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열 가지 번뇌(煩惱)와 수번뇌(隨煩惱) (강의 - 1)
전번 시간에 ‘분별이 없으면 지혜다’ 이런 부분에
중요한 게 있습니다.
경계(境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우리 마음[識]이고,
내가 마음먹음으로서[作意] 생기는 게 마음[識]이고,
또 대상을 분별(分別)하면서 마음[識]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겨나는 마음에 대해서
오늘 열 가지 번뇌와 수번뇌를 얘기 하겠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거기에 따르는 번뇌가 있습니다.
이 번뇌를 심리라 그러는데
이 번뇌에는 열 가지 근본번뇌와
근본번뇌를 따라서 일어나는 스무 가지 번뇌[隨煩惱]를 얘기 할 겁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고
거기에 따르는 심리도 같이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 그 심리 중에서 안 좋은 것,
번뇌에 대해서 오늘 공부를 할 겁니다.
묻습니다.
문 : 열 가지 번뇌는 어느 식과 상응하는 것입니까.
‘어느 식’이라는 것은 여덟 가지 마음[전오식, 말나식, 아뢰야식]이죠.
열 가지 번뇌는 여덟 가지 마음 중에 어느 식과 상응하느냐 이런 얘깁니다.
답을 합니다.
답 : 제팔식인 장식은 근본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 전혀 없다.
여기에 ‘근본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 이 부분은 본문에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번역 하시는 분이 친절하게 이 부분을 넣은 거예요.
원래대로 하면 ‘제팔식인 장식은 전혀 없다.’ 이렇게 됩니다.
아뢰야식은 열 가지 번뇌가 상응하는 것이 없다 이 말이에요.
하지만 이 아뢰야식은 근본 번뇌와 상응 합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감각이고
의식은 직관은 많지 않고, 추리하고, 대상을 분별하고,
이렇게 사량분별을 많이 하죠.
그리고 말나식도 분별은 분별인데 특징적인 것은 표가 안 난다는 거예요.
마치 잠자는 것 같이 그렇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감각으로부터 말나식 까지는 대상을 인식하는 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심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제 제팔 아뢰야식이 문제에요.
이 식은 『대승기신론』에 보면 업상, 전상, 현상, 세 가지로 나누는데,
여기에는 심리가 없어요.
심리가 없다는 말은 주관과 객관이 있기는 있는데
주객이 상대하지 않는 모습이에요.
아뢰야식의 세 가지 모습 중에서 현상(現相)은
경계의 모습이라 해서 경계상(境界相, 객관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전상(轉相)은 능히 보는 모습, 능견상(能見相, 주관의 모습)이라 그럽니다.
다음은 업상(業相, 주객이 나눠지지 않은 모습), 업의 모습, 움직이는 모습이죠.
이 세 가지 특징적인 것이 머냐하면,
주객은 있는데 심리가 없고, 심리가 없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거죠.
다만 근본번뇌[無明]와 상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숭산스님이
화두를 들 때 아무것도 모르는 체 들어가라, 이런 말씀을 하셨죠.
우리가 뭘 알아야 되는데 왜 ‘모르는 체’ 라는 말을 쓰느냐하면,
모른다는 것은 심리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얘기합니다.
주관과 객관이 상대하지 않으면 앎이 없어요.
무지(無知)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주관과 객관이 상대해서 저것이 무엇이라고 아는 것을 번뇌라 그러고,
무지는 주객이 상대하지 않아서 앎이 없기 때문에 무지라 그럽니다.
이런 무지 상태는 대상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게 없기 때문에 무명이라 하는 거죠.
주객이 상대하지 않으니까 진리를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깜깜한 거예요.
그렇지만 이것도 알아야 됩니다.
주관과 객관이 없는 상태로서의 무지 같으면 이것은 진심, 참마음입니다.
그래서 진심무지(眞心無知)라 그래요.
그런데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긴 나눠져 있는데
주객이 상대 안하니까 번뇌가 없는 거죠.
이것이 무명인데, 업상(業相)은 주객이 나눠지지 않은 모습이 아니냐 하지만
마음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이것도 무명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업상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해요.
그리고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있습니다.
법계가 하나인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그럽니다.
이 근본무명을 타파해야 만이 부처님이 되는 거죠.
이런 것들은 전부다 아뢰야식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제칠식 부터는 주관과 객관이 상대해서 심리가 분명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깨쳐들어 가려면 주객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야 됩니다.
주객이 없는 상태가 ‘모르는 상태’에요.
그 모습이 참마음도 주객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죠.
요즈음 정치를 보면 ‘코드 인사’라는 말을 쓰잖아요.
그처럼 아뢰야식과 코드를 맞추려면
주객이 없는, 심리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지속해야 만이 맞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주객마저 소멸하면 참마음하고 코드가 맞는 겁니다.
이렇게 코드가 맞아야 참마음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깨달음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하면 선정에 들게 되는데,
이것은 주객이 나눠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진리 그 자체는 주객이 없다 이거죠.
주객이 있으면 마음이 생멸하지만 없으면 마음 생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정 상태를 만들어 가야만이
코드가 맞아서 본연의 마음자리에 들어가기가 쉬워 지는 겁니다,
번뇌를 얘기하다보니까 약간 핀트가 빗나갔네요.
그 다음에,
제칠식인 말나식은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한다.
제육식인 의식은 열 가지를 다 갖추어 상응한다.
전오식(前五識)은 오직 탐(貪)과 진(瞋)과 치(癡) 세 가지일 뿐이다.
네 가지는 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이죠.
아치(我癡)는 어리석음, 아견(我見)은 ‘나’라는 견해,
아애(我愛)는 나를 사랑하는 것, 아만(我慢)은 ‘나’라는 것을 높이는 거죠.
이런 네 가지 번뇌가 붙는다는 거죠.
이 말나식은 열 가지 번뇌와 수번뇌가 상응하지 않고
왜 네 가지 번뇌만 상응하느냐, 이런 문제가 있죠.
이것도 역시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열 가지 번뇌와 수번뇌는 무엇을 대상으로서 일어나느냐 하면,
바깥 대상을 인식하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말나식의 네 가지 번뇌는 안으로 그 대상을 삼아요.
아뢰야식의 주관[見分]을 가지고 그것이 ‘내다’, ‘내것이다’ 인식을 합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아뢰야식의 경계상을 인식해가지고 ‘내것이다’ 하고
아뢰야식의 능견상을 인식해가지고 ‘내다’ 인식하는 겁니다.
이렇게 안으로 인식하는 데에 나 아(我)자가 붙기 때문에
여기에는 열 가지 번뇌하고 수번뇌가 없는 겁니다.
이런 얘기는 굉장히 공허할 수가 있습니다.
공허하다는 것이 말나식은 의식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다만 이것은 ‘아, 그렇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학습할 뿐이에요.
그렇지만 수행을 하는 사람은 어렴풋이 알게 되죠.
‘제육식인 의식은 열 가지를 다 갖추어 상응한다.’
열 가지 다 갖추는 게 근본 번뇌인데요,
이것을 줄이면 여섯 가지[탐진치만의견(貪瞋癡慢疑見)]가 됩니다.
그렇지만 견(見)도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누기 때문에 열 가지가 되는 거죠.
의식은 이것을 다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전오식(前五識)은 오직 탐(貪)과 진(瞋)과 치(癡) 세 가지일 뿐이다.’
감각은 직관이거든요.
여기에는 대상을 사유한다든지 추리한다든지, 이런 것은 없어요.
그렇다면 탐진치는 직관적으로 오는 거죠.
누군가 비난을 하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벌컥 화를 내죠.
또 어떤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면 갖고 싶다는 마음이 즉시 드는 것처럼
욕심 부리는 자체가 직관적입니다.
어리석음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감각에는 탐진치가 있다 이거죠.
직관 속에는 교만하다든지 삿된 견해라든지 의심한다든지,
이런 견해는 없습니다.
천진도인(天眞道人)이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죠.
천진스럽다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분별심이 없는 걸 얘기 합니다.
옛날에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
해인사 행자교육에서 번뇌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어느 행자가 질문을 했어요.
자기가 천진도인을 만났대요.
어느 시골에 사시는 거사님인데 분별심도 없고 정말 맑고 깨끗하더라,
그렇게 봤을 때 천진도인이 아니냐,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혹시 돼지나 닭은 잡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시골 노인이니까 잡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 사람은 천진도인이 아니고
불오염무지(不汚染無知)가 꽉 차있는 무지의 한 사람이다.
무지는 무진데 오염되지 않은 무지, 이게 어리석음이다.
별 생각 없이 소, 돼지 때려잡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부다 무지에 속합니다.
보통 아주 깨끗하게 사시는 분들을 보면
방안에 개미 한 마리 기어가는 것을 못 보고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죽여요.
이런 것은 전부 어리석음에 속합니다.
모든 존재의 생명의 무게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같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작으니까 꾹꾹 눌러 죽이는 거죠.
이런 것이 치(癡), 어리석음에 속합니다.
탐욕과 성냄은 금방 드러나지만 어리석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지식인으로서 훌륭한 인품을 가진 분이라면 존경은 받지만
이렇게 생명을 죽이는 것은 전부다 무지에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무지는 지식하고 관계없어요.
생명이 있는 개미, 모기, 파리, 이런 미물들은
‘여기 오시지 말고 다른 데로 가시라’고 기도하고 발원하면 안 나타납니다.
아무리 미물이라고 다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탐진(貪瞋)은 드러나지만 치(痴)는 잘 안 드러나는 것이고,
이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탐욕과 성냄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여기서 열 가지 번뇌는 전부다 의식상에서 일어난다는 거죠.
단지 전오식은 열 가지 중에서 세 가지만 일어난다는 것을 얘기 합니다.
옛 스님은 이것을 풀어서
“오식(五識)에 단지 탐․진․치 세 가지만 있는 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아만과 의심 등의 잘못된 견해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만과 의심 등의 잘못된 견해는
반드시 생각을 따라 계탁 분별하는 것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라는 것은 직관이 있다는 말인데
이것을 감관적(感官的) 직관(直觀)이라 그럽니다.
‘계탁(計度)’은 헤아릴 계(計)자, 헤아릴 탁(度)이죠.
이 ‘탁’은 법도를 의미할 때는 ‘도’로 읽습니다.
또 “아만은 재고 따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열의 승부를 가리기 때문이다.
의심은 머뭇거리고 선택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잘못된 견해는 따지고 추론하여 구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식에는 이와 같은 행상(行相)이 없다”고도 하였다.
아만(我慢)은 재고 따진다 이거죠.
우열을 가리기 때문에 아만이라 그랬어요.
우쭐하는 것은 상대보다 내가 높다고 비교해서 따지는 거죠.
야! 이거 참, 나도 아만이 많구나! ㅎㅎㅎ
저도 가끔가다가 우쭐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ㅎㅎㅎ
이거 참, 보통일은 아니네!
‘의심은 머뭇거리고 선택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야, 저도 의심 있습니다.
머뭇거리고 선택하는 게 있거든요.
‘잘못된 견해는 따지고 추론하여 구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지고 추론하고 구한다면 생각을 깊이 한다는 거죠.
이렇게 해서 구한다면 이게 잘못된 견해네요.
‘그러나 오식에는 이와 같은 행상(行相)이 없다”고도 하였다.’
행상(行相)은 행하는 모습이죠.
우리가 심리에 대한 공부를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 조금 알면
내가 지금 생각이 일어나는 게 어떤 번뇌에 속하는지 알 수가 있겠죠.
사실은 이 번뇌라 하는 것이 골치 아파요.
왜냐하면 왕이 아니고 신하거든요.
왕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신하고 안 된다고 하면 못합니다.
신하를 꼼짝 못하게 누르고 있는 독재자라면 다르겠죠.
그렇지만 왕이 성군(聖君)이라면 신하들은 잘 따지지 않고 그대로 잘 따르죠.
그렇지 않는다면 번뇌입니다.
왕이 신하들 때문에 마음대로 못하는 것처럼
이 번뇌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잘 못하는 겁니다.
보리심을 일으켜서 열심히 수행해야지,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다가도
‘아이고, 자비선사는 멀어서 가기 싫어.’
이러면 번뇌가 일어나는 거예요.
제가 물어보면 멀다는 핑계를 제일 많이 대더라고.
그래서 얘기 하는 겁니다. ㅎㅎㅎ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번뇌가 적고,
마음은 있지만 공부하러 안 오는 사람은
번뇌가 있어서 자꾸 방해논다 이거죠.
그래서 이 번뇌가 문제에요.
자, 번뇌공부 또 합시다.
칠식은 아치(我痴)와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와 아만(我慢)의
네 가지 번뇌를 갖추고 있다.
칠식에서는 오히려 살피고 결정하는 힘을 갖추고 있으므로
의심을 용납하여 일으키는 것이 없다.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성나는 것이 생겨날 수 없다.
하나의 심왕(心王) 가운데에 두 가지 분별이 있지 않으므로
다른 견해가 생겨나지 않는다.
여기에 ‘칠식’은 일곱 가지 식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제칠 말나식’입니다.
‘칠식에서는 오히려 살피고 결정하는 힘을 갖추고 있으므로
의심을 용납하여 일으키는 것이 없다.’
제칠식은 살피고 결정하는 힘을 갖추고 있지만 의심은 없습니다.
드러나서 나타내는 칠식의 모습은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성나는 것이 생겨날 수 없다.’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좋아하는 것은 맞긴 맞는데, 성나는 것은 없다는 거죠.
성나는 것은 의식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의 심왕(心王) 가운데에 두 가지 분별이 있지 않으므로
다른 견해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때에 ‘심왕(心王)’은 바로 제칠 말나식을 얘기 합니다.
그런데 왜 심왕이라는 말로 바꿔서 얘기하느냐 하면,
심왕 가운데는 한 가지분별만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견해는 안 생긴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심왕에서 왕은 신하에 반대되는 게 왕인데,
왕은 지시하는 주체를 얘기하죠.
팔종식(八種識)에는 전부 이 왕(王)자가 붙습니다.
팔종식은 잘 아시다시피 전오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이죠.
제7 말나식은 아치, 아만, 아애, 아견을 신하로 거느리고 있는데
다른 것은 신하를 거느리지 않는 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 가지 분별이 있지 않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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