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世上萬事

[김정운의 남자에게] 옆 테이블의 여인. 유방의 역사.언어와 생각.

경호... 2012. 7. 1. 11:47

 

[김정운의 남자에게]

옆 테이블의 여인

 

고혹적인 모습 훔쳐보며
음탕한 말들을 마구 해댔는데
그 여인이 한국인이라니…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일본 교토 기온 인근의 고서점가를 함께 걷던 빡빡머리 사진작가 윤광준과 20년 전 겨우 시집 한권 쓴 게 전부인 ‘시인’ 김갑수는 중고음반가게를 보더니 갑자기 환장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가게의 모든 시디(CD)와 엘피(LP)를 뒤집었다 엎었다 한다. 투덜대는 내게 둘은 재즈의 역사를 설명해가며 자신들이 방금 구한 음반의 가치에 감격해했다.

 

고서점가에서 책을 뒤지면서는 일본의 우키요에와 인상파의 관계, 혹은 근대언어가 먼저 형성된 뒤에야 근대사회의 성립이 가능했던 일본의 모더니티에 관해 토론했다. 서양의 광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우아하고 산뜻한 주말 시장을 지나면서는 서구를 흉내 내다가 더 서구적이 되어버린 일본의 옥시덴탈리즘의 기원에 관해 흥분해 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에 혼자 지내며 시도 때도 없이 외롭다는 문자를 남발하는 나를 위문공연차 방문한 광준이형, 갑수형과 함께 보낸 지난 주말의 이야기다.

 

문화심리학자이며 나름 베스트셀러 작가, 사진작가 겸 오디오평론가, 시인이자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우리 셋이 나누는 고담준론의 수준은 그 끝을 몰랐다. 그 대화를 녹음해서 풀어쓰기만 해도 바로 폼 나는 책이 될 듯했다. 교토의 뒷골목을 한없이 걷던 우리는 골목 어귀의 작은 커피숍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다다미 바닥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특이한 카페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인에게 예민한 시인의 눈길이 자꾸 옆 테이블로 향했다.

 

묘한 분위기의 젊은 여인이 혼자 책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왜 이 찬란한 봄날 오후 혼자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까, 그 여인이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일까를 우리는 궁금해했다.

시인은 헤어스타일을 조금만 바꾸면 이영애 못지않은 고혹함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는 흘끔흘끔 그녀의 몸매를 훔쳐보며 훌륭한 누드사진의 조건을 들먹였다. 나는 내 일본어 실력으로도 충분히 합석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우리의 이야기는 고등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담배 훔쳐 피우며 나누는 음담패설 수준으로 곤두박질했다. 어차피 이 커피숍에는 우리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도 없고, 우리의 정체를 알 수도 없는 일본인들뿐이었다. 우리는 누가 더 과감한 에로틱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시합하듯 쏟아냈다. 우리의 상대역은 물론 그녀였다. 그 사이에도 시인은 틈틈이 그 여인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온갖 상냥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순간 옆 테이블의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카페 주인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아뿔싸, 분명히 한국말이었다. 순간 얼음이 된 표정으로 일제히 카운터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 주인은 자신이 한류 팬이라고 했다.

한국 손님들에게는 한국말로 인사한다고도 했다. 아, 옆 테이블의 그녀는 한국 사람이었다.

 

동시에 입을 가리고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카페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바로 복기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모더니티, 우키요에와 인상파, 재즈의 역사에 관한 폼 나는 이야기는 카페에 들어오기 전에 죄다 끝났다.

시인과 내가 주고받은 에로틱한 상상력은 채찍·촛농이 난무하는 사도마조히즘이었다. 음탕한 단어는 사진작가가 제일 많이 썼다. 그날 밤늦도록 우리는 기온의 선술집에서 그 민망함과 ‘쪽팔림’을 반복해 이야기하며 맥주잔을 들이켰다.

 

그들은 이제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방바닥을 뒹굴며 혼자 미친 듯 자꾸 웃는다. 행복한 주말이었다.

나이 들수록 민망함과 ‘쪽팔림’을 함께할 친구가 그리운 까닭이다.

 

 

 

 

[김정운의 남자에게]

‘가슴 깊이 파인 옷’의 구성주의

 

언젠가부터 난 소설책을 잘 읽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설가가 그려내는 상상의 세계에 푹 빠져 들어갔다가 내 건조한 현실로 다시 돌아올 때의 바로 그 허무함 때문이다. 난 소설을 읽다 보면 며칠이고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산다. 특히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설레고, 슬프고, 아프다. 그러나 소설의 그 풍요로운 정서에서 빠져나오면 퍽퍽하기 그지없는 오십대 아저씨의 일상이다. 그 배신감은 말도 못한다.

어릴 적 이소룡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일어나는 일과 사뭇 흡사하다. 이소룡의 영화를 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미간을 찌푸리며 사방을 노려보게 된다. 걸음도 달라진다. 고양이처럼 발바닥을 붙여가며 사뿐사뿐 걷는다. 그러다가는 꼭 힘센 놈에게 걸려 형편없이 얻어터지게 된 후, 질질 짜며 돌아서던 어린 시절의 바로 그 처량함이다.

 

내 안의 유치한 로맨티시즘을 극복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살기로 한 요즘, 난 주로 역사책만 읽는다.

뭐 심각한 한국 근현대사, 유럽사, 그런 거 아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의 역사책이다.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역사책들을 간단히 나열해보면 이렇다.

사생활의 역사, 구경꾼의 역사, 철도여행의 역사, 침실의 문화사, 소문의 역사, 나체와 수치의 역사, 여성의 역사, 먹거리의 역사, 똥오줌의 역사 등등. 족히 수십권은 되는 것 같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책은 꽤 오래전에 읽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여성학자 마릴린 얠롬의 <유방의 역사>다.

 

얠롬에 따르면 여인들의 ‘가슴’은 문화사적 개념이고, 이 개념이 여성의 체형 변화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의 가슴 크기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따라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모성이 강조되던 시대에는 여성의 가슴이 실제로 풍만해지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질수록 여성의 가슴이 작아졌다. 한때 마릴린 먼로처럼 가슴도 크고 엉덩이도 큰 여자가 사랑받던 시대에 삐쩍 마르고 가슴도 거의 없는 여성의 몸이 이상적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이유도 여성의 사회진출과 깊은 상관이 있다는 거다.

 

거식증 환자에 가까운 몸매의 모델들의 워킹을 기억하는가? 가슴도 없고 엉덩이도 작은 소년처럼 날렵한 여성의 몸이 강조된 이유는 남성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처럼 우람한 몸을 가질 수 없는 여성이 남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민첩한 소년의 몸매를 갖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성들에게는 이중의 과제가 주어진다. 사회적 활동과 더불어 모성적 매력은 물론 에로틱한 매력까지 가져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슴만 크고 엉덩이는 소년처럼 날렵한 기형적 몸매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철없는 한국 남자들의 ‘큰 가슴 페티시’는 이런 시대적 변화의 기회주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사’라고 일컬을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 관한 역사책을 읽다 보면 삶에 대한 ‘구성주의적’ 통찰을 갖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여겨왔던 내 일상의 모든 게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것들의 숨겨진 의도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여인들의 가슴 깊이 파인 옷을 드러내놓고 봐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아예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이 난감한 계절의 당혹스러움도 마찬가지다. 가슴의 크기까지 강요당해온 여인들이 이제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복수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김정운의 남자에게]

내가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내 삶의 콘텍스트에 관한 통찰을 가능케 한다

요즘 피부로 느끼는 경험이다

 

 

‘요즘 행복하세요?’라고 묻고 ‘최근 데이트는 몇 번이나 했나요?’라고 물으면, 두 질문의 대답은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다. 그러나 두 질문의 순서를 바꾼다.

‘최근 데이트를 몇 번이나 했나요?’를 먼저 묻고 ‘요즘 행복하냐?’고 물으면, 데이트를 많이 한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질문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대답의 내용이 달라진다.

 

‘콘텍스트’(context)가 바뀌면 ‘텍스트’(text)의 의미가 바뀐다. 콘텍스트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텍스트가 아예 반대의 뜻이 되기도 한다.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대로 그저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 삶의 콘텍스트가 바뀌는 것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일기나 여행을 통한 자기성찰 등 내 삶의 콘텍스트를 파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외국어 공부를 새롭게 시작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언어는 곧 생각’이다. 현대 심리학의 이론적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장 피아제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37살에 사망한 러시아의 심리학자 비고츠키의 주장이다. 피아제에게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언어의 다양성에서 기인하는 문화적 차이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추상적 사고의 논리는 언어에 상관없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고츠키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생각은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 없이 생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고츠키는 생각을 ‘내적 언어’(inner speech)라고 정의한다. 언어를 습득하면서 아동은 언어로 매개되는 모든 고등정신기능을 ‘내면화’(internalization)한다. 따라서 비고츠키에게 발달이란 문화적 존재가 되어 감을 뜻한다. 논리적인 내적 경험의 ‘외면화’(externalization)를 성숙으로 이해하는 피아제와는 정반대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모국어에 기초한 구체적 텍스트를 상대화할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콘텍스트에 관한 통찰을 가능케 한다. 요즘 내가 일어 공부를 ‘자발적’으로 시작하며 피부로 느끼는 경험이다. 순수한 관심에서 이렇게 외국어를 공부해보긴 처음이다. 학창시절 입시를 위해 억지로 영어를 익힐 때나, 독일 유학 시절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데어 데스 뎀 덴’을 반복해서 외울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아주 사소한 문법의 차이, 혹은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익힐 때마다 내가 살고 있는 문화적 콘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생긴다. 왜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을까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아주 즐겁다.

 

요즘 난 메이지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이 서구의 낯선 단어들을 어떤 방식으로 번역했는가에 관해 호기심이 급발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culture, society와 같은 단어들을 왜 ‘文化’, ‘社會’로 번역했는가에 관한 시대사적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매우 유식해질 것 같다는 격한 흥분도 느낀다. 동시에 늙으면 도대체 뭐 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아주 간단히 해결했다.

 

나는 나중에 늙으면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을 가방에 넣고 비행기 타는 게 꿈이다. 그리고 젊고 예쁜 여자 옆에 앉아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을 차례로 꺼내 읽을 거다. 독어책은 작게 소리를 내서 읽을 거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영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옆 좌석에 안 예쁜 여자가 앉아 있으면 바로 내려 비행기표를 다시 끊을 거다. 아무튼 난 그렇게 곱게 늙어갈 거다.

 

젊고 예쁜 여자 옆에서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을 번갈아 읽어가며….

 

2012.04.09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