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達摩大師語錄

▒ 達摩大師 語錄 ▒ - 1. 二入四行論(이입사행론) (6)

경호... 2012. 2. 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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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아르파이아 · 롭상 랍가이 著, 서보경 譯

      1. 二入四行論(이입사행론) (6) 이 말들은 이 책을 기록한 사람에게서 나온 말들이다. "어떤 신이나 인간도 잘못된 행위가 어떻게 그 열매를 맺는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열린 가슴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이런 말은 절대로 달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역경을 만나도 걱정하지 말라. 그대의 의식은 그것을 통해서 깨어나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그대는 원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억울함을 참음으로써 그대는 도(道)에 들어서게 된다. 이 말들 역시 달마의 말이 아니다. 둘째,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의 자기란 것이 없으며 단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 역시 달마의 말이 아니다. 그는 어떤 인연도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우선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순수한 없음'일 뿐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순수한 없음'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대를 지배할 수 있어도 그대의 존재, 즉 무아를 지배할 수는 없다. '그대 자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연', 이런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 사회에 또 하나의 기생충을, 착취자를 만드는 것이다. 달마는 그런 인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고통을 당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모두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복된 일, 즉 부와 명성을 얻는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일 뿐이다. 이 말 역시 달마의 말이 아니다. 달마는 과거나 미래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현재만을 신뢰한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의 결과는 그림자처럼 즉시 따라온다. 그것의 보상이 미덕이라면 그것의 벌은 죄로 나타난다. 달마는 단순한 사람이다. 그는 철학자들처럼 복잡하지 않다. 그리고 그는 여느 성직자처럼 사회의 기생충이 아니었다. 인연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무로 돌아간다. 그러니 기뻐할 것이 없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연을 따라오는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요가 없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도(道)를 따르게 된다. 이 말은 달마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일의 성공이나 실패로 인해서 그대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하나의 꿈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이다. 그 속에서 그대는 자신을 지켜보는 이로 남아 있어야 한다. 셋째,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욕망에 빠져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마음을 무위(無爲)에 고정시키고 몸마저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이 말 속에는 달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말들이 약간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달마의 뜻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어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달마의 말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계는 공허하다.'는 말 역시 달마가 한 말이다. 그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꿈처럼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모양은 다를지 몰라도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인생 전부가 꿈의 연속이라고 본다. 그대는 어떤 때는 기분 좋은 꿈도 꾸고 어떤 때는 악몽도 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꿈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으며 혹시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더라도 그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꿈이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은 불타는 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불타는 집 속에 들어 있는 한 그 사람은 고통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 속에서 평화롭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삼계란 육체와 마음과 영혼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것을 특히 불교에서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누어 말한다. 여기에 네 번째 세계가 있다. 그것은 '투리야(turiya)'라고 부르는 세계이다. 사실 그것은 세계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세계가 아니다. 세계 바깥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평화 속에 존재하는 세계 바깥이다. 넷째는 다르마(Dharma)를 따라 사는 것이다. 다르마란 만물의 순수한 본성을 일컫는 것이다. 다르마의 눈으로 보면 모든 현상은 공허하게 보인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이 말은 순수하게 달마로부터 나온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다르마란 어떤 것도 그것이 존재하는 실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존재한다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곧 다르마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진리를 충분히 체득하여서 다르마를 따라 살게 된다. 이 말은 책에 기록한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다르마 그 자체에는 그 어떤 것도 보존할 것이 없다. 따라서 다르마를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몸과 소유물을 아낌없이 바친다. 그들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집착도 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남을 도울 수 있으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다른 여섯 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 여섯 가지 덕을 행하고도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다르마를 따라 사는 것이다. 이 문장 전체도 달마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단지 '그들은 전혀 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만 달마가 한 말이다. 이 세상의 경전에 적혀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고 산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은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도둑이건 위대한 인격자이건 아무런 차이도 없다. 꿈속에는 그대는 도둑도 되고 훌륭한 인격자도 될 수 있지만 꿈을 깨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가 꿈속에서 도둑이 되었다고 부끄럽게 생각하겠는가? 그 모두가 물거품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달마를 알면 어떤 것이 그의 말인지 정확히 가려낼 수 있다. 그대가 지금 따르고 있는 철학이나 가치관, 혹은 그대가 행하고 있는 모든 수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대는 비로소 다르마를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손을 놓는다. 그는 망상을 그치며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것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축복 받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대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道) 안에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어떤 것이 달마의 말이고,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려낼 것이다. 그리고 내 말은 진실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달마의 말이라면 모든 것에 찬성한다. 물론 학자들도 자신들 나름대로 학문적인 구분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학자가 아니다. 나는 달마이다. 그러니 나는 어떤 것이 내 말이고 어떤 것이 내 말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