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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자(李花子, 1916~1950)는 지난호의 장일타홍(張一朶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천권번(仁川 券番) 출신의 유행가 가수였다. 권번에 대해서는 전호에서 대강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글을 인용, 설명했지만 이번에는 1955년에 발간된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仁川昔今)』 중에 인천권번에 대해 기술한 내용과 함께 이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을 옮겨 본다. 연예(演藝) 자체를 천시하던 사회 분위기여서 일반인이 유행가수를 지망한다는 것은 꽤나 드문 일로서, 이화자나 장일타홍처럼 노래와 춤의 기본을 익힌 권번 기생들이 가수를 지망했을 것이다.
“인천 기생은 인천기생조합에서 어린 시절부터 기생 공부를 했다. 조합은 권번(券番)이라 했다. 권번에서는 노래와 춤을 가르쳤는데, 평양의 기생학교만은 못 했어도 선생을 앉히고 가르쳤다. 지금 용동권번 자리에는 미용사기술전수학교가 들어섰다. 기생조합 시대에 걸출한 포주 최성인
▲ 1940.3.31. 춘계 | ||
권번 기생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거기 출신 가수 이화자가 전국적으로 상당히 유명했음을 시사하는 정도다. 전호의 장일타홍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별로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아주 단편적인 기사 몇 가지가 그 시절 잡지와 신문 등에 전해질 뿐이다. 1938년 8월 1일에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 이서구(李瑞求)가 쓴 가수들의 활동이나 근황 같은 것을 소개하는 만필류(漫筆類)의 글 「유행가수 금석(今昔) 회상」을 옮겨 본다.
“<포리돌회사>는 또 같은 가수를 오래 지니고 있는 점에 단연 그 특색이 있다. 왕수복(王壽福), 선우일선(鮮于一扇), 김용환(金龍煥), 윤건영(尹鍵榮), 이 네 가수는 포리돌지 정창설초에 당시의 문예부장으로 조선 레코-드계의 가장 공로가 큰 이원배 씨가 단심성력을 기우려 모은 진용이었다. 이래 4년 동안 그 같은 가수를 가지고 당당 대회사의 가수진을 대항해 가는 것을 본다면 이원배 씨의 선배다운 점을 인증치 않을 수 없다. 요사이 신인으로 이화자(李花子), 조영심(趙影心) 두 미희가 전속진에 가당되어 있다. 역시 신민요(新民謠)의 선우일선은 각 사를 통해서 제 일인자가 될 것이요, 김용환 군의 독특한 노래는 아직도 앞으로 기대가 크다고 본다. 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
데뷔 3년 정도가 되었을 신인 이화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호평을 읽을 수 있다. 이 밖에 다른 기록으로는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춘계 독자 위안회 오케- 호화 진용, 당야(當夜) 출연 예술가 소개’ 기사가 있다. 이화자는 동아일보사 주최 독자 위안 무대에 섰던 모양으로, 오늘날에도 널리 이름이 회자하는 쟁쟁한 가수들과 나란히 사진과 간략한 프로필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일류 가수로서 인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명단을 보면, 서봉희(徐鳳姬), 홍청자(洪淸子), 손목인(孫牧人), 이화자(李花子), 장세정(張世貞), 조영숙(趙英淑), 이난영(李蘭影), 김정구(金貞九), 이준희(李俊嬉), 이인권(李寅權), 박향림(朴響林), 「아리랑 보이즈」, CMC뺀드 등이다.
▲ 인천권번 1934.8.12 수해의연금 모금 활동 | ||
또 한편 1934년 8월 12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인천지국발로 “인천권번 기생들도 의연금 모집 활동, 홍등 하에서 웃음 파는 그들의 이 가상한 독행!”이라는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그 기사는 당시 삼남(三南)에 발생한 큰 수해의 복구를 위해 의연금을 모으는 데 앞장선 ‘인천부 외리, 인천항권번’ 이화자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이때는 이화자가 가수가 되기 직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느 백과사전에는 이화자가 1935년 「초립동」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 이동순은 그녀의 데뷔 연도를 1936년, 나이 20세 때로 기록하며 1년의 차이를 보인다. 데뷔한 곳은 <뉴코리아레코드사>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부른 가요 「초립동」은 이른바 신민요 스타일의 작품으로 팬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이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레코드 상점 앞에 모여 섰고, 이화자의 사진과 노래 가사가 인쇄되어 레코드 상점마다 배포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1936년에 「섬 아가씨」「처녀 18세」 등의 노래를 발표하고, 1937년에는 「천리몽」으로 인기를 얻는다.
이렇게 인기가 치솟으면서 이화자는 <포리돌레코드사>로 스카우트되어 전속을 옮긴다. 그리고 1937, 8년 무렵에 <오케-레코드>로 다시 한 번 전속을 옮긴다. “백만 번의 갈채를 거듭한 이화자 독점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꼴망태목동」이 1938년 대히트하면서 ‘민요의 여왕’으로 군림하는데 이 노래는 <오케-레코드>로 전속을 옮긴 후 첫 작품이었다.
“선이 굵은 구수한 목소리의 넋두리 같은 표현과 콧소리의 간드러지는 흥얼거림 등 독특한 창법이 특징”이었던 이화자는 이어 1940년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듯한 「화류춘몽(花柳春夢)」과 또 다른 가요 「살랑 춘풍(春風)」등을 내놓아 팬들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거기까지였다. 이후 이화자는 나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일개 기생에서 민요의 여왕으로 팬들의 사랑을 온몸에 누린 성공의 뒤안길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고독과 초조와 암흑과 절망이 있었는지 모른다.
담배를 많이 피우던 이화자는 그 무렵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끝내 아편 중독자가 된 것이다. 광복 후 만신창이가 된 이화자는 서울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다가 전쟁이 나던 1950년, 혼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화자는 과연 인천 출신인가? 대부분의 기록이 이화자의 출생지를 부평으로 적고 있지만, 이동순 시인은 그녀의 출생지가 ‘경기도 부평’이라는 설이 신빙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을 증명할 자료가 현재는 없다. 그러나 고일 선생의 “이화자는 인천 기생으로…”라는 말투는 그녀가 단순한 인천권번 소속 기생이라는 의미보다는 인천 사람이라는 뉘앙스에 더 가깝다. 그의 저서 『인천석금(仁川昔今)』이 자신이 살았던 1920~30년대를 주로 해서 인천과 인천인을 더듬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 이화자 프로필 확대 | ||
그는 또 이화자가 권번이나 정악전습소 등에서 정식으로 수련을 받은 기생도 아니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류다. 이동순은 이화자의 가수 데뷔 역시 ‘1930년대 부평의 어느 술집에 노랫가락을 잘하는 작부의 소문이 서울에까지 났고, 그래서 마침내 작곡가 김용환에게 발탁’된 것으로 적고 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나 최소한 그의 기록은, 인천의 증인(證人) 고일 선생의 “이화자(李花子)는 인천 기생으로 「어머님 전 상서」를 레코드에 취입했다”는 부분과는 배치되는데, 인천에서 성장하고, 인천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말년까지 줄곧 인천에서 산 고일 선생의 말이 정확할 것이다. 더구나 앞에 인용한 조선중앙일보 1934년 8월 12일자 수해 의연금 모금 기사에도 이화자는 인천권번 기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화자. 그녀의 수많은 노래 중에 꼭 한 곡, 자서곡(自敍曲)이라고 이름 붙여 1939년에 발표한 곡이 있다. 제목하여 「어머님 전 상백(上白)」이다. 자신의 삶과 애환을 자서전처럼 풀어 담은 이 노래 일절을 옮기며 불꽃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30대에 생을 마감한 인천 가수 이화자를 생각해 본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옵나이까.
복모구구무임하성지지(伏慕區區無任下誠至之)로소이다.
하서(下書)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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