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사상 34
菩提達磨의 安心法門에 대한 一考
김진일(묘경) / 동국대학교
목 차
Ⅰ. 들어가는 글
Ⅱ. 達磨와 慧可의 安心法門
1. 석존의 禪定과 安心
2. 苦의 自覺
3. 自覺을 통한 安心의 추구
Ⅲ. 禪佛敎의 安心과 宗敎的 역할
Ⅳ. 菩提達磨의 壁觀安心사상
Ⅴ. 맺음말
투고일자 : 2010.7.9
심사기간 : 2010.7.17~8.16
게재확정 : 2010.8.16
국문 요약
達磨大師가 中國禪宗의 初祖로서 중국에 전수한 것은 大乘禪인 壁觀修行이다. 二入四行을 기록하고 있는 曇林에 의하면, “理入이란 安心이며 安心이란 壁觀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벽관에는 修行과 安心立命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安心立命의 내용은 安心法門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안심법문은 禪宗의 종교적인 색채를 표명하고 있으며 달마대사와 慧可사이에 以心傳心으로 法을 전하게 되어 선종의 傳燈系譜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이 安心法門의 내용을 살펴보면 瞑想과 실천을 통하여 安心立命의 가르침을 전하신 석존의 가르침의 본질이 들어 있다. 佛性의 自覺을 통하여 日常性과 主人公의 삶을 강조하는 祖師禪에서는 더욱 중요한 요소이다.
석존의 가르침은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 문제’는 그 원인을 認識함으로 인하여 해결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며 그 해결된 것이 安心이며 解脫이다. 佛性이나 卽佛의 의미와 함께 궁극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된, 해탈된 상태인 안심의 추구는 매우 중요하다.
보리달마의 壁觀安心은 般若思想을 중심으로 여타 敎學思想을 아우르고 또한 번잡한 불교수행의 체계를 단순화 시켜 부처님의 전하고자 하였던 苦를 자각하고 安心立命하는 삶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리달마의 安心壁觀에는 종교의 본질적인 요소와 중국의 불교교학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그리고 印度의 실천수행법인 禪의 사상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하여 주인공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다양한 길을 제시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상이라 생각한다.
* 주제어
菩提達磨, 安心, 壁觀. 瞑想, 般若思想, 宗敎性.
Ⅰ. 들어가는 글
달마가 중국선종의 初祖인 이유는 석존의 가르침의 본질인 安心立命의 가르침을 중국에 전달한 점이다. 석가모니 이래 보리달마를 비롯한 歷代祖師들의 가르침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본질은 모두가 安心立命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다양한 인연이 교차하는 현실의 삶 속에서는 安心立命의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를 막론하고 큰 의미로 다가 온다. 특히 ?능가사자기?의 저자 정각을 위시하여 초기 선종이 성립될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안심사상은 매우 중요하였다. 日常性과 主人公의 사상을 강조하는 중국의 禪宗에서는 더욱 그렇다.
중국의 禪宗은 인도불교를 포함하여, 불교전반에 흐르고 있는 修行法인 禪과 般若思想을 중심으로 唐 중엽에 성립된 종파이다. 修行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歷史에서 기본적인 수행법인 禪을 중심으로 宗派를 이루었다는 것은 禪宗이외의 여타의 諸宗派는 불교 본연의 수행에서 벗어나 번잡하고 복잡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선종은 安心立命을 기반으로 하여 본질적이면서도 단순한 禪이라는 실천을 중심으로 종파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본질적이고 단순한 사상과 실천에 의하여 수많은 사상과 종파가 선종내에서도 발생하게 된다. 安心壁觀의 예처럼, 단순한 가르침은 단순한 만큼 다양하게 해석하고 변화될 可變性이 크기 때문이다. 즉, 그 단순함과 가변성, 그리고 善巧方便에 의하여 선종은 전 중국불교를 통일하였다.
達磨大師가 中國禪宗의 初祖라 불리는 이유는 ?續高僧傳?의 저자 道宣이 지적한 大乘禪인 壁觀修行을 중국에 전하였기 때문이다. 이 壁觀은 ?二入四行?을 기록하고 있는 曇林에 의하면, “理入이란 安心이며 安心이란 壁觀이다”라고 하였다. 道宣도 “大乘壁觀 功業最高”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壁觀에 대하여 華嚴宗의 宗密은 “外息諸緣 內心無喘”이라 하여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임이 없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景德傳燈錄? 제3권의 제28조 보리달마 장에는,
"그 후 崇山의 少林寺에 머물렀는데, 벽을 대면하여 앉아서는 종일토록 침묵을 지키니, 아무도 그 연유를 아는 이가 없어서 그를 일러 벽을 보는 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壁觀의 의미가 심하게 변화되어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面壁의 의미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달마가 전하고자 했던 壁觀의 의미와 도선과 종밀 등이 평가한 내용 역시 面壁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 논자가 보기에 벽관에는 깨달음을 중요시 하는 禪宗의 수행적 특징과 함께 종교적인 요소인 안심의 사상이 이 벽관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벽관의 여러 의미 중에서 안심의 의미를 중심으로 그 사상적 배경과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유명한 달마와 혜가 사이에 법을 전하게 되는 안심법문에 그 중점을 두었다.
Ⅱ. 達磨와 慧可의 안심법문
菩提達磨가 중국선종의 初祖인 이유는 大乘壁觀이라는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大乘佛敎의 실천법을 安心이라는 구체적인 중국적 표현으로 드러내어 제자인 二祖 慧可에게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安心法門이라 한다.
?조당집? 제2권 ?보리달마전?에는 慧可가 달마를 찾아가서 安心法門을 청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혜가가 말했다.
“화상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조사가 대답했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리라.”
혜가가 말했다.
“마음을 찾아도 끝내 찾을 수 없습니다.”
조사가 말했다.
“찾아지면 어찌 그것이 너의 마음이겠느냐?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느니라.”
달마 조사가 혜가에게 말했다.
“그대를 위해 마음을 이미 편안하게 해주었는데, 그대는 이제 보이는가?”
혜가가 말씀 끝에 크게 깨닫고 화상에게 말했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적하고, 오늘에야 보리가 멀리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보살은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薩般若의 바다에 이르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릅니다.” 1]
1] 월운 역주, ?조당집?1. 동국역경원, 2008, pp.148~149.
?달마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고 있다.
또 물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대답하기를, “자네 마음을 가져 오려무나, 자네를 안정시켜 주지!”
또 말했다. “부디 저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십시오.”
대답했다. “가령 재단사에게 재봉할 천의 재단을 부탁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재단사는 자네의 비단 천을 손에 들고서야 비로소 가위질을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비단 천을 보지도 못했는데, 그대를 위하여 허공을 재단할 수가 어찌 가능한가?
자네가 마음을 나한테 건네주지 못하는 이상, 나는 도대체 자네에게 어떤 마음을 안정시켜 준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허공을 안정시킬 수는 없다구!” 2]
2] 양기봉 옮김, ?달마어록?, 김영사, 1993, p.221.
그러나 ?달마어록?에서 인용한 위 내용은, 이 책의 순서에 의하면 ?가 법사의 가르침?이란 부분에 기록하고 있다. 야나기다 세이잔은 ?달마?에서 이 安心法門 내용의 성립은 ‘당대 중기의 ?寶林傳? 이후이다.’3]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달마가 이 나라 불교에 기여한 가장 특색 있는 공헌이 이 문답에 함축되어 있다.’4]고도 하였다. 그리고 ‘安心의 법문은 達磨이래 초기선종의 기본교설로서 전승’5]되고 있다고 하였듯이 안심법문의 성립은 본격적인 선종의 興起와 때를 같이하고 있어서 선종과 안심법문의 의미는 큰 관계성이 있다고 하겠다.
3] 야나기다 세이잔 著, ?달마?, 김성환 옮김, 민족사, 1991, p.53.
4]上同.
5]정성본 著, ?中國禪宗의 成立史硏究?, 민족사, 1991, p.218.
달마와 혜가와의 안심법문에는 우선, 근원적인 마음인 佛性과 空에 대한 관계성, 둘째로 善巧方便의 문제, 셋째 자신의 그리고 지금의 문제에 대하여, 넷째 正法眼藏6]의 계승과 안심의 현실적인 실천 등의 다양하고도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이 내용들의 역사적인 시점과 우선순위 등은 여기에서 언급을 생략한다. 단지 그 만큼 초기선종이 성립할 당시에 중국인들은 禪의 의미와 禪佛敎의 종교적 역할 등 인생의 삶에 있어서 단순하고 본질적인 安心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우선, 근원적인 마음인 佛性과 空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중생들이 버려야 할 이원화되고 대립된 구도를 벗어나게 함이다.
“화상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요구 하고 있는 이 구절 속에는 불안과 편안, 고뇌와 즐거움 등등의 이분법적인 구분과, ‘나’라는 주체와 ‘불안’이라는 객체를 설정해 놓고 있다.
그것은 “안심이라는 것은 바로 諸緣을 頓止하고 妄想을 永息하며 身心을 放捨하는 것이다.”7]라고 하였듯이 大乘의 본질인 空의 의미를 자각하게 하는 구절이다.
7]정성본 著, 전게서, p.219.
둘째는 대승불교의 특징인 善巧方便의 문제로, 달마대사가 가리키고 있는 문제해결의 방법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게 한다. 달마대사의 실천수행법이 壁觀이듯이 觀을 통하여 사실을 직시하게 하고 있다. 모든 문제는 자기 마음의 문제이다. 문제의 사실을 직시할 수 있을 때 그 문제는 풀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四聖諦에서 苦諦를 올바르게 관찰해야 하는 이유와 같다. 平常心是道 , 隨處作主 立處皆眞의 뜻과도 연결이 되어 祖師禪의 특징이 된다. “재단사는 자네의 비단 천을 손에 들고서야 비로소 가위질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듯이, 달마대사는 현실도피가 아닌,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 편안히 살아 숨 쉬는 것이라 했다.8] 그래서 달마대사는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리라.”고 한 것이다.
8]觀心 著, ?유식삼십송?, 불교시대사, 2005, p.133.
셋째는 ‘자신의 그리고 지금의 문제에 대하여’이다. 혜가 스님의 ‘마음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은 최선을 다하여 백방으로 노력함을 전재로 한다. 斷臂求法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본질적인 물음에 다가서게 되면,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될 때, 거기에 ‘찾겠다.’는 추구는 사라지는 것이다. 찾는 자인 ‘자기’도 마음이요, 찾는 대상인 ‘불안’도 마음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중심으로 모든 인연과 인연의 결합에 의하여 ‘지금’이 존재한다. 조금의 변화도 본질을 변화시킨다. ‘내 눈’으로 ‘내 눈’을 찾을 수 없듯이 마음으로 마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그 마음을 찾을 수는 없다. 그 마음은 자신과 지금의 인연에 의하여 나타난 것일 뿐이다.
넷째는 ‘正法眼藏과 안심의 현실적인 실천’의 의미를 살펴보면 보리달마와 혜가사이에 안심을 통하여 以心傳心하고 있다. 석존의 拈華微笑의 가르침을 마하가섭이 계승하여 法을 계승하고 있듯이, 혜가와 달마사이에도 안심의 가르침을 통하여 師資相承하고 있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계승은 중국선종의 큰 특징이다. 그리고 ‘오늘에야 보리가 멀리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이라는 표현은 平常心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어서 후대에 祖師禪이 발전할 수 있는 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이 安心法門의 가르침에는 壁觀의 실천과 緣起法의 자각, 그리고 般若空의 智慧와 함께 以心傳心을 통하여 正法眼藏이 師資相承되어 중국선종의 傳燈系譜가 형성될 수 있는 근거 등 중국선종의 제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1. 석존의 禪定과 安心
선불교는 본질적으로 인도의 불교의 실천사상을 중국화 시킨 종파이기도 하지만, 釋尊의 실천적인 수행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禪은 불교의 실천적인 입장으로 항상 坐禪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좌선의 자세와 외형적인 방법은 고대 인도의 요가와 고금을 통해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그러한 자세를 통하여 그 思考와 方法에 있어서 각각의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크게 변화가 있었다.
석존의 가르침은 깊은 명상과 정신집중의 실천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불교의 명상은 오래된 바라문교 등의 제사와는 다른 석존의 종교적 특성을 이루는 것이었다. 후에 당신의 주위에 모인 제자들에게 부과한 수행도 완전히 같은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 ?숫타니파타? 등 초기경전을 통하여 살펴보아도 석존이 제자들에게 바란 것은 自制와 瞑想에 의한 내면적인 평안의 생활이었다.
마음의 평안을 경전의 한문 번역자는 定이라고 했고 三昧라고 音寫한 정신통일의 최고의 상태이다. 그것은 동시에 ‘나는 이처럼 평안하다’라고도 의식하지 않는 상태로서, 정신을 잘 가다듬어 자기의 放逸함을 억제하고 오로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었다.9]
9]柳田聖山 著, ?선의 사상과 역사?, 추만호?안영길 옮김, 민족사, 1992. p.25.
정신을 안정하는 일은 동시에 안정한 마음을 즐기는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마음의 안정을 탐하는 것이 아니고, 純淨이며 無我인 열반의 즐거움에 透徹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평안은 평안이라는 의식조차 남기지 않는 기쁨과 즐거움의 가장 충실한 세계이다.10]
10] 전게서 p.28.
불교는 깨달음과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선정의 실천을 행한다. 불교는 종래의 요가의 수행법을 채용하여서는 止(?amatha)와 觀(vip??yan?)으로 내용을 수정하였다.
?대승기신론?에 止觀雙運이라는 말이 있다. 두 가지 실천을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작용시킨다는 의미이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결여된다면 불교의 선정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止는 三昧로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평정한 상태이자 情念이 없어진 조용한 선정의 수행을 말하고, 觀은 통일된 마음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緣起의 법을 관찰하는 수행방법이다.
止는 靜的인 마음상태에 있는 것으로 禪定을 나타낸 말이며, 觀은 그 마음의 動的인 상태가 되는 것으로서 智慧를 나태는 말이다. ‘선정과 지혜’를 말한다. 석존이 종래의 요가 선정설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止의 禪定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止의 선정에서 한 걸음 나아가 緣起의 법을 관찰하는 선정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결국 영원히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시고 止觀雙運의 선정설을 확립하였다.
止觀의 의미를 壁觀에 단순하게 대입하게 되면, 壁은 止의 개념이 된다. 종밀의 “外息諸緣 內心無喘”이 된다. 면벽의 실천이 아니다. 그리고 觀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 다는 것은 편안이라는 자각조차도 없는 내면의 편안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을 터득하고 존재에 대한 깊은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이 선정의 뜻은 욕망의 세계를 버리지 않는 大悲의 실천이며, 중생을 버리지 않고 苦와 不淨의 欲界에 일부러 태어나서 일체중생의 해방에 목숨을 바치는 참된 禪定波羅密의 의미가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波羅密이란 일체의 차별을 뛰어넘는 가장 깊은 실천의 것이요, 空의 실천이다. 釋尊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선정에 드셨다.
2. 苦의 自覺
‘釋尊은 삶은 禪定으로 시작하여 禪定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이 선정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苦의 自覺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석존의 가르침은 현실의 인간에 얽힌 苦를 벗어나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인간이 항상 직면하는 이 苦를 滅하는 것이야 말로 불교의 목적이다. 衆生으로 하여금 無常의 本質을 觀하여 安心과 解脫을 體得하게 하는 것이다. 離苦得樂이다. 無明에 의하여 쌓여있는 현재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把握한 후 그 문제들을 打破하여 安心과 解脫을 얻은 安心立命의 삶을 살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석존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 핵심인 緣起 ? 四聖諦 등등은 禪定의 直觀力에 의하여 드러났다. 緣起의 作用에 依하는 모든 存在들은 刹那에 生滅한다. 이러한 의미를 無常이라 하고 無常은 衆生들의 삶에서는 喜怒哀樂으로 보여 진다. 雜阿含經 9에는 “色無常, 無常卽苦”11]라 하였다.
11] ?신수대장경(이하 T)? 2, p.2上 “色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 非我者亦非我所, 如是觀者. 名眞實正觀.”
물질을 의미하는 色은 因緣에 의하여 四大로 결합된 물질이므로 영원할 수가 없다. 영원할 수 없는 無常이므로 經에서는 “苦”라고 설하고 있다. ?華嚴經? ?十地品?에도 生死輪廻의 12因緣을 세 가지 고통(三苦)12]인 苦苦 ? 行苦 ? 壞苦로 나누고 있으며, ?俱舍論?에는 “苦由三苦合”13]이라 설하고 있다. 이 뜻은 有漏의 行인 세 가지 고통이 합하여져서 苦諦가 되었다14]는 의미이다.
12]T9. ?華嚴經?60卷本:
“又十二因緣說名三苦,
無明行識名色六入名爲行苦,
觸受名爲苦苦,
愛取有生老死憂悲苦惱名爲壞苦.”
T10. 80卷本:
“復次十二有支, 名爲三苦, 此中無明行乃至六處是行苦, 觸受是苦苦, 餘是壞苦, 無明滅行滅者, 是三苦斷.”
13]T29, ?俱舍論?, p.114. “고통은 세 가지 고통의 결합이다.”
14]전게서, T29, p.114.
“有三苦性. 一苦苦性, 二行苦性, 三壞苦性. 諸有漏行如其所應與此三種苦性合故. 皆是苦諦.”
四苦八苦15]에서 알 수 있듯, 人生은 괴로움, 곧 苦이다. 妄想 ? 妄念 ? 惑등에 의한 煩惱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할 뿐 아니라 정신의 작용에까지 괴로움을 준다. 스스로의 생각대로 되는 것도 없으니 모든 것이 괴로움이다. 12緣起의 老死의 의미도, “老死를 단지 苦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老死란 근심해야 하는 것, 슬퍼해야 하는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觀하여 이것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고 있다.
15]生 ? 老 ? 病 ? 死와 愛別離苦 ? 怨憎會苦 ? 求不得苦 ? 五陰盛苦.
석존은 衆生의 삶은 心身이 괴로워 不安한 상태인 苦의 본질을 살펴보게 하였다. 苦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苦의 本質을 파악함으로 인하여 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苦의 해결은 ?雜阿含經? 권1에는 “當觀色無常, 如是觀者則爲正觀. …喜貪盡者, 說心解脫.”16] 이라하였으며, 80권 ?華嚴經?에는 “無我를 바로 보게 함”에 있다하였다.
12因緣의 시작인 無明과 無明의 주체인 “나”라고 하는 “我가 존재함”17]에서 비롯된 苦는 “我”라는 것이 “無我”임을 自覺하는 修行에 의하여 解脫을 얻게 된다.
16]T2, p.1上
“當觀色無常, 如是觀者則爲正觀. 正觀者則生厭離, 厭離者喜貪盡, 喜貪盡者, 說心解脫.”
17] T17, ?圓覺經?, p.917上
“一切衆生從無始來, 由妄想我及愛我者, 曾不自知念念生滅. 故起憎愛耽著五欲.”
?般若心經?에는 “照見五蘊皆空”이라 하였으며 ?俱舍論4에서는 “苦諦以有身見爲因”18]라 하였다. 無明이라는 어두운 곳에 횃불을 비추어 사물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라는 뜻이다. 無明 속에서는 보는 작용인 “見과 觀”등이 작용할 수 없다. 般若의 智慧가 드러나지 않으면 사물의 참다운 가치를 확인할 수 없는 법이다. 깨어있는 수행과 관찰에 의하여 苦의 본질이 空임을 터득하게 되면 두려움 없는 安心을 얻게 된다. 그것이 安心立命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安心”의 의미는 藉敎悟宗이다. ‘經典의 가르침을 터득하여 마음의 편안함을 얻어 흔들리지 않는 경지’일 것이며, 다음 단계로는 觀心과 연결시켜 ‘마음을 한곳에 안주시켜서 움직이지 않는 것’19]이며, 궁극적으로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큰 깨달음을 얻거나, 마음을 꿰뚫어 보아서 절대의 경지에 이르는 것20]이다.
18]T29, ?俱舍論?, p.30.
19]菩提達磨의 ?二入四行論?에는 ‘凝住壁觀’이라는 표현이 있다.
20]?二入四行論?에서의 ‘稱法行’의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圓覺經? ?威德自在?第七에서는 奢摩他 ? 禪那의 修行法21]을 설하고 있다.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하여 寂靜한 輕安을 얻는 奢摩他’修行과 ‘幻化와 고요한 모습들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寂滅의 輕安을 얻는 禪那’의 修行법이 그것이다.
?圓覺經?에서는 “安”의 의미 중에서도 ‘몸과 마음이 유연하여 가볍고 편안함’의 의미가 강한 輕安을 奢摩他修行을 통하여 寂靜輕安을 얻고 禪那의 修行을 통하여 寂滅輕安을 얻게 하고 있다.
?俱舍論?에는 수행자는 加行位 중에서 최초로 苦를 觀한다고 한다.22] 苦聖諦에는 네 가지 모습이 있다. 非常 ? 苦 ? 空 ? 非我이다.23] 깨어있는 의식으로 본질을 자각하게 되면 수행은 깊어지는 것이다.
21]威德自在章第七
“便能內發寂靜輕安 由寂靜故十方世界諸如來心於中顯現如鏡中像 此方便者名奢摩他.”
“便能內發寂滅輕安 妙覺隨順寂滅境界自他身心所不能及衆生壽 皆爲浮想此方便者名爲禪那
22] T29, ?俱舍論?. p.114. “修行者加行位中最初觀苦. 苦卽苦諦.”
23] 상동. p.137. “謂苦聖諦有四相. 一非常二苦三空四非我.”
"?유마경?의 샤리푸트라에 관한 구절에서
“道法을 버리지 않고서도 범부의 일을 나타내는 것 이것을 宴坐라고 한다.
마음이 안에 머물지도 않고, 밖에 머물지도 않으며, 또 그 중간에 머무르지도 않는 것, 이것을 宴坐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명상은 이미 단순한 명상이 아니라, 철저히 마음의 본연의 모습이 문제가 되는 것이며, 붇다의 명상이야 말로 오히려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24]
24] 柳田聖山 著, ?선의 사상과 역사?, 추만호?안영길 옮김, 민족사, 1992, p.61.
?유마경?의 不二法門이나 대승경전의 空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가 보리’이며 ‘마음의 본연의 모습’인 生死가 그대로 涅槃이라고 하고 있다. ?금강경?의 실천적인 표현 중에서 선종에 큰 영향을 끼친 내용은 ‘응당히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라는 부분일 것이다. 육조혜능스님이 깨달음을 얻게 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는 이러한 교학적인 내용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전게되는가.’라는 질문이 생겼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의 답이 혜가와의 대담인 안심법문이다. 바로 ‘불안한 그 마음이 그대로 안심의 마음’인 것이다. 현실긍정의 입장에서 일상생활의 종교로 펼쳐 나갈 수 있는 사상인 것이다.
般若心經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25]
25]玄裝(602~664)
本 “故心無?碍 無?碍 故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T8. p.848.c)
國大德三藏法師沙門法成譯(燉煌石室本)
“心無障? 無有恐怖 超過顚倒 究竟涅槃”(T8. p.850.b)
라고 설하고 있다.
걸림도 없고 머무름도 없는 머무름을 설명하고 있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는 眞空의 묘한 이치를 깨달아 태허의 청정함이 본래 그러함을 확연히 사무치게 되면 부처와 일체 중생이 평등하게 성품이 空하여 모든 수행에 실로 두 가지가 없게 되니 모든 장애를 뛰어 넘은 걸림이 없는 경지인 것이다.”26]
心經의 첫 구절처럼 “度一切苦厄”의 전제 조건은 “照見五蘊皆空”을 터득하는 것이다.
空을 터득하게 하는 이유는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게”하여 주인공의 삶인 대자유를 누리게 하는데 그 의도가 있다. 大顚和尙의 말처럼 “모든 법의 참모습을 통달하고 나면 …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서로 장애됨이 없어 동쪽으로 가도 다함이 없고 서쪽으로 가도 끝이 없어서 종횡으로 자재하니 허깨비 같은 경계가 능히 걸림이 없는 것”27]이다.
“성품이 공한 줄 깨달으면 동서를 가리지 않고 남북을 나누지 않으며 밝고 어둠의 구애를 받지 않고 만법으로 더불어 벗하지 않아서 오고 감에 같이하는 짝이 없으니 부처님의 눈으로도 엿보지 못하며 언제나 홀로 가고 홀로 걷지만 깨달은 사람은 열반의 길에서 함께 노닐게 되리라”28]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마음이란 慧와 함께하는 마음을 의미하며, 걸림은 惑의 障碍와 智에 의한 障碍에 의하여 발생이 된다.’ 29]
26] 玄鋒 옮김, ?大顚和尙注心經 禪에서 본 반야심경?, 도서출판 송광사, 1998, p.188.
27]전게서, p.193.
28]전게서, p.197.
29]圓測 著, ?반야심경찬?, 박인성 옮김, 주민출판사, 2005, pp.136~137.
“心言卽顯與慧俱心 … ?碍 卽是惑智二障”
3. 自覺을 통한 安心의 추구
불교의 본질적인 특징은 無明에 쌓여있는 현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악, 打破하여 般若의 삶을 살게 하는 점이다. 불안한 삶을 安心의 삶으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入道安心要方便法門?을 설한 四祖 道信스님은 ?楞伽師資記? ?道信章?에서
"“단정히 앉아서 실상을 살펴보면, … 三毒心 攀緣心 覺觀心 등을 제거하고,
… 의식에 모습이 없으며 부처는 형상이 없다는 이 사실을 자각한다면 곧 安心을 이룰 것이다.
걸림이 없으며 모양이 없고, 평등하여 둘이 아닌 것이다.” " 30]
30] “端坐念實相... 倂制三毒心 攀緣心 覺觀心
... 識無形 佛無相貌 若也知此道理 卽是安心.
.. 則泯然無相 平等不二”
유전성산 著, ?초기 선종사Ⅰ?, 楊氣峰 譯, 김영사 刊, p.46.
라 하였다.
중생들의 삶은 無明의 삶이라 할 것이다. 단정히 앉아서 實相을 살펴보면 三毒心 攀緣心 覺觀心등에 휩싸인 중생들은 中道의 본질을 自覺하지 못한 채 日常을 여러 가지 속박 속에서 연속되는 不安들의 조합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不安은 三毒心 등등에 의한 우리 내면에 축적된 갖가지 경험들에 대한 우리 사고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유식삼십송? 풀이에, “不安이란 安樂하지 않다는 것이며, 안락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하면 우리를 얽어매고 속박한다는 것이다.”31]라고 하고 있다
31] 觀心 著, ?유식삼십송?, 불교시대사, 2005, p.129.
우리 사고는 내면에 축적된 경험의 總量과 한계, 종류에 따라서 틀이 지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부자유, 속박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에 의한 인식적인 면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내면에 내재하는 갖가지 경험의 총체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마음과 몸이 부자유한 것이 속박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적 속박과 존재적 속박에 의하여 종횡으로 얽혀서 生死大海를 끊임없이 표류하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苦諦32]라 정의하고 있다.
32] T29. ?俱舍論? ?分別賢聖品?6-1. p.114
“諸有漏行皆是苦諦” ; T9. ?華嚴經?, p.420 “如娑婆世界所稱苦諦”
반면에 安心의 安33]은 輕安으로서, 心身이 유연하고 가벼운 것이다. 또 가볍고 편안하여 참을 수 있으며, 안도, 적응성, 일을 하는데 있어서의 마음의 교묘함이다. 安心의 의미에 대하여 사전에는 “佛法에 의해 마음의 안정을 얻어 움직임이 없는 경지 또는 마음을 한 곳에 안주시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觀心과 같은 의미이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34]이라 풀이하고 있다.
33]梵語는 “prasrabdhi”이다. 안정, 安立, 안온한 것 등의 의미가 있다.
34] ?佛敎大辭典?下, 弘法院 刊, p.1663.
우리의 마음은 사고 작용이고 사고는 기억의 반응이며, 기억의 반응은 다름 아닌 내면 경험의 표출이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바로 내면 경험의 표출이다.35] 선정이나 명상을 실천함으로써 몸과 마음이 경쾌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민감해지는데 이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중요한 힘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구속하는 내면의 경험의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번뇌가 없는 자유로운 상태를 얻기 때문이다.36]
35]觀心 著, ?유식삼십송?, 불교시대사, 2005, p.130.
36]전게서, p.128.
因緣과 存在性으로부터 苦의 本質을 분명히 자각하여 불안이 해소된 삶이 곧 解脫이며 般若 ? 空의 삶이라 할 것이다. 般若 ? 空을 터득하여 自由와 和平의 조화 속에서 지금을 主人公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이 安心立命의 의미이다. 馬祖(709-788)의 용어를 사용하면 平常心是道37]가 되는 것이다.
37] T51. ?景德傳燈錄?28.
“若欲直會其道平常心是道. 謂平常心無造作無是非無取捨無斷常無凡無聖.”
불교는 緣起의 中道的 실천이나 四聖諦의 가르침 등 본래부터 禪宗에서 중요시 여기는 禪定에 의한 直觀이 중요한 점임을 가르치고 있다. 因果의 법칙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正定이 필요하고 正定에 의하여 正見하여 立命하게 한다. 正見은 현재의 문제를 直觀的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현실을 的確히 인식할 때 현재 발생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禪宗이라 불리는 中國의 禪佛敎는 이러한 불교의 禪的 諸要所들을 方便으로 받아들여 正見을 터득하게 하여 安心立命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佛敎이다. 禪佛敎는 苦와 無明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의거한 解脫의 세계인 安心立命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安心의 의미에는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선불교의 실천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그리고 대승의 空사상에 근거한 安心의 사상은 四祖道信의 守一不移,38] 弘忍의 守心,39] 祖師禪의 平常心是道의 思想으로 발전하였다. 安心思想은 이렇듯 師資相承과 傳燈에 있어 중요한 측면으로 작용하고 있다.
38]?楞伽師資記? ?道信章?‘守一不移者 以此空淨眼注意看一物....專精常不動’
39]?修心要論?(?最上乘論?) T48, p.377下. ‘此守心者 乃是涅槃之根本入道之要門’
?楞伽師資記?의 저자 淨覺이나, ?楞伽師資記?에서 禪宗初祖로 기록되고 있는 求那跋陀羅三藏 등은 모두가 이 종교적인 요소인 ‘安心’에 중점을 두고 기록한 것이며, 기타 자료에서 初祖로 모셔지고 있는 達磨와 第二祖 慧可의 관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질은 安心의 思想을 중국에 뿌리내린 것이다.
달마와 혜가사이에 이 安心의 계승은 禪思想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함과 아울러 禪宗에 있어서 師資相承의 전통을 만들어 初期 中國禪宗의 발전을 牽引하게되는 중요한 고리로서 역할을 한다. 그 시발점이자 고리가 楞伽宗의 淨覺이 편찬한 ?楞伽師資記?이다. 이 자료의 가치는 初祖 求那跋陀羅, 第2祖 菩提達磨로 시작으로 하는 傳燈系譜이다. 大乘禪과 安心의 의미를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었던 淨覺은 ?楞伽師資記?에서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禪宗의 初祖를 菩提達磨가 아닌 求那跋陀羅三藏으로 기록하고 있다. 菩提達磨는 第2祖로 기록되고 있다. 四種의 安心思想을 설하고 있으며 譯經僧으로 유명한 求那跋陀羅三藏을 自派의 初祖로 設定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고민을 선사하고 있지만, 이 논문의 주제로 한정해서 보면 그만큼 초기 선종의 發生에 있어서 이 安心思想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Ⅲ. 禪佛敎의 安心과 宗敎的 역할
禪 修行을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神을 상정하여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차이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불교 내적으로도 大師가 到來하였을 당시의 중국적인 풍토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야나기다 세이잔은 그의 책 ?달마어록?에서 ‘3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에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초기에서의 불교학의 중요한 작업은, 인도에서 건너온 소승 ? 대승의 경전과 논서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과 아울러, 번역된 경전을 연구 해석하여 중국적 이해에 결부시키는 일이었으며, 문헌으로는 훈고 주석의 책이 태반이었다.’40]고 서술하고 있다.
40]양기봉 옮김, ?달마어록?, 김영사, 1993, p.28.
修行의 풍토가 소멸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天台 華嚴 등등의 제 종파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禪修行을 중심으로 하는 禪宗의 시각으로 볼 때는 실천적인 수행이 없는 것이다. 敎學의 특징이 理性的이고 理論的이다고 생각할 적에는 더욱 그렇다. 神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화적인 종교에서는 '수행보다는 신앙의 낱낱 조목을 얼마나 이해하고 믿느냐가 더 중요하다' 41]라고 하듯이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체계도 이와 비슷하다. 불교의 특징은 상대적으로 직관적이며 체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敎學佛敎와 禪佛敎는 추구하는 길이 다르다. 安心思想은 禪宗 나름의 종교적인 논리체계를 형성하려고 한 것이다. 안심은 宗敎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의미가 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 선불교의 입장에서도 안심의 의미를 달마와 혜가와의 대화를 통하여 부각시킨 점은 기존의 교학불교에 대하여 비교우위에 서고자 하는 기본적이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41]기시모토 히데오(岸本英夫) 著, ?종교학?, 박인재 옮김, 김영사 1996, p.94.
宗敎 一般에 대하여 ‘종교가 어떻다’라는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다. 時間과 空間에 걸쳐서 서로 다른 사회, 다른 문화 전통 속에서 宗敎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禪佛敎와 여타의 敎學佛敎의 例에서도 똑같이 종교라는 말을 쓰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성격이 동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종교학을 해석하고 있는 기시모토 히데오(岸本英夫)는 ?종교학?이라는 책에서 “종교는 ‘인간 문제’라는 주어진 과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데에 그 특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42]라 하였다.
42]상동, ?종교학?, p.48.
平常心是道로 代辯되는 禪佛敎는 日常性을 重視하는 가르침이며, 佛敎의 諸樣相에서도 現實 肯定的이고 實踐的인 面이 특히 강한 實踐佛敎이다. 실천을 강조하는 禪佛敎의 특징 속에 人生의 제반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宗敎的인 要素가 포함되어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이는 中國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풍토와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에 그 뿌리를 내리려 하였던 禪佛敎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불교 內的인 측면에서도 三論宗, 天台宗 등등의 敎學佛敎의 부침 속에 楞伽宗에서 출발하여 祖師禪 등으로 발전하게 되는 中國禪宗의 立場은 宗敎의 普遍的인 요소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였을 것이다.
Ⅳ. 菩提達磨의 壁觀安心사상
道宣은 ?續高僧傳?에서 達磨의 禪法은 虛宗이라 하고 있다. 虛宗이란 반야사상이란 뜻이며, 大乘의 반야사상에 근거를 한 修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구마라집 이후에 중국에서 전개된 반야사상이 녹아있는 실천법이다.
보리달마의 허종은 二入四行으로 드러난다. 二入四行의 二入은 理入과 行入을 뜻한다.
‘가르침에 근거하여 근본을 터득한다.’는 뜻의 藉敎悟宗인 理入은 부처님이 설한 經典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불교의 大意(宗)를 깨닫는 것이다. 보리달마는 진리를 자각하는 구체적인 실천법으로 壁觀이라는 대승선법을 주장하였다. 1900년도 초에 돈황에서 발견된 ?二入四行論? 또는 ?달마론?이라 불리는 ?달마어록?에서 기록자이며 달마의 제자라고 생각되는 曇林은, 理入은 安心이며 안심이란 壁觀이라 했다.
벽관은 모든 번뇌와 거짓된 망상이 들어갈 수 없는 내면적인 마음의 긴장과 安定이다. 즉 마음이 장벽과 같아서 自心을 관찰하는 것을 알며,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心不起) 본래의 상태인 것이다.
거기에는 眞과 妄, 聖과 俗등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과 분별이 탈락되어, 純一無雜한 본래의 마음인 안심의 세계에 凝住하는 것을 말한다. 空을 터득하여 安心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行入은 허종의 구체적인 실천이며 壁觀이다. 壁觀을 통하여 달마는 安心을 터득하였으며, 터득한 안심을 통하여 師資相承하였다. 그러므로 달마와 혜가와의 “安心法門”은 大乘壁觀의 실천이며 이전의 중국 반야사상과 교학의 응축물을 실천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전승한 것이다.
?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에 의하면, ‘北齊의 文宣帝의 天保年間(550-559)은 실로 講學佛敎의 전성기였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질적인 실천불교가 경시되고, 魔說로서 비난된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43]고 서술하고 있다. 보리달마의 壁觀安心이 혜가에게 전해지기 이전에는 이러한 大乘의 실천적인 사상이 구체적으로 전승되고 있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중국인 제자 혜가를 만나 구체적인 표현인 安心法門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安心의 사상은 禪佛敎가 중국의 토양에서 종교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내용이며, 동시에 석가여래의 본질적인 면을 계승하고 있는 대승불교의 본질이 중국에 전달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43]정성본 著, ?中國禪宗의 成立史硏究?, 민족사, 1991, p.88.
?무문관? 제41칙 ?달마와 혜가의 안심문답?에 대한 해설에서 “安心의 安은 安置하는 것이며 있어야 할 그곳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달마는 혜가가 찾을 수 없는 불안한 마음 그 자체를 지금 여기에서 혜가의 눈앞에 안치해 두도록 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혜가를 안심시킨 법문이다. 달마의 이와 같은 교화 수단은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깨닫게 하는 直指人心의 교화 수단이다. 임제가 ‘사람을 깨닫게 하는 뛰어난 교화수단(出入底路)’이라고 말한 것처럼, 달마는 이러한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교화 방법을 중국불교에 최초로 펼친 선승이다.” 44]
44] 정성본 역주, ?무문관?, 한국선문화연구원, 2004, pp.294~295.
?달마?에서 야나기다 세이잔은 “(正法眼藏을 제일 먼저 사용한) ?보림전?의 작자는 달마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安心의 근본이 홍인의 修心이 되고 이어서 남북양종에 의해서 증폭된 후에 마조의 정법안장으로 발전하는 코스를 그들에 앞서 분명하게 하기 때문에’ 45]라고 하고 있다. 禪佛敎의 發展이라는 측면에서는 안심을 통한 실천이라는 단순함에 그 가치가 있다. 중국선종은 이 안심사상을 어떠한 방법과 관점에서 계승하였느냐에 따라 牛頭宗을 비롯하여 후대에 五家七宗 등의 다양한 系派로 발전되어 중국불교를 통일하는 힘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45]야나기다 세이잔 著, ?달마?, 김성환 옮김, 민족사, 1991, p.57.
Ⅴ. 맺음말
달마의 安心壁觀을 기반으로 하여 달마와 혜가와의 安心法門을 살펴보았다. 이 안심법문에는 석존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과 명상 그리고 대승경전의 여러 가지 가르침이 포함?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보리달마가 중국에 도착하여 파악한 문제의식을 혜가와의 안심법문을 통하여 해결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석존의 가르침은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 문제’는 그 원인을 認識함으로 인하여 해결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며, 그 해결된 것이 安心이며, 解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 또는 해탈 등에 이르기 위한 ‘깨어있음’, ‘覺’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상태가 될 수 있는 조건은 우리 모두에게 佛性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佛性이나 卽佛의 의미는 궁극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된, 해탈된 상태를 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곧 해탈의 과제는 不安心을 해결하기 위하여 해탈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석존이 깨달음을 얻게 된 방법인 ‘三昧 ? 定’의 의미에는 본질적으로 空의 체득을 통한 불교적 의미의 安心立命의 뜻이 들어있다. 달마와 혜가와의 安心法問은 단순한 심리적 치료로서의 종교적 색채를 띄우는 것뿐만 아니라 수행의 실천인 坐禪의 본질적인 의미도 그 속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安心立命이란 安心에 대한 확신을 근거로 立命인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는 삶이다. 根本佛敎의 觀點에서 보면 修行에 철저한 것이요, 大乘佛敎의 見地에서는 菩薩의 實踐이다. 그러므로 ‘般若空’과 ‘三昧 ? 定’그리고 ‘安心’은 사용되는 장소와 용법이 다를 뿐이지 禪佛敎에서의 실질적인 체험의 과정에서는 같은 의미로 귀결이 된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보리달마의 안심사상에는 종교의 본질적인 요소와 중국불교의 교학체계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그리고 印度의 실천수행법인 禪의 사상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리달마의 安心思想은 중국불교 敎學의 핵심인 반야사상을 중심으로 여타 교학사상을 아우르고 또한 번잡한 불교수행의 체계를 단순화 시켜 부처님의 전하고자 하였던 苦를 자각하여 安心立命할 수 있는 삶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하여 主人公으로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보리달마와 혜가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安心의 계승은 중국 禪宗史에서 傳燈系譜를 구성하여 무한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안심법문은 祖師禪의 근거이며, 선종계보의 근본으로서 무한한 발전을 할 수 있는 근거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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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Dharma Talk for the Peaceful Mind to Get Enlightenment(安心法門) by Bodhidharma(菩提達磨)
Kim, Jinil(Myo Kyung)
(Ph.D. candidate, Department of Seon Studies,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sity)
It is the very Mahayana style that Bodhidharma(菩提達磨), the first patriarch of seon school in China, transmitted the practice of meditation facing on the wall(壁觀) to the Chinese laypeople. However, we could not find out any commentaries about his way of meditation practice. But we could understand the implications on the commentary about the theory of two ways to the enlightenment and four practices(二入四行論) by his disciple Damlim(曇林); "Two ways to the enlightenment(二入) is to be the peaceful mind(安心), and to be the peaceful mind(安心) is to practice of meditation facing on the wall(壁觀)." There are layed emphasis on the peaceful mind to get enlightenment(安心立命) and the practice to be the state.
There is implied the peaceful mind to get enlightenment on the Bodhidharma's Dharma Talk, that is to say, Dharma Talk for the peaceful mind to get enlightenment(安心法門). The Dharma Talk is characteristic of seon school. It is the first Dharma Talk that Bodhidharma transmitted Dharma Lamp of the Buddha to the 2nd patriarch Hui-k?o(慧可) from mind to mind.
There is the core of the Buddha's teachings that you must keep going the peaceful mind to get enlightenment and the practice to be the state. They are regarded as more important teachings in Josa-seon(祖師禪), which is taught us to see the buddha-nature as it is and to be yourself with your confidence.
According to the Buddha's teachings, fundamentally all the sufferings what we have, are derived from the causes. If we had awakened the cause and effect, we could get enlightenment or liberation. In the state, we can call it the state of peaceful mind or nirvana. 'Awareness' or 'enlightenment' means the state of liberation from all sufferings in Buddhism.
Like this, Bodhidharma had complied the buddhist teachings implied the thought of prajn?a?(般若思想), and simplified the practice system in China. As his Dharma Talk for the peaceful mind to get enlightenment and the practice of meditation facing on the wall, he had tried to solve the problems in the Chinese Buddhism at that time, and lead us the way to the peaceful mind to get enlightenment.
*Key words
Bodhidharma(菩提達磨), the peaceful mind(安心), the practice of meditation facing on the wall(壁觀), meditation(瞑想), the thought of prajn?a?(般若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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