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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경호... 2015. 7. 19. 06:03

한국 근? 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 본 논문은 2010년 8월 12일 동국대 불교학술원이 주최한 간화선국제학술대회 간화선, 세계
를 비추다 에서 발표되었던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김방룡**

**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 목 차 >

Ⅰ. 들어가며
Ⅱ. 보조 지눌과 한국 간화선
Ⅲ. 조계종의 탄생배경과 그 성격
Ⅳ. 보조종조론과 태고법통설

Ⅴ. 근 현대 선승의 보조선 계승 의식
Ⅵ. 보조선은 임제선의 종지가 아니라는 성철의 인식
Ⅶ. 마치며

 

 

<한글요약>

 

본고는 근?현대 간화선사들이 보조선(普照禪)에 대하여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한국 간화선의 시원은 바로 보조 지눌이다. 지눌이 간화선을 최초로 국내에 소개하긴 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간화선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들어가는 삼문(三門)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 들어가 명안종사(明眼宗師)를 만나 화두를 직접 받아 간화선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대혜어록(大慧語錄) 의 한 구절을 열람하는 기연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간화선사로서의 지눌에 대한 평가는 탈중국적인 한국 간화선을 정착시켰다는 평가와 하택 신회(荷澤神會)와 규봉 종밀(圭峰宗密)의 선(禪)을 계승한 지해종도(知解宗徒)라는 상반된 평가로 나타나곤 한다.

 

근대 선승들은 조계종의 종명과 보조선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법맥은 태고법통설을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혼란과 재정비의 필요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한암은 ‘도의-보조 종조설’을 주창하였고, 성철은 ‘태고법통설’을 주창하였다.

근 현대 선승 중 보조선의 계승을 통하여 간화선을 중흥한 대표적인 인물로 경허와 한암, 동산, 경봉, 효봉 그리고 구산 등을 들 수 있다. 근 현대 수많은 선지식들이 보조선풍을 드날렸지만, 그 중에서도 송광사의 효봉과 구산의 노력은 남달랐다. 이들은 보조의 계승의식이 남달랐지만, 사상적인 면에 있어서는 철저한 간화선사였다. 즉 간화선사의 입장에서 보조선을 이해하였고 돈오 후 점수 과정인 정혜쌍수에 대하여는 새롭게 해석하였다.

보조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본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성철이다.즉 보조의 ‘돈오점수설’이 혜능과 마조와 임제를 잇는 임제선의 정통에서 벗어난 이단사설이라는 것이다. 보조의 돈오점수란 사실은 ‘해오점수(解悟漸修)’로 하택과 규봉을 잇는 하택종의 종지이자 화엄선(華嚴禪)이어서, 이를 따르면 선문의 금기인 지해종도가 된다고 성철은 강력히 배격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경허 이후 많은 간화선사들이 돈오점수와 선교일치를 주장하는 보조선을 간화선의 수행지침으로 여겨 왔음을 밝혔다. 다만 성철은 이러한 보조선을 태고법통설과 임제-대혜를 잇는 임제종의 종풍에 입각하여 강력히 배격하고 있음을 밝혔다.

 

?주제어

간화선, 보조선, 보조 지눌, 경허 성우, 한암 중원, 효봉 학눌, 퇴옹 성철, 구산 수연,보조종조론, 태고법통설.

 

 

Ⅰ. 들어가며

 

근?현대 한국선의 효시는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이다. 경허가 1879년 동학사의 강원을 폐쇄하고 영운화상(靈雲和尙)의 “나귀의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馬事到來)”1)라는 화두를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은 사건을 계기로 사교입선(捨敎入禪)과 간화선 수행은 한국선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 景德傳燈錄 卷11, 靈雲志勤條.( 大正藏 51, p.285 中). “僧問如何是佛法大意. 僧曰驢事未去 馬事到來”.

 

경허는 오도(悟道) 후 20여 년간 전국을 돌며 선원을 개설하고 수많은 납자들을 제접하여 간화선을 크게 중흥시켰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서구세력과 일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우리민족은 일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기존의 유학적 가치는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타협과 저항과 탈속이라는 선택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중 타협하지 못하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은 유학적 가치를 버리고 불교에 뛰어들었으며, 전국의 선원에는 눈푸른 납자들이 몰려들어 간화선을 통해 깨닫게 됨으로써 많은 선지식이 이 땅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들 선원 납자들이 중추가 되어 해방이후 정화불사(淨化佛事)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을 탄생시킨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 간화선은 경허이후 출현한 선지식들의 선수행과 깨달음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근 현대 간화선사들이 보조선(普照禪)에 대하여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한국의 간화선은 고려 무신집권기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에 의하여 국내에 최초로 소개된 이후 그의 제자인 진각 혜심(眞覺慧諶, 1178~1234)에 의하여 정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계종’이란 종명이 중국의 육조 혜능(六祖慧能)과 고려의 보조 지눌과 관련이 깊다는 점과 조계종이 기존의 선교 양종을 모두 포용하는 종단이라는 점에서 보조선은 조계종의 종지종풍으로 존중되고 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근대 한국 승려들의 공통적인 고민은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무너진 한국불교를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출현은 불교발전의 새로운 동력을 얻음과 동시에 일본불교의 침투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현대 한국불교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한 것은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이다. 선승(禪僧)들이 주체가 된 정화운동은 결국 대처승과의 결별을 통하여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을 출현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정화의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의 도움을 받고 선승들의 수적 열세에서 출발하는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한국불교는 잦은 종단내의 분규, 기복불교의 유행 등 많은 문제점을 노정시켜왔다. 급기야 10.27 법난이라는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불교개혁과 불교현대화 및 조계종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현대 한국불교의 중심문제로 떠올랐다.

 

성철에 의하여 제기된 종조문제와 돈오돈수론의 등장은 이러한 한국불교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성철은 보조의 돈오점수론을 선문의 이단사설로 규정함으로서 기존의 간화선사들이 가지고 있던 보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1990년대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은 한국 간화선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치열한 논쟁으로 보조선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킴과 동시에 ‘성철선(性徹禪)’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현대 한국 간화선의 새로운 정형을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05년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가된 이후 현재까지 근 100여 년간 한국불교계의 변화를 살펴본다면 경이적인 발전을 해왔다 그리고 그 변화 동력의 핵은 선원수좌와 간화선 수행이라 할 수 있다.2) 따라서 간화선을 통하여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꾀하려는 움직임은 유의미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 물론 이는 대한불교조계종에 국한한 논리라 할 수도 있다. 현재 한국불교 종단의 수만 100여개가 되며, 그 중 태고종, 진각종, 천태종 등의 勢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지만 전체적인 한국불교의 규모면에서 90%를 차지하는 것은 조계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Ⅱ. 보조 지눌과 한국 간화선

 

보조 지눌이 열반한 지 벌써 800주년이나 되었다. 보조 사후 800년 동안 즉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까지의 시기에 그가 제시한 마음으로서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과 수증론(修證論)으로서 돈오점수론(頓悟漸修論) 그리고 수행체계로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 등의 삼문체계(三門體系)는 선수행의 지남(指南)으로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한국 간화선(看話禪) 시원은 바로 보조 지눌이다. 지눌은 그의 나이 41세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 을 통하여 세 번째의 깨달음을 경험하게 된다. “10여 년 동안 정견(情見)을 놓아 버리지 못한 채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처럼 따라다녔는데, 대혜어록 을 통하여 마음을 깨닫자 가슴 속에 걸리던 것이 없어지고 원수가 함께 있지 않아 당장에 편하게 되었다.”3)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로 대혜의 간화선과 만남의 장면이다.

 

3) 김군수, 보조국사비명 (보조사상연구원, 보조전서 , 불일출판사, 1989), p.420. “予自普門已來 十餘年矣 雖得意動修 無虛廢時 情見未忘 有物?膺 如讐同所. 至居智異 得大慧普覺禪師語 錄云 ?禪不在靜處亦 不在鬧處 不在日用應緣處不在思量分別處. 然 第一不得 捨却靜處鬧處 日用應緣處 思量分別處?? 忽然眼開 方知皆是屋裡事 予於此契會 自然物不碍膺 讐不同所 當下安樂耳.”

 

 

이후 지눌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과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의 저술을 통하여 간화선의 필요성과 간화선 수행에서 경계해야할 ‘간화십종병(看話十種病)’4)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지눌의 한평생 고민은 당시 고려불교계의 타락과 선종과 교종 간의 갈등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에 있었다.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실천과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이론정립은 이에 대한 지눌의 처방이었다. 지눌은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론(新華嚴論) 에 나타난 화엄의 성기(性起)사상을 통하여 돈오(頓悟)의 근거를 확립하고, 혜능(慧能)의 육조단경(六祖壇經) 에서 돈오 후 점수(漸修)의 구체적 수행법으로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함으로써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이론을 완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규봉 종밀(圭峰宗密)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지만 지눌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수행자들이 알음알이[知解]의 병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대혜 종고(大慧宗?)의 간화선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4) 절요사기 에서 지눌은 조주 ‘무자’ 화두를 드는 10가지의 병통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대혜 종고가 제시하였던 8가지 병통에 지눌이 2개를 추가하여 10가지로 정형화한 것이다.
즉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없다(無)’는 한 글자는 바로 저 많은 나쁜 앎과 나쁜 깨달음을 부수는무기이다. 그러니 ① ‘있다, 없다’로 알려고 하지 말고, ② 어떤 도리로도 알려고 하지 말며, ③뜻의 밑뿌리를 향해 생각하거나 헤아리지도 말고, ④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박거리는 곳을 향해 숨을 곳을 삼으려고도 하지 말며, ⑤ 말의 길을 향해 살 꾀를 찾지도 말고, ⑥ 일이 없는 갑옷 속에 떠 있지도 말며, ⑦ 화두 드는 곳을 향해 알려고도 하지 말고, ⑧ 문자로 인증(引證)하지도 말라. 다만 12시 중에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이끌고 항상 들되 ‘개
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라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떠나지 않고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목우자는 말한다. “이 법어는 다만 여덟 가지 병만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앞 뒤의 말을 검토해 보면 ⑨ 진실로 없다는 없음과 ⑩ 미혹으로써 깨닫기를 기다란다는 두 가지이니, 그러므로 모두 합해 열 가지 병이 되는 것이다.”
이 ‘간화 10종병’은 수선사 2세인 혜심이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을 지어 그 이해를 심화시켰으며, 이후 태고 보우?서산 휴정 등을 거치면서 면면히 계승되어 화두를 실천하는 방법적 요체로서 우리나라 선사들에게 수용되어 왔다. 즉 한국의 선문에서 ‘구자무불성화’가 대표적인 간화선 수행의 화두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가 지눌의 ‘간화 10종병’의 정형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의 개창자인 대혜가 당시 사대부의 학문을 비판하는 요지는 ‘근본에 대한 성찰 결여’에 있다. 대혜는 사대부들의 과거 지상주의와 무사안일주의를 비판했고 학문방법론과 관련하여 내면공부가 전제되지 않은 분별적 사고와 주체성을 결여한 독서태도에 문제를 제기했다.5) 즉 대혜의 간화선은 분별적 사고인 지해(知解)의 병통을 제거하여 근본에 대한 성찰을 독려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지눌의 간화선 수용 또한 자신의 수행 상에 나타난 마지막 지해의 병통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지눌이 돈오점수를 주장하고 더군다나 돈오 후 점수과정에 수상정혜(隨相定慧)를 포함시킨 이유는 당시 불교계 특히 선종 승려들의 막행막식의 폐혜와 다양한 근기(根機)의 수행자들을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간화결의론 에는 간화선을 수행해야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5) 변희욱, ?사대부 학문 비판을 통해 본 대혜의 ‘유학적 선’?, 불교학 연구 제8호, (불교학연구회, 2004), p.241.

 

 

"물론 화엄에서 말하는 뜻과 이치[義理]는 가장 완전하고 오묘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식정[識情]에 의해서 듣고 이해하여 헤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문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경절문(徑截門)에서는 불법을 이해하는 언어적인 개념[知解]의 병통이라고 하여 (그것을) 모두 버리는 것이다. 무자 화두는 하나의 불덩어리와 같아 가까이 가면 얼굴을 태워버린다. 그런 까닭에 불법에 관한 지적인 이해[知解]를 둘 곳이 없다."6)

6) 지눌, 看話決疑論 (보조사상연구원, 普照全書 , 불일출판사, 1989), p.91. “然此義理雖最圓妙 摠是識情聞解思想邊量故 於禪門話頭參詳徑截悟入之門 一一全揀佛法知解之病也. 然話頭無字如一團火近之則燎却面門故無佛法知解措着之處.”

 

지눌이 간화선을 최초로 국내에 소개하긴 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간화선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들어가는 삼문(三門)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 들어가 명안종사(明眼宗師)를 만나 화두를 직접 받아 간화선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대혜어록 의 한 구절을 열람하는 기연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간화선사로서의 지눌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상반(相反)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탈중국적인 한국 간화선을 정착시켰다는 평가와 하택 신회(荷澤神會)과 규봉 종밀의 선(禪)을 계승한 지해종도(知解宗徒)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Ⅲ. 조계종의 탄생배경과 그 성격

 

일제는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 7개조를 반포하고, 30본산(本山) 체제를 확립시키면서 조선불교에 대한 지배를 노골화된다. 이후 1929년 각황사(覺皇寺)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승려대회(僧侶大會)’를 개최하고 이를 중앙통제기구로 삼게 된다. 이에 한국의 불교계는 1935년부터 본격적인 교단설립추진운동인 총본산(總本山) 건설운동을 추진하여, 드디어 1941年에 태고사법(太古寺法)의 제정(制定)을 통하여 ‘태고사(太古寺)’를 총본산으로 삼아 ‘조선불교조계종(朝鮮佛敎曹溪宗)’을 탄생시키게 된다.

 

해방 이후 한국불교는 본격적인 소용돌이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정화운동이며, 이는 1954年부터 1970年까지 무려 17년간 계속되어 결국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과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의 분종(分宗)으로 마무리되어 진다. 이렇게 탄생한 ‘대한불교조계종’이 해방 이후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동시에 한국불교의 성격을 결정하게 된다.

 

‘조선불교선교양종 → 조선불교조계종 →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이어진 근?현대 한국불교의 큰 흐름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어져 온 것이지만, 그 결말은 ‘선수행전통에 입각한 복고주의’라는 성격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근대 종교계의 흐름이 세속화의 과정을 겪어온 역사와는 상반된 한국불교의 특수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오백년의 억불상황과 일제시대의 불교왜색화 현상에 대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려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은 그 출발이 ‘조선불교선교양종’에 있다. 그 이름에서 보이듯 과거 선종과 교종의 수많은 종파가 존재하여 왔던 것을 인위적으로 하나로 통합하여 단일한 종단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조계종은 선원 수좌가 주체가 되고 간화선이 대표적인 수행법이라 말할 수는 있는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찬란한 대승불교 전통을 복원시켜야 하는 책무 또한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불교조계종과 대한불교조계종의 출현과정에선 선종이 주체가 되면서 교종을 모두 회통시킬 수 있고 또한 현대불교가 지향할 수 있는 종지종풍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단적인 예가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 제1조’에 그대로 드러난다.

 

"제 1조 본종은 대한불교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7)

 

우선 조계종의 기원을 도의에 두면서 그를 구산선문의 대표가 아닌 가지산문의 개창자로 설명하고 있는데, 보조는 사굴산문이며 태고는 가지산문이어서 면면부절이란 말에 모순이 따른다. 또한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의 발달하였던 교종에 대한 기원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선교양종의 포용을 태고의 ‘제종포섭’으로 명명하고 있긴하나 태고가 실시하였던 ‘원융부’는 공민왕 당시 1년 6개월간 시행하였던 것에 불과하다. 원융부란 불교를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한 정치적 통합기구였고, 태고에게 회통의 이념은 부재하였다. 태고야말로 간화선만을 강조하였던 선사(禪師)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를 통한 제종포섭이란 말은 설득력이 약하다.8) 오히려 선교일치의 이념을 표방하였던 보조의 회통정신을 제종포섭의 원리로 제시했다면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할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성격이 ‘남종선 그중에서도 임제종의 종맥을 이은 선종인가?’,아니면 ‘삼국시대 이어져온 선교양종의 통합종단인가?’, 아니면 ‘이전의 전통과 다른 현대 새로운 불교종단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종단내부에서 조차 이견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승려 교육과정에 대한 개정 논의도 조계종의 성격에 대한 시각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현상이라 보여진다.

이러한 문제는 먼저 종지 종풍을 분명히 하고 그에 뜻을 같이하는 승려들이 모여 조계종단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라. 조선후기 억불의 상황 속에서 종단이 모두 해체되어진 상태에서 이를 외형적으로 통합하여 새롭게 종단이 출범하게 된 역사적 상황의 필연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7) www.buddhism.or.kr
8) 태고의 경우 26세 때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지만 이후, 37세부터 조주의 무자화두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원나라로 들어가 석옥 청공(石屋淸珙)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임제종의 법통을 전수하게 된다. 물론 태고에게 있어 정토사상도 보이나 이는 염불화두선으로 ‘염불하는 이 놈이 누구인가?’하는 간화선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Ⅳ. 보조종조론과 태고법통설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는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선종과 교종을 아우를 수 있는 종지 종풍을 현대에 맞게 새롭게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주로 선승들에 의하여 자신의 법맥과 간여된 종조론과 법통설을 주장하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근대 선승들은 조계종의 종명과 보조선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법맥은 17세기 전반 부휴의 문도와 휴정의 제자인 편양문파들에 의하여 정비된 ‘태고법통설’을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혼란을 불식시키고 법통설에 대한 재정비의 필요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직접 언급한 분은 한암 중원(漢巖重遠)과 퇴옹 성철(退翁性徹)이다. 즉 1897년(21세)에 보조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통하여 1차 깨달음을 얻은 한암은 ‘도의-보조 종조설’을 주창하였고9), 성철은 한국불교의 법맥 을 통하여 ‘태고법통설’을 주창하였다.10)

 

한암은 신라에 처음으로 선을 들여온 가지산문 도의국사를 초조로 하여 사굴산문의 범일국사로 하여 고려의 보조 지눌 그리고 그 법이 각엄존자로 이어져 청허휴정에게까지 이어지는 해동 조계종의 법맥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보조의 법통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과 수선사 13국사인 각엄존자를 새롭게 부각시킨 것으로 기존의 태고법통설에 대한 반론이다. 이후 이불화?이종익 등은 이러한 보조법통설을 더욱 체계적으로 논증하였다.

 

9) 한암문도회, 漢巖一鉢錄 , 민족사, 1995, p.87. 한암은 <불교(佛敎)> 제70호(1930.4)에 기고한 ‘해동초조(海東初祖)에 대하야’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그런즉 自今爲始하야 道義國師로 初祖를 定하고 次에 梵日國師로, 次에 普照國師로 第十三國師覺儼尊者로 至하여 拙庵?衍, 龜谷覺雲, 碧溪正心, 이렇게 淵源을 정하야 다시 海東曹溪宗을 復活하는 것이 正當합니다.”

10) 성철, 한국불교의 법맥 , 장격각, 1983, p.18. 성철은 서산행적초(西山行蹟草) 와 종봉영당기(種峯影堂記) 에 근거하여 한국불교의 법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임제(臨濟) … 석옥(石屋) - 태고(太古) - 환암(幻菴) - 구곡(龜谷) - 벽계(碧溪) - 벽송(碧松) - 부용(芙蓉)

부휴(浮休)
서산(西山) - 편양(鞭羊)
                -사명(四溟) - 송월(松月)

 

 

 

이에 반해 성철은 새롭게 제시된 보조법통설에 대한 비판과 함께 태고법통설에 대한 종합적인 논증을 한국불교법맥 을 통해 시도하였다. 즉 선종의 정맥은 혜능, 마조, 임제로 이어지는 임제종이며, 이를 임제의 법손인 석옥 청공에게 태고 보우가 이어와서, 이것이 환암 혼수를 거쳐 부휴와 서산에게 이어져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즉 성철은 임제종의 법통설을 강조하기 위하여 석옥으로부터 법을 이어온 태고와 환암 혼수 그리고 구곡 각운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새로운 한국조계종의 정체성을 어떻게 새울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근?현대 선승들 간의 인식의 차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내면에는 한암과 성철 간 보조선에 대한 상반된 인식차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불교 학계에서는 이러한 종조론과 법통설이 모두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성과 사법전등(嗣法傳燈)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박해당은 ?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11)과 ?성철의 법맥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12)를 통하여 허균의 나옹법통설, 편양 언기의 태고법통설, 이불화?이종익의 보조법통설, 성철의 태고종조설 등의 각각의 문제점에 대하여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결국 이러한 법통설 모두 ‘사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식’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13)

 

문제는 근?현대의 간화선사에게 나타나는 ‘법맥에 의한 한국선의 정통성 찾기’는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박해당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입실면수(入室面授)의 사자상승법에 따르면 모든 법통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장 근대선의 중흥조인 경허의 경우만 보더라도 스스로 깨달았지 스승으로부터 인가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조계종이 선종이 아닌 선교를 통합하는 회통적 성격의 종단이라 한다면 이 같은 법통설에 대한 논란 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조계종의 종지 종풍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11) 박해당, ?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철학사상 11집,2000), pp.51-74.
12) 박해당, ?성철의 법맥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근현대 한국불교의 재조명-퇴옹 성철의 불교관과 현실인식을 중심으로- , 2004.11.5), pp.117-131.
13) ‘법통설’의 문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및 명?청 교체기의 상황 속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 지배 권력이 훈구세력에서 사림세력으로 바뀌면서 사림세력에 의하여 자신들의 도맥을 공맹과 주자 그리고 고려 말의 정몽주와 길재로부터 조광조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펴게 되자 이에 대한 영향 속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어 청나라의 등장으로 중국의 지배가 만주족에게 넘어가자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숭명반청 의식과 함께 소중화의식이 등장하게 된다. 조선이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라는 소중화 의식은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임제법통설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Ⅴ. 근 ? 현대 선승의 보조선 계승 의식

 

구한말 경허의 출현 이후 지눌의 저술과 선사상은 대부분의 선수행자들에게 수행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경허의 ?중노릇하는 법?에는 “목우자스님 말씀이 재물과 색이 앙화됨이 독사보다 심하니 몸을 살펴 그런 줄 알아 항상 멀리 여의라 하시니 이런 깊은 말씀을 본받아 행하여야 공부가 순일히 되나니라.”14)라고 하여 보조법어를 항상 수행의 모범으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경허가 주도하여 발간하고 근?현대 선승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선문촬요(禪門撮要) 하권에는 보조의 저술인 수심결(修心訣 ? 진심직설(眞心直說) ?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등이 실려 있다. 이는 근대 선승들에게 보조선이 수행의 귀감이 되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조계종의 강원교육의 기본이 되는 사집(四集)과정에 보조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와 규봉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가 포함되어 있어 선교일치와 간화선 수행의 지침을 보조선의 안목을 통하여 시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근대 선승들에게 보조의 저술이 수행의 지침서가 되었음은 쉽게 찾아질수 있다.15) 특히 한암의 경우 보조의 수심결 을 통하여 1차 깨달음을 얻고 또 ‘도의-보조 종조설’을 주창하였음은 앞서 밝힌 바 있지만, 1937년(61세)에는 직접 보조법어 를 편집 현토하고 자신의 서문을 기록라고 있다.16) 이러한 사실에서 보조선을 통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한암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한암의 ?선문답 21조?17)는 선의 본질적 수행방법으로 ‘간화(看話)’와 ‘반조(返照)’의 조화와 구경의 경지를 명쾌하게 규명하고 있다. 사실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통한 자성의 회복은 지눌의 수심결 에 나타난 공부방법이고, 간화에 의한 알음알이의 병통을 제거하는 것은 절요사기 의 후반부와 간화결의론 의 공부방법이다. 이 두 가지가 선
수행의 핵심적인 공부법이며 상호 보완적이고 조화적이라는 한암의 관점은 보조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중 제10문답과 제20문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4) 석정명 역주, 鏡虛集 , 도서출판 모아, 1991, p.72.
15) 이에 대한 선행연구로 김경집의 ?한국 근?현대불교의 보조 영향?과 이덕진의 ?근?현대불교에 끼친 보조사상의 영향?이 있다. 김경집은 경허와 한암의 결사 및 송광사 효봉과 구산의 보조선 계승에 주목하였고, 이덕진은 경허?한암?동산?효봉?구산에 주목하였다.
16) 한암문도회, 漢巖一鉢錄 (서울: 민족사, 1995), p.490. 한암의 제자인 탄허는 이를 최초로 번역하였으며, 보조가 절요한 이통현의 신화엄론 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탄허 또한 보조사상을 중시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17) 한암, ?선문답 21조?, 漢巖一鉢錄 , 위의 책, pp.37∼69.

 

 

제 10문 : 간화와 반조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매양 참선인들이 서로 논쟁하니 바라건대 자상히 논변하여 밝혀주소서.
제 10답 : (전략)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학인은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하였으니 사구는 이로(理路)와 언로(言路)와 견문과 이해와 사상이 있기 때문이며, 활구는 이로와 언로와 재미와 모색이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하는 도인이 반조와 간화를 막론하고 여실히 참구하면 마치 한덩이의 불과 같아서 가까이 하면 얼굴을 태우게 됨과 같으니라. 도무지 불법의 지해(知解)를 붙일 곳이 없으리니 어느 겨를에 화두니, 반조니, 같으니, 다르니 하는 허다한 것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생각이 앞에 나타나 투철하게 관조하여 남음이 없으면 백천법문과 무량한 묘의(妙意)를 구하지 않고서도 원만하게 얻어서 여실히 보고 여실히 행하며 여실히 써서 생사에 큰 자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오로지 모든 생각들이 여기에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18)

18) 위의 책, pp.54∼55.

 

제 20문 : 이미 생사를 초월하였다면 갈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니, 사대(四大)가 각기 흩어짐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가야 합니까?
제 20답 : 일면불(一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19)

19) 위의 책, p.62.

 

 

위의 10문답의 내용은 보조가 간화결의론 에서 원돈신해문와 경절문의 관계를 가지고 화엄의 원돈신해는 지해의 장애를 가진 사구(死句)이지만 화두참구는 지해의 장애를 극복한 활구(活句)라는 내용을 응용하여, 반조와 간화의 논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활구참구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간화결의론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문에는 이와 같은 원돈신해(圓頓信解)의 참된 가르침이 항하사 모래알처럼 많지만 모두 죽은 말[死句]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앎의 장애[解碍]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 발심하여 공부하는 자들이 경절문의 활구(活句)를 아직 제대로 참구하지 못하기에, 성품에 맞는 원만한 교설[稱性圓談]로서 그들의 믿음과 앎이 물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20)

20) 지눌, 간화결의론 (보조사상연구원, 普照全書 , 불일출판사, 1989), p.92.

“禪門中此等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河沙數 謂之死句 以令人生解碍故. 竝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 未能參詳 故 示以稱性圓談 令其信解不退轉故.”

 

 

그러나 선문의 이와 같은 참다운 말을 교문에 비교하면 생략된 것이지만 만일 경절문의 화두에 견주면 아직도 불법의 알음알이가 있으므로 열 가지 병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선사는 “무릇 배움에 참여한 사람은 반드시 활구를 참구하여야지 사구을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활구 아래에서 깨달으면 영원히 잊지 않지만, 사구 아래에서 깨달으면 자신을 구하는 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혜선사는 맛없는 화두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참구하게 하여 열 가지 병에 걸리지 않고서 즉시 깨우쳐 곧 삼구를 얻게 하고 삼구의 부림을 받지 않게 하였다.21)

21) 위의 책, pp.101-102.

“然禪門 此等如實言句 若比敎門 雖是省略 若比徑截門話頭 則以有佛法知解故 未脫十種病. 所以云 夫?學者須?活句 莫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自救不. 是以大慧禪師 以沒滋味話頭 令學者參詳 不滯十種病 直下承當 便能使得三句 不爲三句所使.”

 

앞의 20문답의 내용은 수심결 의 서문과 진심직설 의 ‘진심소왕(眞心所往)’에서 제기된 다음과 같은 내용과 같은 의미이다.

 

 

"이 물질적인 몸(色身)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 생겨나고 사라진다. (하지만) 참된 마음(眞心)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百骸)이 죽으면 불과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一物)은 길이 신령스러워 하늘과 땅을 덮어버린다”라고 하였다."22)

22) 지눌, 修心訣 , 위의 책, p.31. “色身是假 有生有滅 眞心如空 不斷不變. 故云百骸潰散 歸火歸風 一物長靈蓋天蓋地.”

 

"만약 진심을 아는 사람은 망심이 모두 없어지고 진심에 일치하여 선악의 인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죽은 뒤에 그 영혼은 어느 곳에 의탁합니까?23)

23) 지눌, 眞心直說 , 위의 책, p.67. “若達眞心人 妄情歇盡 契證眞心 無善惡因 一靈身後 何所依託耶.”

 

 

이처럼 한암은 ‘간화’와 ‘반조’라는 보조사상의 핵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랫동안 깊이 천착하였으며, 대혜와 보조가 그러했듯이 본래면목의 근본에 대한 성찰에 주목하여 활구참구의 논리로서 ‘간화’와 ‘반조’의 대립적 관점을 해소라고 있다.1990년대 돈오점수?돈오돈수 논쟁의 명쾌한 해답을 한암은 이미 제시해 놓았던 것이다.

 

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한 석우(石友)도 1912년(38세)에 범어사에서 수심결 의 “삼계(三界)의 뜨거운 번뇌가 불타는 집과 같다. 이 속에서 어찌 차마 그대로 머물러 오랜 고통을 달게 받겠는가?(三界熱惱猶如火宅其忍淹留甘受長苦.)”하는 대목을 통하여 깨달았다.24) 역시 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하였던 동산(東山)도 평소 선문촬요를 통하여 대중들의 심안(心眼)을 열어주고 보조와 경허의 선풍을 ?았다.25)

 

또 통도사를 중심으로 선풍을 크게 드날린 경봉(鏡峰)도 평소 한암이 편찬한 보조법어 를 보고 보조를 원사(遠師)로 삼았을 정도로 보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는 이영무가 찬한 경봉의 비문에 “주인공과의 문답시(問答詩) 및 태평가 등으로 오도(悟道)의 경지를 읊었으며 오후보임사(悟後保任事)에 대해 방한암?김제산?백용성등 당시 선지식에게 널리 물었고 평소 수행은 보조국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26)고 밝히고 있는 것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같이 보조의 가르침은 공적영지심에 대한 눈뜸, 무자화두를 실참하는데 있어서 간화십종병에 대한 주목,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선교 일치에 대한 확신 등 여러 방면에서 선수행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선지식들이 보조선풍을 드날렸지만, 그 중에서도 효봉(曉峰)과 구산(九山)의 노력은 남달랐다. 보조가 주석하면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펼쳤던 송광사는 이후 16국사를 배출하였고, 줄곧 해동제일도량의 위상을 차지해왔다. 지금의 송광사가 승보종찰로 거듭난 직접적인 계기는 1937년(50세) 효봉이 송광사의 조실(祖室)로서 삼일암(三日庵)에 십년 동안을 머물게 된 데에 있다. 이곳에서 효봉은 수선사(修禪社) 16국사인 고봉화상(高峰和尙)으로부터 몽중법문(夢中法門)27)을 듣고서 원명(元明)이란 법명을 ‘지눌을 배운다’의 의미의 학눌(學訥)로, 운봉(雲峰)이라 부르던 법호를 ‘고봉을 계승하여 다시 새벽을 연다’는 의미의 효봉(曉峰)이라 개명하게 된다. 이는 효봉이 목우자 지눌의 선풍(禪風)을 통하여 한국불교를 재건해야겠다는 굳건한
원(願)을 세웠음을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의지는 이후 제자 구산에게 이어진다.

 

24) 일타스님 외, 현대고승인물평전 하 , 불교영상, 1994, p.14.
25) 일타스님 외, 위의 책, p.101.
26) 이영무, ?傳佛心印扶宗樹敎鏡峰禪師塔碑銘?.
27) ?효봉대종사 행장과 연보?(효봉문도회, 효봉법어집 , 불일출판사, 1995, p.331.) “번뇌가 다 할 때 생사가 끊어지고(煩惱盡時生死絶) / 미세하게 흐르는 망상 영원히 없어지네(微細流注永斷滅) / 원각의 큰 지혜 항상 뚜렷이 드러나니(圓覺大智常獨存) / 그것이 곧 백억의 화신불 나타남이네(卽現百億化身佛)”

 

 

효봉은 해방이후 송광사를 떠나 선원과 율원과 강원의 체계를 갖춘 최초의 총림인 해인사 가야총림의 방장으로 추대된다. 1949년 9월 1일의 가야총림의 <상당법어>에는 효봉이 남종선의 개창자인 혜능과 무자화두를 제기한 조주 그리고 보조의 선풍을 따르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과거 여러 스님들은 문정(門庭)의 시설은 제각기 다르지만 학인(學人)을 지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모두 친절했다. 그 중에서 가장 친절한 이가 상세(上世)에는 육조(六祖)스님이요, 중세(中世)에는 조주(趙州) 스님이요, 하세(下世)에는 보조(普照)스님이니 이상 삼가(三家)의 친절한 어구를 말해보리라. …… 이상이 가장 친절한 언구이니, 그러므로 이 산승은 상세로는 육조를 섬기고, 중세로는 조주를 섬기고, 하세로는 보
조를 섬긴다. "28)

28) 효봉법어집 , 위의 책, p.69.

 

 

해방 후 송광사가 다시 목우자가풍을 크게 떨치게 된 데는 1969년 구산이 효봉의 유훈을 받들어 조계총림을 발기하고 초대방장에 추대되면서부터이다. 구산은 보조의 정혜결사운동(定慧結社運動)을 계승한 ‘제2 정혜결사운동(第二定慧結社運動)’을 전개한다. 송광사의 중창불사와 함께 신도조직인 불일회(佛日會)를 조직하고, 1973년에는 국내 최초의 국제선원인 ‘불일국제선원(佛日國際禪院)’을 개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노력은 구산의 사후 1987년에 ‘보조사상연구원’의 개원으로 이어져 보조사상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효봉과 구산이 보조선을 그대로 묵수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보조의 정혜결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새로운 승가상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보조의 계승의식이 남달랐지만, 사상적인 면에 있어서는 철저한 간화선사였다. 즉 간화선사의 입장에서 보조선을 이해하였고 돈오 후 점수 과정인 정혜쌍수에 대하여는 새롭게 해석하였다. 효봉은 죽는 순간까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놓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깨침 후 보임과정으로 돈오점수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지눌이 제시한 돈오 후 점수과정으로서 정혜쌍수는 아니다.

 

보조에게 있어 정혜쌍수가 진심의 본체와 작용을 의미하는 성적등지(性寂等持)라면, 효봉과 구산에게 있어서는 화두를 들고 있는 상태에서의 적적(寂寂)과 성성(惺惺)함으로 새롭게 이해된다. 이는 구산의 다음과 같은 법어에 잘 나타나 있다.

 

 

"목우자(牧牛子)께서 말씀하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은 바깥 경계인 육근(六根)과 육적(六賊)이 적적(寂寂)하고, 안쪽 경계인 화두(話頭)가 성성(惺惺)함이니, 적적하고 성성함은 옳은 것이요 적적하여 혼침에 빠지는 것은 그른 것이며, 성성하고 적적함은 옳은 것이요 성성하게 망상하는 것은 그른 것이니, 이 적적하고 성성한 곳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인 것이다."29)

29) 구산문도회, 九山禪門 (불일출판사, 1994), pp.224∼225.

 

 

보조는 규봉의 도서(都序) 에 제시된 공적지(空寂知)의 개념을 공적영지(空寂靈知)로 드러내어 진심의 본체는 공적에 그 작용은 영지에 배대하고 있는데, 위에서는 화두를 들고 있는 상태에서 바깥 경계에 적적을 안쪽 경계에 성성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간화선의 입장에서 화두를 통한 정혜쌍수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Ⅵ. 보조선은 임제선의 종지가 아니라는 성철의 인식

 

현대 한국불교계의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 중의 한 분으로 성철(性徹)을 꼽을 수 있다. 1947년 청담(靑潭)과 더불어 ‘부처님의 법대로 살자’는 것을 모토로 시행된 ‘봉암사 결사’는 현재 조계종 수행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한 평생 산을 떠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였던 사실은 한국불교를 중흥시키는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였던 태고법통설과 돈오돈수설은 한국불교계에 크나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한국불교의 법맥 ? 선문정로 ? 본지풍광 ? 백일법문 등의 저술 역시 승가는 물론 재가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혀져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본지풍광은 간화선사로서 성철의 존재를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보조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본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주장한 분 또한 성철이다.
그것은 보조의 ‘돈오점수설’이 혜능과 마조와 임제를 잇는 임제선의 정통에서 벗어난 이단사설이라는 것이다. 보조의 돈오점수란 사실은 ‘해오점수(解悟漸修)’로 하택과 규봉을 잇는 하택종의 종지이며, 화엄선(華嚴禪)이어서 이를 따르면 선문의 금기인 지해종도(知解宗徒)가 된다고 강력히 배격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성철은 선문정로 의 서언(緖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래 지해(知解)는 정법(正法)을 장애하는 최대 금기이므로 선문(禪門)의 정안조사(正眼祖師)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 지해종도(知解宗徒)라 하면 이는 납승(衲僧)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은 이렇게 가공한 결과를 초래하였다."30)

30) 성철, 선문정로 (장경각, 1990). p.4.

 

 

보조가 말한 돈오는 증오(證悟)가 아닌 해오(解悟)라고 성철은 주장한다. 견성(見性)이란 증오이지 해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증오는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망념까지 완전히 없앤 경지이며, 해오는 십신(十信)의 초위(初位)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성철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보조의 사상을 전부 부정한 것은 아니다. 보조의 삼문사상(三門思想) 중 돈오점수에 해당하는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을 부정한 것이며, 간화선에 해당하는 경절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선문정로 의 다음의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解悟)인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문(禪門)의 최대의 금기인 지해(知解)임을 명지(明知)하였으면 이를 완전히 포기함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선문정전(禪門正傳)의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은 추호의 지해도 이를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단절하는 사지악해(邪知惡解)라 하여 철저히 배격할 뿐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지해를 권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조는 규봉(圭峯)의 해오사상(解悟思想)을 지해(知解)라고 비판하면서도 절요(節要) ?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등에서 해오사상을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러니 보조는 만년에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문이 아님은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원돈사상(圓頓思想)을 고수하였으니 보조는 선문의 표적인 직지단전(直旨單傳)의 본분종사가 아니요, 그 사상의 주체는 화엄선(華嚴禪)이다. 선문은 증지(證智)임을 주장한 결의론의 결미(結尾)에서 원돈신해(圓頓信解)인 참의문(參議門)을 선양(宣揚)하였으니, 보조의 내교외선(內敎外禪)의 사상은 여기에서도 역연하다."31)

31) 성철, 선문정로 (장경각, 1990), p.214.

 

 

여기에서 “만년에 원돈신해가 선문이 아님은 분명히 하였다.”는 말은 간화결의론과 절요사기 의 말미에서 간화선을 주창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보조의 사상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변화가 있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며, 경절문의 부분에 대한 보조의 사상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조가 대혜어록을 접한 것은 41세이며, 권수정혜결사문 을 제외하면 나머지 저서 모두가 41세 이후에 저술된 것이어서 성철이 주장한 것처럼 보조의 사상이 전?후기로 나누어 진다는 말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성철의 보조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은 불교계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오며, 1990년대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을 낳았다. 이러한 논쟁의 결과 보조의 선이 ‘하택-규봉’의 사상을 계승한 화엄선이며, 보조의 돈오(頓悟)는 구경각(究竟覺, 證悟)이 아닌 해오(解悟)라는 성철의 주장은 상당부분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보조의 돈오점수는 모든 근기의 사람들이 돈오에 입각하여 수행해 들어갈 수 있고 자비와 이타행을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는 인식 또한 가지게 하였다.

 

태고법통설과 돈오돈수론으로 대표되는 성철선은 임제종의 법맥과 대혜의 간화선 수행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해를 이끌어내는데 공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의 보조에 대한 비판이 보조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근거로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학계의 수많은 이견이 상존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Ⅶ. 마치며

 

본고는 ‘간화선 국제학술대회’의 취지에 따라 한국 간화선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보조선에 대하여 근?현대 간화선사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개괄적으로 소개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 살핀 바와 같이 경허 이후 대부분의 선사들은 돈오점수와 선교일치 및 간화선 등을 회통하는 보조선을 수행의 지침으로 받아 들여왔으며, 특히 한암은 보조선의 핵심적인 문제인 ‘간화’와 ‘반조’가 선수행의 중요한 문제임을 다시 부각시켰으며, 효봉과 구산은 송광사를 중심으로 보조선을 크게 선양하였음을 밝혔다. 반면 성철은 이러한 보조선을 종조론과 임제-대혜의 간화선 선풍에 입각하여 선문의 정로가 아님을 주장하였다는 점 또한 밝혔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간화선은 외형적으로 크게 확장되어가는 모습을 띠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교학의 발전과 남방불교와 티벳불교 등의 유입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조계종이 한국의 선교양종을 모두 포용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간화선수행만을 강조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를 세계화 하는 데에 있어서 ‘간화선’에 주목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제 ‘보조선’과 ‘성철선’은 한국 간화선의 두 경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보조선’에 입각한 구체적인 선수행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 해인사를 중심으로 하여 ‘성철선’에 입각한 구체적인 선수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이론논쟁의 결실이 구체적인 수행상의 경쟁으로 이루어진다면 보다 바람직한 모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 한국불교계의 근본문제는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무너진 한국불교를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하는 데서 출발한다. 보조의 정혜결사정신은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라 할 수 있다. 성철이 산 속에서 나오지 않고 군사정권과 타협하지 않았던 모습은 그가 그토록 비판하였던 보조의 태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정작 간화선을 주창하였던 대혜는 철저히 현실에 참여하였다. 대혜가 묵조사선이라 비판하였던 것은 조동종의 선사들이 현실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 ‘보조를 비판하고 임제와 대혜를 따랐던 성철이 10.27 법난 후 대혜와 같이 철저히 군사정권에 맞서지 않은 것일까?’하는 것은 불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화두처럼 자리하고 있다.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의 정치적 태도와 같이 이후 간화선사들이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실천한다면 한국 간화선을 대중화하는데 일조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젊은 시절 대혜에 심취하여 대혜어록 을 항상 가방 속에 넣고 다녔던 주희(朱熹)가 임제종과 간화선을 비판하였던 핵심 대목은 ‘작용시성(作用是性)’의 문제였다. 즉 본래성불(本來成佛)에 입각하여 ‘작용하고 있는 그대로가 불성’이라고 바라본 임제종의 선풍은 막행막식(莫行莫食)과 광선(狂禪)의 폐단을 낳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주자는 그의 성리학을 통하여 제시하였다. 간화선이 지해의 병통을 제거하고 본래면목을 회복하는데 장점이 있는 반면에, 깨침 이후의 닦음의 문제에는 취약하다는 점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교란 ‘깨침’과 ‘자비’이다. 또 대승불교는 ‘보살도’이다. 한국 간화선의 미래는 바로 간화선 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자들이 사회 속에서 자비와 보살도를 얼마나 실천하는가 하는데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깊은 산속 ‘신비’의 외투를 벗고, 삶의 현장 속에서 펄펄 살아 숨 쉬는 한국 간화선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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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Recognition on Bojo's Seon by Mor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seon Masters

 

Kim, Bang-Ryong

 

Through this paper I aim at investigating how modern Ganhwaseon masters recognized Jinul's Seon.

It was Bojo Jinul who started Korean Ganhwaseon. Jinul introduced Ganhwaseon for the first time in Korea; yet for him it belongs to one of the three practice styles to enter into ultimate awakening. Besides, he reached enlightenment not by receiving a hwadu from a clear-eyed master in China but by opportune conditions in which he read a passage of The Record of Dahui. It is for these reasons that the assessments for him as a Ganhwaseon master run counter to one another.

After all, there are some who consider him as a pioneer in Korean Ganhwaseon distinguished from that of China while there are others who underestimate him as merely an intellectual succeeding to Heze(684~758) and Zongmi's Chan of China.

Modern Seon masters have been greatly influenced by the names of ‘Jogye Order’ and ‘Bojo's Seon’; however, Dharma lineages of today practically acknowledge Taego as the rightful successor of the Dharma. So the problem of orthodoxy requires settling. Hanam advocated ‘the theory of Doui and Bojo as the founders’ while Seongcheol proposed ‘the theory of Taego inheriting the orthodoxy of the Dharma’.

There are lots of Seon masters who had their names up practicing Bojo's Seon, for example, Kyeonheo, Hanam, Dongsan, Gyeongbong, Hyobong, and Gusan. Among them Hyobong and Gusan were conspicuous. Both of them were distinct in their determination to inherit Bojo's thought. But they were Ganhwaseon masters. In other words, they accepted Bojo's Seon from the perspective of Ganhwaseon masters and so renewed the interpretation of ‘the balanced development of sam?dhi and praj??’ which was originally put forth for gradual cultivation after sudden awakening.

 

It is none other than Seongcheol who criticized Bojo's Seon thoroughly and systematically. He asserted that Bojo's approach of ‘sudden awakening/gradual cultivation’ was heretical against orthodox Linji Ch'an succeeding from Huineng to Mazu to Linji. Bojo's was, according to Seongcheol, in fact ‘the understandingawakening/ gradual cultivation(haeo jeomsu)’ and the main principle of the Heze School, to which Heze and Zongmi belong, and the Avatamsaka Seon. So following it meant becoming ‘the follower of discriminative intellect(jihae jongdo)’ which is a taboo among the Seon practitioners. That is why he repudiated Bojo's approach strongly.

In this paper, I investigated that most Ganhwaseon masters of the post- Gyeongheo era accepted as their guidance Bojo's Seon which insisted on sudden awakening/gradual cultivation, the congruence of Seon and doctrines. Among others, Hyobong and Gusan greatly exalted Bojo's Seon centering around Songgwang Temple. Despite favorable attitudes toward Bojo's Seon, however, as I further examined, Seongcheol repudiated Bojo's Seon based on the Dharma orthodoxy of Taego and on the Linji and Dahui style of Ganhwaseon.

 

 

?Key words

 

Ganhwaseon, Bojo's Seon, Bojo Jinul, Gyeongheo Seongwoo, Hanam Jungwon, Hyobong Haknul, Toeong Seongcheol, Kusan Suyeon, the Theory of Bojo Founding the Jogye Order, the Theory of Taego Inheriting the Dharma Orthodoxy

 

 

논문접수일 : 2011년 3월 18일,

심사완료일 : 2011년 4월 13일,

게재확정일 : 2011년 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