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千手經

『 천수경 』 - 【천수경 강의】- 4. 지혜의 배를 타고 행복의 나라로(1)

경호... 2011. 10. 18. 02:10

        【천수경 강의】
           4. 지혜의 배를 타고 행복의 나라로(1)
          그럼 지금부터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면서 열 가지 서원을 말하는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知一切法)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智慧眼)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度一切衆)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善方便)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승반야선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乘般若船)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월고해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越苦海)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정도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得戒足道)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원적산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登圓寂山)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 (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會無爲舍)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 (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同法性身) 이상은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표현한 열 가지 큰 원으로서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뜻을 갖고 있으면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것이 서로서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구성상으로 보면 먼저'속(速)'자가 나오고 다음으로 '조(早)'자가 연결되어 계속 반복되어 있는데 그 뜻은 같습니다. 그럼 먼저 거듭 반복해서 나오는 <나무대비관세음>이란 뜻을 새겨 보면,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귀의하여 받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나무>라는 것은 단순히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귀의하여 받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귀의하여 받는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첫번째 원은 <원아속지일체법>인데 그 뜻은 '원컨데 내가 일체의 모든 법을 빨리 알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 중에서도 법의 세계는 가장 먼저 알아야할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이르는 말로써 불교를 믿고 불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첫째 조건이 바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을 알고 난 다음에라야 둘째의 원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원아조득지혜안>입니다. 그 뜻은 '원컨데 내가 지혜의 눈을 빨리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과 고통도 지혜의 눈을 뜨고 보면 어둠이 걷히듯 사라지는 것입니다. 흔히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불교는 자비보다 지혜가 우선하는 종교입니다. 지혜가 앞서지 않으면 단순히 감정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치우치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자식 간에도 자녀 중심으로 해야 할 일을 부모의 욕심이 중심이 되어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결국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베푼다고 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받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그가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이 그에게 이로운가를 바로 보는 지혜의 안목이 앞서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거듭 지혜를 강조하셨고 지혜가 선행된 자비를 행해야 비로소 그 자비도 올바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로서 지식과 지혜는 엄밀히 구별해야 합니다. 지식이 단순한 알음알이라면 지혜는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마음공부인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불자라면 누구나 지혜의 눈을 뜨는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을 알고 지혜의 눈을 뜬 자는 어떠한 곤경이나 어려움, 불행에 처하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그 속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원으로 <원아속도일체중>은 '원컨데 내가 모든 사람들을 빨리 제도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제도한다는 것은 모든 고난, 어려움, 불행 등의 문젯거리를 해결해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생의 궁극 목표가 생사해탈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잡다한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국 제도인 것입니다. 네 번째 원으로 <원아조득선방편>은 '원컨데 내가 좋은 방편을 빨리 얻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방편>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 <방편>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 <방편>을 잘못 사용하면 악행이 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많은 <방편>을 쓰셨는데, 방편을 비유한 말로써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뗏목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뗏목이 아무리 좋고 그것이 즐거운 일일지라도 뗏목을 탔으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합니다. 주위에서 불교에 입문하여서도 강을 건널 생각은 않고 그저 뗏목만 타고 주저앉아 물놀이만 즐기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사람에게 더 이상의 진보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불법과 인연을 맺어서 부처님과 같은 높은 인격자가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면 방편에 얽매이지 말고, 강을 건넜으면 미련없이 뗏목을 버려야 합니다. 뗏목이 강을 건너게 하는데 꼭 필요했다고 해서 강을 건넌 후에도 계속해서 그것을 짊어지고 다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그 뗏목에 해당하는 <방편>이 무엇인지 살필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며, <방편> 중에서도 좋은 <방편>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배를 탄 목적은 건너편 언덕에 다다르는 것인데, 해가 저물었다고 해서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 원에 해당하는 <원아속승반야선>은 '원컨데 내가 반야의 배를 빨리 타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반야>는 지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는데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투철한 안목이 담겨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가 49재를 지낼 때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해서 조그맣게 종이로 배를 만들어 달아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미신적인 것을 왜 하느냐고 말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의식을 통해 업장이 소멸되고 참으로 지혜의 배를 타고 저 언덕을 건너가 진리의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드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 행사에 참여 할 때 의식 속에 담겨진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 원으로 <원아조득월고해>는 '원컨대 내가 괴로움의 바다를 빨리 건너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흔히 <고(苦)>라고 할 때 사고팔고(四苦八苦)를 말하지만 여기서 괴로움의 바다는 곧 문제의식을 말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수많은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게 마련입니다. 가까이는 자신의 문제, 가정, 사회, 나아가서 세계 전체를 두고 볼 때 도처에 문젯거리가 산적해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결국 <고>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을 해결하여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라는 열쇠로 풀어야 합니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간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원은 <원아속득계정도>인데 그 뜻은 '원컨데 내가 계와 정의 길을 빨리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계(戒)>라고 하면 오계, 십계 등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필요로 하는 윤리와 도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계>의 진정한 뜻입니다. 흔히 <계>의 뜻을 잘못 받아들여 경전에 적힌 제목에 너무 얽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될 것을 문제 삼아서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계>를 잘 지키는 사람은 결국 마음의 안정인 <정(定)>의 세계에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생략되었지만 <정>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 단계로 가장 높은 경지인 <혜(慧)>, 즉 지혜가 열리는 것입니다. 계.정.혜, 이 셋을 합하여 삼학(三學)이라고 하여 불교공부의 아주 중요한 과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덟 번째 원은 <원아조등원적산>인데 그것은 '원컨데 내가 원만하고 고요한 산에 빨리 오르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원적산>은 철저히 고요해진 자리, 즉 열반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온갖 무명과 어둠, 탐·진·치 삼독 등이 완전히 뿌리 뽑혀서 소멸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지혜로 이어져 번뇌가 사라진 완전히 고요한 상태가 열반의 경지인 것입니다. 아홉 번째 원으로 <원아속회무위사>는 '원컨데 내가 아무것도 함이 없는 집에 빨리 모이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위사>는 무엇을 해도 무엇을 했다는 마음의 흔적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결국 마음이 철저히 고요해지면 행함이 있어도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열 번째 원은 <원아조동법성신>인데, 그 뜻은 '원컨데 내가 법성의 몸과 같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법성> 은 진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원은 앞의 아홉 가지 단계의 원을 모두 성취하게 되면 끝에 가서는 자기 자신이 진리화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진리화가 된다고 해서 몸을 바꾸어 이상한 몸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 그 자체가 진리 덩어리이므로 그 자체로서 진리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온이란 거짓 껍데기로 얼룩져있는 것을 말끔히 벗어버리고 본래의 진리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이 부처인 것임을 깨닫는 일이며,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에서 시작하여 부처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처란 바로 진리 그 자체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곧 부처라는 본래의 모습을 망각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비록 구름에 가려 있다고 해도 태양으로서의 가치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위대한 생명은 아무리 거짓 껍데기에 덮여 있어도 변함이 없는 것이며, 가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 보다 더 존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진리의 몸이라는 사실은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컵에 물을 부으면 컵의 모양대로 형성되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의 물 그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을 담는 그릇 모양은 우리가 지은 업대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업의 모습대로 우리의 <법성신>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모양이나 형상에 우리는 속아서 거기에 매달려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불성은 한정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아무 걸림이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해탈이 가능하고 불생불멸도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 자성(自性)은 태어남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러한 근본정신이 철저히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 정신이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 그것은 곧 자성자리를 찾는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모든 문제를 다 열고, 다 풀 수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자신이 곧 부처라는 인식으로 걸림 없이 당당하게 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열 가지 서원 중에서 맨 마지막인 <원아조동법성신>의 의미를 통해 흙덩어리인 줄 알았던 자신의 몸이 금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이 흙덩어리인줄 알고 살아왔기 때문에 쉽게 금덩어리라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이 중생노릇만 거듭 되풀이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