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장주莊周》의 〈천운〉중에서
쉼 없이 하늘은 움직이지 않던가.
땅은 가만히 처해 있지 않던가.
해와 달이 저들의 위치를 다투던가?
누구에 의해 저들은 함께 통제하는가?
누구에 의해 저들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스스로 생성하고 멈출 수 없음인가?
혹은 저들이 제 자신을 벗어나지 않도록 은밀한 노력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구름이 비로 떨어져 내리던가.
그리고 다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지 않던가.
저들을 이다지도 풍요하게 베푸는 것은 누구인가?
누가 노력도 없이 이러한 원초적인 기쁨을 낳고 고무하는가?
바람은 북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가기도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정말 누가 이들을 뿜어내고 빨아들이며 일으키는 것일까?
무함이 말했다.
“내가 말해드리지요. 하늘에는 육극(六極)과 오상(五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왕이 이것을 따르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이것을 거스르면 흉해지는 것입니다.
구주(九疇)와 낙서(洛書)에 기록된 것을 보면, 정치가 완성되고 덕이 갖추어지면
온 세상을 햇볕처럼 비추게 되어, 세상사람들은 그 임금을 떠받들게 되는데,
이런 분을 상황(上皇)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지극한 어짊에는 친함이 없다
상나라 태재인 탕이 장자에게 어짊에 대해서 물었다.
장자가 말했다.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것이 어짊입니다.”
탕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장자가 말했다.
“아비와 새끼가 서로 친한데 어찌 어질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탕이 말했다.
“지극한 어짊은 어떤 것입니까?”
장자가 말했다.
“지극한 어짊에는 친함이 없습니다.”
탕이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친함이 없다면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효성스러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지극한 어짊은 효성스럽지 않은 것입니까?”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한 어짊이란 고상한 것이어서 효성으로
그것을 말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것이 효성보다 뛰어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효성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 영땅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면 명산(冥山)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멀리 떠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공경함으로 효도를 하는 것은 쉽지만 사랑으로 효도를
하기는 어렵다. 어버이를 잊는 것은 쉽지만 어버이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 어버이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기는 쉽지만
천하를 모두 잊기는 어렵다. 천하를 모두 잊는 것은 쉽지만 천하로 하여금
나를 모두 잊게 하기는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덕은 요임금과 순임금도 잊고 그들이 한 것과 같은 일도 하지 않고,
이익과 은혜와 혜택이 오래도록 베풀어지게 하는데도 천하에서는
그를 알아주지 않는데, 어찌 크게 한숨지으며 어짊과 효성만을
얘기하겠습니까? 효도와 공경과 어짊과 의로움이나 충성과
신용과 정절과 청렴 같은 것은 모두가 스스로 힘씀으로써 자기의 덕을
부려먹는 것들이어서 존귀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존귀한
사람은 나라의 벼슬도 버리고, 지극한 부자는 나라의 재물도 물리치고,
지극한 소망을 얻은 사람은 명예도 물리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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