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경호... 2015. 7. 14. 07:32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고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저녁 / 엄원태

 

비 그치자 저녁이다 내 가고자 하는 곳 있는데 못가는 게 아닌데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저녁이다 저녁엔 종일 일어서던 마음을 어떻게든 앉혀야 할 게다 뜨물에 쌀을 안치듯 빗물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하고 앉아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저녁이다 종일 빗속을 생각의 나비들,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젖어가는 날개 가진 것들의 젖어가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저녁이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늙어가는 어떤 마음에 다름 아닌 것을.......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을.......비가 그 무슨 말씀인가를 전해주었나 보다

 

 

 

애가 / 엄원태

 

이 저녁엔 핏빛 노을을 빌려 첼로의 저음 현이 되겠다. 결국 혼자 우는 것일 테지만, 거기 멀리 있는 너도 오래전부터 울고 있다는 걸 안다. 네가 날카로운 선율로 가슴 찢어발기듯 흐느끼는 동안 나는 통주저음으로

네 슬픔을 떠받쳐주리라.

우리는 외따로 떨어졌지만 함께 울고 있는 거다.

 

오래 말하지 못한 입.

잡지 못한 가는 손가락.

안아보지 못한 어깨.

오래 입 맞추지 못한 마른 입술로...

 

 

 

 

 

'#시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나는 아직도 늑대가 분명하다  (0) 2015.07.14
참 나쁜 습관 / 복효근  (0) 2015.07.14
허, 참!  (0) 2015.07.14
희사함喜捨函 / 임술랑  (0) 2015.07.14
벽과 문 / 천양희  (0) 2015.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