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千手經

『 천수경 』 - 【천수경 강의】- 4. 지혜의 배를 타고 행복의 나라로(2)

경호... 2011. 10. 18. 02:11

【천수경 강의】
   4. 지혜의 배를 타고 행복의 나라로(2)
    앞에서 말한 열 가지 서원에 이어 다음에 나오는 것은 서원의 극치를 이루는 대목입니다. 아약향도산 (我若向刀山) 도산자최절 (刀山自催折) 아약향화탕 (我若向火湯) 화탕자소멸 (火湯自消滅) 아약향지옥 (我若向地獄) 지옥자고갈 (地獄自枯渴) 아약향아귀 (我若向餓鬼) 아귀자포만 (餓鬼自飽滿) 아약향수라 (我若向修羅) 악심자조복 (惡心自調伏) 아약향축생 (我若向畜生) 자득대지혜 (自得大智慧) 맨 처음에 나오는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가 만약 칼산을 향해 나아간다면 칼산은 저절로 무너지고 만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칼산'은 험난한 인생역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살이는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역경을 만납니다. 칼산 보다 더한 마음의 불행, 피와 눈물의 능선들이 많이 있습니다. 칼산을 딛는 아픔 보다 더욱 쓰라린 인생의 체험을 누구나 다 겪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 칼산은 저절로 무너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법성신(法性身)>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이 진짜 금덩어리임을 알았을 때 우리의 본성은 허망한 육신이 아니라 참다운 생명이 육신 속에 존재함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그대로 불성(佛性)임을 이해한다면 그 어떤 삶의 고난도, 어려움도 그 앞에서는 다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참으로 귀중한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은 부처님의 생명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공덕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지혜와 자비는 부처님의 대자대비와 조금도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실상이 곧 자신의 참모습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그대로 실천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설사 칼산과 같은 불행을 만나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이미 칼산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귀중함과 보배로움이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면 불행은 이미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의 태양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태양이라고 한다면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몇 조각 있다고 해도 태양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방해의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래면목은 태양처럼 밝고 한량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조그마한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통스러운 존재라고 인정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확신에 찬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다른 어떤 것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발견과 믿음이 불교의 생명이며, 불교를 믿는 중요한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을 풀이하면 '내가 만약 화탕의 지옥을 향해 나아간다면 화탕지옥이 저절로 소멸된다'는 뜻이 됩니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자기 자신의 <법성신>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그 사람에게는 화탕의 지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탕지옥은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구름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태양을 가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부처님의 생명은 우리의 삶에서 바로 저 태양과 구름과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약향지옥, 지옥자고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가 만약 지옥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지옥이 저절로 말라서 없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계속이어지는 <아약항아귀 아귀자포만>은 '내가 만약 아귀가 있는 곳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굶주린 아귀가 저절로 배가 불러진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아약항수라, 악심자조복>은 '내가 만약 아수라와 같은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면 악한 마음은 저절로 항복받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아약항축생, 자득대지혜>를 풀이하면 '내가 만약 축생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면 축생이 스스로 큰 지혜를 얻게 된다'가 됩니다. 축생이 큰 지혜를 얻으면 이미 축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축생이라고 하는 것은 개나 돼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축생보다도 못한 짓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축생 보다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는 이렇게 우리의 인간 생활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성 있는 불교를 믿을 수 있습니다. 경전을 읽고 외우더라도 입술위에서 그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를 음미하면서 새겨 읽어야 새롭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이 부처님의 본성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이해와 실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불이 끝나고 읽는 행선축원에도 이와 유사한 간절한 서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아명자 면삼도(聞我名者 免三道) 견아형자 득해탈(見我形者 得解脫)'이라는 것입니다. 그 뜻을 새겨보면 '내 이름만 들어도 지옥, 아귀, 축생의 삼도가 면해지고, 내 형상을 보기만 하여도 해탈을 얻는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처럼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지극한 서원인 것입니다. 불교는 깨달은 성인이 만든 것이므로 서원도 보통 사람의 상식을 초월하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 표현들은 그것이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아는 것에만 치중하다 보면 믿음이 소홀해지기 쉽고, 너무 맹목적으로 믿기만 하고 아는 것을 소홀히 해도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지식을 조심스럽게 보강하면서 서로 조화롭게 해야만 올바른 신행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신행이라고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부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써 진정한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