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達摩大師語錄

▒ 達摩大師 語錄 ▒ - 1. 二入四行論(이입사행론) (5)

경호... 2012. 2. 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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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아르파이아 · 롭상 랍가이 著, 서보경 譯

      1. 二入四行論(이입사행론) (5) 궁극에 이르는 길은 많다. 이 말은 달마가 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진리에 이르는 길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며 아무 곳에도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대는 어디를 향해 가는 행위를 당장 그만두라. 그저 그대가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라. 진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은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길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 바로 그대 안에 머물러 있으라. 일단 그대가 어떤 길에 들어서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수의 시작이다. 이것이 바로 달마의 말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두 가지란 원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이다. 달마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를 궁극의 실체로 인도하는 이론 같은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이론이란 마음의 장난이다. 그리고 실천의 길이란 더욱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신념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고 그대는 그것을 따라 자신을 훈련시킨다. 그때 그대는 흉내 잘 내는 원숭이 한 마리에 불과하다. 그대의 본래 면목을 결코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실천도 필요 없다. 그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완벽하다. 더 이상 다른 그 무엇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그대는 자신의 존재 속에 정주(定住)하지 않고 주변을 방황해 왔다. 그대가 자신 속에 정주할 때 그때는 두 가지 길이 아니라 어떤 길도 사라지고 만다. 첫째, 원리적인 방법이란 경전에 의해서 불교의 본질을 알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똑같은 진리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감각과 망상에 의해 가리어져 있어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달마는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믿는다'는 말은 장님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믿음이 그대의 시력을 찾아줄 수 없다. 어떤 선입견도, 어떤 견해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대에게 빛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것들은 체험이 아니다. 달마는 오직 체험에만 관심이 있다. 감각과 망상에 의해 가리어져 있어… 이런 말은 평범한 수준이다. 달마의 번득이는 지혜에는 미치지 않는 진부한 말이다. 그래서 망상을 등지고 실체를 향한 사람은 벽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거기에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경전을 대하고서도 흔들림이 없으며, 침묵으로 동의하며 이론과 하나를 이루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로 도(道)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이 문장에서 이론과 하나를 이룬다는 말은 체험과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바꾸어져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이 부분이 달마의 생각임을 나는 전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생각을 버린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떨쳐 버리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의 마음에 있는 화면은 벽과 같이 텅 비어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그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그대 속에 에고(ego)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할 만한 존재가 없는 것이다. 존재만이 있을 뿐, 나는 없다! '무아(無我)'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의 근본 사상이다. 달마 역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가 일으킨 모든 혁명의 머릿돌이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조차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달마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과 성자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들은 생각이 다르고 인격이 달랐지만 그들의 주체를 이루는 내면 자체는 같은 것이다. 죄인과 성자는 똑같다. 죄인은 불필요한 죄의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성자는 '나는 너희들보다 거룩하다.'는 불필요한 에고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아라는 점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같다. 경전을 대하고서도 흔들림이 없으며… 이런 사람들은 경전에 의해서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무아'를 경험한 것이다. 그들은 에고로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 의식에 도달해 보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경전이 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침묵으로 동의하며 이론과 하나를 이루어… 이 부분에서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첨가되었다. 달마의 말로 바꾸자면 그것은 '이론과 하나를 이루어'가 아니라 '체험과 하나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이 말은 달마에게서 나온 말이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란 말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말이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대는 움직이지 않는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대는 마치 그대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지도 말고 노력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때 그대는 존재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실천적인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행(四行)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이 말이 불교 경전에서 나왔지 달마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이 말은 불교 경전에 나온다. 이런 말은 석가모니 부처는 말할 수 있어도 달마는 할 수 없다. 불교 경전에는 '억울함을 참고 인연을 받아들여라.'고 나와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혁명에서 도피하도록 만든다.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석가모니 부처가 가르친 방법으로서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 전생에 지은 나쁜 행위가 그대에게 억울한 상황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하나의 벌이다. 그것에 대해 불평하거나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잠시 겉으로만 즐거울 뿐 그대의 모든 아름다운 개성을 파괴시킨다. 그것은 그대 속에 있는 진정한 혁명의 싹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의 이런 사상 때문에 인도는 2,500년 동안 가난함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대가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참으라고 가르친다면, 모든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면, 그대는 노예 제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노예 제도를 찬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제도를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의 형편이 전생에 지은 업의 결과라는 사상은 사회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어떤 나라도 2,500년 동안 노예 제도를 그대로 간직해 온 나라는 없다. 하지만 소위 자유의 시대라고 부르는 오늘날에도 인도에는 노예 제도가 그대로 있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기탄잘리(Gitanjali)>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 책은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타고르는 그 즉시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캘커타에서 살았고 캘커타 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타고르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는 거절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당신들은 지금 명예박사 학위를 나에게 수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노벨상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당신들의 정신은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있다. 내 책은 이미 인도에서 20년 전에 출간되었고, 지금 나온 번역본은 원본보다 아름답지 않다." 시는 다른 나라말로 번역될 수 없다. 만약 시를 번역한다면 그 의미만 전달될 뿐 그것이 지닌 향기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만다. 석가모니 부처는 인도인의 노예근성과 가난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가르침으로 해서 그것을 잘못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혁명에 대한 그 자신의 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의 식물인간처럼 살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혁명적 기질은 그대 삶의 흐름 그 자체이다! 나는 달마 같은 사람이 '억울함을 참고 인연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차라리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다르마를 따라 산다'는 말은 달마의 말이다. 그대는 '다르마(dharma)'란 말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번역될 수 없는 말이기도 하지만 쉽게 다른 말로 설명할 수도 있다. 다르마는 사물의 본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불의 성질은 뜨거운 것이다. 얼음의 다르마는 찬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다르마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아이며 침묵이며 자비심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모든 구하는 행위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대를 본질에서 벗어나게 한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달마가 가르친 진리의 핵심이다. 아무 데도 가지 말라. 그대의 에너지를 내면으로 쏟아 부으라. 외부로 향한 마음의 창을 닫고 그 안에 있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다르마가 무엇인지, 그대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라. 마치 그대가 아무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라. 그때 그대는 드넓은 자비심을 갖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삶 전체가 하나의 현존이며, 그대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첫째,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나는 세속적인 삶 속에서 본질을 놓치고 생명의 여러 가지 겉모습을 바꾸어가며 방황해 왔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화를 내었고 까닭 없이 남을 미워하고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과거의 잘못에 대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