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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결혼비용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호... 2012. 7. 1. 11:4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 한번 결혼비용이 집10채 값

 

 

“연애결혼도 인정한다. 결혼할 때는 남자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재물 없이 결혼하는 것이 예법이다.

만약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딸자식을 계집종으로 파는 것으로 생각해 부끄럽게 여겼다.

(有婚嫁 取男女相悅卽爲之 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以爲賣婢)”

 

<북사(北史)> ‘열전’ 등에 나온 고구려의 혼인풍속이다. 한마디로 혼수품은 신랑집에서 가져오는 돼지와 술 뿐이라는 것이다. 또 혼수를 받는 행위는 마치 딸을 노비처럼 파는 것으로 여겨 매우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질박한 결혼풍습인가.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혼인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양가 집안이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1>사람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 가운데 ‘시부모에게 절하는 신부’ 그림.

혼례를 마친 신부가 시집에 가서 시부모에게 절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의 호화혼수

 

호화혼수의 원조는 허황옥일 것이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국제결혼한 야유타국의 공주님이다..

 

기원후 48년 7월, 야유타국의 공주가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단 배를 타고 김해에 닿았다. 김수로왕은 임시장막으로 궁전을 조성해서 공주를 맞이했다. 소녀는 나루터에 배를 댄 뒤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16살 공주가 가져온 혼수품은 어마어마했다. 먼저 공주를 따라온 잉신(孕臣·혼인할 때 신부를 따라온 신하)이 두 명이나 됐다. 게다가 두 사람의 아내와 데리고 온 노비까지 모두 20여 명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금수능라(錦繡綾羅·비단옷감)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경구복완기(瓊玖服玩器·장신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보기 힘든 고급 중국제 호화혼수였던 것이다. 김수로왕과 침전에 든 공주가 왕을 찾아 혼인하게 된 까닭을 설명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입니다.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꿈에서 상제가 나타나 너희 공주를 가락국의 수로왕(首露王)의 배필로 삼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상제의 말씀 대로 저를 대왕에게 보낸 것입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그러니까 허왕후가 어린 딸을 이역만리 먼 곳으로 시집 보내면서 바리바리 혼수품을 싸준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도 부모의 전재산이라도 털어 보냈을 것이다.

 

■서라벌이 떠들썩했던 혼수의 대열

 

<삼국사기> ‘신문왕조’를 보자. 신문왕 3년(683), 왕은 일길찬(一吉飡·17관등 중 7관등) 김흠운(金欽運)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엄청난 양의 혼수품을 전달한다.

 

 

<사진2> ‘보주태후’ 허황옥이라는 명문을 새긴 김수로왕릉비.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허황옥의 조상은 아유타국에서 중국 보주로 집단이주한 가문이었다. 허황옥의 부모는 사랑하는 공주를 한반도 동남쪽 가락국 왕비로 시집보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예물로 보내는 폐백이 15수레였다. 또 쌀·술·기름·꿀·간장·된장·말린 고기·젓갈이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 5월7일 7일 이찬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그 집에 보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책봉했다. 그 날 묘시(卯時)에 (귀족들의 부인) 30명들을 보내 신부를 맞아오게 했다. 신부는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서 시종하는 관인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성대했다.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신부가 수레에서 내려 궁궐로 들어갔다.”

 

기사를 보면 왕비를 맞이하면서 들썩들썩거렸을 서라벌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모두 합해 300수레에 달했던,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호화혼수품 대열이다.

백제(660)에 고구려(668)까지 멸망시키고 당나라까지 쫓아낸(676) 신라에 무슨 걱정이 있었으랴. 태평성대를 맞이한 통일신라 시대의 흥청거림을 한 눈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혼수품 적다고 신부 쫓아낸 신랑

 

조선시대에서도 혼수는 요지경 풍속이었다. 혼수품이 적다고 타박하고 신부를 버리는 몰상식한 남자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다. 1445년(세종 27년)에 있었던 일이다. 현감을 지낸 정우가 사헌부에 고했다.

 

“박자형이라는 인물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사위가 혼수품을 갖추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행실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쫓아냈습니다.”

 

요컨대 신랑이 내심으로는 신부의 혼수를 문제삼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신부가 작고 뚱뚱하며 행실이 좋지않다”고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금부에 고소했는데,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정우의 주장이었다. 사위 박자형이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는 진술만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종 임금이 가만히 듣더니 “판결은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며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한다.

 

 

<사진3> 김준근의 풍속도인 <신부잔쌍바든모양>. 첫날밤 신랑를 기다리는 신부를 그렸다.

조선시대에도 혼수가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신부가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핑계를 대서 파혼하려 했던 얼빠진 신랑이 적발되기도 했다. / 숭실대박물관 제공

 

 

“판결은 본질에서 찾아야 한다. 의금부는 박자형이 술에 취해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미혹돼서는 안된다. 박자형은 신부집에서 하룻밤 잤다. 만약 신부의 행실을 문제 삼았다면 그 때 문제삼아야지.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예물을 다 받았으니 혼인은 성사된 것이다. 그래놓고 혼수품인 이불과 요, 그리고 옷이 화려하지 않자 엉뚱한 핑계를 대서 파혼하려 하는 것이다.”

 

결국 박자형은 곤장 60대와 징역 1년이라는 중형을 받았다.(<세종실록>)

 

 

■‘호화혼수 뿌리 뽑아라!’ 그러나…

 

1482년 성종 13년의 일이다. 한성부 우윤(지금의 서울시 부시장)이었던 한간이라는 인물의 혼수품이 도마 위에 올랐다.

 

요컨대 사위를 들일 때 분수에 넘치는 혼수품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간은 심지어 당대에서는 최고급인 중국제 혼수품까지 받아챙겼다는 것이다. 대신들은 한간의 예를 논의하면서 호화혼수품 행태를 비판한다.

 

“요즘 혼수품을 10여 가지나 요구하는 집안이 많습니다. 가난해서 혼수품을 마련하지 못하는 이들은 혼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산군 때(1502)는 사헌부가 이같은 행태를 개탄하면서 ‘혼수품 규정’을 만들 것을 주청한다.

 

“채단(예물)과 침구에 사라능단(紗羅綾緞·견직물), 갓의 장식에 금은주옥, 갓끈에 산호·유리·명박(明珀·호박의 일종)을 사용하는 것을 모두 금지시키소서. 이는 당상관의 자녀들에게도 적용시키소서.”

 

사헌부는 이외에도 분수에 넘친 안장을 꾸민 말을 보내는 사람, 신부가 시부모를 뵐 때 금은·주옥·패물을 갖추어 주는 사람들도 엄단하라고 촉구했다. 호화혼수의 뿌리를 뽑으려는 사헌부의 의지는 추상 같았다.

 

“혼인하는 집은 예물을 주고받는 납채일과 혼례식 날짜를 미리 관부에 알려라. 그날이 되면 관리를 보내 감찰할 것이다. 만약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가 발각되면 해당집안을 물론 관리감독하는 관원(공무원)들까지 중죄로 다스릴 것이다. 또 호화혼수품을 적발하고도 눈감아주는 관리가 있다면 곤장 100대로 다스리고 모두 변방의 군사로 편입시킬 것이다.”

 

심지어는 혼례식 날 골목까지 가득 메우고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는 행위까지 단속했다. 이를 어기면 신랑·신부집은 물론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까지 처벌을 받았다.

 

■혼례비용이 중인(中人)의 집 10채 값

 

그렇지만 혼수품에 대한 집착은 조선시대 내내 계속됐다. 1834년(순조 34년) 지평 이병영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상소한다.

 

“위로는 벼슬아치부터 아래로는 여염에 이르기까지 한번의 혼례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인(中人) 열 집의 재산보다 많습니다. 한 차례의 잔치에 드는 비용도 가난한 백성의 1년치 양식거리가 넘습니다.”

 

혼례비용으로 일반백성도 아닌 중인 10명의 재산보다 많다는 것이니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는 자식을 혼인시키는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 것일까. 시댁과 처가에서 제발 미움 받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마음은 임금도 마찬가지였을까. 왕실의 혼인도 구설이 따랐다. 왕실 스스로 호화혼수의 풍조를 자초했으니 말이다.

 

1522년(중종 17년) 대사헌 김극성과 부제학 서후 등이 잇달아 상소문을 올린다.

 

“지금 전하께서는 왕자녀들의 나이가 겨우 10세만 되면 혼례식을 치릅니다. 왕자와 왕녀의 길례(吉禮)는 예제에 지나치지 못하게 한 것이 국전(國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길례 비용이 3∼4만 필(匹)에 이릅니다. 아! 위에서 폐단되는 일을 행하면서 어떻게 백성들의 폐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사진 5>조선 후기의 혼수품 내역을 기록한 혼수물목. 두루마리 형태로, 세로 31㎝에 가로는 1m가 넘는다. 뻑적지근한 혼수를 요구한 것이다. 신부가 준비해야 할 장농, 상의, 바지, 고쟁이 등의 갖가지 혼수용품의 명칭과 수량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지탄받은 왕가의 혼수

 

그뿐이 아니었다. 중종은 왕자와 부마들의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토목공사를 벌였다. 대신들은 그런 임금의 행태를 가감없이 비난한 것이다. 하지만 개전의 정이 없었다. 이듬해인 1523년 홍문관의 상소가 다시 이어진다.

 

“근래에 왕자녀(王子女) 혼례(婚禮)의 혼수가 전보다 배나 들었습니다. 거기에 명분 없는 하사(下賜)가 많아서 씀씀이가 커져 창고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18세기 이덕무도 장탄식했다.

 

혼수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딸을 낳으면 집을 망칠 징조라 한다. 어린 딸이 죽으면 사람들이 얼마의 돈을 벌었다는 말로 위로한다. 인륜과 도덕이 여지없이 타락한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서)

 

전남 구례군의 문화 유씨 종가의 소장한 옛 문서 가운데는 <혼구물목(婚具物目)>이 있다. 1920~40년대 자녀 혼인 때 들어간 비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1920년 11월 큰 아들을 장가 보내고 쓴 혼인비용이 309원이라 적었다.

 

물론 집값을 뺀 내용이다. 민속학자인 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은 <혼구물목>에 나온 돼지 한마리 값(3원)에 착안했다. 혼인비용 309원이면 돼지가 10마리 분이다. 정 관장은 생돼지 한마리(100근) 값을 대략 30만원이라고 보면 혼인비용은 3090만원(103마리)에 이른다고 계산했다.

 

다시 178년 전 이병영이 상소문을 더듬어보자.

 

“사치는 재물을 소모하는 구멍이요,(奢侈者 消財之眉閭) 탐욕은 백성을 해치는 독벌레입니다.(貪?者 장民之훼석)”

 

끔찍하다. 178년 전에 한 얘긴데….

요즘 부모들의 심정을 어찌 그리 구구절절 대변한 것인가.

 

/ 경향.

 

 

 

 

 

 

 

 

혼수 유감

 

김재명 부영주택 대표이사 사장

 

 

부부 금실 좋기로 ‘잉꼬’를 이야기하지만 이보다 더한 새가 있다. 조류학자들이 고니 919쌍을 조사했더니 배우자가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쌍도 외도도, 이혼도 없이 오순도순 살았다고 한다.

조류의 90% 이상이 배우자에게 헌신적이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홍학(紅鶴) 중에는 배우자를 바꿔가며 정략적으로 혼인·이혼을 반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놀랍게도 상대 배우자를 철저하게 이용해 자신의 생식에 도움을 받겠다는 본능적 계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인간과 닮은 모양이다.

결혼과 혼수라는 절차는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며 한 곳에 정착하고 가부장제가 자리잡으면서 정립된 사유재산제의 결과물임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는 나이 들어서도 혼사를 치르지 못하는 남녀들을 위해 정부가 나서서 중매하고 혼수까지 마련해줘 짝을 맺어주었는데, 이를 합독(合獨)이라 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싱글 남녀의 숫자가 연 10%씩 늘고 있어 각국 정부가 다시 나서야 할 세상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1970∼80년대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펼치던 시기에 태어나 귀엽게 자란 독자(獨子)가 많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 한 이불을 덮고 살면서 양보하며 산다는 것 자체에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이럴수록 부모들의 자식 사랑에는 커트라인이 없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다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 별 여섯 개짜리 특급호텔에서의 결혼식은 물론, 평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낼 정도의 과도한 혼수가 실려간다. 혼수에 관한 한 부모나 자식이나 그 욕심에 한계가 없는 것은 똑같다. 많을수록 좋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몇억원은 기본이다.

과다한 혼수가 가져오는 폐해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혼수 비용이 과다할수록 자식의 결혼생활은 불행해진다. 왜 그럴까?

결혼은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기나긴 과정의 하나다. 갓 결혼한 부부는 이마를 맞대고 삶을 하나하나 그려나간다. 작은 집을 그리다가 점점 커가는 집을 그린다. 미래의 꿈을 그려넣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그 그림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그 모든 과정마다 행복이 놓여 있다. 그곳에 도달해 가며 얻을 수 있는 행복들이다. 부모들의 과다 혼수는 젊은 부부가 열심히 일해야 할 목표와 과정을 박탈하는 것이다. 희망이 없으니 부부싸움을 해도 그 골이 깊고 풀 방법도 요원하다. 혼수가 무거울수록 오히려 자식의 결혼이 빨리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다.

전통적인 독일 가정에서 챙기는 가장 중요한 혼수는 ‘세 가지 K’다.

첫째가 요리솜씨(Kohen)요, 둘째가 육아솜씨(Kind), 셋째가 신앙(Kirche)으로 평생 남에게 봉사하는 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혼수란 자식과 같이 딸려 보내는 재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능력 자체라고 믿는 모양이다.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은 양(羊)을 놓아 기른다.

두 종류의 양이 있는데, 하나는 ‘내림 양’이고 또 하나는 ‘오름 양’이다.

‘내림 양’은 태어난 새끼 양이 산 위에서 내려가면서 풀을 뜯어먹는 반면, ‘오름 양’은 험한 산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서 풀을 뜯어먹는다.

‘내림 양’은 자기 편한 대로 힘 안 들이고 풀을 뜯어먹으며 내려가지만 산밑에 도달할 때쯤에는 먹을 풀이 없어져 결국 비실거리다 굶어 죽는다.

반면에 산을 힘들게 거슬러 올라간 ‘오름 양’ 새끼들은 힘들고 적응하기는 어려워도 올라갈수록 먹이가 풍부해 몸은 비록 마르긴 했어도 ‘내림 양’들에 비해 건강하다.

이렇게 산을 힘들게 올라가는 새끼 양들의 뒤에선 하나같이 엄한 어미 양들이 새끼 양들을 뿔로 찔러대며 밀어올린다고 한다. 진정 자식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