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분별이 없으면 지혜다 (강의)
'분별이 없으면 지혜다'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식(識)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 식은 육도를 윤회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식이 어디 갔나를 살펴보게 했죠.
살펴봤는데 다른 것은 다 간곳을 알겠는데 전신사리만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 부처님이 그것은 전생에 내 전신사리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해골의 식은 전부다 간 데를 알 수 있는데
이 전신사리의 식은 간 데를 알 수 없었던 거죠.
식이 간다는 것은 윤회를 하고 고통이 있다는 거죠.
여기에 ‘분별이 없으면 지혜다’라고 했는데
이 지혜는 가고 옴이 없는 걸 얘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지는 식의 마음으로는 고통을 못 면하지만
주객이 없는 지혜라면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걸 얘기 하는 겁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마음을 심(心), 의(意), 식(識) 세 가지로 얘기 하는데
뜻 의(意)자 의는 분리시키는 특성이 있고, 보통 자아의식을 많이 얘기 합니다.
그러나 알 식(識)자 식은 대상을 인식해서 안다고 해서 식이란 말을 한 거예요.
대상을 알려면 주객이 나눠지는 걸 얘기 하죠.
이것을 이해하면 '분별이 없으면 지혜다'라는 것이 이해가 될 겁니다.
읽어 볼게요.
묻습니다.
문 : 앞에서 이미 식(識)의 모습을 널리 밝혔는데, 어떤 것이 지혜입니까.
‘앞에서 이미 식(識)의 모습을 널리 밝혔는데, 어떤 것이 지혜입니까.’
전식득지(轉識得智), 식을 전하면서 지혜를 얻는다,
식을 의지하지 말고 지혜를 의지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선정은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거나
주관과 객관을 해체시키면 선정을 얻을 수가 있어요.
지혜는 분석해 들어갑니다.
대상을 하나하나 쪼개듯이 분석을 하면 그 본질을 캐 낼 수가 있습니다.
분별도 인연생멸을 분별하는 것은 지혜라고 「대승기신론」에서 얘기 합니다.
원인과 조건이 만나면 현상이 생기는데
이런 현상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겁니다.
이것을 잘 꿰뚫어 봐야 되요.
이런 분별은 분별이라고 얘기 안합니다.
분별 망상할 때 그런 분별이 아니라는 얘기죠.
왜그러냐 하면,
하나하나 분석하는 순간순간에
‘내 것’이라 할 만한 게 찾을 수 없고, ‘내’라고 할 게 없고
어떤 실체라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분별은 있긴 있는데 사실 분별의 내용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지혜입니다.
그 다음에 답을 합니다.
답 : 분별은 식이나 분별이 없으면 지혜다.
이것은 『대보적경』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식이라는 것은 눈이 색을 알고 귀가 소리 알며, 코가 향기 알고 혀가 맛을 알며,
몸이 느끼고 뜻이 어떤 법 아는 것을 요별할 수 있는 것을 식이라 한다.
요즘말로하면 보고 듣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식이다 이거죠.
아까도 얘기 했지만,
식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는데
주관의 식이 객관의 식을 인식하는 것,
대상을 인식해서 알면 그것이 식이라 그랬죠.
그래서 ‘안다’는 뜻으로 알 식(識)자를 쓰는 겁니다.
여하튼 주객으로 나눠지는 마음은 다 식이고
그런 분별이 없으면 지혜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분명하게 인식을 하셔야 됩니다.
선문답 중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산 속에서 지내는데
비가 많이 와서 거처 주위에 높게 자란 풀을 둘이서 베게 됐습니다.
그때 제자가 스승에 물었습니다.
“어떤 게 불법의 적정한 대의입니까?”
요즘말로하면 진리가 뭡니까 물은 거죠.
그러니까 스승이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들이밀면서
“이 날 끝에 손을 댈 수 있겠느냐?”
손 댈 수가 없죠.
이렇듯이 진리라는 것은 말을 댈 수가 없는 거죠.
생각으로도 댈 수가 없는 게 진리라는 얘깁니다.
여기서 날카로운 낫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지혜는 무엇이든지 다 잘라버리는 성질이 있죠.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지혜가 아니고 식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지혜는 인식할 만한 대상이 없기 때문에 인식을 안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안으로 고요하여 바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지혜에만 의지하여 한 가지 법에서도 분별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분별을 하는 것을 지혜라 한다.
지혜는 안으로 고요하다고 했죠.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면 ‘저것이 무엇이다’라고 앎이 일어나죠.
앎이 일어나면 분명히 거기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을 식이라 그럽니다.
하지만 대상을 인식해서 분별하긴 하는데
마음에 내용이 없다면, 늘 고요하다면 그것은 지혜라는 거죠.
무념(無念)을 설명할 때도 『육조단경』에 보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무(無)는 두 가지 상이 없는 것을 무라고 하고
념(念)이라는 것은 대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랬습니다.
대상을 분별하긴 하는데 마음에 상이 없다는 말이죠.
이것은 지혜를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대상을 인식할 때 반드시 마음 안에 뭔가 있어요.
이웃집 아줌마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거기에다 양념을 쳐 가지고 요리를 해 냅니다.
이렇게 요리를 다 해 놓고 또 다른 이웃집 아줌마 만나면
그 요리[얘기]를 내 놓는 거죠.
이렇게 돌고 돌다보면 처음 내용하고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소문이 나는 거죠.
이런 얘기는 여자분 들에게 국한된 게 아니죠.
다만 장소가 다를 뿐이지 남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직 지혜에만 의지하여 한 가지 법에서도 분별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분별을 하는 것을 지혜라 한다.’
한 가지 법에도 분별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내 마음이 고요하다는 것이고
여러 가지 분별한다는 것은 바깥 대상을 분별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안과 밖이 다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얘기 했지만,
대상을 분별할 때 대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높고 낮음, 아름답고 추함을 분별하면 그 분별은 망상이에요.
그렇게 되면 내 마음에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내 안도 고요하면서 밖의 대상도 분별할 수 있을까,
궁금하죠?
인연을 분별해야 됩니다.
원인과 조건이 만났을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분별하면
대상은 분별하지만 마음은 늘 고요하다 이 말입니다.
이런 것을 지혜라 그럽니다.
마음에 흔적 없이 고요한 상태에서 대상 분별하는 것 하고
감정이 일어나면서 대상을 분별하는 하는 게 있고,
반대로 내 마음이 대상을 분별하는데 전혀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고요하고
대상을 분별하면서 마음이 들끓어 오르는 게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와 식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주전자를 예를 들면,
이게 스텐으로 된 거죠.
스텐은 흙에서 축출해서 불에 녹이고
그것을 주전자 형태로 만들어서
사포로 광을 내고 해서 이런 모양이 됐는데
던지면 망가지고 하니까 실체가 없는 것이구나,
이런 식으로 분석하면
분석하는 매 순간순간 내 마음에는 흔적이 남지를 않습니다.
왜 남지를 않느냐 하면,
여기서는 옳고 그름이나 아름답고 추함의 가치가 없어요.
이렇게 인연생멸을 분별하는데,
그렇지 않고 A라는 주전자와 B라는 주전자를 비교를 하죠.
비교해서 분별하는 것은 인연생멸 분별이 아닙니다.
비교분별은 높고 낮음 분별이죠.
이것은 조금 크고 저것은 작고, 이것은 밝고 저것은 밝지 못하고,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밉고 이러면 마음에 남는 거죠.
이것은 분별이기 때문에 지혜가 아니다 이거죠.
또 사리불이여, 경계에서 생겨나는 것을 식이라 한다.
작의로서 생겨나는 것을 식이라 한다.
분별로서 생겨나는 것을 식이라 한다.
그러나 취하거나 집착하는 것이 없고
반연되어지는 것이나 요별되어지는 것이 없으며 분별이 없다면 지혜라 한다.
아까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식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경계에서 생겨나는 것을 식이다 그랬어요.
누가 비난을 하면 화가 벌컥 일어나죠.
이것은 경계에서 생겨나는 식이고,
작의로서 생겨나는 것을 식이라는 것은 뜻을 짓는 것이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다, 이렇게 미리 생각 하는 것을 얘기하죠.
‘분별로서 생겨나는 것을 식이라 한다.’
분별은 이리저리 차별을 하는 거죠.
그래서 식이 생겨나는 것을 세 가지로 얘기 했습니다.
경계에서 생기는 식, 작의로서 생기는 식, 분별로서 생기는 식,
그리고 앞에서는 인식함으로 해서 일어나는 식을 얘기를 하죠.
‘그러나 취하거나 집착하는 것이 없고
반연되어지는 것이나 요별되어지는 것이 없으며 분별이 없다면 지혜라 한다.’
내가 어떤 물건을 집착한다,
무엇인가에 집착해서 놓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식이죠.
하지만 그런 게 없다면 지혜입니다.
‘반연되어지는 것’ 대상을 인식하는 것,
‘요별되어지는 것’ 대상을 분별하는 것, 이런 것이 없으면 지혜라는 말이에요.
또 하나 알아야 될 것은,
여기서는 마음이 경계에서 생긴다고 얘기 했는데,
경계에서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여기는 하나가 빠졌는데 얘기를 하자면,
마음을 일으키는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 있어요?
몸은 마음을 일으킬까요, 안 일으킬까요?
몸은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몸을 뿌리 근(根)자 근이라 그럽니다.
뿌리는 싹을 틔우죠.
예를 들어 봅시다.
몸은 대별되는 것이 다섯 개[눈, 귀, 코, 혀, 피부]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얘기할 때는 이 다섯 개의 근을 얘기합니다.
『능가경』에 보면,
경계의 바람이 불면 몸의 땀구멍이라든지 피부를 통해서
일곱 개의 마음이 파도를 친다고 얘기 하듯이
몸이 마음을 일으키는 뿌리입니다.
눈 뿌리는 대상을 봄으로 해서 일어나는데 그것을 안식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모든 대상을 색(色)이라 하는데
색식(色識)이라고 하면 되지 왜 안식이라 하느냐 하는 물음이 있거든요.
그것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대상을 눈으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고
다섯 감각 기관이 공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의 이름을 빌려서 얘기를 안 하고
몸의 작용을 근거로 해서 마음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눈을 통해서 인식한 것을 안식(眼識)이라 하고,
귀를 통해서 인식한 것을 이식(耳識), 코를 동해서 인식한 것을 비식(鼻識),
혀를 통해서 인식한 것을(舌識),
피부를 통해서 인식한 것을 신식(身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경계에 의해서 마음이 생긴다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몸을 의지해서 식이 생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비수관을 얘기 하자면,
왜 자비손을 몸에 접촉을 하느냐고 의심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모든 심리는 접촉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그럼 마음을 바깥 대상에 접촉시켜야지 왜 몸에다가 하느냐 하면,
보고 듣고 하는 모든 정보가 우리 세포에 다 저장되어 있고
또 몸에 의지하는 마음에도 저장이 다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좋은 것이라면 괜찮지만
나쁜 정보가 정장되어 있다면 현재 의식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자비손을 몸에 접촉 시키면 몸 세포 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
마음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다 들어납니다.
영상이나 감각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나타나면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아, 이게 실체하지 않는 구나,
환영에 지나지 않는구나.’ 이렇게 알아가는 거죠.
그렇게 앎으로 해서 과거를 해결하는 겁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 지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몸이 마음을 일으키는 뿌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대로 몸을 통해서 과거를 다 알 수가 있는 것이죠.
요즘은 과학이 발달 되어 있으니까
체세포를 떼어내서 하면 양이나 소나 개 복제가 다 되잖아요.
이렇게 세포 하나에도 몸 전체의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데,
그 뿐만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보까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업보를 짊어졌다’, 이런 얘기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윗대에 누가 아파서 돌아가셨다면
유전적으로 후대에 그것에 걸릴 확률이 많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게 되면 그런 것을 해소할 수가 있다는 거죠.
요즘 외국에서는 명상을 하면 뇌구조가 바뀐다는 얘기를 하는데,
저는 뇌구조뿐만이 아니고 온 몸이 바뀐다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하면 다 바뀐다는 거죠.
마음을 얘기하다 보니 여기까지 얘기 했네요.
봅시다.
또 사리불이여, 식이라는 것은 유위법에 머문다.
왜냐하면 무위법에서 식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무위법을 요달할 수 있다면 지혜라 이름한다.
유의법이라는 것은 함이 있다는 말인데,
함이 있다는 것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던질 수 있고 부술 수 있는 거죠.
반대로 무위법은 함이 없다는 말이고 비어 있는 거죠.
실체나 자아가 없는 무아, 공, 진여, 일심, 이런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인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식이 발생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을 안단 말이에요.
이렇게 아는 것을 공적영지(空寂靈知),
주관과 객관이 텅 비어서 있으면서도 신령스런 앎은 남아 있는 거죠.
그것을 지혜라 그럽니다.
그래서 앞부분에 굉장히 멋있게 표현한 게 그거예요.
안으로는 고요하면서 밖으로는 분별하는 것이 지혜다,
이렇게 얘기를 한 겁니다.
안으로 분별할 게 없고 오로지 대상을 분별하지만
분별 하는 게 인연생멸을 분별하기 때문에
마음은 늘 고요하고 편안한 겁니다.
대상을 분별하고 웃고 떠들고 하면서도
늘 고요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혜입니다.
하지만 대상을 인식하면서 여러 가지 분별이 생겨가지고
마음이 기쁘다, 아프다, 이런 게 있으면 지혜가 아니고 식입니다.
이렇게 지혜와 식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게송입니다.
또 『월등삼매경』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적하지 않으면 상념이 되나
고요하여 적멸하면 지혜가 되네.
상념의 본래 성품 알게 된다면
중생의 모든 상념 벗어난다네.
공적(空寂)이 본문에는 적(寂)으로 되어 있는데
공적하고 적은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만 쓸 수는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상념이 되나
고요하여 적멸하면 지혜가 된다.’
고요하여 적멸하면 선정인데, 왜 지혜라고 했을까.
이때 ‘지혜’는 텅 비고 고요함을 지켜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텅 비고 고요한 모습이 무아이고 공인 모습입니다.
그것을 지켜볼 때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그럽니다.
그래서 ‘고요하여 적멸하면 지혜가 되네.’ 이게 그런 뜻이에요.
‘상념의 본래 성품’은 실체 없는 공을 얘기합니다.
그것을 알면 ‘중생의 모든 상념 벗어난다네.’ 이렇게 되는 거죠.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순간 늘 비어 있고 고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중생심이 발휘가 안 되는 겁니다.
상념이라 하여서 버리려 하면
이것이 도리어 상념이 되네.
그 상념이 행해지면 희론이 되어
이 사람은 상념을 못 떠난다네.
‘상념이라 하여서 버리려 하면 이것이 도리어 상념이 되네.’
상념이 일어나면, ‘이것을 버려야지’하면
이것이 도리어 상념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상념이 행해지면 희론이 되어 이 사람은 상념을 못 떠난다네.’
‘희론(戱論)’은 바르지 못한 논리를 편다는 말입니다.
그 생각을 계속하게 되면 희론이 되어서
이 사람은 번뇌를 못 떠나는 것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생각 속에 갇혔다는 거죠.
바꿔서 얘기 하면, 모든 생각은 관찰 대상이다 이거죠.
관찰 대상으로서 자기감정의 생각을 보지 못하면
자기감정의 생각에 붙들려서 노예로 전락하는 거예요.
보통 자기는 잘했고 남이 잘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한 사람이에요.
사람이 마음 내어 생각을 하면
이 상념을 어느 누가 일으키는가.
이 상념을 어느 누가 증득할 거며
어느 누가 이 상념을 멸할 것인가.
‘누가 일으키는가’, ‘누가 증득할 거며’, ‘누가 이 상념을 멸할 것인가’
여기서 ‘누가’는 자아입니다.
이것을 이해 하셔야 다음 게송을 알 수 있습니다.
상념을 일으키는 어떠한 법도
모든 부처님은 얻을 수 없네.
이 자리 있는 곳에 존재한다면
무아를 벗어나서 집착이라네.
‘상념을 일으키는 어떠한 법도 모든 부처님은 얻을 수 없네.’
구경무아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거죠.
자아가 없는 분은 상념을 안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그런 게 없다 이거죠.
그 다음에 ‘이 자리 있는 곳에 존재한다면’ 이것을
‘이 곳이 있다면’ 이렇게 고치세요.
‘무아를 벗어나서 집착이라네.’ 이것도
‘아가 없어서 집착을 떠났네.’ 이렇게 바꾸세요.
그래서 내용은 ‘이 곳이 있다면 아가 없어서 집착을 떠났네.’ 이런데
번역을 어렵게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불막능득(諸佛莫能得)’ 모든 부처님은 얻을 수 없네,
‘즉어차처유(卽於此處有)’ 이곳에 있다면,
‘무아리취저(無我離取著)’ 아가 없어 집착을 떠났네, 이렇게 됩니다.
결국 무슨 얘기냐 하면,
내가 상념을 일으킨 주체는 ‘내’라는 자아에요.
자아가 없으면 집착을 떠나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내’가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지면 ‘내’가 사라진다, 이런 겁니다.
다른 법회에서도 얘기를 했는데,
어느 거사님이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내’가 있다는 겁니다.
법문 들으면 ‘내’라는 것이 없는 줄 알지만 심중적으로는 있다는 거죠.
그래서 “거사님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계속 살아 왔느냐?”이러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부모 인연으로 태어났다면
인연 속에는 자아가 없으니까 무아입니다.” 이랬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당신은 부모님이 낳아 주신 게 아니고
하나님 같은 절대자가 있어서
절대자가 만들어서 부모님께 줬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면 무아입니다.”
세 번째는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땅에서 솟았습니까,
원인 없이 계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아입니다.”이랬어요.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아무리 봐도 내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얘기를 했어요.
“그렇다면, 깊이 잠들어 있을 때도 ‘내’라는 게 있습디까?”
깊이 잠들면 모른다는 거죠.
내가 없다는 거죠.
“만약에 내가 있다면 깊이 잠들어도 있어야 되는데,
없다면, 없는 게 아니냐?” 그러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이 일어납니까?” 묻는 거예요.
“생각이 일어나니까 ‘내’가 있다.”
생각은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깊이 잠들었을 때는 의식이 없어요.
의식이 있을 때 일어나면서 ‘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마음은 있지만 ‘아(我)’는 없습니다.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머뭇거려요.
그래서 있다고 생각 한다면 내 놓으라 그랬죠.
내 놓을 수 없대요.
그럼 물질이 아니라면 잡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게 아니냐고, 이렇게까지 제가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 내용이 그 얘기입니다.
결국 상념을 일으키는 주체는 없다는 얘기에요.
그럼 집착할 것이 없죠.
마음에 집착이 있지 않다면
무엇으로 상념을 일으키는가.
마음에 착이 없어 해탈한다면
상념이 일어나는 이유가 없네.
착이 없고 집착하지 않는 다면 무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아가 없으면 상념이 안 일어난다 이거죠.
마음에 해탈을 증득하면은
해탈한 마음은 부사의 하니
해탈한 마음이 부사의 하여
부사의 한 일들을 성취한다네.
‘부사의(不思議)’라는 말은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뜻으로
깨달음을 존경한 말입니다.
‘마음에 해탈’은 심해탈(心解脫)인데 이것은 부사의 하다 이거죠.
그러면 이 부사의 한 마음에서 부사의 한 일들을 성취한다 이런 얘깁니다.
내가 본래 이 마음 짓는 것이니
마음의 근원 자리 안주하여서
일체의 망념을 버리는구나.
원력으로 부사의 성취하여서
청정하고 깨끗한 법 과보를 받아
한가로운 무위법을 바라다보니
한 생각에 일체 중생 마음을 알아
내 마음이 일체 중생 마음이라네.
‘원력으로 부사의 성취하여서’
‘원력’은 수행자의 원력, 보살의 원력, 부처님의 원력, 중생 구제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사의 한 것을 성취하는 거죠.
깨달음을 얻는 이유가 그거예요.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만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청정하고 깨끗한 법 과보를 받아’
중생을 구제하고자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게 되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색신(色身)을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청정하고 깨끗한 법 과보를 받는다 이런 말이에요.
‘한가로운 무위법을 바라다보니’
한가롭다는 것은 집착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걸림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함이 없는 법[무위법]을 바라보는 건 지혜를 얘기 합니다.
‘한 생각에 일체 중생 마음을 알아 내 마음이 일체 중생 마음이라네.’
그 다음에
중생의 본래 바탕 이 마음이요
이 마음이 여래의 청정한 바탕
부사의 한 모든 부처 신통가피력
일체 모두 이 마음에 드러난다네.
위 내용을 다 지우고
‘중생이 곧 마음이며
마음이 곧 여래이니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가
이 마음에 드러난다네.’ 이렇게 하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 중생이고 부처란 얘기죠.
그러면 마음을 깨치면 부처고 못 깨치면 중생이다 그거죠.
그런데 이 마음에서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가 드러나는 거예요.
마음에 깨달음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런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객을 상대하는 마음,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 이런 식의 마음이 아니고
바로 지혜의 마음에서 부처님의 부사의가 다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지혜의 마음이 선정이고 선정이 바로 지혜의 마음이에요.
앞부분에 ‘고요하여 적멸함은 지혜가 되네.’이렇게 나왔듯이
고요함, 무아를 바라보면 그것은 지혜다 이런 말이에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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