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千手經

『 천수경 』 - 【천수경 강의】- 3. 얼마나 사랑하기에 -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 (4)

경호... 2011. 10. 17. 02:37


        【천수경 강의】
           3. 얼마나 사랑하기에
          -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 (4) 千手千眼 觀自在菩薩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 啓請 계속해서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칭송하는 구체적인 게송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천룡중성동자호(天龍衆聖同慈護)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勳修)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 수지심시신통장(受持心是神通藏) 처음의 <천룡중성동자호>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에 있는 천산 사람들과 용, 그리고 여러 성인들이 함께 자비로써 보호한다'는 뜻이 됩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이 너무 훌륭하니까 주위의 성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조금이라도 베풀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위에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백천삼매돈훈수>는 '백천 가지의 온갖 삼매를 한꺼번에 닦는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갈등이 생기지 않고 일념으로 해야 합니다. 승가에서는 '전기생(全機生) 전기사(全機死)'라고 하여 살 때도 철저히 살고, 죽을 때도 철저히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뿌리까지 철저히 되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여기서 <훈>이라고 하는 것은 향을 피워 놓고 오래 앉아 있으면 그 향기가 몸이나 옷에 서서히 배어드는 것을 일컫는 말인데, 이 말은 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수행이 쌓여가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백천삼매>는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과 하나가 되어 마음을 비우고 철저히 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결국 <백천삼매돈훈수>는 관음 대비주를 철저히 일념으로 독송하면 온갖 수행이 한꺼번에 닦여진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걸림이 없이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업장이 소멸되고 여러 성인의 보호 아래 수행이 닦여진 연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거듭 강조했듯이 『천수경』에서 관세음보살이 상징하는 것은 대비주인데, 이것을 넓은 의미로 생각하면 불법, 곧 정법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지신시광명당>을 해석하면 '관세음보살의 대비주를 몸에 지니면 그것이 곧 광명의 깃발이 된다' 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흔히 경전에 대한 공덕을 말할 때 서사(書寫), 수지(受持), 독송(讀誦) 이 세 가지를 일컫는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첨가하여 위인연설(爲人演說)을 할 수 있다면 최상의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서사란 경전을 베껴 쓰고 출판하는 것을 말하며, 수지란 경전을 몸에 잘 지니고 다니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또 독송은 읽고 외우는 것을 말하며, 위인연설은 남을 위해 경전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경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데 거기에다 남을 위해 한 구절이라도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최상의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경전을 대할 때, 이 네 가지 중 최소한 하나는 반드시 수행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경전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정신, 부처님의 마음, 부처님의 뜨거운 가슴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바로 경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만나다고 할 때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 바로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부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남이 곧 서사, 수지, 독송이며, 거기에 위인연설까지 더한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복을 짓는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수지>라고 하는 것은 관세음보살의 대다라니를 수지하는 데서 한 차원 높여서 불법,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니는 것을 뜻합니다. 또 <광명당>이라고 하는 것은 불법을 수지하는 그 자체가 바로 광명의 깃발을 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불법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둠이란 없으며 더 이상의 고통이나 번뇌, 근심, 걱정, 문젯거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광명>은 바로 희망차게 밝게 사는 삶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삶의 부정적인 것, 온갖 고통, 뒤엉킨 상황들은 <광명>의 반대 의미로 어둠, 혹은 무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지닌 사람은 마치 태양을 항상 몸에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불법을 마음에 제대로 지닌 사람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그 밖의 어떤 관계에 있어서도 고뇌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도 죽음도 떠나 있는 본래 생명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과 이해, 그리고 자신감에 찬 확신이 섰을 때 비로소 불교를 믿고 이해한다는 할 수 있습니다. 불교교리를 잘 알고 염불이나 한문을 많이 안다고 해서 불교를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개개인의 본성은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의 능력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과 공덕과 빛과 진리 덩어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자신도 부처님과 똑같은 <광명>과 영원한 생명 덩어리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무량한 생명과 한량없는 공덕이 곧 자기 자신 속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곧 불법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인간이 발견한 숱한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부처님께서 모든 인간들에게는 똑같이 영원한 생명과 빛과 진리가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 하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몇 개의 고을과 바꿀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구슬이 돌 속에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바쳐 큰 고을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왕에게 구슬의 귀함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왕은 그것을 몰라보고 가짜라고 우기면서 그를 물리쳤습니다. 그러면서 왕을 속였다고 해서 그 사람의 다리 하나를 잘라버렸습니다. 그 다음 임금이 등극하자 그는 또 그 구슬을 바치면서 "이것은 겉보기에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속에 엄청난 보물이 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그 사람의 다리를 또 하나 잘라버렸습니다. 다리 두 개가 다 잘리고 나서 세 번째 왕에게 바쳤을 때 비로소 구슬의 귀함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몇 개의 성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모습 또한 이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비록 늙고 젊고, 무식하고 유식하고, 못 배우고 많이 배우고, 잘 생기고 못 생기는 등의 차별이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껍질을 벗고 자기 자신의 생명의 참 면목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똑같이 부처님과 같은 한량없는 빛과 생명과 진리와 신통과 만덕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며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발견한 최대의 깨달음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팔만 사천 가지의 방편을 설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감로법(甘露法)'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곧 생사를 초월한 불사법(不死法)인 것입니다. 불사의 가르침, 진리의 가르침을 깨달은 사람은 바로 감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감로병을 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 속에 감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불법을 수지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천수경』속에는 문제 해결의 지혜가 가득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수지심시신통장>이란 '불법을 수지한 사람의 마음은 바로 신통의 창고와 같다'는 말입니다. <신통>이란 말 그대로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잘 되는 것입니다. 불법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온갖 <신통>의 변화가 그 사람이 마음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법을 마음에 지닌다는 것은 거대한 창고 속에 신통을 가득 채워 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불법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빛나는 보물에 대한 믿음, 이해,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보물을 손에 있는 과일을 보듯이 육안으로 확연히 보는 것을 가리켜 견성(見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지신시광명당><수지심시신통장>의 두 게송은 『천수경』의 깊은 안목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수지신시광명당>과 <수지심시신통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결국 불자라면 어느 곳에 있든지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세 가지 몸 가운데 법신 비로자나불이 바로 <광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광명>은 바로 진리의 몸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만약 우리에게 <광명>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빛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빛의 역할, 즉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광명>의 깃발을 높이 들고 미혹한 사람을 이끌어야 할 임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병든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줘야 할 중대한 책임이 불법을 믿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좋은 것인 줄 알면 자신감을 갖고 이웃에게 전할 때, 비로소 불제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구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인생의 밤길은 길고 멀어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갈 길을 모르면 늘 불행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나면 하루하루가 보석처럼 빛나는 나날로 이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훤히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눈뜸은 곧 지혜로워지는 것이고, 그것은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대하는 『반야심경』이 바로 지혜의 완성이며, 그것은 곧 성불과 연결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