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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자소(事大字小).後發制人.[동양학 산책 신동준 박사]

경호... 2013. 1. 26. 03:06

[동양학 산책]

朝晋暮楚냐 和晋和楚냐 글로벌 兩强을 대하는 우리의 생존전략은?

 

 

▲ 신동준 박사·21세기정경연구소장

 

 

차기 정부의 대외 전략으로 연미화중(聯美和中)과 연미연중(聯美聯中) 방략이 주목받고 있다. 전자는 '연미'를 전제로 중국과의 경협 확대와 대북 현안 시각차 축소를, 후자는 중국과도 대미 수준의 정치외교 협력관계로 격상을 주장한다. 양자 모두 미국 일변도 외교의 위험을 지적하는데, '화중'과 '연중'의 방법론만 다르다.

춘추시대 말 공자의 사상적 스승인 자산(子産)의 부국강병 행보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많다.

기원전 526년, 당시 G1이던 진(晉)나라의 대부인 한기가 정나라에 사절로 왔다. 진귀한 옥환(玉環) 한 쌍 가운데 하나를 갖고 있던 그는 정나라 상인이 갖고 있는 나머지 하나를 얻고자 했다. 정나라 군주에게 이를 청하자, 곁에 있던 자산은 "과군(寡君)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거부했다.

대부 유길 등이 "저들을 흉포하게 만들면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어찌하여 옥환 하나를 아끼려는가?"라며 독촉하자 자산은 말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면서 사대자소(事大字小)를 못하는 게 걱정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고 했소. 저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면 장차 무엇으로 그 요구를 감당할 것이오?"

 

 

 

 

 

'사대자소'는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대가로 대국이 소국을 잘 보호하는 것을 일컫는다. 자산은 또 "지금 상인에게 물건을 억지로 팔게 하면, 귀하는 옥환 하나를 얻는 대신 동맹국 하나를 잃을 것이다. 만일 멋대로 공물(貢物)을 납부케 하면 우리는 비록 망하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 명을 좇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이에 당황한 한기는 즉각 사과했다. '사대자소' 국제질서에서 대국이 소국에 일방적인 '사대'를 강요하면, 소국의 강한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 약소국이란 자신의 처지를 꿰뚫고 있는 자산은 집정하자마자 세발솥에 형법조문을 새겨 넣은 중국 최초의 성문법 형정(刑鼎)을 만들어 법을 엄격히 시행하고 생산을 독려하며 부국강병에 힘썼다.

정나라는 자산의 집정 전만 해도 아침에 진나라, 저녁에 초나라에 붙는 조진모초(朝晋暮楚)로 일관했다. 당시 진나라는 쇠락 중이었고, 초나라는 강대했지만 중원의 제후국들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당했다.

자산은 초나라를 만족하게 하기 위해 G2 국가로 대우했다. 극도의 공을 들여 윤색하고 다듬어 정중한 내용의 외교문서를 만들어 보낸 게 대표적이다. 자산은 진나라를 다독이기 위해 교역협상에서 작은 이익은 과감히 양보하고 안보 만큼은 독자노선을 견지했다. 진나라는 당시 원조를 핑계로 군사를 투입해 병탄하는 방식으로 영토를 넓히거나 과도한 대가를 요구한 적이 많았다.

지금 같은 G2시대에도 양쪽의 마음을 얻으려 억지로 애쓰는 '조진모초'보다 정나라의 자산처럼 실력을 키워 몸값을 올린 뒤 안보·생존을 확실하게 하는 화진화초(和晋和楚)가 더 고급 책략이다. 즉 양강이 앞다퉈 우리를 필요하게 하는 게 요체이다. 이러려면 탄탄한 경제와 국방이 관건인데, CEO들의 분발이 절실하다.

 

 

 

 

[동양학 산책]

열세를 뒤집으려면 총사령관이 앞으로 나서라

 

後發制人의 교훈_총사령관이 직접 진두지휘

일거에 비축된 힘을 쏟아야 LG스마트폰 부활이 좋은 예

위기 국면의 선택_글로벌 침체·내수위축 속

민주경영만 내세우다가는 자칫 패망의 길로 빠질 수도

 

 

LG전자가 모처럼 활짝 웃었다. 미국 진출 한 달도 안 된 LG의 옵티머스G가 갤럭시S3와 아이폰5를 누르고 제품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지난달 23일 '컨슈머 리포트'가 발표한 것이다. 구본무 회장의 직접 진두지휘 아래 계열사 임직원이 총출동해 구슬땀을 흘린 덕분이다. '회장님폰'이란 별명이 이를 방증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열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반드시 총사령관의 '친정(親征)'이 전제돼야 한다.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복귀를 계기로 불과 2년 만에 스마트폰 분야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게 이를 보여준다. 당시 그는 남보다 먼저 출근해 삼성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임직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아이폰의 아성을 깨뜨린 배경이다. 갤럭시가 '회장님폰'의 원조인 셈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자신이 쓴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란 군사논문에서 '엎어치기'에 성공하는 비책을 이렇게 제시했다.

 

"중국의 전쟁사를 개관하면 약자가 병력을 결집해 승리를 거둔 사례를 무수히 접할 수 있다.

유방과 항우가 자웅을 겨룬 성고(成皐)대전, 원소와 조조가 충돌한 관도(官渡)대전, 손권과 조조가 격돌한 적벽(赤壁)대전, 동진의 총사령관 사현과 전진의 부견이 맞붙은 비수(?G肥水)대전 등이 그렇다.

모두 '후발제인(後發制人)'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후발제인'은 열세에 있는 쪽이 한 발 물러났다가 힘을 결집해 반격함으로써 엎어치기에 성공하는 계책을 말한다. 순자가 쓴 '의병(議兵)'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적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적보다 나중에 움직이되 먼저 목적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강적을 만나면 일단 정면 대결을 피한 뒤 적의 예기(銳氣)가 무뎌지고 전열이 흐트러졌을 때 병력을 총결집해 기습공격을 가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전국책의 '제책'에 이를 비유한 대목이 나온다.

 

"천리마라도 오래 달려 피로해지면 평범한 말도 그보다 빨리 달릴 수 있고, 천하의 용사도 싸움에 지쳐 힘이 빠지면 평범한 여인도 그를 이길 수 있다!"

 

'후발제인'과 보완관계를 이루는 게 '선발제인(先發制人)'이다. 위기상황에서 먼저 움직여 주도권을 쥐는 것을 말한다. 당태종 이세민이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일으켜 태자 이건성 세력을 일거에 쓸어낸 게 그 전형이다. 조선 초기 태종 이방원도 똑같은 수법으로 정도전 세력을 제압한 바 있다.

 

 

 

 

그러나 상대가 압도적으로 강할 때는 '선발제인'이 통하지 않는다. 그때는 '후발제인' 계책을 써야 한다. 이 계책의 핵심 동력은 2가지다.

 

첫째, 총사령관이 직접 전쟁터로 나가 북채를 취고 북을 울리며 장병들을 고취해야 한다.

둘째, 힘을 비축해 놓았다가 적이 빈틈을 보일 때 일거에 비축된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 반드시 이 두 가지를 겸해야 목표를 달성하며 주효할 수 있다.

 

제갈량의 첫 북벌 때 벌어진 가정(街亭)전투가 그 반면교사에 해당한다. 생전에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17번이나 읽은 마오쩌둥은 자치통감의 해당 대목을 읽다가 이런 주석을 달아 놓았다.

 

"제갈량은 가정전투 때 친히 전투에 임했어야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당시 제갈량이 병력을 결집해 싸워야 한다는 위연의 건의를 무시한 채 조자룡에게 기곡, 마속에게 가정을 접수토록 한 뒤 자신은 기산(祁山)으로 진격한 것을 꼬집은 것이다. 제갈량은 병력을 세군데로 분산하고 직접 가정전투에 나서지 않는 바람에 다 이긴 싸움을 놓쳤다.

그런 점에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제갈량의 실책을 호도한 술수에 불과하다. 남북조 때의 역사가 배송지(裴松之)는 삼국지를 주석하면서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 포진해 있었고 모두 적보다 많았다. 그러나 적을 깨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패하고 말았다. 이는 병력이 적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때 '한 사람'은 바로 제갈량을 말한다. 병력과 힘을 하나로 집결하지 못한 점을 뒤늦게 비판한 것이다. 아이폰의 무차별 공세 당시 애플은 스마트폰의 절대 강자였다. 삼성과 LG로서는 '후발제인'이 간절했다. 삼성은 이를 곧바로 실행해 성공을 거둔 반면, LG는 주춤거리는 바람에 대만 HTC에게까지 밀리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애플이 휴대폰의 최강자인 노키아를 비롯해 삼성과 LG 등을 잇달아 격파한 것도 총사령관인 스티브 잡스가 진두지휘하며 스마트폰에 힘을 집중시킨 덕분이다. LG는 애플과 삼성을 뒤늦게 흉내 내 이제 재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런 경험은 '민주경영'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오너경영'을 배격하는 한국 경제와 정치권의 거센 풍조에 대한 일대 경고나 다름없다.

 

세계경제 침체와 내수시장 위축 같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만 탓하면 앞날은 없다. 위기상황일수록 기발하고 담대한 계책을 짜내야 한다. 상황이 급박한데도 총수가 '민주경영'을 한답시고 계열사 CEO에게 모든 일을 맡긴 채 전황(戰?v)이나 보고받는 것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한반도 주변이 온통 강대국인 상황에서 '경제민주화' 목소리만 크게 들리기에 '선발제인'과 '후발제인' 계책이 더욱 가슴에 깊이 와 닿는다.

 

 

 

 

 

[동양학 산책]

 

주는 것이 도리어 받는 것임을 아는 것이 백성 다스림의 요체

 

 

다음 달 우리나라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취임한다. 이는 대통령제 발상지인 미국은 물론 민주공화정의 진원지인 프랑스조차 이루지 못한 일이다. 동양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여제(女帝)는 측천무후이다. 그는 치세 중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당나라 전성기를 열었다.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와 청조 말기의 서태후도 사실상 여제였으나 세평은 좋지 않다.

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여제는 섭정을 하며 요나라를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만든 소태후(蕭太后)이다. 983년, 30세에 과부가 된 그의 곁에는 12세의 어린 아들만 있었다. 그는 비상한 지혜와 담력으로 황권을 굳건히 다지며 엄한 교육으로 아들을 요나라 최고 명군(성종·聖宗)으로 키웠다. 출발점은 국방 분야였다. 사방이 온통 적국인데도 요나라 군대는 총 20만을 넘지 못했다. 그는 종족 간 구별을 없애고 정예군을 편성해 직접 지휘했다. 관직 세습 관행을 철폐하고 과거제를 실시해 천하 인재도 모았다.

 

 

 

 

그는 986년, 송나라 대군을 하북성 탁현 인근 '기구관(岐溝關) 전투'에서 격파하는 등 뛰어난 용병술을 구사했다. 당시 송 태종 조광의(趙匡義)는 패주하느라 급급했다.

사람들은 소태후를 '철마를 탄 미녀'란 뜻의 철마홍안(鐵馬紅顔)이라 불렀다. 소태후의 공세에 밀려 송나라는 화친을 구걸, 1004년에 전연지맹(?G亶淵之盟)을 맺어 요나라를 형님 나라로 섬기며 매년 은 10만냥과 비단 20만필을 바치기로 맹세해야 했다. 요나라는 그 덕분에 막대한 부까지 축적해 부국과 강병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

새 정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관자'의 '목민'편에 나오는 "주는 것이 도리어 받는 것임을 아는 것이 다스림의 요체이다"라는 구절이다.

명나라 숭정 14년(1641) 초 일이다.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은 북상하면서 낙양의 복왕(福王)을 표적으로 삼았다. 복왕을 총애한 만력제가 혼인 비용으로 내린 황금 30만냥과 많은 하사품을 노린 것이다.

복왕은 재물을 목숨보다 아껴 매년 기근이 이어지는데도 백성의 고통에 눈과 귀를 막았다. 당시 낙양성은 성벽이 튼튼해 반란군의 거센 공격에 끄떡없었다. 이를 과신한 복왕은 수차례 장령들의 요청에 겨우 은 3000냥을 내주었으나 중간에 누군가 가로채 버렸다. 그가 다시 은 1000냥을 내주자 배분 문제를 놓고 큰 소동이 일어났다. 분노한 병사들이 성루에 불을 질러 반란군을 성 안으로 맞아들였다. 적은 재물을 아끼려다 가문 전체가 멸망했다.

장자의 '거협'에는 이런 경고가 등장한다.

"궤짝을 끈이나 줄을 당겨 단단히 묶고 튼튼한 빗장이나 자물쇠로 채우는 것이 흔한 방범(防犯)의 지혜이다. 그러나 거도(巨盜)가 오면 쓸모가 없다. 이들은 궤짝을 통째로 등에 지고 달아난다."

 

공자도 '논어'에서 "나라를 보유한 제후와 저택을 보유한 경대부는 재물이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2013년 한국의 경제·정치 지도층도 '나눔의 미학'을 기초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각성해야 할 것이다.

 

 

/ 조선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