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우리 집에 갑시다

경호... 2009. 2. 9. 10:10

망고 열매는 노랗게 익어 뚝뚝 떨어지는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길바닥에 떨어진 망고 열매를 아무리 걷어차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스승은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에게 가슴이 살아 있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지 않은가. 그런 스승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망고나무 주인이 쫓아와 남의 망고 농사를 다 망쳐놓는다고 아우성칠 때까지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해 망고 열매를 걷어차고 또 걷어찼다. 물어주면 되지 않느냐고 내가 큰소리 치자 맨발의 여주인은 돈은 고사하고, 저러다가 저 머리 긴 남자가 망고나무를 송두리째 뽑아버리지나 않을까 경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소 진정이 된 나는 그래도 남에게 손해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길가에서 얼음차 파는 여자와 속닥거리고 있는 그 망고나무 여주인에게로 다가갔다. 대여섯 개를 걷어찼으니 10루피(300원) 정도 주면 되겠지 했는데 여주인은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했다 돈을 꺼내 손바닥에 쥐어줘도 기어코 내 바지 주머니에 도로 찔러 넣었다. 이유를 묻자 그 여주인은 말했다. “당신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오. 그래서 내 망고를 걷어찬 것인데 어찌 돈을 받겠소. 그냥 가시오.”


봐라! 가진 거 없고 배운 거 없는 여자도 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명상을 배우러 인도까지 온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나는 또다시 화가 치밀어 망고나무 밑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여주인이 놀라서 황급히 나를 붙들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망고밭을 다 망쳐놓을 뻔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장현숙이란 이름의 여성이 날 찾아왔다. 그녀는 다짜고짜로 나한테서 명상을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명상을 가르칠 입장도 못 되고 세상에는 훌륭한 스승들이 많으니 그들을 찾아가라고 해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그렇게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와 명상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나는 그녀를 당시 내가 스승으로 따르고 있던 인도의 오쇼 라즈니쉬 명상센터로 보냈다. 그러면서 차츰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전직 교사였으며 이혼을 한 경험이 있었다. 딸은 남편이 데려가고 홀로 된 그녀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교사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가게를 냈는데 그것도 얼마 안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이제 수중에 돈도 없고 마음에 상처만 남은 그녀는 내 권유에 따라 전 재산을 털어 인도로 떠났다. 나는 그녀가 명상센터에서 생활하며 머지않아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을 기원했다.


그런데 보름 뒤에 내가 뒤따라 인도엘 와보니 뜻밖의 일이 벌어져 있었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 명상센터에 온 장현숙은 이틀 뒤에 곧바로 미쳐버린 것이었다. 정신이 나가 거리를 마구 쏘다니고 아무한테나 눈을 흘기며 욕을 해댄다고 했다. 명상센터에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들이 명상하는 도중에 신발을 신고 명상 홀을 마구 뛰어다니며 소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결국 명상센터의 관계자들은 그녀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내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임시로 얻은 아파트 골방에 틀어박혀 안으로 문을 잠그고 열흘째 단식 중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무더운 아열대 기후에 물도 먹지 않고 그런 식으로 있다가는 탈수증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다. 당시 그 명상센터에는 한국에서 온 구도자들이 열 명 정도 있었다. 대부분이 젊은 친구들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먼 여행을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장현숙을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내가 그녀를 그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말하자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가 지금 우리보다 더 진화된 길을 걷고 있는지 누가 압니까? 그녀는 깨달음의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니 그대로 놔둡시다.” 또다른 친구도 말했다. “그 말이 맞아요. 또한 우리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러 이곳까지 왔는데 다른 일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요.”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자신이 깨들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남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가 없어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죠. 그리고 그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도 없구요.” 나는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깨달음이 아니라 물과 음식이며 인간적인 보살핌이하고 설득했지만 다들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국인 중에 가장 나이 많고 스스로 열렬한 라즈니쉬 추종자라고 주장하는 여성은 보름 동안의 침묵 명상에 참가중이라고 아예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상을 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이런 식으로 외면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오후 명상 시간이 됐다면서 곧 자리를 떴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정이 떨어져서 명상센터 밖으로 나왔다. 이런 삭막한 곳에 있느니 차라리 북인도를 여행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고 열매들은 노랗게 익어 바닥에 떨어지는데, 정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에 망고나무 밑을 떠난 나는 릭샤를 타고 장현숙이 머물고 있는 화장터 옆의 아파트로 갔다.  그녀는 내가 아무리 불러도 방문을 열지 않았다. 옆방에 사는 프랑스 여자는 그녀가 화장실 가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방안에 있는게 분명했다. 문틈으로 이따금씩 이상한 괴성이 새어나왔다.  결국 그날 나는 내 힘으로는 그녀를 밖으로 불러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에 엉뚱한 일이 벌어져 그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아파트로 올라오면서 릭샤 운전사에게 밑에서 기다리라고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내려오지 않자 운전사는 차비를 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를 수소문하고 찾아다녔다. 마침내 나를 발견한 인도인 운전사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나보다 더 애절하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보시오. 어서 나오시오. 우리 다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갑시다. 슬프다고 해서 자신을 괴롭히면 안 됩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운전사는 마치 자신의 여동생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욱 간절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당신은 지금 마음이 아픈 것뿐입니다. 곧 나을 거예요. 어서 문을 열고 우리 집으로 가서 뭘 좀 먹읍시다.”


영어가 짧은 운전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자 이제는 아예 힌두어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전혀 반응이 없던 장현숙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힌두어로 누가 마구 떠들어대자 궁금한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아무 관계도 없는 한 인도인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지만 진심으로 설득한 결과 그녀는 굳게 달았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명상센터의 한국인들을 소집해 장현숙을 데리고 근처의 인도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잠시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음식값까지 자신이 냈다. 그리고 나한테 고맙다며 1백 루피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장현숙은 어려서부터 꿈이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녀가 부르는 이태리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은 감동적이었다. 아름다운 목소리,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그녀의 모습이 잠시나마 우리를 기쁘게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녀는 한국의 부모에게로 돌아갔다. 이 모두가 닫혔던 문을 열게 해준 어느 평범한 인도인 릭샤 운전사 덕분이었다. 그는 가슴이 살아 있는 진정한 구도자였다.


수리야 다스가 편집한 티벳 이야기 <<눈사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연못가의 납작바위 위에 앉아서 명상하기를 좋아한 한 티벳 노승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명상을 시작할라치면 작은 벌레들이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삐걱거리는 늙은 몸을 일으켜 그 작은 생명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고 나서 다시 명상을 시작하곤 했다. 노승과 함께 그 승원에서 수행을 하는 다른 승려들은 마침내 노승이 연못에서 벌레들을 건져내느라 명상 시간 대부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크든 작든 의식이 있는 생명체를 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런 일에 방해받지 않고 다른 곳에서 수행을 한다면 더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행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들은 노승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다른 곳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명상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더 빨리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실 테고, 그때가 되면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더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을텐데요.” 어떤 승려는 이렇게 제안했다.

“연못가에서 수행을 하시더라도 아예 눈을 감고 앉아 계시면 어떨까요?” 명상할 때마다 수십 번씩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 어떻게 환전한 평정과 정신집중에 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형제 승려들의 말을 경청한 노승은 마침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 말처럼 하루 종일 꼼짝하지 않고 수행하면 많은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에 입문할 때 어려운 중생을 돕고 구제하는 데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했거늘, 이제 나이 먹어 아무 쓸모없게 된 이 늙은이 눈앞에서 힘없는 생명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걸 모른 척하란 말인가? 눈을 감고 마음을 닫은 채, 중생을 도우라는 관세음보살의 가르침만 외우고 있으란 말인가?” 노승의 간단하고 분명한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승려들 중 누구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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