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불교논집
話頭參究에 있어서 疑情頓發法
李月瑚
雙磎寺 仲講. 동국대 철학박사.
주요 논문: ?고려 혜심의 간화선 연구?, ?선문염송의 기초적 저본에 대하여,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통시적 고찰? 등.
Ⅰ. 머리말
Ⅱ. 의정돈발에 도움이 되는 요인들
1. 스승과 화두에 대한 신념
가. 선지식과의 만남
나. 새로운 화두의 개발
다. 화두를 혼자서 선택하는 경우
2. 참구자의 마음가짐
가. 깨침으로 법칙을 삼는다〔以悟爲則〕
나. 간화선은 待悟禪이 아니다
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모를 뿐
3. 화두를 드는 요령의 숙지
가. 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
나. 화두는 배로 참구한다
Ⅲ. 맺음말
Ⅰ. 머리말
지난 동안거에는 전국 64개 선원에서 총 1,794명의 대중이 정진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외호대중 334명을 제하더라도 1,460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이 참선수행에 몰두한 것이 된다.1] 물론 공식적인 선원 이외에 토굴이나 각 개인의 처소에서 수행에 힘쓰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이들이 참선을 한다고 할 때, 대부분은 看話禪 수행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계종문의 대표적인 수행법은 간화선이다. 이 방법은 끊임없이 하나의 話頭를 參究해 나가는 것으로서, 禪에 있어서 가장 발달된 수행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행하고 있는 수행인들 가운데서도 더러는 이러한 화두참구법 자체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거나, 혹은 요령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계 일각에서 그 효용이 의심받기까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근래에 와서 간화선 문중이 그 위기를 맞고 있다는 여론과 함께 이를 극복할 만한 대책을 논의해 보고자, 실상사 선우도량에서는 1993년 3월 16일부터 수행론의 주제로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천태선?염불선?위빠싸나를 동시에 발표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사흘 동안의 발표와 열띤 토론 끝에 도출된 결론은 ‘지금으로서는 간화선을 대체할 만한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2]
1]全國禪院首座會, ?禪社芳啣錄?, 丙子年 冬安居. 금년 丁丑年 夏安居에는 이보다 더 많은 1981명(외호 358명 포함)이 동참하였다.
2]원융 지음, ?간화선?(藏經閣, 1993), p. 8.
그렇다면 이제는 달리 대안이 없는 간화선이 좀더 잘 적용되고 살려져 많은 공부인이 이를 통하여 大道를 터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화두참구가 순일치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어떻게 하면 좀더 화두가 잘 들리는지를 초보적인 단계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다만 수행자의 분발심과 간절함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다만 열심히만 하면 될 일이지, 무슨 말이 필요하냐고 논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초보적인 점을 간과하거나 눈여겨 챙기지 않음으로써 헛되이 공력을 낭비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즉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요령에 맞게 밀어붙여 나갈 때, 좀더 빠르고 정확히 공부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수행방법에 대한 확신이 서 있어야 평생 흔들림 없이 매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취지를 갖고서 간화선의 화두참구법에 대하여 살펴볼 때, 우선적으로 중점을 두어 검토되어야 할 점은 역시 疑情의 문제가 될 것이다. 간화선은 의정을 생명으로 한다. 화두참구시에 의정이 일어나야 참으로 살아 있는 공부가 되는 것이요, 의정이 일지 않는 것은 죽은 공부에 다름아닌 것이다. 즉 화두를 든다는 것은 곧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 것이므로, 화두가 잘 들리고 안 들리는 것은 온전히 의정의 유무와 강도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의정은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간혹 의정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를 지속시키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진정한 의정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공부인의 마음가짐이 절실해야 하겠지만, 이를 촉발시킬 만한 機緣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스승의 경책이나 자신에게 걸맞는 화두의 부여, 내지는 화두를 드는 요령에 대한 정확한 이해 등이 수반되어 꾸준히 밀어붙일 때에 보다 신속히 의정을 일으키게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화두참구에 있어서 의정이 몰록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수행이 상당한 궤도에 접근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므로, 쉽사리 의정을 얻고자 안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상당한 노력을 들여 공부해 감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의정이 솟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원인을 되짚어 반추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의정이 솟아나지 않는 연유가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는지, 스승이나 화두에 대한 신심의 결핍에선지, 혹은 화두를 드는 요령에 문제는 없지 않은지 등을 겸허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고의 제목에서 가리키는 바 ‘疑情頓發法’이란, 말 그대로 하자면 ‘의정을 몰록 일으키는 방법’을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의정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요인들’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본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실제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면 의정을 좀더 잘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다루고자 하는 데 있다.
이러한 연구를 편의상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검토하고자 한다. 선지식, 참구자 및 화두가 그것이다. 즉 의심을 일으키도록 결정적인 가르침을 주는 선지식과, 그로부터 화두를 받아서 참구해 나가는 당사자, 그리고 바로 그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실제적 요령의 숙지 등의 세 가지 부문별로 의정돈발과 관련지어 검토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선지식에 관한 논의를 진행함에 있어서 표준이 되는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는 자료는 고봉 원묘의 ?禪要?이다. 이 책에서 고봉은 자신의 행장을 상세히 설명해 나가면서, 처음 의정이 붙지 않아 어렵사리 공부했던 일과, 스승과 화두를 바꾸어 가면서 정진해 나가는 가운데 문득 의정이 일어나게 된 경위 및 그 이후의 몇 차례에 걸친 깨침의 기연 등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참구자의 마음가짐에 관하여 고구정녕한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는 것은 대혜 종고의 ?書狀?이다. 주로 사대부들과의 서신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책 속에서 대혜는 간화선의 주창자답게 당시 묵조선의 폐단을 통렬히 지적하면서 나아가 화두참구의 마음가짐과 자세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우선 상기의 텍스트를 기본으로 하여 검토하되, 기타 의정 돈발에 관련된 언급이 있는 다수의 자료들과 함께, 최근 선사들의 가르침과 법문테이프 및 직간접 체험 등을 모두 고려하여 각 부문별로 분석 접근해 나가고자 한다.
Ⅱ. 의정돈발에 도움이 되는 요인들
1. 스승과 화두에 대한 신념
가. 선지식과의 만남
화두를 참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믿을 만한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화두는 그 자체로서도 힘이 있지만, 선지식의 지도를 통해서 생생하고도 직접적으로 전해질 때 거기에 비로소 그 스승의 수행력과 정진해 나온 힘이 배어져 전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지식으로부터 개인적으로 화두를 받아서, 때때로 점검도 받아가며 최종적으로 인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다면, 그야말로 최상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선지식이란 선각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어떠한 화두가 힘이 덜 들고 닦기 쉬운가를 확연히 알아서 지도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지식이야말로 믿을 수가 있으며, 또 그런 선지식이 내린 화두라야 확고한 신념이 따라붙을 것이다.
이러한 信을 바탕으로 비로소 화두의 내용에 대하여 疑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신심이 크면 의정이 반드시 크고, 의정이 크면 깨침도 크다고 하는 것이다. 의정은 본래 믿음에 기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알라. 疑는 信으로써 ?를 삼고, 悟는 疑로써 用을 삼음이니, 信이 十分이면 疑가 十分이 되고, 疑가 十分이 되면 悟가 十分이라. 비유컨대 마치 물이 불어나면 배가 높이 뜨고, 진흙이 많으면 불상이 커지는 것과 같으니라."3]
3]安震湖 編, ?禪要?(法輪社, 1981), p. 20.
須知 疑以信爲? 悟以疑爲用 信有十分 疑得十分 疑得十分 悟得十分 譬如水漲船高 泥多佛大.
의심의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물결이 없는 데서 물결을 일으키고, 번뇌가 없는 데서 번뇌를 일으키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쇠를 강철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금질이라는 열처리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본래 부처라는 것을 정말로 의심치 않는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막연한 신심을 일단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檢證 절차라고도 할 수가 있다. 검증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참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검증은 계산되거나 사려분별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지식과 알음알이 및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모조리 녹여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누가 전해 줄 수도 없고 자신이 밝힐 수도 없는 한 소식이어서 그저 꾸준히 의심을 덩어리지어 밀어붙여서 안팎으로 한 조각을 지어 나갈 따름이다.
그러다가 문득 화두를 깨쳐서 의심덩어리를 타파하면 비로소 막연히 본래 부처라고 믿는 경지에서 벗어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경계에 이르는 것이다. 부처니 조사니 하는 분별까지도 넘어서서 참다운 본래 부처의 자리에 당당히 진입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믿어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경지인 不疑之地의 체득인 것이다. 의심을 통해 검증이 이루어진 신심인 것이다. 이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生死一大事에 대자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의 화두를 의심해 나간다는 것은, 생과 사에 대한 의심, 본래 부처에 대한 의심 등 천가지 만가지 의심을 하나로 몰아붙이는 것으로서, 화두에 의심이 해결되면 모든 의심이 일시에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공부를 지음에는 첫째로 큰 의정을 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공부를 짓되, 모름지기 大疑情을 일으켜야 한다. 너의 공부가 아직 일개월 반개월도 한 뭉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만약 眞疑가 현전하면 흔들어도 요동치 아니하여 자연히 惑亂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오직 용맹스럽게 분심을 내어 가면 종일토록 마치 바보와 같이 되리라. 이러한 때에 도달해서는 옹기 속 자라가 달음질쳐도 걱정할 것이 없음과 같으니라."4]
4] 운서주굉 지음, 광덕 역주, ?禪關策進?(불광출판부, 1994), p. 211.
做工夫 須要起大疑情 汝工夫 未有一月半月成片 若眞疑現前 ?搖不動 自然不?惑亂 只管勇猛忿去 終日如?的漢子相似 到恁?時 不?甕中走鼈.
참다운 의심만 현전한다면 공부는 거의 다 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옹기 속 자라는 아무리 달음질친다 해도 언제든 손만 넣으면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처럼, 깨침은 다만 시간문제가 되는 것이다. 참다운 의심이란 의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앉으나 서나 자나깨나 이어지는 상태이다.
결국 화두참구는 眞疑를 일으키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것인데, 문제는 진의를 일으키기까지의 과정이다. 의심이 끊이지 않기 이전에 우선 의정이 몰록 발하여야 하고, 이를 계속 덩어리지어 경계와 하나가 될 때까지 밀어붙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정돈발의 첫째 요건은 信이 서는 스승을 만나는 데 있다. 자신의 신명을 바칠 수 있을 만한 스승을 만난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스승은 일찍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해 주는 까닭에, 그만큼 쉽고 빠르게 의정을 촉발시켜 주는 것이다.
"산승이 이로 말미암아 그대를 가상히 여겨 힘을 덜어 주며 닦기 쉽고 일찍이 체험한 화두를 가져서 ‘萬法歸一 一歸何處’를 양손으로 전해 주노니 결정코 능히 문득 이와 같이 믿어 가며 문득 이와 같이 의심해 갈지어다."5]
5] ?禪要?, 앞의 책, p. 20. 山僧 由是撫之 將箇省力易修會驗底話頭 兩手分付萬法歸一 一歸何處 決能便恁?信去 便恁?疑去.
고봉화상은 이처럼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를 적극 권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체험한 바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본 결과, 일귀하처 화두가 수행자의 힘을 덜어 주며 닦기 쉽다고 하는 것이다.
고봉은 본래 15세에 출가하여 16세에 僧이 되고 18세에 敎를 익히다가, 20세에 옷을 바꾸어 淨慈寺에 들어가 3년의 死限을 세우고 禪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 斷敎妙倫(1201~1261)에게서 ‘生從何來 死從何去’ 화두를 받아서 1년 남짓 참구하였으나 공부에 진전이 없었다. 그러자 다시 仰山祖欽(1215~1287)에게서 ‘無字話’를 받아 3년여를 참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홀연 잠결에 단교화상의 室中에서 든 바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를 기억하고 이로부터 의정이 돈발하여 打成一片해서 바로 동서를 분간치 못하고 침식을 다 잊었다고 한다.
"산승이 접때에 雙徑寺에 있다가 禪堂에 돌아간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홀연 잠결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화두에 의심이 생겼다.
이로부터 ‘疑情이 頓發’하여 잠자고 먹는 것도 잊었으며, 동과 서도 분간치 못하였으며, 낮과 밤도 분간치 못하였고, 자리를 펴고 발우를 펴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一動?日靜?一語?一?에 이르기까지 총히 다만 이 일귀하처뿐이요, 다시 털끝만치도 다른 생각이 없었다.
또한 조금 다른 생각을 내고자 해도 가히 낼 수가 없는 것이 마치 못으로 박고 아교로 붙인 것 같아서 흔들어도 동하지 않았다. 비록 사람이 많은 넓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마치 한 사람도 없는 것과 같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에서 아침까지 맑고 담담하며 우뚝하고 드높아서 순수히 맑아 티 한 점 없고 일념만년이라 경계도 고요하고 나도 잊었으니 마치 천치와 같고 바보와 같았었다. "6]
6] 위의 책, p. 2.
山僧昔年 在雙徑 歸堂未及一月 勿於睡中 疑着萬法歸一 一歸何處 自此疑情頓發
廢寢忘餐 東西不辨 晝夜不分 開單展鉢 ?屎放尿 至於一動一靜一語一? 總只是箇一歸何處 更無絲毫異念
亦要起絲毫異念 了不可得 正如釘釘膠粘 ?搖不動 雖在稠人廣坐中 如無一人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澄澄湛湛 卓卓巍巍 純淸絶點 一念萬年 境寂人忘 如痴如兀.
이처럼 의정이 돈발한 지 단 엿새째 되는 날, 홀연 五祖法演和尙의 眞讚 마지막 두 구절인 ‘백년 삼만 육천날에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라’는 글을 보고, 일전에 앙산노화상이 다그쳐 묻던 ‘송장 끌고 다니는 놈’ 화두를 맥연히 타파하였다. 그리하여 百丈野狐?狗子佛性?靑州布衫?女子出定 등의 화두를 처음부터 일일이 들어 증험해 보니 요달치 아니함이 없었다고 한다.7]
7] 위의 책, p. 43.
이처럼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는 있지만, 고봉이 의정을 일으킨 화두는 명백히 ‘일귀하처’였다. 그는 거의 3년여를 無字를 들었는데, 특이하게도 죽과 밥을 먹는 두 끼니 때를 제외하고는 일체 앉지도 기대지도 아니하고 行禪을 하였다고 한다. 죽기를 한정하고 그토록 열심히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침과 산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잠깐도 힘을 덜 수가 없었다. 그 원인은 다름아니라 疑情상에서 공부를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귀하처 화두는 이와는 달랐던 것이다.
"‘일귀하처’는 도리어 ‘무자’와 더불어 같지 아니하며 또한 이 의정이 쉽게 발하여 한번 들면 문득 이루어져서 반복해 사유하거나 계교해 뜻을 짓지 않아도 의정을 내기만 하면 점차 덩어리를 이루어 곧 능히 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없어졌다.
이미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사량하는 바가 곧 없어져서 온갖 반연으로 하여금 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쉬어지며 六窓을 고요하게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요해져서 작은 티끌만큼도 범하지 않고 단박 無心三昧에 들어갔었다.
홀연히 죽 먹고 밥 먹는 곳에서 발우에 수저를 갖다 댈 때에도, 옹기 속에 달리는 자라와 같아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8]
8] 위의 책, p. 3.
一歸何處 却與無字不同 且是疑情易發 一擧便有 不待返覆思惟計較作意? 有疑情 稍稍成片 便無能爲之心
旣無能爲之心 所思卽忘 致使萬緣 不息而自息 六窓 不靜而自靜 不犯纖塵 頓入無心三昧
忽遇喫粥喫飯處 管取向鉢盂邊 摸着匙? 不?甕中走却鼈.
이처럼 ‘일귀하처’는 ‘무자’와 달리 의정이 쉽게 발하여서 저절로 무심삼매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무자’든 ‘일귀하처’든 의정을 돈발시켜 주는 화두가 중요한 것이며, 고봉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귀하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점이다. 천편일률적인 화두를 밋밋하게 제시한다거나, 화두에 뭐 맞고 안 맞고가 있느냐고 막연히 다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참다운 선지식이라면 자신의 실다운 체험과 화두를 받고자 하는 이의 선근에 맞추어서 적절한 화두를 지도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근기에 맞는 적절한 화두를 내리는 데 있어서 참고로 삼을 수 있는 내용이 ?禪門鍛鍊說?에 있다. 이 설은 南岳下 36세인 晦山戒顯(1610~1672)이 지은 것으로서, ?손자병법?의 체제를 본따 禪衆을 단련하는 방법을 13편으로 나누어 밝히면서, 선림의 이론적인 강령을 정리하고 당시 선림의 유폐를 신랄히 지적한 것이다. 이 책의 제2편 ?辨器授話?에서는 선중의 근기나 參學한 정도에 따라 화두를 달리 일러주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회산은 우선 대중의 근기에 상관없이 하나의 화두만 사용하는 것은, 마치 모자를 사려는 자가 머리의 크기를 살피지 않고, 연장의 자루를 박으려는 자가 구멍을 살피지 않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처음 공부하는 자는 화두가 너무 어렵고 깊으면 필시 거부감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며, 기질이 뛰어난 자는 화두가 느슨하면 생각으로 따지기 쉽다. 따라서 삼종의 근기로 나누어 처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萬法歸一이나 父母未生前이나 死了燒子 따위와, 내지 目前一機一境 같은 것은 비록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가 모두 사용할 수 있으나, 특히 처음 공부하는 자에게 편리한 화두다.
그리고 南泉의 三不是나 大慧의 竹?子나 道得道不得皆三十棒이나 恁?不恁?總不是 등은 비록 고하간에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나, 특히 근기가 뛰어난 자에게 편리한 화두다.
또한 머리를 쳐들고 뿔을 단, 지견이 매우 웅강한 자가 있다. 이럴 경우에는 스승이 발톱을 매섭게 세워야 할 것이니, 어떤 때는 기묘한 喜怒로 그들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어떤 때는 까다로운 속임수로 그들의 기를 꺾어 버려야 한다. 임제가 말한 全?니 半身이니, 獅子니 象王이니 한 것 등이 모두 이런 자들을 위하여 시설한 것이다."9]
9] 회산계현 지음, 연관 역주, ?禪門鍛鍊說?(불광출판부, 1993), pp. 35~36.
이와 같이 상?중?하에 따른 화두의 분류가 정확히 어떠한 근거에 입각하고 있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화두가 여러 가지이지만 모두가 위쪽에서 묘하게 자물쇠를 잠궈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도둑 아비가 궤를 잠궈 버리고 소리쳐서 아들에게 포위를 뚫고 달아나게 하는 것과 같다. 다만 한 생각, 어떻게 신속히 이 궤짝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너무 쉽게 빠져나오거나 너무 어려워 절망적이어서도 안 된다. 자물쇠는 그것을 풀 학인의 근기에 적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간혹 스승이 선문의 깊은 이면을 알지 못하고서 그저 학인에게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나 ‘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가?’ 또는 ‘어떤 것이 학인의 자기인가?’ 따위만을 참구하게 한다면, 이것은 위에서 자물쇠를 채워 놓지 않고서 되는 대로 소리치는 격이라 한다. 다만 이렇게 한다면 의정을 발하는 것이 무력하여 결코 깨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처음으로 선문에 들어와서 근본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 ‘남전의 斬猫’나 ‘백장의 野狐’, ‘단하의 燒佛’, ‘女子出定’ 등의 화두를 참구하지 않도록 금기하고 있다.10]
그 까닭은 여러 가지로 살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알음알이’를 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문에서는 알음알이를 가장 금기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정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화두를 지식이나 이해로써 접근하는 한, 그 해결은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좋은 화두란 알음알이를 막아 주고 문득 의정을 내게 하는 화두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처럼 참다운 선지식이란 의정을 촉발시켜 주는 화두로써 지도를 해줄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수시로 점검을 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고봉 또한 깨친 이후에 앙산화상과의 문답을 통해서 일차로 인정을 받고, 다시 그 지도를 받아 ‘나의 이 깨친 주인공은 필경 어느 곳에서 安身立命하는가?’ 하고 의심타가, 도반의 베개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마지막 의단을 타파하였던 것이다.11]
10] 위의 책, pp. 39~40.
11]?禪要?, 앞의 책, p. 44.
나. 새로운 화두의 개발
고봉에게는 자신을 일깨워 주고 점검해 주는 스승이 있었으며, 꾸준한 노력 끝에 화두에 의정이 돈발하여, 이로부터 번뇌가 단박 쉬고 일념도 나지 않는 획기적 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그는 42세 때인 1271년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16년간 天目山 西峰에서 死關을 설치하고 室中의 三關으로서 학인을 제접하였다. 이 삼관이란 일종의 화두라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돋는 해가 허공에 당하여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에 가리워지는가?
사람마다 하나의 그림자가 있어서 촌보도 여의지 아니하거늘 무엇 때문에 밟을 수가 없는가?
온 대지가 하나의 불구덩이이니 무슨 삼매를 얻어야 불에 타지 않을까? " 12]
12] 위의 책, p. 45. 室中三關 ?日當空 無所不照 因甚 被片雲遮却 人人有箇影子 寸步不離 因甚踏不着 盡大地 是箇火坑 得何三昧 不被燒却.
고봉은 스스로 이러한 三關을 정해 놓고, 학인을 제접하고, 또한 자신의 깨친 후의 保任으로 삼은 듯하다. 혹은 앞의 하나는 깨치기 전의 用心이요, 뒤의 둘은 깨친 이후의 用心이라고도 하나, 어쨌든 스스로가 이러한 관문을 설정하여 깨침의 기연으로 삼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즉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화두공부를 진전시킨 것이라고나 할까. 이것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미묘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화두의 개발과 관련해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日本의 18세기 禪僧인 白隱慧鶴(1685~1768)은 독자적인 공안 체계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말년에 ‘隻手의 聲’이라고 하는 공안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권했다고 한다. 이것은 ‘無字’를 대신해서 白隱이 개발한 화두로서, 이 방법이 ‘無字’ 화두보다 훨씬 의단을 일으키기가 쉽다고 하였다.
"이 5, 6년 동안은 문득 생각한 것으로 隻手聲(척수성)을 들으라고 가르쳤다. 이는 종전의 가르침과 분명히 다르다. 누구라도 격별히 의단을 일으키기 쉽고, 공부를 열심히 하기 쉬우며, 雲泥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므로 지금 오로지 隻手의 공부를 권한다. 생각건대 隻手공부란 어떠한 것인가 하면, 지금 양손이 부딪치면 소리가 나지만 한 손을 흔들면 소리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이것은 완전히 귀로써 들을 수 없으며 사량분별을 교량할 수 없으며 見聞覺知를 떠나 단지 行住坐臥의 위에서 잠시도 쉼 없이 참구해 가면 理에 관한 말도 참구하고 技도 참구하는 곳에 있어서 홀연히 생사의 業海를 踏?하고 窟宅을 劈破한다."
---?隻手音聲? 13]
13] 柳田聖山 지음, 韓普光 옮김, ?禪과 日本文化?(불광출판부, 1995), p. 147.
이와 같이 隻手 화두를 사용하여 납자들을 제접한 결과 훨씬 쉽게 의단을 일으켰다고 한다. 결국 화두란 의단을 일으켜야 活句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古則公案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창출해서라도 의단을 일으키기가 쉽고, 또한 깨침을 속히 획득할 수 있다면 고려해 볼 만한 것이다. 이 시대 이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화두의 개발도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예컨대 숭산 행원선사도 기존의 고칙공안을 다소 변형하거나 새로운 화두를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그는 다수의 공안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특히 열 가지로서 공안 지도의 핵심을 삼고 있다. 이 가운데 ‘부처님께 재를 떨다’라는 공안은 퍽 이채롭다.
"누군가 선원에 와서 담배를 피웠다. 그는 연기를 뿜고 부처님에게 재를 떤다.
당신이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14]
14]숭산 지음, ?오직 모를 뿐?(대원정사, 1990), p. 250.
나아가 조주의 무자 화두라든가 발우 씻기 등 다른 화두들에 대해서도 전통적 참구방식에서 벗어나 따로이 구체적 질문을 제시함으로써 구체적 의심을 갖도록 애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 화두를 혼자서 선택하는 경우
눈밝은 正知見人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또한 그런 선지식들이 막상 앞에 있다고 해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안목을 갖추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자신이 신명을 바쳐 믿고 의뢰할 만한 스승을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면, 일단은 스스로 고칙공안을 살펴 의심을 일으키기 쉬운 것으로 선택해 참구해 나가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도 일정한 스승 없이 공부하였다고 하며, 태고 보우도 혼자서 도를 깨친 이후 저 멀리 중국까지 건너가 석옥 청공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왔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근세선의 중흥조라고 일컬어지는 鏡虛惺牛(1846~1912)선사도 화두를 스승에게서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 고칙공안들을 살펴 마침내 ‘나귀의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에 알음알이를 내지 못함이 마치 은산철벽에 부딪힘과 같아 즉시 ‘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看하였다고 한다.15]
15] 鏡虛惺牛禪師法語集刊行會 編, ?鏡虛法語?(人物硏究所, 1981), p. 662.
이렇게 혼자서 화두를 간택하여 참구할 경우 특히 주의할 점으로는 첫째, 화두를 자주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둘째, 깨친 후에는 반드시 눈밝은 종사를 만나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있다. 스스로가 선택한 화두이다 보니 조금 들어 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자꾸 바꾸게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물을 파는 사람이 여기저기 조금씩 파다 보면 마침내 물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두를 임의대로 바꾸어서는 좋은 결과를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고봉화상의 경우는 임의로 화두를 바꾸었다기보다는 몰록 의정이 일어나 지속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알음알이로서 화두를 풀이하고자 하는 것도 큰 병통임을 알아야 한다. 오로지 의정을 일으키는 데 역점을 두어 마침내 화두가 오나 가나 한결같은 動靜一如, 자나깨나 한결같은 寤寐一如의 상태에까지 이르러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딘 연후에,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 인가를 받아야 바야흐로 일마친 한가로운 도인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2. 참구자의 마음가짐
가. 깨침으로 법칙을 삼는다〔以悟爲則〕
선지식에게서 화두를 받은 연후에는 더 이상 좌우를 돌아봄이 없이 밀어붙여야 할 것이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마음가짐이다. 생사일대사를 기필코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뒷받침되지 않은들 아무리 스승과 화두를 바꾸어 본다 해도 의정이 일어날 리 만무이다.
"만약 이 일을 논할진댄 다만 당인이 적실히 간절한 마음〔切心〕이 있어야 한다.
간절한 마음이 있기만 하면 참 의심[眞疑]이 문득 일어나리라. 참 의심이 일어날 때에는, 점차에 속하지 않고 직하에 문득 능히 번뇌를 단박 쉬고, 혼침과 산란을 아울러 제하여 일념도 나지 아니하고 앞뒤가 끊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절에 이르기만 하면 틀림없이 결과를 얻겠지만, 만일 이 생각이 간절하지 않아서 참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설령 그대들이 앉아서 포단을 백천만 개를 헤어뜨리더라도 여전히 대낮에 삼경 알리는 종을 치리라."16]
16] ?禪要?, 앞의 책, p. 37.
若論此事 只要當人 的有切心
?有切心 眞疑便起 眞疑起時 不屬漸次 直下便能塵勞頓息 昏散屛除 一念不生 前後際斷
?到者般時節 管取推門落臼 若是此念不切 眞疑不起 饒?坐破蒲團 百千萬箇 依舊日午打三更.
이와 같이 참 의심은 간절한 마음이 우선 밑받침되고, 거기에 더하여 스승이나 화두의 경계에 영향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참구하는 이는 우선적으로 스스로에게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조사선 도리가 비록 더 이상 찾고 궁리할 것 없이 바로 그 찾고자 하는 마음을 쉬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확철대오치 못한 이는 당연히 분심을 내어 의정을 일으키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불조가 이미 체득한 경지를 나라고 해서 체득치 못할 까닭이 없다. 나도 어엿한 대장부인 것이다. 그들의 경지도 알고 보면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일 없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입장에서는 마음으로는 늘 무언가 부족하다 싶어야 하고, 마음을 편히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 한편 분발심이 일어나고, 무언가 부족하게 여길 때 가없는 성인의 도를 터득할 수가 있으며, 무궁한 결실 또한 이때 보게 되는 까닭이다.17]
17] ?山房夜話?(장경각, 선림고경총서 2), p. 62.
그리하여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는 데서 다급해지고, 큰일날 것도 없는 데서 무슨 일이나 난 듯 참구해 나가야만 비로소 이 생사문제를 해결해 나갈 자격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18] 그것은 마치 거문고의 줄을 적절히 조절해야 하는 것처럼 팽팽하고 느슨함을 적당히 맞추어야만 곡조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어쨌든 아직 확철대오하기 이전에는 마음을 결코 느슨하게 하여 편안함에 안주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견성의 체험이 있기 전까지는 분심을 내어 끊임없이 연마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18] ?參禪警語?(장경각, 선림고경총서 5), p. 45.
"근년 이래로 총림 가운데에 일종이 있어 삿된 설을 제창하여 종사된 자가 학자에게 일러 가로되, “다만 오로지 고요함만을 지켜라” 하니, 알지 못하겠다.
지킨다는 것은 이 어떤 사람이며, 고요하다는 것은 이 어떤 물건인고.
도리어 말하기를 고요하다는 것은 이 기본이라 하고 도리어 깨달음이 있음을 믿지 아니하여 이르되, “깨달음은 이 지엽이라” 한다." 19]
19] 安震湖 編, ?書狀?, p. 221.
近年以來 叢林中 有一種 唱邪說 爲宗師者 謂學者曰 "但只管守靜" 不知
守者是何人 靜者是何物
却言靜底 是基本 却不信有悟底 謂悟底是枝葉.
본디 석존 당시에는 간화선이라고 하는 수행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요가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의 심신수행 방식과 삼매는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오로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인위적인 의심의 응결과, 이의 타파를 통한 견성체험이라고 하는 방식의 수행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화두참구 방식의 참선을 하다가 벽에 부딪히는 경우, 자칫하면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다.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가지고 끊임없이 씨름해 나간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도 않으며 진전도 쉽지 않은 터이므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염불선이나 위빠싸나같이 얼핏 수긍이 가는 방식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심지어는 지금 이 주인공 자리를 믿고 다 놓아 버리면 몽땅 해결되어 지금 그대로 삼매이고 그대로 참선임에도 불구하고 ‘이놈이 뭔고?’ 하고 앉아 있으면 몇천 년 전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盤珪禪師 같은 이도 疑團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公案은 의단이 없는 사람에게 의단을 짐지워서 불심을 의단으로 변하게 한다고 나무랐다. 말하자면 공안의 공부는 불필요하게 어려운 것을 사람들에게 떠맡기는 격이라는 주장이다.20]
20] 柳田聖山 지음, 앞의 책, p. 140.
이상과 같은 주장들은 중국 선종에서의 祖師禪的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조사선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本覺的 信心을 중시하고 있다. 이미 부처인 것이다. 육조 혜능의 ‘마음땅에 그릇됨만 없다면 자성의 戒요, 마음땅에 혼란 없으면 자성의 定이요, 마음땅에 어리석음 없으면 자성의 慧’라는 말이나, 馬祖의 ‘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더 이상 삿된 생각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본래 부처인 것이다. 즉 고요함만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 믿고 앉아 있는다 해서 곧바로 道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절대로 체험이 필요하다. 또한 정말로 그 경지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검증 절차도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인 진전을 더한 것이 바로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상기의 本覺的 信心에 입각처를 두고 있으되, 화두참구라는 始覺的 疑心을 내는 구체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大慧宗?(1089~1163)가 특히 ?照邪禪을 공격하면서 그 폐단을 벗어나고자 제시한 것이다.
"근년 이래로 일종의 삿된 스승이 있어 묵조선을 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열두 시간 가운데에 이 일을 관여치 말고 쉬어 가고 쉬어 가되 소리를 짓지 마라, 今時에 떨어질까 두렵다” 하니,
왕왕에 사대부가 총명이근에 부린 바 되어 대부분이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다가, 자못 삿된 스승들의 고요히 앉아 있으라는 지령을 입고는 도리어 힘덜음을 보고는 문득 이로써 족함을 삼아 다시 妙悟를 구하지 않고 다만 묵연함으로써 극칙을 삼나니, 내가 구업을 아끼지 아니하고 힘써 이 폐단을 구하니 지금 조금씩 허물을 아는 이가 있음이라.
원컨대 공은 다만 의정이 부수어지지 아니한 곳을 향하여 참구하되 행주좌와에 놓아 버리지 말지어다.
어떤 僧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화상이 답하되 “없다〔無〕” 하였으니 이 한 글자는 문득 이 생사의 의심을 깨뜨리는 칼인 것입니다."21]
21] 安震湖 編, 앞의 책, pp. 64~65.
近年以來 有一種邪師 說?照禪 敎人十二時中 是事莫管 休去歇去 不得做聲 恐落今時
往往士大夫 爲聰明利根所使者 多是厭惡鬧處 乍被邪師輩 指令靜坐 ?見省力 便以爲足 更不求妙悟 只以?然 爲極則 某不惜口業 力求此弊 今稍稍有知非者
願公 只向疑情不破處參 行住坐臥 不得放捨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遮一字者 便是箇 破生死疑心底刀子也.
깨침은 묵조의 삿된 스승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미친 소리가 아니며, 第二頭가 아니고 방편의 말도 아니고, 접인의 말도 아닌 것이다. 다만 쉬어 가고 쉬어 가서 고요함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妙悟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정이 파하기 전까지는 절대적으로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無門慧開(1183~1260)의 ?無門關?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 제1칙인 ‘趙州無字’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떤 僧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화상이 답하되 “없다[無]” 하였다.
無門이 가로되, 참선은 꼭 조사관을 뚫는 것이요, 妙悟는 요컨대 마음의 길을 끊어 다하는 것이라.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의 길을 끊지 못하면 이 모두 풀을 의지하고 나무에 붙어 있는 유령과 같은 것이니, 또한 일러라 어떠한 것이 이 조사관인가?
다만 이 한 개 無字가 이 종문의 한 관문이라, 드디어 지목하여 가로되 선종의 무문관이라 한다. "22]
22]大正新修大藏經 48, p. 293上.
趙州和尙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州云無
無門曰,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且道 如何是祖師關
只者一箇無字 乃宗門一關也 遂目之曰 禪宗無門關.
더 이상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이 본래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이 조사선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선의 경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관문을 통과하지도 않고서 본래 부처라느니, 제할 망상도 없고 진리를 구할 것도 없다느니 하는 것은 枯木邪禪에 불과하다. 따라서 참선을 통해 조사관을 뚫어야 하며, 묘한 깨침을 통해 마음길이 끊어져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관이란 다름아닌 無字 공안인 것이다.
나. 간화선은 待悟禪이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간화선에서는 본래 부처라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서 깨침을 법칙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깨침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절인연이 무르익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는 저 과실열매처럼 충분히 익을 때를 기다려야지, 생짜로 나뭇가지를 흔들어 떨어뜨리거나 미리부터 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익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즉 간절하기는 하되, 速效心을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조급한 심정으로 알음알이를 내게 하며, 이러한 사량계교야말로 제대로 공부를 못하게 하고 의정을 일으킬 수도 없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점은 깨침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에는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음이라.
그러나 첫째로 마음을 두어 깨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일 마음을 두어 깨닫고자 기다리면, 기다리는 바의 마음이 道眼을 장애하여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집니다.
단지 화두를 잡아가다가 문득 잡아 가는 곳을 향해서 생사심이 끊어지면, 이것이 곧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은 곳입니다."23]
23] 安震湖 編, 앞의 책, p. 245.
硏窮至理 以悟爲則
然第一不得存心等悟 若存心等悟 則被所等之心 障却道眼 轉急轉遲矣
但只提?話頭 驀然向提?處 生死心絶 則是歸家穩坐之處.
깨닫겠다는 일념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침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단지 화두에 몰두해서 생사심이 파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깨침을 얻고자 기다리다 보면 그로 인하여 장애가 되어 깨침은 더더욱 더디어질 따름이다. 간화선은 결코 待悟禪이 아니다. 오히려 그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까지도 화두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 버려야 한다.
"경산 대혜禪師도 ‘평소에 지견이 너무 많아 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앞에서 장애를 짓기 때문에 자기의 正知見이 현전치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장애라는 것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요, 또 별다른 일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분간할 것이 있겠는가? 이른바 十種病이란 證悟를 求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24]
24] ?看話決疑論?(普照全書), p. 91.
徑山大慧禪師亦云 平昔知見多 以求證悟之心 在前作障故 自己正知見不能現前
然此障非外來 亦非別事
豈有揀耶 所言十種病 以求證悟之心爲本.
여기서 말하는 십종병이란 趙州無字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하여야 할 병통 열 가지를 말한다. 조주무자 화두는 모든 화두의 대표격이므로, 결국 이것은 일반적으로 화두참구에 있어서의 열 가지 병통을 말해 준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전적에 따라 약간의 출입이 있지만 대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① 有와 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不得作有無會〕
② 眞無의 無로 생각지도 말고〔不得作眞無之無卜度〕
③ 道理로써 이해하려고 하지 말며〔不得作道理會〕
④ 意根下를 향해서 사량하고 계교하지도 말며〔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⑤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데서 캐내려고 하지도 말며〔不得向揚眉瞬目處?根〕
⑥ 語路上에서 活計를 짓지도 말며〔不得向語路上作活計〕
⑦ 일 없는 갑옷 속에 드날려 있지도 말며〔不得揚在無事甲裏〕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킨 곳을 향하여 알려 하지 말며〔不得向擧起處承當〕
⑨ 문자로써 이끌어 증명하지 말며〔不得文字中引證〕
⑩ 어리석음을 가져다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라〔不得將迷待悟〕.25]
25] 위와 같음
이러한 열 가지 병이란 것도 알고 보면 證悟를 구하는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있다는 것이다. 待悟之心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묶어 놓는 것이며, 나아가 깨침을 얻기 위해서 갖가지 계교나 사량분별 및 허망한 노력을 하게 만드는 근원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한 개 무자만을 看할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과 뚫고 뚫지 못한 것을 관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간화선을 닦는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기피하여야 할 점은 待悟之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모를 뿐
깨침을 법칙으로 삼되,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자칫 상충되기 쉬운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을 다 함께 살려 나갈 수 있어야 올바른 화두참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두참구시에 오로지 깨침을 중시하다 보면, 다만 미래의 향상사에만 마음을 두어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매어 놓고 중생지견 가운데서 알음알이를 지어 깨닫기를 기다리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묵조선측으로부터 간화선은 대오선이라는 비난도 받게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본래 부처라는 입장에 치중하다 보면 깨침을 법칙으로 삼지 않고 도리어 방편시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입장을 함께 살려 나갈 수 있는 중도적 방법은 무엇일까?
본래 불교에서는 제행무상의 도리를 중시하고 있다. 즉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라고 할 때 그 현재는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면노자가 말씀하시되,
마음으로 망령되이 과거법을 취하지 말고, 또한 미래사에 탐착하지 말며, 현재에도 머무르는 바가 없어서, 삼세가 다 공적함을 요달하라 하시니라.
과거사에 혹 善과 혹 惡을 사량치 말지니, 사량한즉 도를 장애하리라.
미래사를 계교치 말지니, 계교한즉 광란하리라.
현재사가 면전에 이르거든 혹 逆과 혹 順을 또한 뜻붙이지 말지니,
뜻을 붙인즉 마음을 요동케 하리라."26]
26]安震湖 編, 앞의 책, p. 209.
故黃面老子有言
心不妄取過去法 亦不貪着未來事 不於現在有所住 了達三世悉空寂
過去事 或善或惡 不須思量 思量則障道矣
未來事 不須計較 計較則狂亂矣
現在事 到面前 或亦或順亦不須着意
着意則 擾方寸矣.
그러므로 깨침을 기다리지 않고 화두를 드는 입장에서는 앞의 시간과 뒤의 시간이 끊어진 상태인 前後際斷이 되어야 한다. 一刀兩斷하여 더 이상 뒤를 생각하거나 앞을 사량치 아니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現前一念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일념을 단속해서 화두를 들 것이요, 깨치고 못 깨치고에 상관없이 오직 “이 뭐꼬” 하는 의심덩어리만이 홀로 뚜렷해지는 疑團獨露를 달성하고자 노력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의단을 갖는다는 것은 견성체험을 살리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모르겠습니다” 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로소 알 수 없는 의심이 일어난다. 정작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하는 바로 이 ‘모르는 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견해’, ‘내 여건’, ‘내 상황’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잘못 알고 있는 惡知 惡覺을 쓸어 없애 주는 것이다. 즉 ‘나, 나의, 나를’을 사라지게 하며, 비로소 올바른 正知見이 드러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경각을 얻기 전에는 완전히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如兀如痴하게 지내면서 분별지해로써 알려고 하지 말고, 다만 모른 채로 오직 모를 뿐인 화두를 챙겨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깨치고 못 깨치고에 상관없이 화두가 한 조각을 이루어[打成一片] 의단이 독로해지고 시시각각으로 法喜禪悅을 느껴 나가 안락의 법문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요컨대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는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비록 견성체험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견성에 너무 얽매여서도 안 된다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는 조사선의 초기적 입장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번뇌망상을 다스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표명하고 있다. 본래 부처임을 확실히 믿는다면, 본래 부처인데 왜 이리 차별적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근원적 의심을 비롯한 천가지 만가지 의심을 오직 하나의 의심으로 응축시켜 ‘오직 모를 뿐’인 마음가짐으로 화두로 곧장 나아가, 이 한 가지 의심덩어리를 타파시킴으로써 천만가지 의심을 일거에 타파하고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참다운 본래 부처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3. 화두를 드는 요령의 숙지
가. 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
화두를 드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앞서 待悟之心을 경계하여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한 것도 그러한 알음알이가 의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정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화두를 드는 요령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더러는 이러한 요령을 정확히 터득치 못함으로써 헛되이 공력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표적으로 조주의 無字를 看할 때, 그저 無! 無!를 되풀이하여 드는 경우가 있다. 이야말로 잘못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의심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먼저 분노심을 내어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하고 의심해야 한다. 이 분노심은, 소리를 내거나 내지 않거나 하는 것은 학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하나의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하는 의심을 의심해 가는 것이다.
조주의 無를 看하는 것이 아니다! 조주의 無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다."27]
27] 단운지철 지음, 연관 옮김, ?禪宗決疑集?(불광출판부, 1993), pp. 161~162.
길을 갈 때도 무, 앉을 때도 무,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도 무, 언제나 무라고 하며 혹은 천천히 하기도 하고, 혹은 호흡과 관련지어 급하게 하기도 하는 것 등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 無라는 말에 달라붙어서 의정을 일으켜야지, 그저 무, 무 하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처음부터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분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따금씩 소리를 내어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하면 혼침과 도거가 사라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해서 공부를 짓되, 정신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혹은 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부를 짓되 다만 공안을 念하지 말지니, 念해 가고 念해 오면 무슨 交涉이 있으리오?
念하여 미륵불이 나올 때까지 이를지라도 또한 교섭함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아미타불을 念한다면 공덕이나 있지 않겠는가?
다만 하여금 念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각기 화두를 들어 일으켜야 할지니,
‘無字’를 看한다면 문득 ‘無字’上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柏樹子’를 看한다면 문득 ‘柏樹子’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一歸何處’를 看한다면 문득 ‘一歸何處’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28]
28] 慧學尊者 信眉 編, 禪學刊行會 譯, ?蒙山法語?, pp. 181~183.
做工夫 不只是念公案 念來念去 有甚?交涉
念到彌勒下生時 亦沒交涉 何不念阿彌陀佛 更有利益
不但敎不必念 不妨一一擧起話頭
如看無字 便就無上 起疑情 如看柏樹子 便就柏樹子 起疑情 如看一歸何處 便就一歸何處 起疑情.
이처럼 단지 공안을 念해서는 안 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미타불과 같은 불명호를 염하는 것이 이익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화두는 念하는 것이 아니고,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심을 지어 나가는 요령에서도 또한 우선은 화두 전체를 들어서 챙기고, 그리고 나서는 ‘도대체 일체 함령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는 무엇을 因하여 無라 일렀을까?’, ‘어째서 無라 했을까?’, ‘어째서?’, ‘왜?’, ‘?’ 하는 식으로 지어 나가는 것이다.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들 때에도 요령은 마찬가지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여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에다가 의정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어 버리고 ‘도대체 어디에다 두었을까?’ 하고 의심하고 의심해 나가듯이 의심을 지어 나가는 것이다. 다만 念하는 것과 의심해 나가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하여 골똘히 의심하고 의심할 때, 혼침과 도거는 자연스레 사라지고 성성하고도 적적한 경지가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화두가 잘 들리지 않으면 다시 화두를 처음부터 끝 구절까지 들어서 수미일관하게 하고 다시 의심을 지어 나가되, 그래도 쉽사리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포단에서 내려와 한동안 거니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혹 화두를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거든, 연거푸 세 번 들면 즉시 힘을 얻을 것이요,
혹 심신이 피로하고 지쳐 마음이 불안하거든, 조용히 땅으로 내려와 한동안 거닐다가
다시 포단에 앉아 본참화두를 가지고 전과 같이 밀고 나가도록 하라."29]
29] 운서주굉 지음, 광덕 역주, 앞의 책, p. 272.
若是話頭提不起 連擧三遍 便覺有力
若身力疲倦 心識?? 却輕輕下地 打一轉
再上蒲團 將本參話 如前??.
즉 앉아서 공부에 장애를 느낄 시에는 서서 다니며 공부해도 무방한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오로지 서서 다니며 화두를 참구해서 깨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고봉화상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禪宗決疑集?의 저자인 元나라 斷雲智徹(1309~?) 선사도 그러하였다.
"聖像 앞에 향을 사르고 3년을 죽기로 한정하고 이렇게 서원하였다.
“제가 만약 나태하여 앉거나 눕고자 하여 몸을 자리나 평상에 붙인다면 무간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어지이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배회하였다. 두 끼의 공양 때에만 자리에 앉았을 뿐, 그밖에 차를 마시는 경우에도 역시 발을 멈추지 않았으며, 道友나 시주가 방문했을 때에도 또한 맞이하는 법이 없었다. 말은 일체 절제하였다. 단지 ‘만법귀일 일귀하처’만을 들을 뿐이었다. 다만 이 한마디를 향하여 간절히 의심을 지어 갈 뿐이었다."30]
30] 단운지철 지음, 연관 옮김, 앞의 책, pp. 145~146.
아침에 죽먹을 때와 점심에 밥먹을 때를 제외하곤 일체 앉거나 기대지도 않고 화두를 참구하여 다만 의정만이 마음속에서 분명한 무심삼매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봉화상도 거의 3년이 되도록 두 끼니의 죽과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앉지 않았고 피곤할 때에도 자리에 기대지 않고서 밤낮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며 ‘無字’ 화두를 참구했다고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외에 ?禪關策進?의 毒峰季善 선사도 ?溪에서 정진할 때에 눕는 곳을 만들지 아니하고 다만 한 개의 걸상만을 놓고 정진하여 필경 깨침으로 법칙을 삼았다고 한다.
하루 저녁에는 졸다가 밤중이 된 것도 몰랐는데, 깨어서는 마침내 걸상마저 치우고 주야로 서서 다니며 참구하였다.
한번은 벽에 기대어 졸은지라, 그후로는 “내 다시는 벽에도 기대지 않는다” 맹세하고 빈 땅 위를 홀로 걸으며 각고의 정진을 하여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한다. 31]
31]) 운서주굉 지음, 광덕 역주, 앞의 책, p. 367.
毒峯善禪師 在?溪進關 不設臥榻 惟置一? 以悟爲則
一夕昏睡 不覺夜半 乃去? 晝夜行立
又倚壁睡去 誓不傍壁 遼空而行 身力疲勞 睡魔愈重 號泣佛前 百計逼? 遂得工夫日進 聞鐘聲 忽得自由.
한마디로 睡魔와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걸어다니며 정진하는 것은 대체로 혼침이 심할 때에 주로 잠을 쫓고자 쓰는 방법이다. 물론 걸어다니면서 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잠깐뿐이고, 앉아 수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잠을 쫓기에 수월할 것이다. 따라서 비록 흔치 않은 예이지만, 이상과 같이 전적으로 서서 걸어다니며 수행해 깨친 예가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32]
32]이와 관련해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수행자의 성향에 따라서 보다 적합한 수행 자세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남방불교의 대표적 논서인 ?淸淨道論?에서는 인간의 성향을 貪行?瞋行?痴行의 세 가지와, 이에 각각 대응하는 信行?覺行?尋行 세 가지를 합해 모두 여섯 가지 종류로 분류하고, 각각의 성향에 적합한 선정 방법과 수행 자세 및 수행 장소를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수행 자세와 장소만을 예시하자면 다음과 같다(?淸淨道論?(南傳大藏經 62), pp. 228~229).
이상 도표에서와 같이 탐행자?치행자?심행자에게 있어서는 앉는 것보다는 걷거나 서 있는 것이 보다 적합한 수행 자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보다 심도 있게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여하간 화두를 참구하는 입장에서도 참고로 알아둘 만한 것이다.
나. 화두는 배로 참구한다
마지막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화두를 두는 장소에 관한 점이다. 즉 화두를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가? 이와 관련해 ?무문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백60 골절과 8만 4천의 털구멍을 한꺼번에 뭉쳐 한 개 의심덩어리를 만들어서 이 한 개의 무자를 참구하여 의심하되 주야로 공부하여 놓지 마라.
그러나 이 무자를 허무의 무로 알려고도 하지 말며, 有無의 무로 알려고도 하지 말고, 마치 뜨거운 무쇠환을 목구멍에 삼켜 넘긴 것같이 하여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이 하여
종전의 惡知惡覺을 탕진하고 오래오래 무르익게 하여 자연히 안팎이 한 조각을 이루어 나가면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다만 저 스스로만 앎이로다."33]
33] 大正藏 48, p. 293上.
將三百六十骨節 八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晝夜提?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如呑了箇熱鐵丸相似 吐又吐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
驀然打發 驚天動地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岸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3백60 골절과 8만 4천의 털구멍을 한꺼번에 뭉쳐’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혼신을 다해서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無字라는 조사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의심덩어리를 지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몸조차 없는 듯 잊은 듯 ‘안팎이 한 조각을 이루어 나가도록’ 화두삼매에 드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본래 마음에는 일정한 方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화두를 어느 한 자리에다 묶어 놓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위에서 가리키는 바와 같이 온몸으로 간절히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머리로 생각이 집중되어 上氣病에 걸리기도 쉽고, 또는 호흡의 부조화 상태에 이르러 격심한 가슴의 통증을 수반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대체로 견성체험을 위해서 의정을 일으킬 것을 중시하며, 이러한 의정은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화두를 간절히 용을 써서 참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작용과 시행착오를 덜 수 있는 방법으로서 화두참구시에 복식호흡을 병행해 나가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복식호흡을 통해서 화두를 들다 보면 상기 부작용을 피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망상과 혼침도 줄일 수 있다. 즉 급하고 완만함이 그 중간을 얻어서, 상기병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정진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복식호흡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을 갖되 ‘머리’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화두를 ‘배꼽 밑에 두고 관하라’고 권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눈은 전방을 주시하고 있지만 마음의 시선을 배에 두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아랫배가 볼록하고 홀쪽함을 느끼면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각이 단전에 가 있게 되고, 생각이 단전에 가 머무는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의심을 내어 “이 뭐꼬?” 하면 화두가 단전에 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머리로써만 “이 뭐꼬, 이 뭐꼬?” 하면 氣가 상승해 상기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때 단전에 무리한 힘을 주게 되면 탈장할 우려가 있으니,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준비호흡과 본호흡이 있다. 처음에는 준비호흡을 한다. 즉 공기를 가득 들이마셔 잠시 머물렀다 내쉬기를 두세 번 해서 폐 속의 묵은 공기를 완전히 방출한다. 그리고 나서 본호흡을 한다. 이때는 공기를 조용히 들이마시되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도록 하고, 조용히 내쉬어 차츰 아랫배가 약간 들어가도록 8부 가량만 숨쉰다. 이때 잠시 호흡을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뭐꼬?” 하는 것이 화두를 배로 참구하는 요령이다.
간혹 내쉬는 숨만 있고 들이마시지를 못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곤란해진다. 그럴 때는 숨을 들이마실 때 아랫배가 홀쪽하도록 하고, 내쉴 때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한다. 즉 위와는 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가슴 답답함이 사라진다. 어쨌든 호흡에 있어서는 전체적으로 숨이 가쁘거나 막히도록 하지 말고 무리가 없도록 자연스럽고 편안케 해야 부작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차츰 요령을 터득하면 매번 숨쉴 때마다 화두를 들 필요가 없고, 화두가 사라지거나 딴 생각이 들어오면 화두를 한 번씩 챙긴다. 이때 가벼운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고 다만 화두만을 의심하면 된다. 34]
34] 복식호흡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요령에 관해서는 용화선원 송담스님의 법문테이프(병자년 동안거 결제법어)를 참조하였다.
이상과 같이 복식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챙기다 보면 자연히 머리로써 사량분별하지 않게 된다. 마음의 시선이 배에 가 있기 때문이다. 배는 분별치 않는 것이다. 더러 화두를 전방에 놓는다거나 혀 끝에 놓는 것이 좋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두를 어느 곳에 두는 것이 가장 좋은가는 참구하는 이가 실제로 활용해 보고 선택할 일이다.
아무튼 화두는 念하거나 머리로써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면 될 것이다. 번뇌망상을 배에 맡기고 화두에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체처에 무심하면 차별경계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화두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려 沒巴鼻 無滋味해서 뱃속이 고민할 때가 문득 이 좋은 시절인 것이다.
Ⅲ. 맺음말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동안에 가슴이 무척 답답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도대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화두가 한동안 잘 들리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갖가지 번뇌망상이 떠오르고, 이러한 번뇌망상에 시비분별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격정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때문인가? 혹은 마음을 너무 조급하게 써서인가?
아무튼 그 원인이야 차치하고라도, 점점 더 가슴속이 답답해져서 마침내 심할 때는 정진시간중에도 문을 박차고 뛰쳐나오고 싶을 정도로 증상이 심해져갔다. 호흡이 콱 막혀서 잘못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더욱 답답했던 것은, 지금까지 참선에 관련한 서적이나 자료들을 어지간히 섭렵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이와 같은 현상에 관한 원인이나 대처방안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유독 나 혼자만 이런 현상을 겪는 것은 아닐 텐데, 앞서의 수행자들은 이런 경우 어떻게 극복해 나갔을까? 고민 끝에 마침내 주위 도반들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호소하게 되었고, 그 조언에 힘입어 증상을 고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예는 지극히 사소한 경우에 해당되겠지만, 사실상 화두공부를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수행상의 실제적 방법에 관한 논의는 흔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수행을 지속하다 보면 자연히 스스로 터득케 되기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혹은 다행히 처음부터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 올바른 방법으로 매진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久參들이 이미 겪어 나간 시행착오를 초심자들이 여전히 되풀이해 나가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른바 ‘경험의 축적’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크든 작든 간에 선각자들의 축적된 체험이 문자로서 ‘공유’가 되어야, 후배들은 시행착오를 최소화함으로써 무엇이든 한발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어떻게 보면 누구나 이미 뻔히 알고 있는 사항들인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세히 검토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되는 방법론에 관하여서 살피고자 하였던 것이다.
화두참구에 있어서 의정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의정이 일어나야만 비로소 살아 있는 활구참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정을 어떻게 하여야 보다 쉽게 빨리 일어나도록 할 수 있는가?
그 첫 번째는 믿음이 가는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한 선지식의 지도를 통해서 곧바로 의정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으며, 여하간 화두에 신념이 붙어 의심덩어리로 점차 지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계합하는 선지식을 만난다는 것은, 막연히 바란다고 성취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엄청난 善根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선근을 지어 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참구자의 올바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우선 큰 서원을 발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에 임하여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현재와 같은 방식의 화두참구법이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앞설 필요가 있다. 간화선은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는다. 이것은 묵조선에서 간과하고 있는 견성체험을 중요시함을 의미한다. 즉 화두를 통해서 의정을 일으키고 마침내 이를 타파함으로써 더 이상 의심치 않는 경지, 즉 자신을 100퍼센트 믿는 경지인 佛地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간화선은 待悟禪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깨침을 중시한다고 해서 오로지 깨달음 지상주의로 흐른다든가, 미래적 깨침에 지나친 관심을 가져 알음알이로 분별적 노력을 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모를 뿐’인 마음가짐을 갖고 화두참구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의정을 보다 신속히 갖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화두를 드는 요령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실제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알아 두어야 할 방법이다. 우선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念話頭를 하는 것은 의정을 일으키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다. 염화두를 하려면 차라리 念佛을 하는 것이 공덕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어째서 無라고 했을까?” “어째서?” 하는 식으로 의심을 지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화두를 너무 용을 써서 의심하다 보면 상기병에 걸리기가 쉽다. 따라서 화두를 배로 참구하는 것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배로 참구한다는 것은 화두를 들 때 호흡에 따라서 배가 나오고 들어감을 관찰하면서 화두를 드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상기병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며, 혼침과 도거도 상당히 덜어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화두참구에 있어서 의정돈발에 도움이 되는 요인들을 선지식, 참구자, 화두의 세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물론 위의 셋을 모두 갖춘다고 해서 당장 의정이 돈발할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혹은 이 가운데 한 가지만 갖추고도 몰록 의정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나아갈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의정이 몰록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하는 것조차도 화두에 맡겨 버리고 다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의심할 뿐’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세상은 변하고 있다.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조류는 종교계의 영역이라고 해서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한국불교계 또한 이러한 점에서 현대사회에서의 적응과 전통성의 고수라는 자칫 상충되기 쉬운 문제점을 항시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원시불교?근본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법론이었던 것이지만, 중국과 우리나라 등 대승불교권에서는 상당기간을 정통불교로서 인정받아 내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비록 새로운 방법론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석존의 가르침과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즉 대승불교의 空觀과 소승불교의 煩惱對治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치우친 묵조사선을 비판하면서 간화선이 출현하였듯이, 간화선 또한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실다운 공부인이 출현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實參實悟가 중요하며, 열심히 하다 보면 방법도 자연스레 터득이 된다고는 하더라도, 과거와 현재에 선현들이 몸소 체득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고구정녕한 가르침과 실례를 세밀히 살펴보아 가능한 한 시행착오를 줄여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현 시대에서도 여전히 지켜져야 할 것과 변화해야 할 것을 잘 가려내어, 시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자기 자신과 함께 불법을 생동케 하는 비결이 되리라 의심치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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