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
寄君實/ 月山大君
여관, 가물대는 등불, 새벽
외론 성, 부슬비, 가을.
그대 생각 가이 없고
천리에 큰 강물 흐른다.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思君意不盡 千里大江流
1,2구는 토막 토막 명사로만 이어 놓았다. 굳이 서술어가 끼어들지 않고도 의미는
행간으로 고여 넘친다.
여관방에 혼자 앉아 있다. 창밖엔 부슬부슬 가을을 앓는 비가 내린다. 이 비에
곱게 물든 잎들 다 떨어지겠구나. 등불이 가물거린다. `잔등(殘燈)`은 밤을
꼬박 새운 등불이다.
나그네는 등불 앞에 앉아 객지의 가을 밤을 꼬박 새웠다. 낯설고 물선 땅. 인적도
흔치 않은 외로운 성. 차마 등불을 끌 수 없었던 것은 이 방의 불마저 꺼지면
세상이 다 어둠으로 지워질 것만 같아서였겠지. 등불 아래선 생각이 참 많다.
창밖엔 부슬부슬 가을을 앓는 비가 내린다. 곧 추운 겨울이 성큼 다가서리라.
벗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을 `천리대강류(千里大江流)`에 담았다.
`천리(千里)`는 다함 없는 그리움의 길이요, `대강(大江)`은 가눌 길 없는
그리움의 깊이요 너비다. 밤새 가을 비를 싣고 깊이도 알 수 없게 흘러가는
강물도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만은 못하리라. 가을비는 바깥으로 향하던
마음을 거두어 자꾸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추수 끝난 텅빈 벌판처럼 훵한
가슴을 도무지 어찌해 볼 수가 없다.
명사로만 이어지는 한시를 한 수 더 본다. 원나라 때 시인 마치원(馬致遠)의
사(詞) 추사(秋思)〉다.
앙상한 등나무, 늙은 나무, 저물녘 까마귀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사람 사는 집.
옛 길, 가을 바람, 비쩍 마른 말
석양은 지고
애끊는 사람은 하늘 가에.
枯藤老樹昏鴉 小橋流水人家
古道西風瘦馬
夕陽西下 斷腸人在天涯.
읽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잎 다 진 앙상한 등나무가 얽힌 고목 가지 끝에는
저물녘 갈가마귀 떼가 앉아 있다. 시냇물 위에 놓인 작은 나무 다리 너머에
덩그러니 인가가 한 채. 아무도 찾지 않는 옛길, 가을 바람에 비쩍 마른 말을
타고 정처없는 유랑의 길을 떠돈다. 황량한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저녁해.
저 하늘 끝 어딘가에서 내 생각에 애 끊어질 그 사람을 생각하면 내 창자가
마구 졸아 붙는다. 애가 바짝바짝 탄다.
이렇듯 투명하게 자기 자신과 맞닥뜨릴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고마운가.
그 정경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내면이 정화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시가 주는 위로는 이렇듯 따뜻하다.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木瓜茶) 마시면
가을 빗소리
박용래 시인의 〈모과차〉란 작품이다.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정신은
이상스레 또랑또랑 맑은 밤, 긴 밤의 시간이 나를 짓누를 때면 나는
모과차를 마신다. 그 제멋대로 못생긴 과일을...
출처;한국한문학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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