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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경호... 2015. 7. 14. 05:05

도시 한 가운데에 전통마을이?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2-1>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한강의 기적’으로 세계를 놀라킨 한국의 발전상은 경이적이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은 이제는 세계 10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국이 됐고, 인터넷 보급률은 세계 1위다. 자동차 생산 대국이 됨에 따라 로봇 숫자도 세계 4위에 이르고 있다. 이런 급속한 발전을 되돌아 생각해보면 여러 분야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데 반론의 여지가 없다.

국력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무분별하게 과거의 모습을 파괴하려는 것에서는 벗어났다. 이제는 도리어 우리 것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 것을 표방하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야말로 못 살던 시대에 먹던 술, 막걸리가 우리 것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의식주 중에서 ‘주(住)’에 해당하는 전통마을은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의 선생영조(善生永助)에 의하면 1930년대에 1만 5000개의 동족마을이 전국 곳곳에 산재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많던 마을이 거의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남은 곳은 은닉한 오지 중의 오지거나 한적한 농촌마을이 대부분이다.

●‘한 고집’하는 경주최씨 마을

현대화된 도시에 전통마을이 남은 곳은 대구광역시에 소속된 ‘옻골마을’이다. 1930년대만 해도 현재의 대구 지역에 60여개의 씨족마을이 있었지만 모두 현대화의 물결에 사라졌다. 지금은 옻골마을만 남아 선조들의 오래된 삶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옻골마을의 모습. 이 마을은 대구광역시라는 도심 속에서 살아남은 전통마을이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옻골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위치한 경주최씨 마을이다. 마을 남쪽을 뺀 나머지 세 면의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 ‘칠계(漆溪)’라고도 부르며, 이는 둔산동(屯山洞)의 다른 이름이다. 언뜻 이 마을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아는 ‘경주최씨 고집’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사실 이 마을이 보존됐던 이유는 마을로 들어가는 인근에 있는 ‘동촌비행장’이라는 군사시설로 인해 개발이 불가능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발이 불가능한 입지의 불리함이 마을을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유지시킨 요건이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옻골의 조산은 팔공산이고 주산은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옻고개(390m)다. 그리고 동쪽의 황사골이 청룡, 서쪽의 새가산이 백호 구실을 한다. 마지막 안산은 금호강 건너편의 형제봉(196m)이다. 한마디로 이 마을의 세 면은 산으로 막혀 있는 배산임수형이다.

하지만 마을 터는 좁고 기다란 형상을 하고 있고 농토 또한 비교적 좁은 편이다. 주거지 양쪽 산 사이에 개울이 흐르는데 서쪽의 서계(西溪)는 건천이나 동계는 항상 물이 있다. 이들 두 개울은 마을 입구 연못 부근에서 만난다.

1945년 이전에는 최씨 25호(약 200명)에 타성 11호(60여 명)가 있었는데 현재는 22호로 줄어드는 사이 모두 최씨만 살고 있는 전형적인 씨족마을이 되었다.

옻골마을은 도심에서 가까운 까닭에 문명의 이기가 끼어들어 일부 가옥은 현대식으로 개량됐다. 하지만 아직 조선시대 양반주택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어 놀라움을 준다.

 

 

조선시대에도 SNS가?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2-2>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옻골마을은 광해군 8년(1616) 태동공(台洞公) 최계(崔誡)의 아들인 대암 최동집(崔東集, 1586~1661)이 가족과 함께 입향함으로써 출발했다.

대암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태동공 최계(台洞公 崔誡)의 둘째 아들로, 인조 18년인 1640년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왕자를 가르치는 대군사부에 천거됐지만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따서 ‘숭정처사’를 자처하고 은둔에 들어갔다.

그가 이곳에 올 때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당대 많은 지식인들은 임진왜란 같은 전란이 다시 닥칠 것을 우려했고, 더 안전한 곳을 찾았다. 이런 이유로 대암이 선택한 장소가 옻골이다.

 

옻골마을에 들어온 대암 최동집은 이곳을 중심으로 ‘광역네트워크‘를 꾸리려 했고, 이는 최동집의 증손자인 최수학에게 이어졌다. 최수학은 마을 연못을 만들고 그 앞 둔덕에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어 동수를 만들었다. 동수는 마을을 보호하는 산림막이다. 이종호 제공

 

 

●종가 뒤에 너른 복숭아밭이 있는 까닭은?

옻골마을은 다른 전통 씨족마을과 다른 특성이 있는데, 이는 종가 배치에서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종가집은 마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는데 옻골마을의 종가집인 ‘백불고택’ 뒤에는 너무 넓은 평지가 있다.

이 평지에는 복숭아 과수원이 조성됐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종가 뒤에는 집을 짓거나 산소를 쓰지 않는 문중의 불문율에 따른 것이다. 가뜩이나 마을 터가 좁은데 종가를 골짜기 맨 뒤에 자리 잡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입향조의 의도가 들어있다.

한국 전통마을은 대체로 본거지인 한 마을에서 시작해 주변으로 세력 범위를 넓혀나간다. 그러나 대암은 자식들을 위해 통 큰 생각을 했다. 자신이 만든 마을에는 종가만 남기고 다른 자손들은 옆 마을로 분가시켜 더 큰 공간으로 후손이 퍼지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암은 맏아들만 옻골에 남기고 나머지 세 아들을 모두 외지로 분가해 내보냈다.

그는 옻골마을을 최소화해 베이스캠프로 삼은 후 그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손들을 배치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독특한 전략을 전개했다. 종가를 중심에 두는 네트워크형을 구상한 것이다. 그 결과 구한말까지도 옻골마을은 종가와 그에 딸린 일부 하인들을 위한 가랍집만 있었다.

대암의 큰 뜻은 묘지의 위치로도 알 수 있다. 산소를 다른 씨족마을처럼 마을 주변에 쓰지 않고 멀리 뒀는데 기본은 산소에서 종가집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씨족들이 종가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각자가 나름대로의 위상을 개척하라는 뜻과 다름없다.

●넓은 연못과 산림막 조성했다가 귀양살이

그의 증손자인 최수학은 대암의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한다. 그는 광양현감을 지낸 뒤 귀향하자 마을 입구에 연못을 팠다. 연못은 마을 뒷산의 거북을 닮았다는 대암(생구암(生龜岩)이라고도 부름)이라 바위와 관련이 있다. 거북이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으므로 마을 입구에 물을 가두어 상당히 큰 연못을 만들었다.

또한 연못 앞에 둔덕을 만들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한 줄로 심어 동수(洞蓚)를 조성했다. 동수란 마을 전면에 안산이 없거나 취약할 때 비보(裨補) 뜻을 갖고 있는 산림막을 말하는데 옻골마을은 마을의 양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느티나무를 심었다.

 

최수학은 마을 뒷산에 있는 거북을 닮았다는 ‘대암‘ 바위에게 물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거대한 연못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커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종호 제공

 

거북에게 물이 필요한 것치고는 너무 넓게, 골짜기 폭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큰 연못을 만들고 동수를 방편으로 했다는 것은 마을 경계를 더 이상 넓히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마을은 종중가로 한정하고 마을 외부에 있는 종친들을 네트워크로 묶으면 된다는 생각을 비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큰 뜻이 마냥 호평만 받은 것은 아니다. 커다란 연못 조성은 당대의 개념으로 볼 때 다소 파격적이었는지 호화생활을 하는 현감의 비리라며 고발되었는데 그 내용이 재미있다.

‘광양현감을 할 때 재물을 착취했는지 고향에 와 못을 크게 파고 그곳에서 배를 띄우고 논다. 관리가 배를 띄어가며 유람을 하다니 이럴 수가 있겠는가?’

옻골마을 입구에 있는 연못의 크기를 보면 다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여하튼 그는 탄핵을 받아 결국 자신이 현감으로 있었던 광양으로 귀양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서야 옻골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똥’이냐 ‘피’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2-3>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마을 입구에서 동계(東溪)를 지나는 작은 다리가 옻골마을 시작이다. 여기에 수령 약 350년에 높이가 무려 12m나 되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는데, 안내판에는 ‘최동집 나무’라고 적혀 있다. 대구광역시에 따르면 지역사회 문풍진작에 크게 기여한 대암 최동집을 기리기 위해 최동집 나무로 명명했다.

 

 

토담 위에 소나무가지 넣고 그 위에 기와를 올린 ‘속깝담장‘의 모습. 이는 소나무 숲을 가진 부자여만 가질 수 있는 담장이다. 이종호 제공

 

마을을 들어가면서 눈에 띄는 것은 좌우에 있는 집의 담장이다. 담장의 상단부를 보면 전통마을에서 보던 것과는 다소 다르다. 토담인 것은 분명한데 토담 위에 속갑(소나무가지)이 있고 그 위에 기와가 얹어져 있다. 이를 마을에서는 소나무가지로 만든 지붕이라는 뜻의 ‘소깝담’이라고 부른다.

담 위를 소나무 가지로 만든 건 평민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해다. 소나무 가지로 담의 지붕을 만들 수 있다면 중산층 이상으로 적어도 소나무 숲을 가진 부자여야 한다. 한마디로 옻골 마을에서 보이는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는 뜻이다.

 

옻골마을의 담장들은 자연스러운 곡선이 아니라 직선을 고집한다. 일직선으로 각을 이룬 길이 전형적인 반촌의 분위기를 만든다. 이종호 제공

 

 

또 옻골마을 집의 담장은 우리나라 돌담이 자연스럽게 곡선을 이루는 것과는 달리 직선을 고집한다. 토석담으로 마을 안길의 돌담길이 대부분 직선으로 구성되어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인다.

전통가옥들과 일직선으로 각을 이룬 돌담길은 전형적인 반촌(班村)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 덕분에 이 마을 길도 ‘아름다운 담길 10선’ 중에 포함됐다. 돌담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음미하면서 발길을 옮기기 바란다.

●효자 백불암 기리는 ‘정려각’… 요절한 학자 기리는 ‘동계정’

옻골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백불암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조13년(1789) 정조가 내린 정려각(旌閭閣,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40호)이다. ‘정려’는 왕이 충신·효자·효부에 대한 표창으로 마을에 세우도록 한 ‘홍살문’으로 ‘정문(旌門)’이라고도 부른다.

 

백불암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려각‘의 모습. 정문이 없으며 안에 들어가면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있다. 이종호 제공

 

 

백불암이 효자로 책봉된 연유는 다소 놀랍다. 그는 두 살 때 어머니가 젖몸살을 앓자 다시는 젖을 빨지 않았으며, 31세 때 부친 병세를 살피려고 대변을 맛본 게 효자로 인정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효자로 정려를 받는 방법은 주로 부모의 대변을 맛보는 ‘상분(嘗糞)’과 손가락을 잘라 절명하려는 부모의 입에 피를 넣어드리는 ‘단지주혈(斷指注血)’이 있는데, 그는 앞의 것을 실천해 정려를 받았다.

옻골마을에 있는 정려각은 정문이 없고 겹처마 맞배지붕의 정려각만 있다. 정려각 안에는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 있으며 공포에는 수탉의 머리가 새겨져 있다.

정려각을 중심으로 옻골마을 주거지는 동서 두 영역으로 나뉜다. 첫 번째 주거지는 정려각에서 서쪽으로 꺾었다가 다시 북쪽의 종가로 이어지는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정려각에서 북쪽으로 곧게 뻗어 ‘동계정’ 옆을 거쳐 보본당으로 이어지는 동쪽 영역이다.

동쪽 영역의 동계정은 마을의 공동 영역 부분이다. 이 정자는 백불암의 맏아들인 동계 최주진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지은 문중 정자다. 학문이 출중했던 동계가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문중에서 그의 요절을 아까워 해 지은 것이다. 동계정은 동네 서당으로 사용됐는데 훈장이 상주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을의 동쪽에 있는 공동영역 ‘동계정의 모습. 요절한 천재 최주진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지은 정자다. 동계정 옆에는 청석으로 된 벽이 있고, 옆에 개울이 흐른다. 이종호 제공

 

 

동계정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칸은 마루고 나머지 두 칸은 온돌방이다. 동계정 주위로 담을 둘렀는데 서쪽 안길, 남쪽 샛길, 동쪽 계곡 쪽으로 각각 문을 냈다. 자그마한 집인데도 불구하고 3곳에 문을 둔 게 매우 특이하다. 동계정 편액은 전서(篆書)로 돼 있는데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의 글을 집자한 것이다.

●깨끗한 관리 ‘허목’의 글씨

허목은 88세까지 생존했지만 관계에 진출한 것은 말년에 속한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효종1년(1650년)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됐으나 1개월 후 사직했고 63세 때 지평에 임명되자 비로소 입시했다.

환갑이 넘어서 관에 진출했는데도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의정부좌참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이 됐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우의정까지 된 경우는 매우 특이한 예다. 허목의 남다른 관운은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기까지 이른다. 성호 이익이 찬(撰)한 신도비문에는 허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권력에 연연, 아부함이 없이 오직 정의를 지키기에 힘썼고 또한 마땅히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서서 진퇴의 본말을 분명히 했다.’

 

동계정의 편액은 허목의 글씨를 모아서 만들었다.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지낸 사람으로 글과 그림 솜씨가 뛰어나고 학식도 풍부해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종호 제공

 

 

우리나라에 허목이 쓴 편액이 여러 곳에 있다. 그의 글씨가 사랑받는 것은 그가 남인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지냈고 그림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전서에 통달하여 전서의 동방 1인자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굳이 허목의 전서를 집자해 동계정 편액으로 쓴 것은 허목이 입향조 대암과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어서다.

동계정 옆에 청석으로 된 절벽이 있고 그 사이로 개울물이 흐른다. 여기는 마을 사람들이 목욕을 하던 곳인데, 목욕의 편의를 위해 큰 돌을 옮겨놓는 등 약간 변형을 했더니 물고임이 좋지 않아 목욕을 할 정도가 되지 못한다고는 한다. 그러나 마을 한쪽에 이런 천연 자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옻골마을의 또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동계정은 현재 탐험학습의 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궁궐 들어가기보다 ‘장지문’ 넘기가 더 힘들다고?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2-5>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백불고택의 사랑채(왼쪽)와 보본당(오른쪽)의 모습. 사랑채는 장지문을 달아 공간을 분리해서 쓸 수 있다. 보본당은 백불고택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축물로 제사 준비뿐 아니라 문중회의도 열렸다. 이종호 제공

 

 

현재 백불고택의 사랑채는 2개의 건물을 붙여 만든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사랑채는 큰사랑, 중사랑, 마루로 이어졌고 서쪽에 인접한 3칸의 행랑채를 툇마루로 연결했다. 큰사랑은 흥선대원군이 1871년에 내린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어낸 동천서원에서 나온 재목을 사용해 중건한 것으로 맞배지붕이다.

집안의 어른이 기거하는 사랑방 위아래 칸 사이에 ‘장지문(障紙門)’, 뒤쪽에 반 칸 크기의 ‘벽장’을 달았다. 또 위쪽 북벽에 안채의 안마당으로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을 달았다. 큰사랑 북벽에 수구당, 앞쪽에 백불고택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데 둘 다 중흥조 최흥원의 호다. 서까래 가운데 몇 개가 구부러진 게 눈에 띄는데 이는 나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연스런 정취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굽은 목재를 채택한 것이다.

장지문은 연이어 있는 방 또는 방과 마루 사이에 있는 미세기문이다. 한옥에서 이런 문은 주로 큰 방을 다양하게 쓰기 위해 둘로 나눌 때 많이 설치한다. 큰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두 공간을 다시 터서 사용 가능하게 만들고, 평소에는 시각적인 차단을 하는 용도다. 따라서 낮은 문턱에 미닫이로 설치한다.

 

 

건물 벽에 대각선으로 목부재를 댄 ‘가새‘의 모습. 이종호 제공

 

 

백불고택에서 장지문은 신분 상하를 가르는 잣대 구실을 한다. 주인과 동등한 신분은 장지 문턱을 넘어 아래 칸으로 내려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위 칸에 앉아서 주인과 대화를 나눈다. 잠도 격이 같은 처지의 손님이라야 아래 칸에서 주인과 함께 잘 수 있었다. 아들조차 위 칸에서 아침저녁 인사를 올리는 게 법도다.

사랑채 중심을 가르는 디딤돌 크기가 저마다 다르고 고주를 팔각형으로 만든 게 눈에 띈다.

또 건물 측벽에 대각선 방향으로 댄 부재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이렇게 대각선으로 댄 부재를 ‘가새’라고 하는데, 안채는 물론 별묘와 고방에서도 보인다. 가새는 바람이나 지진에 의한 횡력을 받기에 유리한데 백불고택에서는 힘을 받는 구조재를 외부에 그대로 노출해 미적인 요소로 삼았다.

●지붕이 솟아올라 우람한 안채

백불고택의 안채는 매우 큰 규모이며 모체 지붕이 솟아올라 우람한 느낌을 준다.

안채 서쪽에는 정지방(찬방)·큰방·정지·안대문을, 동쪽에는 상방(며느리방)·고방·작은방·여막방·중문을 배치했다. 3칸 규모의 대청 위쪽에 맞배지붕을 높이 올리고 쪽지붕을 이어 붙여서 안방과 정지, 상방과 여막방을 배치했다. 여막방은 상을 당했을 때 사용하는 방이며, 보통 때는 제기와 제수 따위를 보관하는 공간이다.

안채의 대청 뒤로 개구부가 있는데 멀리 ‘생구암’이라는 바위가 보인다. 백불고택의 축이 안대문 생구암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역중일기’에 생구암을 옻골 풍수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유상일이 대암에 올라가 아래쪽의 와혈(窩穴)을 보고 가히 쓸 만하다며 임좌병향(壬坐丙向)이면 하늘과 땅이 합치돼 장군대좌(將軍大坐)형이 된다고 했다. 이에 기록해 뒤에 징험을 보기로 한다.’

대암은 입향조 최동집의 호인데, 경주최씨 가문이 이 바위 이름을 입향조의 호로 바꾼 것은 그만큼 생구암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걸 짐작케 한다.

 

백불고택 안채의 모습. 안채의 대청 뒤로 개구부가 있는데 멀리 ‘생구암’이라는 바위가 보인다. 이종호 제공

 

 

●죽은 자를 위한 영역 ‘가묘’와 ‘별묘’

백불고택은 산 사람들의 생활 영역과 조상들을 모시는 영역으로 구성되며, 후자는 다시 ‘가묘’와 ‘별묘’ 영역으로 이뤄진다. 세 영역은 담과 대문으로 구분된다. 가묘 영역을 가운데 두고 사적인 생활영역은 서쪽, 공적인 별묘 영역은 동쪽에 배치했다.

산 사람들의 생활 영역이 절반에 못 미친다는 것을 볼 때 과거 조선인들에게 조상 숭배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뒤에 있는 건물이 앞 건물보다 위계가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생활 영역인 안채보다 가묘, 가묘보다는 별묘의 위계가 더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가묘에는 백불암의 불천위(국가공신 혹은 덕망이 높은 자를 나라에서 정하여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것)가 모셔졌다. 가묘는 기둥머리와 보 사이에 익공을 하나씩 끼워 넣은 초익공집으로 높은 위계를 나타낸다. 참고로 가묘에 있는 문에 불쑥불쑥 드나드는 것은 큰 실례다. 가묘 정면에 있는 문은 신이 드나드는 곳이므로 신위가 이동할 때만 사용되며, 평상시 사람은 서쪽 문으로 드나든다.

입향조인 대암을 모신 별묘는 1742년에 지었다. 단칸 건물이지만 기둥머리에 익공을 2개씩 끼워 넣은 이익공집으로 가묘보다 위계가 한 단계 높다. 별묘 앞 벽 출입문 위에 태극문양을 새긴 화반(花盤, 수평부재를 받치는 넓적한 부재)이 있는데 이 또한 건물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별묘는 비록 작지만 최씨종가는 물론 옻골 전체의 중심으로 펼쳐진 광역 경영 즉 네트워크의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집 안에 석빙고 설치한 간 큰 양반님네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2-6>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백불고택의 사랑채(왼쪽)와 보본당(오른쪽)의 모습. 사랑채는 장지문을 달아 공간을 분리해서 쓸 수 있다. 보본당은 백불고택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축물로 제사 준비뿐 아니라 문중회의도 열렸다. 이종호 제공

 

 

별묘 앞에 있는 ‘보본당’은 백불고택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1753년 백불암이 지은 이 건물은 건축미가 뛰어난데다 정원이 잘 다듬어져 있다. 마루턱에서 자세를 낮춰 보면 마을 뒷산 대암(생구암)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보본당에서는 제사 준비뿐 아니라 문중회의도 열렸으므로 대청이 안채처럼 넓다는 특징이 있다. 보본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민가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다듬은 원추형 주추와 그 위에 놓인 원기둥이 이 건물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이 건물은 현재는 서당과 숙박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불고택은 종가이므로 원래도 위상이 높았지만, 이 집의 유명세를 더욱 높인 것은 손님들에게 여름에 얼음을 대접했다는 점이다. 이는 자체 석빙고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역중일기에 따르면 1741년 백불고택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얼음과 수박을 가져다 손님을 대접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름에 얼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으로 이런 내용이 널리 알려지지 않을 수 없어 백불고택의 명성을 드높였다.

 

 

안채 앞에 있는 종이컵의 흔적. 종가집 주인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판기를 설치했다가 치우면서 남은 것이다. 이종호 제공

 

일제강점기의 백불고택은 이 지역 독립운동의 산실이나 마찬가지다. 융희 1년(1907)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최시교 선생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 그의 아들 최종운은 상해임시정부의 모금책으로 활약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현대화의 흔적인 ‘종이컵을 쌓아두는 통’이 보여 흥미롭다. 이 집에는 설 명절에 300여 명분의 떡국을 끓여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데, 이들에게 대접하려고 설치했던 커피 자판기의 흔적이다. 최진돈 종손은 종가 인심에 집을 찾은 사람에게 차를 대접하지 않을 수 없어 자판기를 설치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대접에 소홀한 것 같아 철거했다. 그러나 사랑채 앞에 종이컵을 쌓아두는 통이 남아 자판기를 설치했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최씨 종가의 박물관 ‘숭모각’

백불고택 입구에 ‘숭모각’이란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종가의 박물관이다. 백불의 역중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장서가 있고, 의병활동을 위한 격문의 원문 등이 보관됐다. 또 계약서 등을 작성할 때 수결했다는 손을 그린 문서도 있다. 이밖에도 집안에서 사용하던 집기 등이 소중하게 보관돼 집안에 있는 박물관으로는 소장품이 충실한 편이다. 방문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개방한다.

 

 

옻골마을 경주최씨 종가의 박물관인 ‘숭모각‘의 모습. 장서와 격문, 계약서를 비롯해 집안의 기구 등도 보관돼 있다. 이종호 제공

 

 

참고로 현대화의 물결은 백불고택도 강타하는데 가장 큰 문제점은 유산 상속에 따른 어려움이다. 백불고택과 같은 대저택인 경우 유산상속에 따라 재산을 배분한 뒤 장손에게 운영하라고 할 경우 고택 자체의 존립이 어려워진다. 이는 비단 백불고택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대갓집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백불 집안에서는 이 문제를 매우 슬기롭게 해결하고 있다. 백불고택을 종중 법인화해 이를 장손이 운용하게 하는 것이다. 적어도 분할 상속으로 인한 문제점을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다른 대갓집에서도 참조할 만한 예로 보인다.

옻골마을은 어느 마을보다 많은 자연혜택을 받았지만 나름대로 불편도 있었다. 바로 우물의 수질이다. 이곳의 우물에는 철분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배앓이를 했는데 상수도가 들어오자 배앓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이후 공동우물은 메워졌다.

 

 

숭모각 내부의 모습(위쪽)과 수결계약서(왼쪽 아래), 의병격문(오른쪽 아래)의 모습. 숭모각은 집안에 있는 박물관이지만 유품이 꽤 충실한 편이다. 이종호 제공

 

 

전통마을을 고수하는 유별난 마을 옻골에서 대구광역시라는 대도시에서 발견할 수 없는 뜨거운 전통이 숨 쉬고 있다는 데 놀랄 것이다. 이 마을을 찾아 한국인의 맥이 숨어 있는 한국 전통의 미를 흠뻑 맛보기 바란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옻골마을이 대구광역시에 속하므로 자동차로 이동할 때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시내를 통과하기 만만찮으므로 옻골마을까지 가려면 일정을 여유 있게 잡는 게 좋다.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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