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맵다 / 김낙필
죄가 많다
그래서 기다릴 사람 없고 늘 혼자다
죄가 깊디 깊다
혼자 사는일이 능숙하다는 걸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
독선이다
주위 사람을 무시하는 몹쓸 행태
독립군이 아니라
역마살 낀 행려병자에 가깝다
기다릴 사람 없이 기다리느라 한 세월이 갔다
그리고 또 다른 기다림의 시작
그러고나면 생의 끝이 오겠지
아무렴 사는게 뭔 큰 위세라고 사설...넋두린...
많은 죄를 지은만큼 삶은 유난히 길다
낮보다 밤이 긴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죄가 넘치니 또 가을이다
사느냐 마느냐를 고뇌해야하고
시작할까 말까를 망서려야하는
망할놈의 계절이다
낙엽 한잎의 의미와
이미 가버린 사랑을 반추하고
버림받은 날들과 다시 해후해야하는
대책없는 날들이다
곰씹기도 싫다
세속 인연일랑 다 버리고
은비령 골짜기 은자당에 숨어
한세월 불아궁이나 지키고
돼지감자나 구워먹으며 살면 좋겠다
구설수에 말릴일도 없고
산듯 죽은듯 보이지않게 그렇게
만사 세상일
이리해도 저리해도 다를건 없는데
사는게 맵다
죄 값이다
눈물이 또 고인다
라면 / 김낙필
양파 송송 썰고
신김치 숭숭 썰어
끓는 물에 풍덩 잠수시켜서
사리수프 넣고 설설 끓이다
치즈 한 조각 살짝 얹고
친구가 준 오리알 하나
후르륵 풀어넣고
냄비뚜껑을 닫는다.
내가 내 의지대로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라면 끓이는 일밖에 없다.
넣고 싶은 대로 넣고
끓이고 싶은 만큼 끓이고
먹고 싶은 만큼 먹고
그렇게 자유롭다.
'스트로가노프'를 먹을 때나
'믹스 파스타'를 먹을 때는
분위기를 잡아야 하고
입 언저리도 정결하게 해야 하고
품위도 지켜야 하는데
범생이에게는 갑갑한 일이다.
사는 일도 폼을 잡으려면
가려야 할 것 많아 답답하고
냄비뚜껑을 받치고
툇마루에 쪼그려 앉아
후루룩대며 먹는 오뚜기 열라면이
차라리 솔직하고 담백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나
꽃등심 집에서는
우아한 인생들이
우아한 얘기들만 하고 있을 텐데
나는 지금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을까 말까
고민중이다.
타락천사(墮落天使) / 김낙필
하늘나라에서 소식이 왔다.
다신 올라오지 말란다.
상제께서
등날개 둘을 모두 꺽어놨으니
이젠 나를수도 없는
인간 군상으로 남게됐다.
탐식하고 간음하고
욕정을 즐기고
재물에 욕심을 냈으니
야차처럼 타락했다.
애초 천상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올땐
백옥같은 양날개로
바람이 뚫고가듯 투명했는데...
이젠
온갖 세상의 오물에 찌들어
청명한 모습은 간데없다.
어디가야
날개를 빌려줄 천사를 찾을수 있을까.
어찌해야
덕지덕지 묻은때를 벗길수 있을까.
<香林院>앞에서
차마 들어서질 못하고 서성인다.
뒷좌석과 트렁크엔
라면 13 박스가 채워져있는데
이런다고
천상의 노여움을 풀수는 없는일
차라리
하늘이 보이지 않는곳에 숨어들어
라면이나 끓여 먹으며
살아야 할까보다.
그래도
남에게 베풀고.. 주려고
무진장 노력은 했었는데
그래도 두서넛의 목숨은 살려놨는데
그래도
지은죄가 더 큰가보다.
천상귀천(天上歸天)은 날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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