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산책]/민요,국악

"八萬大藏經" 팔만대장경

경호... 2015. 7. 17. 02:25

"八萬大藏經" 팔만대장경

 

첨부이미지
고려 1236∼1251년,
팔만대장경 판목 (국보 제 32 호)
1236-1251년, 각판 69.6cm-24cm
경남 합천 해인사


전곡듣기
Synthesizer , Erhu,  김수철
피리,태평소, 김성운
아쟁, 백인영
오고북, 20인 오고북 연주단
국악 타악기, 김수철
synthesizer, 최태완

I. 서곡(序曲)-다가오는 검은 구름 the gathering storm - 07:03


Synthesizer , Erhu,  김수철
피리,태평소, 김성운
아쟁, 백인영
오고북, 20인 오고북 연주단
국악 타악기, 김수철
synthesizer, 최태완

전반부 에서는 단조로운 멜로디로 평화로운 시기를 표현하였고 점차 전운이 감도는 상황을
일정한 리듬의 타악기로 나타냈다. 1장의 막바지에는 큰북을 사용하여 전쟁의 불안감 ,긴박감,공포를 표출하여 전쟁이 임박했음에 대한 암시로 비극을 표출하는 멜로디가 절정을 이룬다. 戰雲, 직접적인 원인은 바깥에서 들어 왔지만 내부의 문제도 助因 이 되었다.힘있는 자(몽고)의 침략이 암시되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한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99개를 가진 자가 100개를 채우기 위해 하나 가진 자의 그 하나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II. 전장(戰場)에서...the tides of battle - 11:42


Synthesizer , Erhu,  김수철
피리,태평소, 김성운
아쟁, 백인영
오고북, 20인 오고북 연주단
국악 타악기, 김수철
synthesizer, 최태완

우리소리와 서양의 소리의 조화가 두드러진 악장. 우리 악기로는 태평소,아쟁,피리, 오고북,대북 등이 중국 악기로는 얼후(erhu) 를 사용하였고 서양 음악의 뿌리인 교회음악의 하프시코드 소리 및 오케스트라 형식이 조화롭게 구성되도록 작곡 되었다. 전쟁은 국악 타악기 소리로 표현되었는데 대북으로 전쟁발발의 암시를, 오고북으로 전쟁의 참화와 비극적인 소리를 표현했다.몽고의 침입, 폭력의 극단적이 표출인 전쟁은 침략한자,침략당한 자 모두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無明 과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

III. 구천(九天)으로 가는길 journey to valhalla - 05:56


Synthesizer , Erhu,  김수철
피리,태평소, 김성운
아쟁, 백인영
오고북, 20인 오고북 연주단
국악 타악기, 김수철
synthesizer, 최태완

침략한 나라나 침략당한 나라나 모두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를 격게 된다.전쟁과정에서 인간을 헤치며 죄를 짓게 되지만인간의 본성으로 그에대한 수치심과 참회로 희망의 싹을 피어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신디사이저 를 이용해 우주적인 사운드를 표현 하였다. 전반부는 인간의 수치심과 참회를 후반부는 희망을 상징한다.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

구체적으로는 당시에 유일한 정신적인 기둥이었던 불교를 민심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부처님 가르침의 그릇인 팔만대장경에는 좋은 세상을 열망하는 고려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영원한 평화가 없듯이 영원한 구속도 존재하지 않는다.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찾아 내는 것, 이 또한 인간이 일구어낸 역사이다.

IV. 천상(天上)의 문(門)에서 At st.peter's gate - 16:12


Synthesizer , Erhu,  김수철
피리,태평소, 김성운
아쟁, 백인영
오고북, 20인 오고북 연주단
국악 타악기, 김수철
synthesizer, 최태완

위기와 국난이 극복되고 하늘로 부터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이 기회를 소중하게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가꿔 나가야 한다. 이 악장은 클래식 장르로 작곡 되었고 ' 참회의 눈물' 부분 에서는 우리 악기 '피리' 소리로도 표현 되도록 작곡 되었다.

'사랑으로 극복하자'는 메세지는 장엄한 오케스트라 형식으로 표현 되었다. 팔만 대장경의 조성과 그로 인한 평화, 몽고 침략의 와중에마침내 팔만 대장경이 완성되고 그 결집된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게 되었다. 고난은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작은거인 김수철!!
20년전 대학 그룹 「작은거인」으로 대중앞에 나타나 작은 체구에 열정적인 사운드와 무대매너로 많은 팬들을 열광시켰고, 솔로 가수로서도 '못 다핀 꽃 한송이',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등 수많은 HIT곡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던 그... 그러나 이제야 대중은 그를 진정 "작은거인"이라 불러야 하리라.

인기가수라는 틀에서 벗어나 순수한 음악적 열정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시도하였고, 특히 우리 소리의 현대화에 힘써 영화음악, 국악작곡집, 무용음악, 드라마음악, 86 아시안게임 및 88 올림픽 등을 통하여 독보적인 그의 음악세계를 구축하여 온 김수철. 이제 다시 팔만대장경 음악을 통하여 민족의 유산, 팔만대장경의 법력을 음악으로 만들어 또다른 음악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

그는 단순한 가수나 뮤지션으로 블릴 수 없다. 그의 음악작업은 “소리”를 찾고자 하는 그의 집념과  목적의 산물 이며, 특히 "우리의  소리"를 찾아 내어 현대화 하려는  남다른  노력은  그의 음악의 근간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정말 그를 “작은거인”이라 부를 수 밖에 없다.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첨부이미지

고려 1236∼1251년,
팔만대장경 판목 (국보 제 32 호)
1236-1251년, 각판 69.6cm-24cm
경남 합천 해인사

고려 고종대에 판각되어 현재 국보 제32호. 목판본은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1,258매인데 이 가운데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은 보유판(補遺板)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년(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사업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주관했으며,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자작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는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다.

이 대장경은 조선 초기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해인사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1398년(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며〈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때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하고, 5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독경(讀經)했다"라고 한다.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 순서대로 배열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색에 의해서 그 내용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대승법계무차별론 大乘法界無差別論〉 권1은 어느 대장경에서도 볼 수 없다. 둘째, 사전류의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 續一切經音義〉 등 중요한 전적과 〈대승보살정법경 大乘菩薩正法經〉·〈제법집요경 諸法集要經〉 등 중요한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자체(字體)의 예술성이다. 하나의 목판에 대략 가로 23행, 세로 14행으로 310자 내외를 새겼는데 그 정교한 판각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은 이를 두고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라고 경탄했다. 이 팔만대장경은 뒤에 5차례나 간행·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이 빈번하게 침략해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요구했는데 1389~1509년에 83차례나 요구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간혹 인본(印本)을 주었다고 하며,

1410년(태종 10)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도내에서 생산되는 인경지(印經紙) 267묶음을 해인사로 보내 인경(印經)하도록 명했으며,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으로 하여금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했으며, 1898년 용악(聳岳)이 4부를 인출하여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에 1부씩 봉안했다. 고려 중반부터 장경도량(藏經道場)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6, 7일씩 거의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으며, 현재 해인사에서는 1년에 1번씩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특수성은 첫째, 사상적인 것으로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佛事)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護法的)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이규보(李奎報)의 〈군신기고문 君臣祈告文〉은 이 대장경조조의 사상적 의의를 천명한 글로 몽골을 야만시하고 문화적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경제적인 것으로 대장경의 역사(役事)에 대한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므로 국민에 대한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내용적인 것으로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수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고려대장경 이후에 편집된 중국판 빙가장경, 일본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등은 모두 이것을 모본으로 하여 판각된 것이다. 즉 이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한문대장경의 완벽한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영인 축소하여 영인본 47권과 전대장경에 대한 내용·주소(註疏)·번역자·연구서 등을 상술한 해제 색인본 1권을 합쳐서 총 48권을 간행했다. 또한 1967년부터 이 한문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판 대장경을 간행하고 있는데 현재 120권이 출판되었다.

음원출처:http://club.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