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전생에 나는 인도에서 살았다.

경호... 2009. 2. 9. 10:13

어떤 장소엘 가거나 누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도 꼭 한번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른바 데자뷔(기시감)현상이다. 몇  해 전 올드 델리에서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신비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자전거 릭샤를 타고 옛 성곽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릭샤 운전사 샤부가 뜻모를 얘기를 중얼거리지만 않았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찬드니 쵸크시장을 꾸불꾸불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샤부가 말했다. “난 당신을 압니다. 당신은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난 분명히 당신을 기억해요.”  처음에 나는 샤부가 하는 말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인도인들로 가득한 찬드니 쵸크 시장은 인파와 소음으로 일대 장관이었다. 이마에 붉은 점을 친 힌두교 상인들과 온갖 크기의 터번을 쓴 시크교인, 흰소가 끄는 마차에 바나나를 가득 싣고 좁은 길을 가로막는 노인, 야반도주라고 하듯 일가족과 함께 서녀 개의 트렁크를 이고 떠나가는 남자, 아열대 지방의 새처럼 “짜이 짜이 짜이, 꼬삐 꼬삐 꼬삐!”하고 외치는 차와 커피 파는 소년들이 한데 뒤섞여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영화 장면이 따로 없었다.


내가 듣든 말든 샤부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인도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지요. 그리고 전생의 만남들도 기억해요. 당신은 분명히 전생에 여기서 살았어요. 그래서 이곳엘 오게 된 거구요.” 인도 여행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닌 내가 그런 수작에 말려들 리 없었다. 날 기억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자기 삼촌이 운영한다는 기념품 가게로 끌고 가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전생의 어떤 인연이 있으니까 인도가 그토록 강하게 날 끌어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증거도 없이 전생에 인도에서 살았다고 주장할 순 없는 일이었다. 나는 농담하듯이 샤부에게 말했다.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인도에 온 수많은 외국 여행자들 모두가 한 번쯤은 전생에 인도에서 살았겠군. 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생의 인연에 이끌려 이리로 오게 되는 것 아니겠어?” 스물다섯 살쯤 돼 보이는 샤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은 내 말을 우스개로 듣고 있군요. 그렇지 않아요. 난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당신은 가까운 전생에 분명히 이곳 델리에서 살았어요. 잘 생각해보면 당신도 알 겁니다.”


난 웃음을 터뜨렸다. 잘 생각해봐서 전생을 알 수 있다면 세상에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내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샤부가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네 외국인들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죠. 전생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거든요. 내 말이 틀렸나요?” 도로를 가로막은 소떼들 때문에 릭샤가 잠시 뭠춰선 틈을 타서 수드라(최하층계급) 여인이 갓난아이를 끌어안고 다가왔다. 그녀는 굽은 손을 내밀며 내게 자비를 구했다. 1루피를 주자 또다른 여인이 뛰어왔다. 전생의 내 누이와 어머니도 여기서 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았을까? 밀려오는 소떼들 틈을 비집고 샤부는 요령있게 릭샤를 몰면서 말했다.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어)에선 인간을 ‘돌라밤’이라고 하죠. 돌라밤은 얻기 힘든 기회라는 뜻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건 매우 드문 기회니까요. 생물체가 인간으로 환생하려면 8천4백만 번의 윤회를 거듭해야 하죠.” 여든네 번도 아니고 8천 4백만 번의 윤회라! 그 말을 들으니 유명한 인도 설화가 생각났다. 한 사람이 신전에 바치기 위해 염소를 끌고 갔다. 제사장이 염소의 목을 치려고 칼을 높이 쳐든 순간 염소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제사장이 염소에게 웃는 이유를 묻자 염소는 말했다. “이제 난 서른 번만 죽으면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오.” 과연 인도의 염소다운 대답이 아닌가.



내가 진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아선지 샤부는 입을 다물고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회교도 통치 시절의 옛 수도 올드 델리의 거리는 이른 아침인데도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덧 바르샤(비의계절)가 끝나고, 태양이 아름다운 샤라다(가을)가 찾아왔다. 만디(시장) 끄트머리에서 한 청년이 안다(달걀)와 팔(과일)과 사브지(야채) 등을 라따(손수레)에 싣고서 손님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물건을 많이 팔게 해 달라고 손수레 한 켠에 가네쉬(코끼리 머리를 한 신) 신상을 세우고 그 앞에 아가르바티(향)를 연기 가득히 피워놓았다.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그 모든 힌두어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누가 가르쳐준 것처럼 생생히 그 이름들이 생각났다. 만일 누군가 내게 말을 걸기라도 하면 힌두어 문장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위세서 인도인들이 쓰고 있는 언어가 외국어가 아니라 마치 내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모국어처럼 들렸다. 더구나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거리 풍경은 이전에 틀림없이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흰 옷에 흰 두건에 흰 콧수염을 한 고집센 관리, 주렁주렁 축제용 금잔화 꽃목걸이를 파는 아주머니, 물통을 손에 들고 철둑길로 똥 누러 가는 아저씨, 우유통을 머리에 이고 가는 가난한 처녀.., 분명히 이 장면과 이 냄새와 이 소음 속에 나는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착각이나 데자뷔 현상이 아니었다. 나는 흥분이 되어 그냥 릭샤 위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릭샤에서 뛰어내린 나는 그만 샤부와 헤어지고 말았다. 차비를 건네줄 틈도 없었다. 머리에 자루를 인 한 무리의 인부들이 뒤에서 우르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며 샤부를 소리쳐 불렀지만 인부들에 떠밀려 샤부와 나의 거리는 점점 멀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인부들은 내게서 릭샤 운전사를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현재에서 과거로,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휙 하고 나를 밀쳐냈다. 그렇다! 그때는 이 마을에 보리수와 바냔나무가 많았으며, 감미롭고 매혹적인 향기를 가진 마두말티나무도 있었다. 헤만타와 쉬쉬라(겨울)의 계절이 끝나고 베산타(봄)의달이 찾아오면 마두말티나무의 가지마다에선 수천수만 송이의 꽃이 일제히 피어났었다. 거대한 나무 전체가 온통 흰 꽃으로 뒤덮이곤 했었다. 건조한 대기 속에 꽃들의 열기가 파도처럼 퍼져나가는 걸 느끼며 내 어린 시절이 흘러갔었다.


나, 난 분명히 이 거리를 지나갔었다. 여기는 분명 내가 존재했던 것이고, 한때 내가 살기도 한 곳이었다.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커다란 회교 사원이 있을 것이다. 사원을 지나 몇 개의 골목을 통과하면 붉은 성곽이 나타나리라. 그곳에서 나는 전생에 도티(인도남자들이 허리에 둘러 입는 옷)를 입고 성 안쪽의 낭하를 걸어다니곤 했었다.  아직도 거기에 낭하와 기둥들이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 있을까? 성벽에서 내려다보이던 나디(강)는? 강과 성벽을 오르내리던 반다르(원숭이)들도 아직 그대로일까?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어제 찍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속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인도인 얼굴을 한 청년, 그는 분명히 나였다. 모습은 지금과 달라도 그가 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퀼라 키트네 두르 하이(성은 어디에 있죠)?” 남자는 내가 예상한 대로 동쪽 방향을 손짓해 보였다. 이젠 누구에게 길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지리에 익숙한 그곳 사람처럼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담과 골목과 늙은 나무들이 내 기억 속 풍경 그대로였다. 아직 문명의 뒤켠에 서 있는 그곳은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저 뒤켠에 만화영화의 배경처럼 우뚝 솟아 있는 붉은 성! 나는 한달음에 성곽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는 하루 종일 붉은 성 안을 돌아다녔다. 성루에 올라가서는 멀리 야무나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한때 너무나 자주 가보았던 곳이라서, 회랑의 모퉁이를 돌면 어떤 형태의 아치가 나타날 것인지조차 알아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생에는 내가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언제나 나를 이해해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마치 조금 전에 헤어진 사람을 찾듯이 열에 들떠 성 안을 돌아다녔다. 동쪽 복도를 지나 아랍풍의 무늬가 새겨진 문을 빠져나올 때였다. 한 무리의 인도인 관광객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앞에 가는 한 여성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미라, 이다르 아이예(미라, 이리 와 봐)!” 그 소리에 한 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계시와도 같은 울림이 나를 흔들었다. 아, 그렇다. 내가 전생에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은 미라였다. 이제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녀의 얼굴까지도, 그리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그 표정과 웃는 모습까지도! 내 마음은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미라!”


그 이름이 성의 복도에서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기둥들 사이에선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녀를 만지기 위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길이었다. 나는 현생 속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녀는 전생 속의 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엔 한 생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환영 속의 미라와 함께 성의 복도를 달려가 다시 야무나 강이 내려다보이는 망루로 올라갔다. 오렌지색 석양이 서서히 강을 물들이고 있었다. 밀려오는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해 나는 성벽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미라는 어디로 갔을까? 현생에서 그녀는 어떤 관계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을까? 아니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내 곁에 왔다가 다시 떠나갔을까? 그것으로 이생에선 우리의 만남이 끝이었을까?  나는 미라의 환영에 대고 rrjt들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미라의 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야무나 강은 금방 밤의 어둠에 파묻혀 버렸다. 강 아래쪽에서 물살 하나만 빠르게 달빛에 흰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날 밤 뉴델리의 숙소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을 잤다. 삶 자체가 그저 하나의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들기 직전에 갑자기 목이 메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떤 풀리지 않던 의문 하나가 내 안에서 툭! 하고 풀어져버렸다. 인력거 운전사 샤부는 그 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이번 생에서 그와의 인연은 그것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서 또 하나의 비늘을 벗겨준 더없이 소중한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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