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밤
雪夜/ 惠楫
한 떨기 찬 등불에 불경을 읽다보니
한밤 눈이 뜨락 가득 내린 줄도 몰랐네.
깊은 산 나무들도 아무런 기척 없고
처마 끝 고드름만 섬돌에 떨어진다.
一穗寒燈讀佛經
不知夜雪滿空庭
深山衆木都無賴
時有첨氷墮石牀(첨: 木+詹)
조선 후기 혜즙(惠楫, 1791-1858) 스님의 시다. 텅빈 방에 노오란 등불
하나가 켜 있다. 그 앞에 허리를 곧추 세우고 사려 앉은 눈빛 푸른 스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불빛이 일렁인다. 청 맑은 독경 소리는 밤이 새도록
그칠 기미가 없다. 무슨 경전을 읽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창 밖의 동태가 어딘가 좀 수상쩍다. 산 골을 타고 무시로 올라오던
매운 밤바람 소리도 뚝 그쳤고, 평소 야단스럽기 그지 없던 풍경소리도
제풀에 잦아 들었다. 천지가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라도 된 모양인지 절집은
사방이 괴괴하기 짝이 없다. 이따금 처마 끝에서 무언가가 섬돌 위로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릴까? 그 소리 때문에 스님은 사방의 고요를
문득 느켰다. 그리고는 제 목소리에 제가 놀라 독경을 잠시 멈춘다.
창 쪽을 보니 창밖이 희부윰하다. 벌써 날이 밝았나 싶어 덜컹 미닫이를 밀고
밖을 내다본다. 세상에! 그 사이에 천지는 눈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나무가지마다 눈이 소복히 쌓였다.
아무도 그 태초의 적막을 깨트리고 싶지 않은 듯 모두들 있는 숨을 다 죽이고
있다. 층층의 솔가지 사이로 솔래솔래 빠져나가며 온갖 음악을 지어내던
송뢰성(松 聲)조차도 딱 멎고 없다. 낭랑한 책읽는 소리의 진동 때문이었던가.
처마 끝에 옹송망송 매달렸던 고드름이 제 무게를 못견뎌 그만 맥을 놓고 만다.
고드름은 뾰족한 제 머리 끝을 섬돌에 부딪쳐 장렬하게 산화한다.
존재의 뿌리를 손놓고서 아무런 의심없이 떨어지는 고드름. 그 날카로운 집중만이
산사의 적막을 설핏하게 흔든다. 깊은 밤 눈은 소복소복 쌓이고, 스님의 책읽는
소리는 청이 높아만 간다. 이따금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가 환기하는 홀가분한
존재의 적막. 툭 하는 그 소리에 우리 모두는 그토록 고대하던 한소식을 문득
깨칠 수 있을 것만 같다. 깨달음은 그렇게 언제나 늘 불시에 찾아온다.
몇 떨기 오죽이 빗긴 처마 들어와
한칸 방 청량하여 자못 호사스럽다.
높은 가지 새 달이 떠올라 올 때마다
한가로이 책상 기대 능엄경을 외운다.
數叢烏竹入斜첨(첨: 木+詹)
一室淸凉頗不廉
每對高枝上新月
閒憑經궤誦楞嚴(안석 궤)
역시 혜즙 스님의 〈山居雜詠〉 둘째 수이다. 이때는 계절이 아마도
여름이었던게다. 오죽을 처마 밑에 옮겨다 심었다. 시선이 아연 맑고
시원해진다. 조촐한 살림인지라 이것마저도 웬 호사냐고 생뚱스러워
한 것은 짐짓한 너스레다.
오죽이 내 살림에 끼어들고 나서 나는 새로운 습관을 얻었다. 하루가
다르게 제 키를 솟아올리고 있는 오죽의 맨 윗 가지 위로 새달이 떠올라
걸릴 때까지 내가 하는 일이란 《능엄경》을 펼쳐 외워 읽는 것이다.
한가로이 기대었다 했으니, 당초 목적을 정한 독서가 아니다.
그저 낭창낭창 가락을 돋우워, 저 높은 가지 꼭대기까지 달님을 솟아
올리려는 것일 뿐이다. 한갖진 산집에선 밤이 깊어가고, 달은 어느새
뿌수수한 머리를 말끔히 빗고서 저만치 중천으로 올라갔겠지.
달이 대 그림자를 벗어난 뒤로는 스님의 독경소리도 맥이 빠져서 그만
실없이 잦아들고 말았을게고.
혜즙 스님의 호는 철선(鐵船)이다. 띄우기가 무섭게 가라앉기 바빴을
묵직한 쇠배를 타고서 그는 깨달음의 바다를 그렇게 건너갔던 모양이다.
《철선소초(鐵船小艸)》란 시집에 74편의 시만 남았을 뿐, 그 삶은 정작
이렇다 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막상 우리 쇠배 스님의 절집 생활에서도
이런 만남의 순간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한국한문학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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