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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의 연緣 / 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경호... 2015. 7. 17. 02:30

 

 

 

 

 

 

 

 

모란의 연緣 / 류시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이 모란이 안다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梅雨(매우) / 류시화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히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나뭇가지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답기로

그 꽃은

눈꽃이니까

 

천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그곳에도 매화가 피었나요 촉촉이

초봄의 매우도 내렸나요 아니면

육체를 잃어서 슬픈가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신비하기로

환생의 꽃이니

 

 

梅雨(매우) :

매화(梅花)나무 열매가 익어서 떨어질 때에 지는 장마라는 뜻으로, 대략 "6월 중순(中旬)께부터 7월 상순께까지에 지는 장마" 를 일컫는 말

 

 

 

소면 / 류시화

당신은 소면을 삶고
나는 상을 차려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살구나무 아래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 집에 있어 온
오래된 나무 아래서
국수를 다 먹고 내 그릇과 자신의 그릇을
포개 놓은 뒤 당신은
나무의 주름진 팔꿈치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깐일 것이다
잠시 후면, 우리가 이곳에 없는 날이 오리라
열흘 전 내린 삼월의 눈처럼
봄날의 번개처럼
물 위에 이는 꽃과 바람처럼
이곳에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우리는 부재하리라
그 많은 생 중 하나에서 소면을 좋아하고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던
우리는 여기에 없으리라
몇 번의 소란스러움이 지나면
나 혼자 혹은 당신 혼자
이 나무 아래 빈 의자 앞에 늦도록
앉아 있으리라
이것이 그것인가 이것이 전부인가
이제 막 꽃을 피운
늙은 살구나무 아래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단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
두 육체에 나뉘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영원한 휴식인가 아니면
잠깐의 순간이 지난 후의 재회인가
이 영원 속에서 죽음은 누락된 작은 기억일 뿐
나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문학의 숲 2012

 

 

 

 

 

 

 

 

 

 

 

 

[시집 한권]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제3시집

 

오랫동안 숙고한 언어, 명상으로부터 길어 올린 지혜, 그리고 진솔한 자기 고백을 마주하다!
류시화 시인의 세 번째 시집『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이후 15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서 저자는 그동안 써온 350편의 시 가운데 56편을 소개한다. 상처와 허무를 넘어 인간 실존의 경이로움과 삶에 대한 투명한 관조가 담긴 시편들을 통해 긴 시간의 시적 침묵이 가져다 준 한층 깊어진 시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사하촌에서 겨울을 나다’, ‘봄은 꽃을 열기도 하고 꽃을 닫기도 한다’, ‘두 번째 시집에서 싣지 않은 시’, ‘언 연못 모서리에 봄물 들 때쯤’, ‘살아 있는 것 아프다’,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등 여행의 노정 위에서 수없이 반복된 중얼거림으로 완성해 저자만의 독특한 리듬과 언어적 감성이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오늘처럼 내 손이

오늘처럼 내 손이 싫었던 적이 없다
작별을 위해 손을 흔들어야만 했을 때
어떤 손 하나가 내 손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상처 입게 했다
한때는 우리 안의 불을
만지던 손을

나는 멀리서 내 손을 너의 손에
올려놓는다
너를 만나기 전에는 내 손을
어디에 둘지 몰랐었다
새의 날개인 양 너의 손을 잡았었다
손안 가득한 순결을
그리고 우리 혼을 가두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내 손이 싫었던 적이 없다
무심히 흔드는 그 손은 빈손이었다

 


[출판사 서평]돌의 내부가 암흑이라고 믿는 사람은 돌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에 별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노래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물녘 강의 물살이 부르는 돌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돌에서 울음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냉정이 한때 불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이다 돌이 무표정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돌의 얼굴을...

 

돌의 내부가 암흑이라고 믿는 사람은
돌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에 별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노래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물녘 강의 물살이 부르는 돌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돌에서 울음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냉정이 한때 불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이다
돌이 무표정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파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무표정의 모순어법을

 

-<돌 속의 별> 전문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7)의 류시화 시인이 15년의 긴 침묵 후에 세 번째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펴냈다. 그동안 시 발표와는 거리를 둔 채 명상서적을 번역 소개하거나 변함없이 인도 네팔 등지를 여행하며 지내 온 시인의 신작 시집이라 더 반갑다. 사실 그는 시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쓴 350여 편의 시 중에서 56편을 이번 시집에 묶었다. 시 <옹이> 외에는 모두 미발표작이다.

시집 출간이 늦은 이유에 대해 시인은 짧은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시집을 묶는 것이 늦은 것도 같지만 주로 길 위에서 시를 썼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채 마음의 갈피에서 유실된 시들이 많았다. 삶에는 시로써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번 시집에는 긴 시간의 시적 침묵이 가져다 준 한층 깊어진 시의 세계가 있다. ‘시는 삶을 역광으로 비추는 빛’이라는 그의 말을 증명하듯, 시인의 혼이 담긴 56편의 시에는 상처와 허무를 넘어 인간 실존의 경이로움과 삶에 대한 투명한 관조가 담겨 있다. 또한 오랜 기간 미발표 상태에서 써 온 시들을 모은 것이라 시의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도 이 시집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노래 속에서도 시인은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고 말한다.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낙타의 생> 전문

 

삶을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이 세계에 사는 것의 불가사의함을 독특한 감성과 섬세한 언어로 노래한 첫 번째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정서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몇 년 후 발표한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시인은 일상의 언어로 신비의 세계를, 낯익음 속에 감춰진 낯설음의 세계를 막힘없이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이로 표현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홍섭은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의 “시인은 언어에 봉사하는 자”라는 말을 인용하며 “시인은 언어에 봉사함으로써 언어의 본성을 되돌려 주고, 언어가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해 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의 시에 주목한다.

 

 

오늘 나는 달개비에 대해 쓴다
묶인 곳 없는 영혼에 대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
나비가 태어나는 곳이나 생각의 틈새에서 자라는
이 마디풀에게서 배울 점은 다름 아닌
신비에 무릎 꿇을 필요
신비에 고개 숙일 필요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부분

 

이 시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들이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받아쓰는 자이다. 이 작품에서 ‘달개비’가 상징하는 것은 자연과 생명의 신비로움이다.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라는 구절은, 시인이란 존재가 훼손되지 않은 사물의 원초적 본질과 물성을 언어로 표현하는 자임을 드러낸다.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상상은 그래서 가능하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중략)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부분

 

이 시대로라면, 아마도 시인이 만드는 사전은 감각과 정서와 통찰이 하나가 되어 사물과 현상을 관통하는 언어들로 가득할 것이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직조해 내면서 얼마만큼 섬세하게 언어에 귀 기울이는지는 이번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이홍섭은 말한다.

“사물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 사람은 언어를 깊이 포옹할 줄 안다. 무릎을 꿇고 이들의 이야기에 먼저 귀 기울여 본 적이 없으면서, 언어와 포옹부터 하는 시인은 사이비일 확률이 높다. 류시화 시인이 일군의 대중적 시인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그의 시는 먼저 사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어둠 속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어 가면서 마침내 깊은 포옹에 이른다.”

한 해의 다섯 달 정도를 길 위에서 여행자로 살아가는 시인은 한 좌담에서 “시를 거의 종이에 쓰지 않는다. 모두 입 속에서 중얼거리며 외워서 쓰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러 시들이 내 안에서 자기를 완성해 달라고 다가온다. 어떤 시는 거의 1년에 걸쳐서 한 줄씩 덧붙여 입 속에서 완성한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여행의 노정 위에서 수없이 반복된 중얼거림으로 완성한 시편들에는 그만의 독특한 리듬과 언어적 감성이 스며들어 있다.

 

 

이제 말하련다, 보리여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처럼
나는 견자가 되지 못하고 고백자가 되었다
생의 흔들림을 시에 맡기고
고작 별똥별이나 반딧불이 정도의 사상밖에 노래하지 못하면서
고산 지방의 나귀와 벗하거나
노천의 빛에 길가 꽃처럼 빈혈이 번졌다
나의 전생이 티베트의 야크였다고 한 라마승이 옳았을까
그래서 낮은 세상에서는 습관처럼
머리가 뜨거울까
그러나 내 안의 어둠을 바람이라 명명한 그는 혹시 그 바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일까

-<보리> 부분

 

이문재 시인은 이번 시집의 시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류시화의 시는 ‘감응의 시’다. 그의 감응은 시의 대상을 끌어안으면서 공감과 연대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큰 순환에 자신을 내맡기는 기술’을 터득한다. 하지만 그 기술이 늘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냉정이 깊어지는가 하면, 분노가 폭발하기도 한다. 류시화의 시는 앨런 긴즈버그와 함께 ‘거대한 세탁’을 하면서 폭력에 바탕한 산업문명을 전복시킨다. 감응과 연대가 ‘안전한 수준’에서만 이뤄진다면 삶과 문명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지금과 다른 삶, 여기와 다른 세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 뭇 생명의 아픔을 이해하는 시적 감수성을 회복한다면, 오늘의 ‘나’는 분명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가슴에 멍 자국 같은 새 발자국 가득한 사람이어서
누구와 부딪혀도 저 혼자 피 흘리는 사람이어서
세상 속에 벽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일생을 벽에 문을 낸 사람
이어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 속의 별을 먹는 사람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 별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제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가벼워져서 환해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내가 아는 그는> 전문

 

류시화 시인은 이 시집을 묶기 몇 해 전 한 문학잡지와의 좌담에서 말했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시인의 눈을 간직하는 것, 시인의 영혼을 갖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 몇 권의 시집을 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위의 사물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내 삶이 공기 속을 걸어가는 나뭇잎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순간에도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무엇보다 한 사람의 시인일 뿐이다.”

시인 류시화가 1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돌’과 ‘꽃’의 대화이다. 꽃에게 손을 내미는 돌, 돌에게 말을 거는 꽃. 각 시편들은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한 개의 기쁨”이 되어 준다. ‘한 개의 슬픔’이 ‘천 개의 기쁨’을 앗아가는 외롭고 가난하고 어두운 시절, 이 시집은 시인 류시화가 돌과 꽃에 새긴 기도문과 같다. 두근거리는 시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시인 이문재).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중략)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부분

 

그의 말대로 삶에는 시로써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각각의 시에 담긴 독특한 시적 감성과 상상력이 이상한 빛을 발하며 다가온다. 세계가 한 권의 시집이라면 시는 감정, 풍경, 기억이 담긴 상자이다. 상처와 꽃이 그 안에 있다. 한 편의 시가 우리를 강하게 껴안는 때가 그때이다.


/ 서울시정일보

 

 

 

 

길 위에서 길어올린 회고와 고백 류시화 돌아오다

 

■16년 만에 새 시집 '나의 상처는 돌…' 펴내

우주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삶

방랑과 죽음충동에 사로잡혔던 젊은날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노래해

여전히 평이하고 보편적인

대중 폭넓은 공감 이끌만한 작법 시를 잊은 시대의 독자에도 통할까

 

류시화 시인은 블로그ㆍ트위터를 통해서나 간간이 독자를 만나는 대표적 은둔 작가다. 그는 시인의 말에 "시집을 묶는 것이 늦은 것도 같지만 주로 길 위에서 시를 썼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채 마음의 갈피에서 유실된 시들이 많았다"고 적었다. 문학의숲 제공

 

 

류시화(54ㆍ본명 안재찬) 시인이 16년 만에 새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숲 발행)을 펴냈다. 1990년대 국내 문학 시장을 풍미했던 밀리언셀러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6)을 잇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출판사 측 설명에 따르면 시인은 지난 2년 간 집중적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해 350여 편을 썼고, 그 중 56편을 이번 시집에 묶었다. 수록시 중 일부는 지난해 상반기 그의 트위터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어느덧 지천명을 넘어선 시인의 시에는 지난 삶에 대한 회고가 두드러진다. '가족력은 방랑이었다'고 말하는 '자화상'이나 죽음 충동에 사로잡혔던 젊은 날을 돌아보는 '화양연화'처럼, 그 회고는 격렬한 자기 고백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시인은 그러나 '해탈은 멀고 허무는 가까웠지만/ 후회는 없었'다고 노래한다.('바람의 찻집에서'에서)

'이제 말하련다, 보리여/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처럼/ 나는 견자가 되지 못하고 고백자가 되었다/ 생의 흔들림을 시에 맡기고/ 고작 별똥별이나 반딧불이 정도의 사상밖에 노래하지 못하면서'('보리'에서)

 

'고작'이라는 반어적 표현에서 '별똥별이나 반딧불이' 같은 우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삶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내가 죽어서 땅에 묻히면/ 내 혼도 모로 눕겠다/ 저쪽 세계로 가서/ 한 손으로 시를 지어야 하니까'('모로 돌아누우며 귓속에 담긴 별들 쏟아 내다'에서)

 

시인은 80년대 말부터 1년 중 4~5개월은 인도 티베트 네팔 등지를 떠돌고 있다. 유랑의 삶이 그에게 줄곧 소중한 시의 자양분이 되고 있음을 물론이다. '나무는 페러/ 연못은 탈라브/ 운명은 바갸/ 작별은 비다이/ 당신을 사랑해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런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라고'('옛 수첩에는 아직'에서) 둥근 눈의 인도 여자가 시적 화자에게 그 나라의 낯선 단어들과 더불어 사랑의 본뜻을 넌지시 일러준다. 당나귀에 몸을 싣고 북인도 라다크의 고산지대를 통과하는 것은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초월적 경험이다.('당나귀'에서) 원거리 이동에 지친 족속들에게 인간의 소금을 얻어 먹이려 스스로 사냥감이 되는 툰드라 순록의 자기 희생('순록으로 기억하다')도 길 위에서 얻은 이야기일 듯.

 

본인의 창작 의도와는 무관하게 근사한 연애시로 읽히곤 하는 시인의 서정시가 이번 시집에도 여러 편이다.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모란의 연'에서)

 

앞선 시집들이 그랬듯 이번 시집은 독자들에게 즉각적이고도 폭넓은 공감을 끌어낼 만하다. 이 대중적 소구력은 평이하고 정갈한 시어와 난해하지 않은 비유, 시적 소재의 현실적 맥락을 지워 추상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정서를 빚어내는 특유의 작법에서 비롯한다.(이는 반대로 시인에 대한 박한 평가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세기를 건너 돌아온 류시화 시집이 시를 읽지 않는 시대의 독자들을 능히 휘어잡을 수 있을까.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옹이'에서)

 

 

 


Rare Bird - Sympat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