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看話의 철학 -실제와 원리- / 변희욱

경호... 2013. 2. 7. 03:02

看話의 철학

-실제와 원리-

 

변희욱 / 서울대학교 철학과 강사

 

 

목 차

 

1. 글의 動機

2. 간화의 실제

3. 간화의 원리: 살(殺)/활(活), 생(生)/숙(熟)

4. 간화의 비결: 간절하게[切]

5. 간화, 일상(日常)과 격외 사이

 

투고일자 : 2010. 1. 10

심사기간 : 2010. 1. 20 ~ 2. 5

게제확정일 : 2010. 2. 8

 

 

국문 요약

 

이 글은 看話의 본격 주제, 간화의 실제와 원리를 학술적으로 접근해보기 위한 시도이다.

 

祖師는 本來面目을 일깨우기 위해 格外의 機緣을 보인다. 학인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조사는 낮추어 보여준다. 조사의 뜻을 알고자하나 공부가 진척되지 않는 다양한 증상으로, 혼침과 도거, 無記, 송화두?염화두, 주작화두, 穿鑿, 大悟가 있다. 이런 증상의 원인은 답을 찾지 않고 문제만 보거나 간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절하게 답을 찾으면 나와 의심이 저절로 하나가 된다. 이 때가 간화의 시절이다.

 

중생은 곧 부처다. 중생이 노력해서 부처가 되겠다고 발상이 근본적인 병이다. 지금 바로 부처인데도 여전히 중생인 까닭은 부처와 중생, 나와 남, 있음과 없음을 둘로 나누어 사고하기 때문이며 그런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틀(熟)을 벗어나 낯설지만 본래의 틀(生)로 복귀해야 不二門을 투과할 수 있다. 존재의 원리가 中道이니, 간화의 원리도 중도이며, 궁극의 지향도 중도 체득이다.

 

간화는 기존의 나를 해소하여(殺) 본래의 자유로운 상태로(活)로 가기 위한 조사의 관문이다. 격외의 관문을 돌파하여 부처로 복귀하는 방안이 바로 간화이다. 돌아보면 본래 그 자리다.

 

 

*주제어

간화, 화두, 중도, 살·활, 생·숙, 알려는 간절함

 

 

1. 글의 動機

 

무엇이 참되게 수행하고 참되게 깨닫는 소식인가?” 좌선하지 않고 간화로만 견성했다는 고봉(高峰, 1238~1295)은 이렇게 물었다. 고봉은 한참을 침묵하다 말했다. “남산에 구름 피어오르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1] 질문이 던져졌고 답도 나왔다. 그렇지만 질문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도, 마지막 게송의 진면목을 알아차리는 것도 만만하지 않다. 견문각지(見聞覺知), 사량계교(思量計較)라면 말할 수 있겠으나, 남쪽 구름에 북쪽 비를 체험해 본 적이 있겠는가? 논의의 시작은 선의 요체(?禪要?)를 역설한 고봉이 던진 일구이다.

 

1] ?禪要?, ?晩?其十?, HTC.122.711a, 如何是實?實悟底消息. 良久云, 南山起雲, 北山下雨.

 

최근 “간화”에 관한 관심이 심상치 않다. 많은 사람들이-사부대중이라 해도 좋고, 착각에 빠진 부처라 해도 무방하다- 간화에 몰두하고 있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불교 학자들이 간화와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법당에도, 선방에도, 야단법석에도, 학술대회에서도 간화는 주요 소재다. 지난 몇 십 년간의 정체가 혼침 혹은 무기 증상이라면, 최근의 과도 열기는 산란 내지 상기 증세다.

 

학계가 간화를 주요 연구 소재로 주목하고 있지만 간화를 비판하는 소리도 커졌으며, 적지 않은 수좌들은 선 특히 간화선 관련 학술논문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자들이 선 특히 간화를 모르고 글을 쓴다고 지적한다. 실제 지금까지의 주요 연구 주제는 송대(宋代, 960~1279) 유학(儒學)과 간화선(看話禪)의 비교,2] 묵조선(?照禪)과 간화선의 비교이다.3] 엄격히 본다면 이상의 연구는 간화의 주변을 탐색한 것이다. 수좌들의 지적대로 간화의 원리와 실제를 비롯한 본격 주제는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았다.4]

 

2]Ari Borrell, “Ko-wo or Kung-an?,” in Buddhism in the Sung,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변희욱, ?사대부 학문 비판을 통해 본, 대혜의 유학적 선?, ?불교학 연구? 8, 불교학연구회, 2004.

3]柳田聖山,, ?看話と?照?, ?華園大學校硏究紀要? 6, 1973.; Morten Schl?tter, “The Twelfth Century Ts'ao-tung Tradition as the Target of Ta-hui's Attacks on Silent Illumination,” ?駒澤大學佛敎學部硏究紀要? 6, 1995.; Morten Schl?tter, “Silent Illumination, Kung-an Introspection, and the Competition for Lay Patronage in Sung-Dynasty Ch’an,” in Buddhism in the Sung,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9.; 김호귀, ?대혜의 묵조선 비판에 대하여?, ?普照思想? 13, 2000.

4]간화 수행의 원리를 정리하려한 연구물도 있지만(예를 들어, 정성본, ?간화선의 본질과 수행구조?, ?불교평론? 6, 2001.; 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동국대 출판부, 2005), 논자가 보기에 간화의 실제와 원리를 정확히 간파했다고는 할 수 없다.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조계종 출판사, 2005)은 살활 등의 간화의 핵심 원리와 참구과정에 나타나는 병통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관련 분야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 책은 원전과 이론을 엄격하게 정리한 학술 연구라기보다는 간화를 권면하는 입문서에 가깝다.

 

이 글은 간화의 본격 주제, 실제와 원리를 학술적으로 접근해보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은 간화를 학술적으로 재규정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 아니라, 간화의 현장에서 논자가 직접 품었던 의문과 학인들이 논자에게 던진 질문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먼저 의문과 질문을 소개하고, 현장에서 나타나는 간화의 양상들을 정리할 것이다(2. 간화의 실제). 그런 후에 어록에 소개된 사례를 통해 그런 물음에 대한 답변을 시도할 것이고,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왜 간화를 해야 하는지(3. 간화의 원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4. 간화의 비결).

 

이 글이 간화의 양상을 정리한다고 해서, 모든 실제 상황을 포괄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 간화의 원리를 궁구한다고 해서, 간화의 필요이유와 간화의 메커니즘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기획은 “간화의 실제와 원리”를 정리하여야 한다는 실참 현장의 요구에 한 걸음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2. 간화의 실제

 

운문(雲門, 864~949)은 어떤 학인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묻자, “마른 똥 막대기[乾屎?]이다”라 대답했다.5] 오조(五祖, ?~1104)는 대중들에게 주먹을 들어 보인 후, “주먹이라 한다면 줄곧 행각해본 적도 없는 것과 같으며, 주먹이라 하지 않는다면 얼굴을 맞대고 속이는 것이다”6]라며 윽박질렀으며, 그의 제자 원오(圓悟, 1160~1125)7]와 대혜(大慧, 1089~1163)8]는 똑 같은 방법으로 학인을 제접했다.

 

5] ?雲門廣錄?, T.47.550b; ?無門關? 제21칙 雲門屎?, T.48.295c, 雲門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

6] ?五祖語錄?, T.47.656a, 擧起拳頭云, 若喚作拳頭, 一似不曾行脚, 若不喚作拳頭, 對面相?.

7] ?碧巖錄?, T.48.183a, 若喚作雨聲, 則是迷己逐物, 不喚作雨聲, 又如何轉物.

8] ?大慧語錄?, T.47.882a, 一日問他, 喚作竹?則觸, 不喚作竹?則背如何.

 

 

조사들의 행위와 말은 상식의 “틀을 벗어났으며[格外], 기존의 틀을 벗어난 의미[格外旨]를 알라고 하는 상징[機緣]이다. 그들이 학인에게 던진 질문과 대답은 “상식의 틀”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상식의 틀이란, 일반적인 사고, 논리,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어려운 만큼 반응도 다양하다.

⑴ 격외어를 듣자마자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격외지를 알아낸다.

⑵ 아무런 반응이 없다.

⑶ 조사의 뜻을 알고자하나 공부가 진척되지 않는다.

⑷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알아차리고 말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⑴은 순간 깨침으로, 바로 부처이니 조사의 의도가 적확하게 전달되었다. ⑵는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없다. 문제는 격외지이기에 쉽게 알아차릴 수 없지만, 알아내려고 하는 ⑶, ⑷ 두 경우다.

먼저 ⑶은 노력하지만 의심이 발동되지 않았거나 가짜 의심이 일어난 경우다.

⑷가 간화다. 관문을 돌파하겠다는 의지에 동반하여 문제를 풀고자하는 의심이 지속된 경우이다.

이제 ⑶과 ⑷의 증상을 알아본 후, ⑶이 왜 일어나는지와 어떻게 하면 그런 증상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리고 ⑷가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

 

 

1) 가짜 의심과 간화

 

(1) 혼침(昏沈)과 도거(掉擧)

 

혼침과 도거를 겪어 보지 않은 실참자는 거의 없다. 혼침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것을 이기려 턱밑에 송곳을 세워 놓고 정진했다는 경허의 일화, 생쌀을 씹으며 밧줄을 목에 걸고 장좌불와했다는 혜국의 분투9]는 선문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9]박희승, ?선지식에게 길을 묻다?, 은행나무, 2009, p. 181.

 

도거가 일어날 때, 싸워 이기려는 경우가 허다한데, 대혜는 말한다.

“앉을 때 혼침해서는 안 되고 도거해서도 안 됩니다. 혼침과 도거는 옛 성인이 꾸짖은 바입니다.

고요히 앉았을 때 이 두 가지 증상이 나타남을 느끼자마자, 그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화두를 들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두 가지 증상은 힘써 억누르려하지 않아도 바로 사라집니다.

시간이 흘러 힘이 덜 듦을 느낍니다. 바로 이 때가 힘이 생기는 때입니다. 또한 고요한 공부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공부입니다.” 10]

10] ?大慧語錄?, ?答富樞密(季申)?, T.47.922b,

坐時不得令昏沈, 亦不得掉擧. 昏沈掉擧先聖所訶.

靜坐時, ?覺此兩種病現前, 但只擧狗子無佛性話, 兩種病不著用力排遣, 當下??地矣.

日久月深, ?覺省力, 便是得力處也. 亦不著做靜中工夫. 只這便是工夫也.

 

혼침은 의식이 멍멍해지거나 졸리는 현상으로, 간혹 학인들이 상념이 다 없어졌다[寂寂]고 착각하기도 한다. 도거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증세로, 많지는 않지만 일부 실참자들은 의식이 오롯해졌다[惺惺]고 오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문에 그런 적적과 성성은 없다. 고요한 가운데 의식이 밝게 살아있어야 진짜 적적이며, 의식이 살아 있는 가운데도 고요한 상태가 지속되어야 진짜 성성이다. 한 마디로 혼침과 도거는 그 자체로도 나쁜 증상이지만, 그런 현상을 좋은 경계(境界: 수행과정에 다가오는 현상)로 착각한다면 발길질 당해 마땅하다.

 

혼침과 도거를 억누른다고 해소될 수 없다. 억지로 눌러 망념이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돌로 풀을 누른 것이며 파초 잎을 벗겨내는 것이다. 혼침과 도거의 뿌리를 본다면, 착각할 이유도 애써 싸울 까닭도 없다. 비결은 바로 그 순간 화두 들기이다.11]

11]?몽산법어?(원순 역해, 서울: 법공양, 2008), ?蒙山和尙示古原上人?, p. 16,

?覺眼皮重, 便着精彩, 提話頭.

 

그래도 혼침과 도거를 힘써 물리치고 간화하려는 학인에게 고봉은 이렇게 충고한다.

“형제들이 십 년 이십 년이 되도록 풀을 헤치고 바람을 맞았으되 불성을 보지 못하고 가끔 혼침과 도거의 그물에 갇혔다고 모두 말한다. 어찌 모르는가?

혼침과 도거 네 글자의 당체가 곧 불성이라는 것을. 아!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고, 스스로 법을 잡고 망령되게 병이라 여긴다. 병으로 병을 다스리는 것이다.”12]

12] ?禪要?, ?示衆其九?, HTC.122.710b,

兄弟家, 成十年二十年, 撥草瞻風, 不見佛性, 往往皆謂被昏沈掉擧之所籠?. 殊不知.

只者昏?掉擧四字, 當體卽時佛性. 堪嗟. 迷人不了, 妄自執法爲病, 以病攻病.

 

간화는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을 가리는 공부가 아니고 언제 어디서든 해야 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며, 혼침과 도거도 본래면목이 특정한 양상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병이다, 약이다’라는 발상이 병이다.

 

 

(2) 無記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히다가 갑자기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화두를 챙겼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생각이 더 이상 발생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상태[寂寂]이다. 그러나 이 때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리면서 동시에 화두를 놓아버릴 수도 있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무기는 고요한 상태에서 화두를 놓친 지경이다. 13]

13] ?몽산법어?, ?普濟尊者示覺悟禪人?, p. 136,

念起念滅謂之生死, 當生死之際, 須盡力提起話頭. 話頭純, 起滅卽盡. 起滅卽盡處, 謂之寂. 寂中無話頭, 謂之無記. 寂中不昧話頭, 謂之靈.

 

학인들은 이런 상태를 “한 순간에 고요해졌다,” “정신 맑아지고 시원해졌다,” “몸이 허공과 같아졌다”라 묘사한다. 그러나 화두를 놓치고 이렇게 느꼈다면, 이것이 바로 공에 떨어진 외도(外道)이며 넋이 흩어지지 않은 채 죽은 사람이다. 대혜가 묵조선을 비판할 때 지적한 바이다. 이 상태는 공부과정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으로, 이를 즐겨서는 안 된다. 고요한 상태가 지속되어도 화두는 성성해야 하며 의식은 또렷해야 한다. 간화는 고요한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준칙[以悟爲則]이다. 14]

14]?大慧語錄?, ?答宗直閣?, T.47.933c.; ?示眞如道人?, 895a.

 

 

(3) 송화두, 염화두

 

어떤 경우 소리를 내어 화두를 외우면서 화두에 집중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것이 송화두다. 속으로 반복해서 외우기도 하는데, 화두가 잡힐 때도 있고 의심이 때때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이 염화두다.

선지식이 화두를 주고 답을 내어 놓으라 다그치자, 학인은 열심히 공부하려 한다. 학인은 답을 찾으려는 처음의 의도를 망각하고 문제만 자꾸 외우며, 길을 잃었다. 제자리걸음만 하면서도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있다. 선지식의 일기일언(一機一言)에, 학인은 답을 찾기는커녕 문제만 외운다.

 

 

(4) 주작화두(做作話頭)

 

의심내기에 정성을 기울이지만, “억지로” 의심을 만들어 낸다. 어떤 때는 화두가 분명하게 들리다가, 다른 때는 끊어진다. 한 때는 생각만 해도 화두가 들리다가, 어떤 때는 몽롱한 상태에서 애만 태우기도 하고, 간혹은 뜨거운 것이 머리 속에서 움직이듯 머리만 아프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빨리 성취하겠다는 욕심[速效心]은 있으나 진정한 믿음이 없고, 진정한 믿음이 없기에 가짜 의지가 발동되었기 때문이다. 노력하니 의심이 일어나기는 하나, 이렇게 인위적으로 일으킨 의심은 지속되지 않는다. 끊어지지 않는 의심이 진짜 의심이며, 있고 없음을 반복하는 의심은 억지 의심, 가짜 의심이다. 혼침과 산란이 일어나는 것도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이다. 15]

15]?몽산법어?, ?蒙山和尙示古原上人?, p. 14,

話頭上有疑不斷, 是名眞疑. 若疑一上少時, 又無疑者, 非眞心發疑, 屬做作. 是故昏沈掉擧, 皆入作得.

 

 

(5) 천착(穿鑿)

 

머리로 정답을 찾는 경우이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서 정답을 찾고 두뇌의 유추능력을 발동하는 상태다. 천착은 대혜가 가장 경계한 증상으로 박람다독(博覽多讀), 사량계교를 동반한 뜻풀이여서, 고인의 언구를 천착함은 잡독이다.16] 천착의 기저에는 조급증과 자만이 있다. 중국 고전에서 천착이란 단어는 좋은 의미보다는 나쁜 의미에 가까우며,17] 지금도 제방의 선지식들이 학인을 제접할 때 “천착하지 말라”고 한다. 천착한다면 열심히 뚫으려 했으나 쓸데없이 헛수고했을 뿐이다. 대혜의 경고를 보자.

 

16]?大慧語錄?, T.47.867b, 將古人入道因緣, 妄生穿鑿.;

892c, 穿鑿卽錯. 莫愛諸方奇言妙句, 宗師各自主張, 密室傳授底, 古人公案之類, 此等雜毒.;

921a, 不可將古人垂示言敎胡亂穿鑿. …… 理會不得. 錯下名言, 隨語生解. 見與舟峰書尾, 杜撰解註.

17] ?孟子?, 14:31.

 

 

㈎ 평소에 총명한 사람은 겨우 법문을 듣고는 문득 분별심으로 알며, 널리 헤아리고 증거를 끌어와서 분부할 곳을 알았다고 말하려 합니다. 어찌 모릅니까?

증거 끌어옴을 용납하지 않고, 널리 헤아림을 허용하지 않으며, 분별심으로 알아차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사 증거를 끌어오며, 널리 헤아리며, 이해하였더라도, 모두 해골 이전의 잘못된 분별심의 일입니다.

…… ㈏ 비록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이해한 바가 들어맞으며, 인증하는 것이 빈틈이 없더라도, 다 귀신 집에서 살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18]

18] ?大慧語錄?, ?答王敎授(大受)?, T.47.934c,

尋常聰明人, ?聞擧起. 便以心意識領會, ?量引證, 要說得有分付處. 殊不知.

不容引證, 不容?量, 不容以心意識領會.

縱引證得, ?量得, 領會得, 盡是??前情識邊事.

 

 

㈎ 그런데도 일부 학인들은 정답의 단서를 얻고자 어록을 펼쳐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역대 공안집이나 사전을 펼치기도 하고, 성질 급한 사람들은 인터넷을 검색하여 공안의 의미를 쉽게 알려고 한다.

어떤 이는 문자를 활용하여 논리나 설명으로 문제를 풀고 답을 추적해 나가기도 한다. 지식이 풍부하고 어록에 해박한 학인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다. 뚫으려 한 것은 분명하지만, 분별적 사고와 지식 수집으로 했기에 조사의 관문을 뚫을 수 없다. 그래서 헛수고에 그치지 않고 “이 일”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

 

㈏ 극히 일부이지만 천착해서 뜻풀이 하고서, 깨달았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조사의 기연(機緣)에 대해 이해하여 분명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일과는 전혀 관계없다. 엄밀히 말한다면, 천착으로 어록의 구절을 뜻풀이 할 수 있어도 깨칠 수는 없다. 한마디로 천착은 도둑 공부, 거짓 공부이다.

고인의 말로 정리해 본다. “사자는 사람을 물고 한나라 개는 흙덩이를 쫓는다.” 19]

19] ?禪要?, ?開堂普說?, HTC.122.703b, 獅子咬人, 韓盧逐塊.

 

 

(6) 깨달음을 기다린다(待悟)

 

선지식이 던진 질문, 혹은 화두를 간직하고 언제가 알게 되겠지 하면서, 그저 기다리기도 한다. 화두를 붙잡고 때를 기다리면 견성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대혜는 장애의 하나로 “어리석은 가운데에서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림”20]을 들었다.

왜 깨달음을 기다림이 잘못일까? 대혜는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기에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함은 큰 잘못이다. 어리석음에 집착하여 깨달음을 기다림은 그 잘못이 더욱 크다. 왜인가? 깨우치지 못하기에 어리석다고 여기고는, 어리석음에 집착하여 깨달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깨우치지 못한 것 중에서도 더 깨우치지 못한 것이며, 어리석은 것 중에서도 더 어리석은 것이다.”21]

대혜에 따르면, 이미 어리석고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깨우치지 못했다면, 그저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20]?大慧語錄?, ?答富樞密(季申)?, T.47.921a.

21]?大慧語錄?, ?示智通居士?, T.47.893a,

知迷不悟是大錯. 執迷待悟, 其錯益大. 何以故. ?不覺故迷, 執迷待悟. 乃不覺中又不覺, 迷中又迷.

 

박산무이(博山無異, 1574~1630)는 이렇게 처방했다.

“공부할 때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감에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끝내 집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길을 가야 집에 이를 수 있다.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끝내 깨닫지 못할 것이니, 오로지 직접 부딪쳐서 깨닫고자 해야 한다. 깨달음은 기다릴 것이 아니다.”

요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시절인연이 맞는다 해도 그저 깨달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몸소 화두를 잡아야만 깨달을 수 있다.22]’ 진실하지 못하기에 대오라는 증상이 일어난다. 간절하고 진실하다면 대오라는 증상이 발생되지 않는다.

 

22] ?參禪警語?, 백련선서간행회 역, 경남, 합천: 장경각, 1991, p. 43. 번역은 필자가 윤문했다.

 

 

2) 진짜 의심과 간화19)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는 느낌은 다양하다. 각양각색 느낌의 공통점은 “답답하다”이다. 특히 가슴이 답답하다. 의식은 명료한데 꼬리를 물던 생각이 끊어지면서 무엇인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답답하다면, 진짜 의심이 일어나고[眞發疑] 간화가 시작된 것이다.

 

화두를 계속 잡은 채 그 상태를 밀고 나가면, 갑갑하기 그지없게 된다. 갑갑하기만 할뿐 어찌 할 바 없으므로 답답함을 넘어 짜증마저 일어난다. 어찌 할 바를 모를 정도로 갑갑해도 다른 생각하지 말고 화두에만 집중해야 한다. 집중하다보면 몸은 갑갑한데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갑갑하면서도 화두를 잡는 데에 힘이 들지 않는 새로운 체험이 다가온다. 이제 의심이 내 몸의 감정[疑情]인 양 자연스럽게 달라붙는다. 이런 느낌이 들면 의심이 의정으로 진행된 것이다. 의정으로 발전하면 화두를 잡는다는 느낌마저 없다. 간혹 실참자가 이럴 때 화두가 없어졌다고 여기면서 당황해 하기도 하는데, 조금도 의아해 할 필요가 없다. 잘되고 있는 상태다. 대혜가 알려주었던 바, “힘이 덜 듦을 느끼면서 힘이 한없이 생김을 느끼게 된다” 24]가 바로 의정이 형성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23] 2.2.의 내용은 변희욱, ?선, 몸으로 하라?, ?몸, 마음공부의 기반인가 장애인가?, 서울: 운주사, 2009, pp.132-135를 정리?보충한 것이다.

24]?大慧語錄?, T.47.924a.

 

가슴이 답답하고 온몸이 갑갑하더라도 화두를 잡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느낌이 엄습해 온다. 죽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숨구멍이 꽉 막혔지만 빼낼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느낌[栗棘棒], 무엇인가 가슴을 옥죄지만 불가항력인 느낌[金剛圈], 암흑 속 감옥에 홀로 갇힌 느낌, 아무도 없는 칼날 능선에 외발로 선 느낌……. 이런저런 체험을 통칭한 묘사가 “만년설 고산준령과 천길 철갑 절벽[銀山鐵壁]”이다. 이때 갑갑함 이외에는 아무런 기분이 없어서[無滋味] 막막할 뿐이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보려 해도 볼 수 없다. 이미 내 몸과 한 덩어리가 되었기[打成一片] 때문이다. 그 느낌은 이젠 몸과 하나가 되어서 피할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된다. 이것을 선문에서는 의심덩어리[疑團]라 한다. 의심덩어리로 발전되면 의단 이외는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疑團獨路].

 

나와 의심이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쳤을 때의 느낌을 고봉은 이렇게 묘사했다.

“걸어도 의심덩어리이고 앉아도 의심덩어리이며, 옷 입고 밥 먹어도 의심덩어리이고, 대소변을 보아도 그저 의심덩어리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만 의심덩어리일 뿐이다. 계속 의심하다보면 힘이 덜 듦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가 힘을 얻는 때이다.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며, 화두를 들지 않아도 스스로 들린다.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쫓아내도 사라지지 않는다. 몸이 움직여도 움직였다는 것도 모르고 앉았어도 앉는 줄을 모르며, 추워도 춥다는 것도 모르고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며, 차를 마셔도 차 마셨다는 것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 먹은 줄을 몰라서, 하루 종일 어리석기가 진흙 덩어리나 나뭇조각과 같을 것이다.

이러한 반응이 나타나면 집에 이르는 소식이다. 그 자리에 멀지 않다. 잡아 얽으며 모아 붙여서 다만 때를 기다릴 따름이다. 이때 조금이라도 정진하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또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도 놓으려 하지 말아야 하며, 한 생각도 버리려 하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지속되는 바른 생각을 굳게 지켜서 깨달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25]

25]?禪要?, HTC.122.

 

일부 학인은 은산철벽에 갇히자 기다리던 것이 드디어 왔다는 듯, 통쾌함을 느끼고 쾌재를 부르며 그 상태에 빠져버리고 만다. 또 어떤 학인은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화두를 잡으려 발버둥치기도 한다. 그러면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그저 화두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면, 어느 순간 몸속에서 무거운 불길이 치솟는 느낌이 일어난다. 한 순간에 몸이 공중으로 퍼지거나, 바닥이 빠진 듯 갑자기 밑으로 꺼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 때 밑으로 꺼지는 경험과 함께 엄습했던 갑갑함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면서 짐을 내려놓은 듯, 허물을 벗는 듯, 가벼워진다. 깃털보다도 가볍다고 느낀다.

 

왜 갑갑함이 사라지고 온몸이 가벼워졌을까? 기존의 자기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내 것”, “자기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이 소멸되었기에 자유롭고 활발발해진 것이다. 다름 아닌 중도(中道)를 한꺼번에 처절하게 체험한 것이다. 간화는 은산철벽에 갇히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은산철벽을 돌파하여 중도를 체화하기 위한 무엇이다.

 

 

3) 근본병과 간화

 

간화 때의 여러 상태를 알아보았지만, 실제로 겪는 구제적인 상황은 더 다양할 것이다. 다양한 증상을 대별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고봉이 정리한 유형이 간화의 실제에 가깝다.

 

 

“㈎어떤 때는 불같이 뜨거우며, ㈏어떤 때는 얼음같이 차가우며, ㈐어떤 때는 노새를 끌고 우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어떤 때는 물을 따라 돛을 펴는 것과 같다.

㈒가 네가지 마군이 다시 서로 죽이고 해치기 때문에 학인들은 ㈓집을 잊어버리고 가업을 잃기에 이르렀다. ㈔나는 오직 오늘 한 계책을 내서 여러 사람과 함께 ?迹을 쓸어 없애겠다. ㈕[오랜 침묵] 악(捷)!” 26]

26] ?禪要?, ?示衆其九?, HTC.122.710ab,

有時熱??, 有時冷??, 有時如牽驢入井, 有時如順水張帆.

因此四魔, 更相殘害, 致使學人, 忘家失業.

西峰, 今日, 略施一計, 要與諸人, 掃?滅跡. 良久云, 捷.

 

 

㈎는 무엇과 싸우는 것과 같은 증상, 산란이다. ㈏는 강물이 흘러가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양상의 증세, 혼침이다. ㈐는 억지로 무엇인가 하려고 애쓸 때 만나는 상태, 역경이다. ㈑는 힘이 덜 들면서 화두가 잘 들이는 현상, 순경이다.

간혹 어떤 학인은 이 네 가지 증상을 맛보고, 간화가 잘되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도자가 이런 상태를 긍정하고 부추기기도 한다. 이 네 가지 증상은 과정 중에 겪는 일시적인 현상 즉 경계이고, 공부에 장애가 될 수 있는 마군이다㈒.

그중에서 ㈑는 공부의 진전일 수도 있지만, 이 느낌에 탐닉한다면 앞의 세 가지보다도 더 무서운 병증일 수도 있다. ㈓경계에 빠져 본래면목을 구현하지 못하니, ㈔어떤 방안을 제시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분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봉의 비방도 있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안타까움 속에, 어쩔 수 없이 대오각성을 요구한다는 뜻으로 외마디 소리를 쳤을지도 모른다.㈕ 경계는 화두가 순일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경계에 탐닉해서는 안 되며, 화두가 순일하다면 경계는 일어나지 않는다. 27]

 

27]?몽산법어?, ?蒙山和尙示惟正上人?, p. 50,

忽有一切好惡境界現時, 都不要管他. 話頭分曉, ?忽境界自淸.

 

근본 문제는 지금까지 열거한 증상이 아니다. 달의 입장(本分事)에서 보자면, 이상의 증상은 공부 주체와 공부의 분리, 과정과 목적의 나뉨, 그리고 부처와 중생의 구분이 전제되었을 때, 나타나는 말단 현상이다. 고봉의 웅변을 보자.

 

 

"만일 근본병[膏?之病]을 논의한다면 이 안에 있지 않다. 이미 이 안에 있지 않다면 끝내는 어디에 있는가? 돌(?)! 앉은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28]

28]이상, ?禪要?, ?示衆其十二?, HTC.122.712b,

兄弟家, 十年二十年, 以至一生, 絶世忘緣, 單明此事, 不透脫者, 病在於何. 本分衲僧, 試拈出看.

莫是宿無靈骨?. 莫是不遇明師?. 莫是一曝十寒?. 莫是根劣志微微. 莫是汨沒塵勞?. 莫是沈空滯寂?. 莫是雜毒入心?. 莫是時節未至?. 莫是不疑言句?. 莫是未得謂得未證謂證?.

若論膏?之疾, ?忽不在者裡. 旣不在者裏, 畢竟在甚?處. ?. 三條椽下, 七尺單前.

 

"이 안에 이르러서는 화두를 드는 주관과 들리는 객관, 의심하는 주관과 의심되는 객관이 둘 다 없어지고 둘 다 사라지면, 없음이 없어진다는 것도 또한 없다.

…… 이 속에 이르러서는 설사 털끝만큼이라도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일어나고 조금이라도 정진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면, 곧 훔치는 마음이 그치지 않으며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 하나의 병은 다 도를 막는 발단이다."29]

29]?禪要?, ?答直翁居士書其二七?, HTC.122.721a,

到者裏, 能擧所擧, 能疑所疑, 雙忘雙泯, 無無亦無.

…… 到者裏, 設有毫釐待悟心生, 纖塵精進念起, 卽是偸心未息, 能所未忘. 此之一病, 悉是障道之端也.

 

 

근본병[一病, 膏?之病, 毛病30]]은 “앉은 그 자리”에 있으며, 존재 그 자체의 기본 속성이다. 왜 그 병이 생겼을까? 고봉의 생각은 이렇다. “만일 이 속에서 깨달으면, 곧 이 일은 닦고 다스림을 빌리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 다만 믿으면 그만이다.”31] 근본병이란 본래 부처임을 믿지 않고 부처로 살지 못하는 것이며, 부처와 중생을 분리한 채 수행해서 부처로 접근하겠다는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부처와 중생을 분리한 채 수행해서 부처로 접근한다면,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다. 32]

 

30] ?禪要?, ?端陽示衆其十五?, HTC.122.714a.

31] ?禪要?, ?答直翁居士書其二七?, HTC.122.721a,

若向者裏薦得, 便知此事不假修治. …… 但信得及便是.

32] ?永嘉證道歌?, T.48.396a-396b, 學人不了, 用修行眞成, 認賊將爲子.

 

공부하는 자와 공부가 분리되었다면 진짜 공부가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구분되었다면 진짜 선이 아니다. 그래서 “발밑을 보라[照顧脚下]!”라 하는 것이다. “앉은 자리” “발 밑”을 보기 위한 비결 아닌 비결이 간화이다.

 

 

3. 간화의 원리: 살(殺)/활(活), 생(生)/숙(熟)

 

1) 존재의 두 측면: 무심(無心)과 평상심(平常心)

 

학인이 도(道)를 물었을 때, 황벽(黃檗, ?~850)은 “무심이 도”33]라 했고, 마조(馬祖, 709~788)는 “평상심이 도”34]라고 했으며, 성철(性徹, 1912~1993)은 “무심이 도”35]이면서 “부처다”36]라 했다.

 

33]?宛陵錄?, T.48.384b, 問, 如何是佛. 師云, 卽心是佛, 無心是道.

34] ?景德傳燈錄?, ?江西大寂道一禪師語?, T.51.440a,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謂平常心.

35]性徹, ?本地風光?, 경남 합천: 장경각, 1993, p. 192.

36]圓澤 편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 대구: 해인사 출판부, 1987, p. 108, 114.

 

 

그런데 고봉은 그것도 옳지 않다고 했다.

고봉은 “평상심이 도인가? 무심이 도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평상심과 무심이라는 말이 몇 사람이나 성취시켰으며, 몇 사람이나 그르쳤겠는가?”라 반문했다. 고봉은 계속해서 말했다.

“어찌 진흙 가운데 가시가 있고 웃음 가운데 칼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가, 몽둥이를 휘둘러 달을 때리고 대나무로 하늘에 점을 찍으려는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 ‘무심이 도라고 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혀있다. 어찌 한 겹에 그치겠는가?

…… 모름지기 이것(무심)과 저것(평상심)은 다 가짜라고 알아야 한다. 분명하게 진실한 것은 ‘적(?)’이다. 돌(?)! 아지랑이고 허공의 꽃이다.” 37]

37]이상, ?禪要?, ?答直翁居士書其二七?, HTC.122.720b-721a,

問平常心是道, 無心是道. 此平常心無心之語, 成却多少人, 誤?多少人.

…… 不知泥中有刺, 笑裡有刀者, 何?如掉棒打月, 接竹點天.

…… 莫道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 何止一重.

…… 須知道者箇那箇摠是假箇. 的的眞底, ?. ?.. 陽?空華.

 

황벽이나 마조가 틀렸을까? 고봉의 의도는 무엇일까?

 

무심과 평상심이 도인 까닭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흙(殺) 가운데 가시(活)가 있고 웃음(殺) 가운데 칼(活)이 있다고 했듯이, 무심 속에 평상심이 있고 평상심 속에 무심이 있다. 무심은 평상의 모습으로 드러나기에 무심이며, 평상심은 무심을 근거하기에 평상심이다. “무심”과 “평상심”이란 표현은 본래면목의 살의 측면과 활의 측면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무심과 평상심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별이고 망상이다. 바로 그 순간 그런 분별을 잘라내야 한다. 그것이 도이고 선이다. 무심만 도, 평상심만 도라고 한다면, 선이 아니다.

 

도만 그런가? 어리석음도 그렇다. “미혹한 가운데 깨달음이 있고 깨달음도 다시 미혹함에 돌아간다.”38] 한 생각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고, 한 생각 어리석으면 부처가 중생이다.39] 무심과 평상심, 부처와 중생이 따로 떨어졌다고 여긴다면, 그야말로 허공을 둘로 쪼갠 것이고 허공의 꽃이다

 

38] ?禪要?, ?示衆其二四?, HTC.122.719b, 迷中有悟, 悟復還迷.

39]?六祖壇經? 돈황본, T.48.340b.

 

 

2) 왜 부처가 중생이며, 중생이 부처인가?

 

-낯섦[生]과 익숙함[熟]-

 

중생과 부처의 갈림길은 한 생각의 차이인데, 중생은 왜 한 생각을 바꾸지 못할까? 대혜의 말을 빌자면, 익숙한 것에 너무도 쉽게 친숙해 하고, 낯선 것에 지나치게 생소해 하기 때문이다.40]

익숙한 것은 무엇이고 낯선 것은 무엇일까? 익숙한 것은 상식적인 판단 즉 두뇌활동을 동반한 논리 추론[聰明靈利思量計較]이며, 낯선 것은 보리, 열반, 진여, 불성이다.41]

익숙한 것이나 낯선 것이나 고정되지 않았으며, 낯선 것은 저절로 익숙해지며 익숙한 것도 억지로 바꾸지 않아도 생경해진다.42]

중생 그대로 부처인데, 중생 노릇에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중생이며, 익숙하지 않더라도 한 생각 바꾸어 부처로 살면 부처이다. 이것이 조사선에서 말하는 존재의 원리이다.

 

40]?大慧語錄?, ?示呂機宜(舜元)?, T.47.901a, 蓋無始時來, 熟處太熟, 生處太生.

41]?大慧語錄?, ?示徐提刑(敦立)?, T.47.908b, 且那箇是熟處, 聰明靈利思量計較底是. 那箇是生處, 菩提涅槃眞如佛性.

42]?大慧語錄?, ?示徐提刑(敦立)?, T.47.908b, 生處自熟, 熟處自生矣.

 

조사의 일기일경(一機一境) 일어반구(一言半句)는 이 내용에 벗어나지 않는다. 존재의 원리에서 수행의 필요성(왜?)과 방안(어떻게?)을 모색할 수 있다. 학인들은 본래부처라 하는데, 왜 수행하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본다. 학인은 감히 이렇게 질문하길 주저한다. 그런 질문은 이미 참되게 수행하지 않으며, 사량계교에 빠져있음을 실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익숙한 모습을 힘써 노력해서 없애야 하는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가이다. 대혜는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다만 깊은 곳은 얕게 하고 얕은 곳은 깊게 하며, 낯선 것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은 생경하게 하십시오. 문득 세상의 번잡하고 수고로운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힘써 물리치려 하지 말고, 다만 따져 생각하는 그때 얼른 화두를 굴린다면 힘을 한없이 덜고 힘을 한없이 얻을 것입니다."43]

43]?大慧語錄?, ?答趙待制(道夫)?, T.47.924a,

但深處放敎淺, 淺處放敎深, 生處放敎熟, 熟處放敎生.

?覺思量塵勞事時, 不用著力排遣, 只就思量處, 輕輕撥轉話頭, 省無限力, 亦得無限力.

 

 

번뇌망상이든 세속 일에 관한 관심이든 ‘힘써 물리치려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둔 채’, 화두를 든다는 것이다. 그럼 왜 번뇌망상을 힘써 물리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 채 간화해야 하는가?

힘써 버리려 한다면, 또 하나의 인위이고 또 다른 망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번뇌망상은 불성의 작용이고, 그 자체가 존재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44] 중생의 모습이라는 존재의 한 측면을 일단 인정하고, 구현하지 못한 한 측면인 부처를 회복(발현)하기 위해 공부하라는 것이다. 망상을 제거하려 한다거나 세속 일을 다 부정한 후, 간화를 시작하려 한다면 존재의 원리에 어긋나고 만다. 존재의 원리에 위배된 수행은 선 수행이라 할 수 없다. 이처럼 간화의 원리를 알려면 존재의 원리를 알아야 하며, 간화의 원리는 존재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44] ?永嘉證道歌?, T.48.395c,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3) 중생과 부처의 구분을 넘어서

 

-죽으면[殺] 살아난다[活]-

 

조사의 관문을 투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익숙한 틀[熟]을 벗어나 낯설지만 본연의 틀[生]로 돌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문(無門, 1183~1260)은 이렇게 말한다.

 

 

"조사의 관문을 뚫고자하는 사람은 없는가?

…… 무자를 참구하되 이 무자를 밤이나 낮이나 항상 들고 있어야 한다. ‘진짜 없다’는 뜻으로도 이해해서도 안 되고, ‘있다,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를 삼킨 듯이 토하고 토해도 나오지 않는 듯이 하여, 이제까지의 잘못된 앎을 몽땅 없애야 한다[殺].

꾸준히 하여 공부가 익어지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打成一片]

…… 갑자기 화두가 터지면 하늘과 땅을 뒤흔들 길, 마치 관우(關羽) 장수의 큰 칼을 빼앗아 손에 쥐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며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것과 같다[活].

생사의 언덕에서도 대자유를 얻고 중생의 삶 속에서도 삼매를 즐길 것이다[活].” "45]  

 

45] ?無門關?, T.48.293a,

莫有要透關底.

…… 參箇無字, 晝夜提?.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如呑了箇熱鐵丸, 相似吐又吐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 打成一片.

…… 驀然打發, 驚天動地.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岸頭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생숙을 전환하는 또 다른 원리는 살활자재이며, 살활자재의 방안은 간화이다. 대혜도 마찬가지 길을 제시했는데, 그의 생각은 이렇다.

"중생들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분별 의식 때문에 자재하지 못한다. 생사를 벗어나 쾌활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活], 모름지기 한 칼에 두 동강내어서 분별심의 길을 끊어 버려야 한다[殺]."

끊어내서 활발발해 지기 위해 대혜가 제시한 방안도 간화이다. 46]

 

46] ?大慧語錄?, ?答王敎授(大受)?, T.47.934bc,

衆生無始時來, 爲心意識所使, 流浪生死, 不得自在. 果欲出生死作快活漢, 須是一刀兩段,

絶?心意識路頭, 方有少分相應. …… 知是般事, ?在腦後, 且向沒巴鼻處, 沒撈摸處, 沒滋味處, 試做工夫看.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또 다른 예를 보자. 야부(冶父, 1127~1130)가?금강경(金剛經)?의 도입부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에 관해 말했다.

“고인이 말했다. ‘여여’라 말한다면 이미 변했다. 다시 말해 보라. 변해서 어디로 갔는가? 돌! 어지럽게 쫓아다니지 말라. 결국엔 어떻게 해야 하나? 불이라 말하더라도, 입을 태우지도 못했다.” 47]

 

이에 함허(涵虛, 1376~1433)는 더 극명하게 말했다.

“남전(南泉, 748~834)이 강사에게 ‘무슨 경을 강의합니까?’라 물었다. (강사가 대답했다.) ‘열반경을 강의합니다.’ 또 물었다. ‘열반경 중에서 무엇을 제일 중요시합니까?’ 답했다. ‘여여를 제일 중요시합니다.’

남전이 말했다. ‘여여라 말한다면 이미 변해버렸다. 모름지기 이류중행(異類中行)을 향해서 이류중사(異類中事)로 말해야 비로소 옳다.” 48]

 

47]?金剛經五家解?, ?法會因由分 第一?, p. 81,

古人道, 喚作如如, 早是變了也. 且道. 變向甚?處去. ?. 不得亂走. 畢竟作?生. 道火不曾燒?口.

48]?金剛經五家解?, ?法會因由分 說誼?, p. 81,

南泉問講師, 講甚?經. 云講涅槃經. 云經中以何爲極則. 云以如如爲極則.

云喚作如如, 早是變了也. 須向異類中行, 道取異中事始得

 

여여라 하든, 마음이라 하든, 부처라 하든, 한 물건이라 하든, 모두 이름일 뿐이고 사람이 지어낸 상대 개념일 뿐이며, 이미 죽은 말[死句]다. 그래서 조사선에서는 선지식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정답을 제시하려 해서도 안 된다. 길이 있다면 오로지 상대 개념을 벗어난 방식으로 자기가 본 경지를 드러내야 한다. 자신은 이미 상식적 세계에 살고 상식적 표현 방식에 익숙해 있으므로 그 방식대로 답을 찾는다면 머리만 아플 뿐 답을 찾을 수 없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본디 지니고 있는 경지를 익숙한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이, 간화이다. 간화는 살활자재의 길이다.

 

 

4. 간화의 비결: 간절하게[切]

 

간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의심을 일으킬 수 있나? 학인들은 다 이렇게 묻는다. 의심이 없다면 간화가 시작되지 않고, 알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없다면 간화의 의심은 생기지 않는다. 관건은 의심 만들기가 아니라 “격외지를 알고자 함”, 다른 말로 격외의 관문을 돌파하고 선지식의 “질문에 답을 찾으려 함”이다. 만일 선지식이 던진 화두만 염한다면- 문제만 외운다면, 미륵이 하생하더라도 의심이 진정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격외의 관문을 뚫으려 했는데도 의심이 온몸을 엄습하지 않았다고 반문하는 학인들의 물음에 이렇게 반문하겠다. “한 차례 추위가 뼈골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으리오.”49]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때 할 수 있다.50]

49] ?宛陵錄?, T.48.387b, 不是一凶寒徹骨, 爭得梅花鼻香.

50]?大慧語錄?, ?答陳少卿(季任)?, T.47.923a, 若捨得性命, 方肯自下手.

 

 

고봉도 같은 말을 했다.

“이 일을 말한다면, 다만 당사자가 간절한 마음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기만 해도 진짜 의심이 문득 일어날 것이다. 진짜 의심이 일어나는 상황에는 점차에 속하지 않고 바로 그 순간 한꺼번에 망상과 헛된 노력[塵勞]이 그치고 혼침과 산란이 함께 사라지며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끓어질 것이다.”51]

학인들이 진짜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의단을 형성하지 못하는 까닭은 간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본래성불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화두의 힘을 확고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간절해야하고 처절하게 겪어야 진짜 의심이 온 몸을 엄습한다.

51] ?禪要?, ?示衆其二四?, HTC.122.719a,

若論此事, 只要當人, 的有切心. ?有切心, 眞疑便起. 眞疑起時, 不屬漸次, 直下便能塵勞頓息, 昏散屛除, 一念不生, 前後際斷.

 

흔히 간화선의 핵심으로 의심을 꼽는다. 그러나 믿음, 의지, 의심 중 무엇이 가장 긴요하냐고 굳이 묻는다면, 의지[決定志, 大墳志] 즉 “알려는 의지”가 가장 긴요하다고 대답하겠다.52] 천길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고 하자. 그 때 매달린 손가락을 펼 수 있는 절박함이 있어야 다시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선의 도리를 믿을 수 있다.53] 선문에 “화두공부는 간절 절[切]자 한 자면 족하다”는 말이 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 팔십 노파가 전쟁터에 나간 외아들을 생각하듯이, 간절하게 화두를 들어야 의심이 생긴다. 닭이 알을 품을 때 잠시도 둥지를 떠나지 않듯,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간절하다면 끊어지지(間斷) 않는다.

 

52]Buswell도 그렇게 정리했다. Robert E. Buswell,

"The 'Short-cut' Approach of K'an-hua Meditation: The Evolution of a Practical Subitism in Chinese Ch'an Buddhism," in Sudden and Gradual Approaches to Enlightenment in Chinese Thought, edited by Peter N. Gregory.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 p. 354.

53]?大慧年譜?, 37세조, p. 516, 懸崖撒手自肯承當, 絶後再甦欺君不得. 須信有這箇道理.

 

목숨보다도 절박하게 알려는 의지가 없다면 간화는 시작할 수도 없다. 간화를 제대로 하는 비결 아닌 비결은 간절함이다.

 

 

5. 간화, 일상(日常)과 격외 사이

 

조사는 본래면목을 일깨우기 위해 격외의 기연을 보인다. 학인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낮추어 보여준다. 학인이 중생을 고수하기에[熟], 조사는 부처를 중생으로 대했다. 중생으로 전락한 부처는 중생을 떨쳐내겠다는[殺] 간절함을 느껴야 한다. 자신을 중생으로 대하는 조사에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느낄 수밖에 없다. 부처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며, 부처로 살겠다는 의지이다. 그것이 간절한 의지이다.

 

존재는 부처이면서 중생이고, 부처와 중생은 하나이지도 않고 나뉘지도 않았다. 도는 무심이면서 평상심이고, 무심이라 해도 안 되고 평상심이라 해도 안 된다. 부처와 중생, 무심과 평상심, 나와 남의 불이가 중도이다.54] 존재의 원리가 중도이니, 간화의 원리도 중도이며, 궁극의 지향도 중도 체득이다. 익숙함과 낯섦의 전환, 살활자재의 방안이 바로 간화이다. 몸에 밴 기존의 틀[熟]을 벗어나야[殺] 조사의 의도[格外旨]를 알 수 있고 활발발해 질 수 있다[活].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語?動靜] 간화하라는 것도 존재의 모습이 어묵동정이기 때문이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일상의 공부도 이런 의미이다. 망상을 제거하려 한다거나 세속 일을 다 부정한 후 간화를 시작하려 한다면, 존재의 원리에 어긋나고 만다. 간화는 일상에서 틀 밖의 뜻을 알아내는 길이다.

54]?禪要?, ?示衆其一八?, HTC.122.715a, 人我卽生死之根, 生死卽人我之葉.

 

화두는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라고 제시된 것이지, 의심을 만들라고 준 것이 아니다. 억지로 생각해서 의심한다면(做作話頭) 망상이며, 사량계교나 어구인증(穿鑿)도 몽둥이를 휘둘러 달을 때리며 대나무를 가지고 하늘에 점을 찍으려는 것과 같다. 부처가 부처 아니기에 부처이며, 간화가 간화 아닐 때만 간화이다. 화두잡는다는 생각이 없어야 화두를 들 수 있으며, 의심하겠다는 생각이 없어야 진짜 의심이 생긴다.

진짜 의심은 알려는 의지에서 생기고, 알려는 의지는 본래성불과 선지식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 그래서 본래성불을 전제하는 선을 “조사”선이라 부르며, 간화선은 조사선인 것이다.

 

오래 공부한 학인조차도 어떻게 화두를 들어야 하냐고 묻는다. 그들의 답답함을 어찌 모르겠는가? 숨이 막히도록 갑갑해야 간화가 시작되니,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지 말고 그 자리에서 알아내겠다는 각오로 해야 한다. 다급한 학인은 화두의 답을 물어보기도 하는데, 절대로 다른 사람이 말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설사 애절한 마음으로 한자락 그림자를 말해준다 하더라도 남의 집 살림살이일 뿐이다. 화두의 의심이 찾는 답은 답 없는 답이기 때문이다. 진짜 답은 따로 있다.

 

산란과 혼침, 순경과 역경에 개의치 말고 그저 화두를 들어야 한다. 질문만 반복하지 말고 답을 찾아야 한다. 지식을 동원하여 따져 본다면 진짜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 답을 찾기 위해 의심을 내지만, 정답을 만들려는 순간 화두의 의심은 사라지고 만다. 좋은 경계, 나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아야 한다. 화두가 분명하면 경계는 저절로 사라진다. 비결 아닌 비결이라면 불타는 집안에 내 아이가 갇혀있는 듯, 절박한 심정으로 해나가는 것이다. 그래야 지금까지의 삶을 환골탈퇴하고[殺] 활발발해 질 수 있다[活].

 

처음에 언급한 “남산에 구름이 피어오르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는 본분사 그대로를 말했을 것이다. “돌!”이라 한 것도, “구멍 없는 쇠방망이다”55]라 한 것도 이런 의미이다. 본디 온전한 기틀의 큰 작용[全機大用], 죽임과 살림의 자재함[殺活自在]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본래 태평한가. 사람사람 발아래에 청풍이 불며 사람사람 면전에 달이 밝다.” 56]

55]?禪要?, ?示衆其十六?, HTC.122.715a.

56]?金剛經五家解?, ?法會因由分 說誼?, p. 89, ?生是本太平. 人人脚下 淸風拂, 箇箇面前 明月白.

 

 

돌아보면 본래 그 자리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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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hilosophy of K’an?hua

-The Actual State and the Principle-

 

Byun, Hee-Wook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article attempts to clarify the fundamental subject of K’an?hua, namely the actual state and the principle.

Seon masters ask questions beyond the case for their students to acknowledge their own pure nature(s. prabh?svavat?). There are some symptoms such as torpor or agitation, tranquility without huatou, pronunciation of huatou, attention of huatou, falsification of huatou, inquiry of huatou, waiting (for) enlightenment without K’an?hua, in case a student wants to know his/her Seon master's intention. The origin of these features is that students do not focus their mind to find an answer and/or they study without sincerity. When a student focuses his/her mind to find an answer with sincerity, he/she and a great doubt become one spontaneously.

A sentient being is a buddha. It is fundamentally ill if anyone has an idea of practicing in order to become a buddha. The reason why anyone is still a sentient being, even though he/she is already a buddha, is that he/she has the dualistic thought; a sentient being or a buddha, myself or others, being or nothing, etc. He/she can pass the non-dualistic gate, when he/she frees himself/herself from the familiar pattern and return to the unfamiliar but original pattern.

The principle of existence is the middle way, the principle of K’an?hua is the middle way and the purpose of K’an?hua is the realization of the middle way.

 

 

* Key word

K’an?hua, huatou, the middle way, to remove / to recover, the familiar pattern / the unfamiliar pattern, the sincerity to acknow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