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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율의 여자 / 안효희
죽을 때까지 거울을 닦으며
거대한 궁전을 꿈꾸는 너는 여자다
쿠프왕이 피라미드를 세우듯
3.14원주율과 1.618 황금비율을 계산한다
오리온자리 세 별에 맞추어
천체天體 창을 내고 커튼을 단다
뾰족한 집 아래 둥글게 묻힐 때까지
긴 머리카락 흩날리며
하얀 손톱을 가꾼다
빛나는 것과 빛나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곧 허물어질 집 속에서
또 하나의 집을 위한 연주
나날이 황금비율의 혀와 귀를 옮겨심는다
그렇게 분산시키고 분열시키며
무덤 주변을 서성인다
아름다운 골반뼈를 세울 동산
원주율에 꼭 맞는 꽃무덤을 가꾸느라
일생동안 분주한 너는 여자다
신이 내린 황금비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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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의 여자들 / 김선우
늦봄 저수지 둑 위에 앉아
물속을 오래 들여다보면
거기 무슨 잔치 벌였는지
북소리 징소리 어깨춤 법석입니다
바리공주 방울 흔들어 수문 열리자
시루떡 찌고 있는 명성황후가 보입니다
구름이 내려와 멍석을 펼치고
축문을 쓰고 있는 황진이 쪽찐 머리
가르마 따라 흰 새 날고 바람 불어옵니다
난설헌이 어린 남매를 위해 소지를 사르다가
문득 눈을 들어 감나무를 봅니다
우듬지에 걸려 펄럭이는 나비연
황진이가 다가와 장옷을 걸쳐줍니다
두 여자가 마주보고 하하 웃습니
명성황후 다가와 붉은 석류를 내밉니다
석류알 새금새금 발라 먹으며
세 여자가 찡그려 하하하 웃습니다
물보라치는 눈가루,
이승을 혼자 노닐다 온 여자들이
휘모리 장단을 칩니다 지전 흩어지고
까치밥마냥 미쳐서
술잔 속에 한 하늘이 천년을 헤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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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그녀는 무엇이든 가방에 넣는 버릇이 있다. 도장 찍힌 이혼 서류, 금간 거울, 부릅뜬 남자의 눈알, 뒤축 닳은 신발. 십 년 전에 가출한 아들마저 꼬깃꼬깃 가방에 구겨 넣는다. 언젠가 는 시어머니가 가방에서 불쑥 튀어나와 해거름까지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녀의 취미는 접시 던지기, 지난 봄, 던지기에 열 중한 나머지 벽을 향해 몸을 날린 적도 있었다. 틈만 나면 잔 소리를 향해, 바람난 남자의 뻔뻔한 면상을 향해 신나게 접시 를 날린다. 쨍그랑 와장창!
그녀의 일과는 깨진 접시 주워 담기. 뻑뻑한 지퍼를 열고 방 금 깨뜨린 접시를 가방에 담는다. 맨손으로 접시조각을 밀어 넣는 그녀는 허술한 쓰레기봉투를 믿지 않는다. 적금통장도 자식도 불안하다. 오직 가방만 믿는다.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 으로 터질 듯 빵빵한 가방, 열리지 않는 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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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여자 / 최정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엇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녀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츠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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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세탁소 / 임동윤
그 여자의 세탁소는 계단 아래에 있다 가파른 계단을 머리에 인 스팀보일러가 종일 쉭쉭 단내를 토해내는 곳 드라이클리닝기계는 바람을 만들며 돌아가고 매연과 먼지 속을 떠돌다 온 옷들이 불끈 다리미를 쥔 여자의 손에서 대낮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보낸다 바짓단 자르며 바지런히 도르르 재봉틀을 돌리는 몸집 작은 여자, 앞가슴에 한껏 실밥을 묻힌 채 엉덩짝을 꿰매는 중이다 납작해진 다리미와 다리미판 사이, 구겨진 사람들이 누우면 더운 김에 훅훅 젖어 하얗게 일어서는 길들, 능숙한 여자의 손끝에서 풀잎처럼 팔랑대는 옷들, 먼 길 돌아온 생애까지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고 있다 날마다 찰랑찰랑 물소리를 내는 그 여자의 세탁소는 늘 푸른 대나무 숲 얼굴 씻은 새들이 종일 와서 소리 울고 구겨진 마음들이 온통 제 속을 비우는, 여자는 마침내 푸른 물이 도는 숲으로 일어선다 너덜대는 내 삶도 저 옷처럼 잘라 기우면 모두 반듯하게 펴질 수가 있을까 스팀보일러가 단내를 뿜어대는 계단 아래서 헛짚어 떠돈 하루가 씽씽 씻겨 돌아가는 곳, 불끈, 다리미 고쳐 잡는 여자의 손에 축 쳐진 내 팔 다리도 벌써 움켜잡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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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여자 / 문정
옥탑방 여자가 눈 덮인 골목을 몇 점 오려 널고 있었네
사내는 휠체어에 앉아 2층 옥상을 내려다보았네
그 여자의 빨래건조대를 아파트 3층 발코니로 바짝 끌어 당겼네
교회당 종소리가 얼음처럼 단단한 사내의 바깥공기를'
말랑말랑하게 두드려주었네 빨래에는 그 여자의 지난 일주일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네 사내는 여자의 발끝으로 꼭 길 하나
흘려놓고 싶어 가만가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네
좀처럼 꿈쩍하지 않는 발바닥에 바퀴나 깃털을 달고 싶었네
빨래들이 햇살을 물고 금방 피라미 떼처럼 꿈틀거렸네
젖은 수건 한 장이 손을 뻗어 여자의 어깨를 어루만졌네
그 여자의 발끝에서 시가지 쪽으로 하얀 길이 달려나갔네
사내의 지루한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 멀리 있었네
여자의 눈에 쉽게 끌려온 시가지가 여자의 입술에 웃음을
새겨 넣었네 갑자기 빨래 한 장이 긴 줄에서 여자 앞으로
뛰어내렸네 잽싸게 빨래를 집어 들고 뒷덜미에 집게를
물리는 여자의 가슴이 높음음자리표처럼 출렁거렸네
사내는 목을 빨래처럼 길게 쭉 내밀었네 순간 2층 옥상과
3층 발코니 사이에 길이 척 놓였네 사내는 휠체어를
힘껏 앞으로 굴려나갔네 그 여자가 옥탑방 문을 쿵 닫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네 빨래들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
햇살이 사내를 자꾸만 간질였네 눈이 녹아내리는 골목길 위로
두 개의 바퀴자국을 내며 사내는 굴러가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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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다 / 심여수
손톱을 정리하고 손톱 에센스를 바른다
욕망이라는 비자발성과 허위성을 인정한 그때는
손톱 길이만큼의 자존이 낭만적 거짓이라도 있어 좋았다
오래된 서가에 꽂힌 한물간 책들의 잔영처럼
내손톱 길이만큼 자라다가 멈춰버린 열정처럼
지금 나는 핏기를 잃고,윤기를 잃고 고단한 현기증과 동거중이다.
가질 수 있었는데 놓쳐버렸다는
잃어 버리고 더 이상 눈물짓고 싶지 않다는
내생각의 공간이 허공과 같이 텅 비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이 여자의 아름다움이라고
이 지구에 여자가 없다면 남자의 생존에 이렇다 할 의미가 없다고
어떤 여자건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 여자는 없다고
존재의 살갗에 무심히 던져 놓아두며
빈 조개 껍질처럼 텅 비어있길 원하지 않는다
없애버림이 아니고 새롭게 바꾸어져서 다시 여자이고 싶다.
내 엄마가 달뜬 세상 모든 것을 품었던 자궁을 물려 주었고
내가 다시 내 딸에게 모든 것을 품을 자궁을 물려준
나는 여자다.
도도한 세월의 흐름 그 한가운데에 결핍으로서의 존재로
욕망에 파먹히는 육체의 메세지를 해독할 줄 알 때
한 여자에게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되리라
혼란스럽고 뚜렷하지 않은 목소리를 가지는 동안
자궁라는 안전한 감옥을 빠져나와 고요한 흔들림을 향해 가는 동안
망설임과 뒤틀림을 돌려세워 보는 동안
손톱에 바른 에센스가 햇살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누가 뭐래도 나는 여자다.
그대 안에서 비로소 나는 여자가 된다 / 심여수
바람이 어둠에 몸을 부빈다
무게가 무게에 겨워 바람의 모든것들이 몸을 포개고
소리가 소리에 겨워 제몸을 풀어 울어대고
그리운 이의 얼굴은
눈앞에 잡힐 듯 말 듯
그얼굴 부딪 듯 말 듯
그래서 더 그리운 밤이 짙어진다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를 쉬게 하듯이
그대 눈속에 담겨 비로소 얼굴이 되는
그대안에서만이 비로소 나는 여자가 된다
아름다운 삶에
슬픔과 연민의 감정 줄창 따라 다녀도 좋다
사랑의 무덤가에 상처로 벌초를 해도 좋다
참혹으로 뭉쳐진 비애라도 좋다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
더 이상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는
끝내 버릴 수도 없는
끝내 되돌릴 수도 없는 사랑으로하여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은 내 가슴에서
잠시만 치워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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