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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보는 경영 전략 ① 한비자. ② 사기 대원열전

경호... 2015. 7. 4. 04:47

 

중국 허난성에 자리한 관문 한구관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창시자들이 함께 모여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앞줄 왼쪽은 노자, 오른쪽은 공자다.

 

 

고전으로 보는 경영 전략 ① 한비자

 

“깊숙이 감추고 어리석은 모양새를 갖춰라”
리더는 큰 그림 그릴 뿐 사소한 간섭 삼가야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최상의 덕은 덕이라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덕이 있게 된다(上德不德, 是以有德).”

『한비자』 「해로(解老)」편에 등장하는 말이다.

재미있게도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한비(韓非)가 아닌 노자(老子)다. 단호한 법치를 역설한 법가사상의 한비가 무위자연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 노자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한비자』 「해로」와 「유로(喩老)」편을 지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흥미롭다.

 

한비는 노자의 말을 인용해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治大國者若烹小鮮)”

(「해로」)며 무위(無爲)의 덕을 강조한다.

생선은 익으면서 살이 연해져 여러 번 뒤집거나 옮기면 으스러지기 십상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군주가 나서기를 좋아해 나랏일을 이리저리 자주 바꾸면 백성들의 불안과 고통은 심해지고 신하들도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물론 혁신과 변화를 미덕으로 삼는 현대에 한비의 이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말에 담긴 뜻은 무위로써 통치의 근본인 마음을 살피는 일에 집중하고 조용히 뒤에서 사람을 움직이라는 것이다.

군주는 기본적인 제도를 갖춘 후 백성 개개인이 이익을 추구하고 이를 누리게 하는 사람이지, 불필요한 규제를 만들어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자가 아니라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상의 덕은 덕이라 하지 않는다” 는 한비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최상의 것을 얻는 것이 바로 군주가 지녀야 할 진짜 덕이라는 뜻이다. 어찌 보면 마음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말 같기도 하다. 노자든 한비든 덕이란 아랫사람의 마음을 하나하나 살펴 그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동력으로 보았고, 이 덕의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사람은 결국 군주 자신이기 때문이다.

 

 

 

군주는 남의 지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비는 “(최상의) 군주와 함께하는 자는 모두 스승이며, 중등의 군주는 (신하들을) 친구로 생각하고, 하등의 군주는 그들을 온통 부리려 한다(君與處皆其師; 中, 皆其友; 下, 盡其使也)”(『한비자』 「외저설 좌하」)고 했다. 최하의 군주는 자신의 능력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중간 등급의 군주는 남의 힘에 기대는 군주이며, 최상의 군주는 자기의 지혜와 남의 지혜를 함께 활용하는 자라는 것이다.

 

한비는 춘추오패로 유명한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말을 빌려 이를 자세히 풀어냈다. 초나라와 전쟁이 한창이던 때 황봉(黃鳳)이라는 언덕에 이르러 대님이 풀리자 문공이 몸소 그것을 묶었다. 주변 신하들이 당황하며 다른 사람을 시키라고 말하자 문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최상의 군주와 함께 있는 자는 모두 군주가 경외하는 자들이고, 중등의 군주와 함께 있는 자는 모두 군주가 아끼는 자들이며, 하등의 군주와 함께 있는 자는 모두 군주가 경멸하는 자라고 들었소.
과인은 비록 현명하지는 않지만 선왕 때부터 모시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오.”

 

진문공은 군신 간의 관계에서 이처럼 겸허한 자세로 신하를 대하고 세부적인 것들은 과감히 적임자를 믿고 맡겨 춘추오패가 된 것이다.

 

무위(無爲)로써 성과를 내는 사람이 진정한 실력자

 

프로는 난리 법석을 피우지 않는다. 큰 움직임 없이도 원하는 바를 이끌어내며 주위 평가에도 경거망동하지 않고 말없이 무위(無爲), 즉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하면서 성과를 내는 사람이다.

 

『한비자』 「외저설 우하」에 “나무를 흔들 경우 한 잎 한 잎 끌어당기면 힘만 들 뿐 전체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뿌리를 좌우에서 친다면 잎이 다 흔들리게 될 것이다(搖木者一一攝其葉, 則勞而不?; 左右?其本, 而葉?搖矣)”는 구절이 있다.

 

한비는 조보가 말을 다루는 법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보가 마침 밭을 매고 있는데, 한아버지와 아들이 수레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말이 놀라서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들은 수레에서 내려 말을 끌고, 아버지도 내려서 수레를 밀며 조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조보는 농기구를 수습해 묶어 수레에 올려놓고 그 부자에게 손을 뻗어 수레로 올라오도록 했다. 이후 조보가 단지 고삐를 당겼을 뿐인데, 말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만일 조보가 말을 다스릴 수 없었다면, 비록 온 힘을 다해 몸이 지치도록 그들을 도와 수레를 밀었더라도 말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몸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농기구를 수레에 싣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수레 모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수레가 군주의 나라라고 하면 말 고삐는 권세이고 치국(治國)의 핵심이다.

고삐를 놔둔 채 다른 일에 힘을 쏟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닌가?

 

한비가 생각하는 이상적 군주상은 핵심만 파악하고 엄중하게 감독하되, 군주가 할 일과 신하가 할일을 구분해 가능하면 나서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이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명확히 알고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가 욕망이 강하고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이것저것 관여하려 하고 결국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리더는 자신의 지위에 취해 곁에 있는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아랫사람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고 독단적인 판단에 취해 대사를 그르쳐서도 안된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돼야 한다.


노자가 자신에게 예를 물으러 온 공자에게 “깊숙이 감추고 어리석은 자처럼 행동하는 모양새를 갖추라”(『사기』 「노자한비열전」)고 충고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7세기에 그려진 장건출사서역도(張蹇出使域圖). 무제가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장건에게 명령을 내리는 가운데 장건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고전으로 보는 경영 전략 ② 사기 대원열전

 

동서 문명 교류 튼 13년의 고난 역경을 이긴 개척자의 길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이 명명한 ‘실크로드’, 즉 비단길은 오늘날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로 서방 문명과 중국 문명 교류의 이정표라 할 만하다.

바로 이 비단길을 발견한 사람이 장건(張騫)이다.

장건은 『사기』 ‘대원열전(大宛列傳)’에 처음 등장한다. 장건을 소개하는 열전의 명칭이 중앙아시아 동부, 페르가나 지방의 나라 이름인 ‘대원’인 것은, 탐험가 장건이 중국에 대원을 알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장건은 한
중(漢中) 출신으로 낭관(郎官) 벼슬을 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대원을 발견했으며, 위대한 탐험가로 기록될 수 있었을까?

 

실크로드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

 

장건이 살았던 당시 한나라는 북방의 흉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번은 한 무제가 투항해 온 흉노들을 직접 심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흉노를 물리칠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다.

 

“흉노는 월지(月氏)의 왕을 죽이고는 그 머리뼈로 술잔을 만들었습니다. 월지는 살던 곳을 뒤로하고 달아난 후로 흉노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 했지만 함께 도모해 흉노를 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대원열전)

 

이 말을 들은 한 무제는 월지와 동맹을 맺어 흉노를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마음먹고는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문제는 그런 임무를 맡을 만한 적임자를 찾는 일인데, 월지로 가는 길목에 흉노 땅이 있어 목숨을 내걸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나서는 자가 없었다. 바로 이 임무에 자원한 사람이 있었으니 장건이었다.

 

월지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험난했다. 장건은 대규모의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족 노예인 감보(甘父)를 길 안내자로 삼아 흉노의 영토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사로잡혔다.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는 장건 일행이 한 무제의 사자(使者)라는 사실을 알고는 10여 년 동안이나 붙잡아두었다.

장건은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두었으나 사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고 틈만 생기면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자 흉노의 감시도 느슨해졌고 장건은 그 틈을 타 흉노 땅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겁에 질려 고국인 한나라로 돌아올 법도 했지만 장건이 향한 곳은 원래 목적지였던 월지
였다. 그러나 가시덤불을 헤치고 숱한 어려움을 견디면서 수십 일이 걸려 도착한 곳은 월지가 아니라 그보다 가까운 대원이란 나라였다.

 

대원의 우두머리는 일찍이 한나라에 물자가 풍부하다는 소식을 듣고 왕래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터라 장건 일행을 반가워했다. 장건은 흉노에게 잡혀 있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온 경위를 설명하면서 자신에게 월지까지 가는 길을 인도해 줄 호위병을 주면 사명을 완수하고 한나라로 돌아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나라 왕이 엄청난 재물을 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건의 말에 대원의 우두머리는 길 안내자와 통역자를 내어줬고 장건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월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월지에서는 왕이 죽은 후 태자가 왕위에 올라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정복해 다스리고 있었다. 대하는 땅이 기름지고 침략자도 거의 없는 곳이어서 월지는 흉노에게 복수할 마음도 이미 버린 상태였다.

 

한나라와 손을 잡고 흉노를 치자는 제의가 통할리 없었다. 할 수 없이 장건은 월지에서 1년여간 머물다가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그곳에 붙잡힌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흉노에 내란이 일어났고, 장건은 그 틈을 타 흉노족 아내와 노예 감보를 데리고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왔다. 맨 처음 장건과 함께 길을 떠난 일행은 100여 명이었지만 13년 후 돌아온 사람은 단 세 사람이었다.

 

웅비하는 개척 정신이 필요한 때

 

장건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해서 가져왔다. 비록 원래의 사명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동안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서쪽 지역의 정보들을 한 무제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이 제법 구체적이었다.

 

“대원은 흉노의 서남쪽, 한나라의 정서쪽에 있으며 한나라에서 만 리쯤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중심으로 한곳에 머물면서 밭을 갈아 벼와 보리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어 먹습니다. 좋은 말이 많은데 그 말은 본래 천마(天馬)의 새끼로 피땀을 흘릴 정도로 빨리 달린다고 합니다. 이 나라에는 성곽과 가옥이 있으며, 속읍(屬邑)으로는 크고 작은 성 칠십여 개가 있고 인구는 수십만 명쯤 됩니다. 무기로는 활과 창이 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합니다.”(대원열전)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는 세밀한 정보였다. 이 정보들은 한나라가 대외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 무제는 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했다. 장건이 겪은 서역의 나라들을 아는 한나라 사신이나 장수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무제가 물으면 장건은 언제나 그 땅의 생활 양식, 성곽의 수와 가옥의 모양, 인구와 군사력까지 세세히 대답했다. 장건의 뒤를 이어 파견된 사신들은 현지에서 한결같이 장건을 내세우며 보다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고자 하면 누구든 두려움을 갖게 마련이다. 더구나 변화나 개혁보다는 기존의 관습에 따르는 것에 익숙해져 안정된 삶이 주는 안일함으로 달려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장건처럼 굳은 의지와 성실성으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개척자의 길을 걸어가기란 쉽지 않다. 만일 그가 흉노에게 붙잡힌 10년의 세월 동안 좌절감에 빠졌거나 흉노 땅에서 얻은 가족과의 안정된 삶에 안주했다면 그의 이름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웅비하는 개척 정신이 필요한 시기다.

세상과 상황이 아무리 변해도 하나에 매진하는 사람은 결국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포스코 경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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