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길과 사회 참여, 용성진종 선사 1
“마음은 삼계의 주인, 성품은 만상의 근원”
용성스님
용성진종(龍城震鐘, 1864∼1940)선사는 1864년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현재 지명)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수원 백씨(白氏) 백남현이고 모친은 밀양 손씨(孫氏)이다.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震鐘),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14세(1877년) 되던 해 남원시 교룡산성 덕밀암으로 출가를 단행하였지만, 부모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16세(1879년) 되던 해 마침내 해인사 극락암에서 은사 화월화상, 계사 혜조율사를 모시고 정식으로 출가 득도한다. 1940년 2월 24일 세연을 마치고 입적하니 세수 77세, 법랍 61세 였다.
선의 대중화 선구적 역할
용성은 선의 대중화에 가히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임제의 간화선풍을 선가의 으뜸으로 보고 있고, 전통적 의미의 한국선은 간화선일 뿐이라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용성은 깊은 경지에 도달한 자신의 선적체험을 바탕으로 ?귀원정종(歸源正宗)?,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 ?각해일윤(覺海日輪)?, ?청공원일(晴空圓日)? 등의 선적(禪籍)을 저술하였고, 또 이제 막 공부하고자 마음을 내는 초심자들에 대한 간화선 지침서인, ?수심정로(修心正路)?를 저술하기도 하는 등 막대한 양의 저술과 번역서 그리고 어록 등을 남겨두고 있다.
용성에 의하면 삼계(三界)가 모두 나일 따름이며 오직 마음의 소작(所作)일 뿐이다. 따라서 내가 천지를 낳고 내가 천지를 멸하기도 하고, 내가 만물을 낳기도 하고 내가 만물을 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내가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생하며 내가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은 삼계의 주인이며, 성품은 만상의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세계의 만상이 참된 본성의 나를 바탕으로 일어났으므로 생한즉 오직 내가 일으켰다하고 멸한 즉 오직 내가 멸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성은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며,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고 설파한다. 그러나 용성에 의하면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것과 같이 마음과 의식의 길이 끊어진 곳에 이를 때 곧장 허공을 당겨 파하고 건곤(乾坤)을 삼키고 토하는 등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소요할 수 있다. 그때 가서야 비로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변화에 특별한 방법을 내세우지 않고 종횡에 걸림이 없게 된다. 그런데 깊은 이치를 요달하지 못하고 다만 물은 그저 물이고 산은 그저 산일 따름이라 하여, 주리면 먹고 곤하면 잔다고 하는 자는, 부처이기는 커녕, 범부일 뿐이다.
복원된 용성스님 생가
용성에 의하면 마음이란 거울의 본체와 같고 본성이란 거울의 빛과 같으니 이것은 성(性)과 상(相)이 상대(相對)한 성이다. 다시 말해서 소금에는 짠 성품이 있고, 고추에는 매운 성품이 있으며, 불에는 뜨거운 성품이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부처님의 성품 즉 ‘각성(覺性)’이 있다. 이것은 성과 상이 상대한 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이 꺼졌을 때 뜨거운 본성이 잠시 사라졌다가 불이 붙었을 때 그 뜨거운 본성이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본성은 응당 소재가 없이 스스로 오고 간다. 다시 말해서 불이 꺼졌을 때 불의 상과 뜨거운 성을 얻을 수 없지만, 불의 원성(元性)은 허공에 가득하여 상도 없고 체도 없으며 열도 없고 빛도 없다. 그러므로 진공(眞空)의 성화(性火)가 법계에 두루하여 담연하게 항상 머문다.
우리가 불의 본성이 생멸하는 본원을 분명히 안다면 사람과 물상이 다 그러한 것을 알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상(性相)의 절대(絶對)인 성(性)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산을 오름에 있어서 산봉우리 정상에 앉아 그 천애를 바라본 뒤에 내려 온 자라야 바야흐로 산을 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도를 배움에 있어서 만물의 근원을 다하고 의심이 없어진 뒤에야 비로소 도를 통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음의 다른 이름은 불(佛)
용성은 인아(人我) 밖에 특별히 법신(法身)의 아(我)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용성의 삼계가 오직 나일 따름이며 오직 마음의 소작이라는 주장, 즉 일체세계의 만상이 참된 본성의 나를 바탕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나, 온갖 해골은 산화되고 흩어져 불로 바람으로 돌아가고 한 물건(마음)은 영원히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는 주장, 이 마음이 미묘하여 시방세계에 사무치지 않음이 없으며 널리 과거 미래 현재에 달하지 않음이 없다는 주장 등은 단지 마음의 ‘참 성품’, 즉 불성(佛性) 혹은 각성(覺性)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적인 언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성스님이 사용했던 불자, 휴대용 마니차, 요령, 금강저
용성의 마음에 대한 주장에는 선불교의 정통적인 입장 뿐 아니라 유식불교(唯識佛敎)에 관한 깊은 통찰도 역시 보인다. 유식이라는 말은 ‘오직 식(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우리들의 인식의 표상에 불과하고, 인식 이외의 사물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모든 것은 오직 심식(心識)에 의해서 창조되며 심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즉 정신과 객관세계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은 정신이 주가 되어 나타난 객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소유자는 만법의 주인이 되고 선악제법을 능히 창조할 수 있다는 순전한 정신주의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결과 유식은 “존재는 인식의 영역 속에서만 성립하며, 인식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식의 연기가 일체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주관적 인식과 감각기관, 그리고 대상의 연기적 관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일체의 모든 것’이다. 이때 연기적 관계 형성의 근원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므로 모든 가능성과 현실은 아뢰야식에 뿌리를 두게 된다.
용성에 의하면 불교는 마음을 믿는 교이다. 마음의 다른 이름은 불(佛)이기 때문에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곧 식(識)이 천지만유를 창조함이지, 따로 천?신 등이 있어서 천지만유와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신교인 불교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진성(眞性)을 깨닫게 하며, 만법을 통하여 일심(一心)을 밝히게 한다는 것이다.
용성은 말하기를 만법이 유식이라고 하는 것은 산하대지와 삼라만상 그리고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제8아뢰야식의 변화작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성의 식을 변화시켜 부처가 되는 것이지 식을 버리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마음을 버리고 새로 구하는 어떤 것을 통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그 마음이되, 마치 흐린 하늘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같은 하늘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흐린 하늘이요, 하나는 맑은 하늘이 되는 것처럼, 중생과 부처가 그 본래적 의미는 같지만, 변화의 양태에 따라서 부처가 되기도 중생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위와 같은 용성의 마음에 대한 주장을 통하여 우리는 선사인 용성의 마음사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유식교학의 위치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선사의 길과 사회 참여, 용성진종 선사 2
“자비심이 바다처럼 커지면 깨달음은 저절로 일어나”
용성선사는 스스로 말하기를 임제의현(臨濟義玄, ?- 867)의 37대 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경율론 삼장은 결국 선종으로 돌아가며, 그 중에서 임제종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온 유일한 선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용성은 철저한 임제선 계통의 간화선자이다.
용성에 의하면 간화선 수행인 참선은 삼세제불의 어머니이다. 삼세의 부처와 조사가 모두 선정을 바탕으로 하여 몸소 이 마음을 깨달아 증득하셨다. 다시 말해서 석가세존이 설산에 들어가 6년간을 좌정하여 움직이지 않은 것도 이 선을 닦은 것이고, 달마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면벽하신 것도 바로 이 선을 닦은 것이며, 천하의 노화상들이 모두 도를 통한 것도 모두 이 선을 닦은 결과에서 비롯된다.
용성은 사대오온과 삼라만상과 유정과 무정의 당처가 모두 공(空)하며, 또한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 모든 법의 당처가 모두 공하여 상(相)도 공하고 공조차 또한 공하다고 한다. 대장부라면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한번 변신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되었을 때, 부처님과 보살의 경지에 계합된다고 한다.
용성에 의하면 선 공부의 목적은 무위법을 체증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의 실상에 고정된 아(我)가 없는 것을 체득하여 모든 중생을 고루 이익 되게 하는 것이 간화선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하는 이들의 첫째가는 공부 방법은 간절한 의심을 가지고 화두를 놓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수행자가 화두를 들고 전심전력을 할 때 조심할 것은 ‘총명한 의식으로 계교(計較)하고 사량(思量)하는 마음’이다. 화두는 의식과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화두에 몰입되어 화두와 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은산철벽의 경지에 들어서다 보면, 마침내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과 비단결로 얼굴을 가린 곳과 마음과 의식의 길이 끊어진 곳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언젠가는 몸을 솟구쳐 살아날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대장부로서 일대사인연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깨달음, ‘이 세상이 공(空)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
용성에 의하면, 깨달음은 ‘이 세상이 공(空)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몰록 깨침은 별안간에 부처가 됨이 아니라 생사와 열반을 한통속에 몰아넣고 동시에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금체(眞金體)이며, 시각과 본각이 둘이 없어서 자각(自覺)과 각타(覺他)가 원만한 구경각이다. 따라서 용성은 ‘돈오’이외 ‘점수’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 조사선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임제선의 적자이다. 물론 용성은 여러 군데에서 ‘돈오’이후의 ‘점수’에 대해서 표방한다. 그런데 주의 할 것은 이 경우, 대개 중?하근기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상근기의 경우, 그는 철저하게 ‘돈오’만을 말한다. 이 점 때문에 바로 그가 중국 조사선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임제선의 적자가 되는 것이다.
용성스님의 발우
깨달은 자는 비추며 항상 고요하고, 고요하며 항상 비추어 뜻대로 고요하게 알아 편안하고 한가하며 즐겁고 고요하며 허융(虛融)하고 담박(淡泊)하여 동과 정에 무심하며 자나깨나 성성하여 텅 비고 밝게 스스로 비춘다.
용성은 깨달은 자는 청정함과 혼탁함이 함께 공하고 식심이 맑고 깨끗하여 위로 천당을 보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지옥을 보지 않으며 중간의 모든 성현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디 천당과 지옥과 성현 등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오온이 본디 공하고, 육진이 있지 않으며 중생이 세간을 벗어날 게 없고 제불이 중생의 세계에 들어갈 게 없으며 제불이 출세간을 벗어날 게 없고 중생이 출세간에 들어갈 게 없다. 고요하지도 않고 산란하지도 않다. 다시 말해서 선성(禪性)은 주(住)함이 없으므로, 선의 자취에 머물지도 않고, 선성은 생함이 없으므로, 선상(禪相)이 생하지도 않는다. 본디 이렇지 않으며 또한 이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위없는 대열반이 뚜렷이 밝고 항상 고요하면서도 비춘다. 용성은 이곳이 바로 부처와 조사가 몸을 편안히 하고 명을 세우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용성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신비주의나 초월주의, 더 나아가서 눈앞에 있는 세계를 뛰어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용성에 의하면, 깨달은 사람의 분상에 있어서는 일체 작위하는 모든 것들이 다른 게 아니다. 오직 이 마음일 뿐. 마치 전단향나무를 쪼개면 조각조각이 전부 전단향인 것과 같다. 임운(任運)하여 등등하고 소요자재하게 날을 보낸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어떤 별천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역력하게 살아있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 일러준다는 것조차 맨살에 상처를 내는 꼴이 된다. 이것은 조주 선사가 말했듯이 차나 한잔 마시는 일이다. 더 이상 다시 보태고 얻을 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갖추어져 있기에 불가득(不可得)이요 불가설(不可說)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우리의 모든 정신 활동이 이제 열쇠로서 작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제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보다 더 평화로워져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만함 속에 살게 된다. 그 결과 ‘삶의 색조’가 바뀌어져서 봄날의 꽃들은 더 아름답게 보이며, 계곡의 시냇물은 더 신선하고 맑게 흐르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결국 깨달음은 일종의 ‘평안한 상태’, ‘행복한 상태’이다.
깨달음의 두 축은 지혜와 자비
조심해야 할 것은 이때 이 ‘평안하고 행복한 상태’가 우리가 자기애(自己愛)를 극복한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열려서 반응적으로 되고, 감수적으로 되고, 각성되고, 공(空)으로 되는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한 상태’, ‘행복한 상태’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정의적(情意的)으로 충분하게 연결지어져, 분리와 소외를 극복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개아(個我)를 버려, 탐(貪)하는 것을 중단하고, 개아를 보존하고 확대하려는 끊임없는 추구를 그만두며, 단지 자기를 보존하고 탐욕하고 이용하려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활동 속에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평안하고 행복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다시 말해서 깨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깨달은 이의 삶이 중생의 제도를 평생의 서원으로 여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용성스님이 사용했던 염주.
깨달음의 두 축은 지혜와 자비다. 깨달음은 나와 남,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깨고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를 체득하는 것이다. 간화선은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이고 세간이 그대로 출세간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번뇌 가운데 있되 번뇌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을 부처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세간에 있되 세간에 물들지 않고 세간에서 만행을 실천하며 교화활동을 펼친다. 다시 말해서 깨달은 이는 인연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생제도의 길을 가면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그때 그때 저마다의 본래면목을 밝게 보여주는 것이다. 용성에 의하면, 그렇기 때문에, 자비심이 바다처럼 커지면 깨달음은 저절로 일어난다.
선사의 길과 사회적 참여, 용성진종 선사 3
“불교의 전통 수호, 대중화, 자주성 회복”
용성선사 진영
용성은 1911년(48세) 서울로 간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다른 종교, 특히 개신교에 비해 형편없이 적막한 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크게 한탄하게 된다. 그 결과 선종의 본사는 청정한 산간에 건립 조성하여 도인을 양성하고 선종의 포교당은 각 도시 속에 설치하여 천하의 대중으로 하여금 함께 이익을 얻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산중 수행을 고집하기 보다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중 교화에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일관한다.
용성의 48세 이후의 대중 교화기의 행적은 크게 ‘불교적 전통의 수호’, ‘시대에 맞는 불교의 정립’, ‘민족의 자존과 자주성의 회복’의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는 첫 번째로 불교적 전통의 수호를 위해 전념한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 이후 순수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 계승하고, 식민지 불교체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제 사찰령에 예속되지 않는 불교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불교계는 1920년 경에 한국 전통선을 표방하는 선학원(禪學院)의 설립을 제안한다. 이 때 용성은 한국 전통선 부흥의 기치를 내세운 선학원 창설의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워져 발기인의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용성은 불교의 대중화 및 사회화를 위해 기존 불교를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용성의 개혁론은 전통불교 수호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 및 활성화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선학원의 입장은, 전통불교 수호라는 측면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실행방법에 있어서, 불교의 대중화를 추구하는 용성의 입장과는, 달랐다.
“참선으로 깨달음 얻어 중생 제도”
1925년 용성은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추진한다. 용성이 이 결사를 추진한 근본 의도는 당시 일제에 의한, 한국 전통불교의 계율 파괴와 선의 몰락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용성은 만일참선결사회의 추진 방향을 선(禪)과 율(律)의 균형적인 자립으로 정하고, 당시 불교계의 모순과 행태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것은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용성의 결연한 의지가 표출된 것이라 하겠다.
승려의 대처식육 문제는 1926년에 이르러 불교계 갈등의 핵이 되고 만다. 이에 용성은 총독부에 취처(娶妻)와 식육(食肉)을 금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建白書)를 1926년 2차례에 걸쳐 제출하였다. 하지만 일제 당국이 대처승려가 주지를 할 수 있다는 사법(寺法) 개정안을 수용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당시의 불교 종단은 점차 일제 식민지 정책에 적응하면서 현실 타협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주지하듯이 용성은 전통불교 정신의 회복을 위하여 선율겸행(禪律兼行)을 평생에 걸쳐 추구한다. 선학원의 설립에 참여한 것이나 2차에 걸쳐 건백서를 제출한 것도 용성의 이러한 신념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과 더불어 용성은 당시의 승려들이 승려라는 표면적인 직업을 가지고 대처를 하면서 이권과 사리사욕에 매달리는 풍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승려가 자영할 수 있는 기능과 사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승려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선율(禪律)을 함께 실천함으로서 사회로부터의 부정적인 인식과 함께 불교의 발전을 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나이 64세 당시인 1927년부터 10여 년간 경남 함양의 백운산과 중국 간도의 용정에서 화과원(華果院)과 선농당(禪農堂)을 설립하여 선농불교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두 번째로 시대에 맞는 불교의 정립을 위해 노력한다. 용성은 기존 불교계에 대한 환멸과 전통불교를 보다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는 열망이라는 두 가지의 복합적인 이유를 가지고 대각교 창설이라는 독자적인 불교노선을 걷는다. 용성은 불교의 본래적 의미를 대각(大覺)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대각교를 창립해 대중들에게 기왕의 불교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했다. 그리고 기성종단의 타락과 무기력성을 극복하기 위한 불교개혁을 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사원경제의 자립, 불교의 대중화, 선의 대중화 등의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부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는 창조적인 혁신운동이었다.
대각교 창설, 임제종 운동의 선두
용성스님 생가터에 건립된 장수 죽림정사
불교의 대중화운동은 용성의 말년의 보살행 중 가장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대각교 운동의 주요 내용은 사원경제의 자립, 불교의 대중화, 선의 대중화 등이다.
첫째, 사원경제의 자립은 선농불교의 실천을 의미한다.
둘째, 선의 대중화의 문제는 도심 포교당의 건립, 선학원의 건립, 만일참선결사회의 추진 등이 그러하다.
셋째, 불교의 대중화이다.
용성은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역경활동, 의식집의 한글화, 포교의 현대화, 한글 찬불가의 제정 등을 하였다. 용성이 역경사업을 중시한 이유는 신앙적인 측면과 시대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리고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용성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대중포교활동에 관한 부분이다. 용성은 불교의식집의 한글화 작업도 하였는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집을 번역하여 한글로 된 의식집을 가지고 예불을 스스로 집행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포교의 현대화를 위해 불교음악을 보급하고 직접 노래가사를 짓고, 법당에서 찬불가를 부르게 하는 당시 불교계에서 볼 수 없는 파격성까지 있었다. 그리고 어린이 포교를 위해 대각일요학교를 개설하고 법당에서 무용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세 번째로 그는 민족의 자존과 자주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용성은 일제 암흑기가 시작되고 있던 48세(1911년)이후, 서울에서 재가불자들을 위한 포교의 제 1선에 서게 된다. 그가 포교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막 전락된 때이다. 불교계에서도 이러한 정치적 변동에 의해 큰 격변을 겪고 있었다. 이른바 원종(圓宗)의 대종정인 이회광(李晦光) 등이 한국불교를 일본의 일개 종파인 조동종에 매종하려한 ‘조동종맹약(曹洞宗盟約)’이다. 1910년 9월 경에 구체화된 그 맹약은 동년 12월경 전불교계에 그 사실이 파급되어 불교계에 일대 파장이 일어나고 그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임제종운동’이다.
1911년 1월 송광사에서 조동종맹약 규탄대회가 열렸다. 당시 그 총회에서 한국불교의 상징으로 임제종을 표방하게 된다. 민족의 주체성과 정통 조선 선종을 표방한 임제종 승려들은 1912년 5월 인사동에 임제종중앙포교당을 건립하고 운영하게 되었다. 이 개원식에서 관장대리인 한용운은 임제종의 종지를 설명하고 용성은 개교사장(開敎師長)의 자격으로 설법을 하였다. 이처럼 항일불교 운동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임제종 운동의 제1선에, 이제 막 서울에 온 용성이 서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의 자주적인 불교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후 그의 노선을 짐작하게 하는 단적인 실례이다. 이처럼 임제종 운동의 제일선에 용성이 서 있은 것은 그의 노선이 항일불교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1독립운동에서도 승려로서 불교계의 전면에 서서 활동하고 이를 주도해나간 이는, 만해 한용운과 함께 용성뿐이다. 용성은 33인의 민족지도자 가운데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만해와 함께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항상 선두에 서서 투쟁한 비타협적 민족운동의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세속과 단절하면서 수도에만 정진하는 수행승이 대부분이었던 당대에 이와 같이 독립운동에 직접적,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용성의 제반 행적은 일제에 저항한 문화적인 민족운동이었으며, 일제 식민체제를 극복하려는 정신사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용성은 일제 식민지 불교 체제를 근본적으로 저항, 거부, 이탈하기 위한 독자적인 노선을 경주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용성의 민족 운동은 승려 및 불교의 범주 내에서만 추진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용성은 근현대 한국불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선지식 중의 한분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대서원을 세운다음, 기왕의 전통불교가 지닌 대중과의 소통 부재라는 측면을 뛰어넘기 위하여, 거의 무모하다는 힐난을 들을 정도로, 용감하게 불교의 대혁신을 단행했다.
용성의 불교 개혁은 철저하게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실천을 통하여 전통 불교의 수호(守護) 및 개신(改新) 그리고 식민지 불교의 극복을 기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불교의 행적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끝)
-이덕진(창원문성대학 교수)
'[佛敎] > 佛敎에關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엄경』의 유심(唯心)사상 ? (0) | 2013.02.02 |
---|---|
菩提達磨의 安心法門에 대한 一考 (0) | 2013.02.02 |
十牛圖의 修行과 自我實現 (0) | 2013.01.26 |
한국 간화선과 화두참구의 계승 / 월암 (0) | 2013.01.25 |
唐宋 선종 어록에 나타난 몇 가지 語氣助詞 ?/ 송인성 (0) | 2013.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