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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시간과 시계, 과학문화재. 별을 향한 조상의 경외심과 탐구정신

경호... 2015. 7. 14. 04:41

 

 

조선의 시간과 시계, 그리고 과학문화재

 

 

 

 

세종을 위한 천상의 시계

 

1438년 장영실은 자격루(국보 제229호)의 시계제작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세종에게 첨단적인 자동 물시계를 헌상하게 된다. 그것이 천상시계인 흠경각루이다. 세종은 흠경각(조선시대 세종 20년(1438)경복궁 안 강녕전 옆에 지은 전각. 여러 가지 천문기구를 설치했던 곳) 안에 설치된 흠경각루를 보면서 자연을 벗 삼고, 때로는 농사짓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균형 잡힌 국정을 위해 노력했다.

 

37명의 시보인형(종, 북, 징을 쳐서 시, 경, 점을 알리는 인형)들이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연출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진풍경이었을 것이다. 흠경각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가 운영되는 곳이면서 세종 자신이 백성을 생각하고, 국가를 운영하며, 정치를 구현하는 천상의 공간이었다.

 

 

 

 

 

 

세종의 천문의기 제작과 시계 제작 프로젝트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세종대왕은 조선의 독자적 역법체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천문의기 제작과 시계 제작 사업을 펼쳤다. 당시에는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중국에서 개발한 간의가 있었다. 간의는 중국에서 개발한 당시의 최신기기였다.

조선의 과학자들은 한양의 위도에 맞도록 간의를 개량했다. 나아가 실용성과 이동성이 겸비되도록 새로운 형태의 소간의를 제작했다. 이들 관측기기에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백각환이라는 시계부품이 장착됐다.

 

세종시대에는 다양한 해시계가 제작됐다. 당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였다. 궁궐에서 알려주는 자격루의 표준시간 이외에 종묘와 혜정교에서도 백성들이 마음껏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해시계를 설치했다. 이 해시계가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용 해시계인 앙부일구(보물 제845호)이다. 앙부일구는 시간은 물론 날짜까지 알 수 있었다. 앙부일구 시반면(그림자가 비치는 면)에는 시각선과 절기선이 바둑판 모습처럼 그려져 있다. 앙부일구는 천문정보와 예술적 아름다움이 담겨진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학문화재이다.

 

 

일 년의 길이를 측정하라

 

오늘날 1년의 길이는 약 365.2422일이다. 조선에서는 1년의 길이를 약 365.25일로 계산하여 사용하였다. 600여 년 전, 이렇게 정확한 1년의 길이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1년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규표’라는 측정기기가 있어 가능했다. 규표는 하루에 한 번만 측정하는 해시계라고 할 수 있다. 남쪽 하늘에서 태양이 가장 높이 올라왔을 때(남중시간) 그림자 길이를 측정한다. 규표의 구조는 수평방향으로 ‘규圭’가 놓여 있고, 수직방향으로 ‘표表’가 세워져 있다. 매일 매일 표가 만드는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게 되는데, 여름에는 짧고, 겨울에는 길다.

 

그림자 길이가 가장 길어진 날(동지날)부터 가장 짧아지다가(하지날) 다시 길어질 때(다음해 동지)까지 날 수를 측정해 보면 365일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측정을 매년 반복하게 되면 365일이 아닌 366일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수년에서 수십 년 반복해서 1년의 길이를 측정하여 약 365.25일이라는 평균값을 얻게 된다. 이렇듯 1년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 규표의 기본적 역할이었고, 표 그림자 길이로 1년 중에서 24기氣(12절기와 12중기) 날짜를 정했다. 이러한 규표의 측정은 오늘날 사용하는 양력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였다. 조선시대는 음력 날짜와 더불어 규표를 사용하여 양력 날짜를 함께 사용했다.

 


 

 

17세기 최첨단 천문시계·송이영의 혼천시계

 

조선에서 1654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하면서 새로운 역법에 부합하는 천문시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서양에서는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기계식 톱니 기어를 갖춘 추동력의 시계를 사용했다. 시간의 정밀성을 높이기 위해 추동력을 일정한 속도로 내려가도록 하는 기술적 해결이 필요했다.

 

당시에 사용하던 폴리오트 방식의 시계장치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사람이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이다. 그는 1657년 세계 최초로 진자장치를 이용하여 정밀한 시계를 제작했다. 놀랍게도 이 진자장치는 1669년 조선으로 건너와 혼천시계의 동력장치로 사용됐다. 1669년에 제작한 혼천시계는 조선에서 발전시킨 혼천의 제작기술과 서양식 자명종의 동력을 결합해 제작한 독창적인 천문시계이다.

 

이 천문시계는 조선시대 관상감(당시의 천문기관)의 천문학교수였던 송이영(宋以穎, 1619~1692)이 만들었다. 그는 서양의 자명종을 연구하여 혼천의(국보 제230호)와 결합해 획기적인 시계를 발명했다. 송이영은 당시의 천문역법인 시헌력을 시행하는 데 높은 지식을 겸비했고 천문관측에 능통했던 대표적인 천문학자이다. 혼천시계는 홍문관(당시의 학술기관)으로 보내져 여러 학자가 천체운행의 원리와 서양 역법의 이해, 천문관측과 시간측정 교육에 활용했다.

 

 

 

 

 

조선 후기의 명품 시계-강건과 강윤 형제의 휴대용 앙부일구

 

조선시대 선비들도 오늘날 휴대폰보다 작은 크기의 시계를 지니고 다녔다. 진주 강씨 후손으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강윤(姜潤, 1830~1898)과 동생 강건(姜 , 1843~1909)이 만든 휴대용 해시계는 초소형으로 상아와 같은 고급 재료로 만들었다. 현재 이들 형제가 만든 해시계는 11점이 남아 있다.

 

강윤과 강건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증손이다. 그의 손자, 즉 두 형제의 큰아버지 강이중과 아버지 강이오는 또 다른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건의 두 아들도 가업을 이어 해시계 제작을 했다. 이에 따라 중인 출신의 기술자가 아닌 명문가의 3대가 조선 후기 명품 휴대용 해시계의 전통을 이어갔다.

 

조선 사회에서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역법을 제정하고 하늘의 이치를 살펴 농사에 필요한 시時와 때를 알려주는 일은 국왕이 실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의 천문의기 제작과 시계 제작 기술은 오늘날 과학문화재 복원이라는 형식으로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조선의 시간과 시계, 그리고 과학문화재는 선조들의 과학적 창의성이 담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과학유산이나 복원한 과학문화재는 전통기술과 미래과학을 연결해주는 든든한 토대가 되고있다.

 


 

 

글·사진·김상혁 한국천문연구원박사

 

 

 

 

 

 

별을 향한 우리 조상의 경외심과 탐구정신

 

 

 

 

신앙의 대상으로서 별을 숭상했던 우리 조상

 

고조선 시대에 남아있는 유적 중에 고인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고인돌은 고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고인돌 중에는 덮개돌 위에 십 여 개에서 수백 개까지 홈을 파 놓은 것들이 있다.

 

이 홈 중에는 연결해보면 북두칠성으로 보이는 홈들도 보인다. 삼국시대 전후로 하여 별과 관련된 행사로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 부여의 영고迎鼓 등이 있는데 이는 추수가 끝난 뒤 하늘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는 천제와 같은 행사였다.

 

특히 삼국사기에 보이는 바로는 신라인들이 천체를 대상으로 지낸 제사 세 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별을 대상으로 지내던 것이 영성제靈星祭, 태양과 달에 지내던 일월제日月祭, 5개의 행성에 대해 지내던 오성제五星祭 등이 그것이다.

 

이렇다보니 우리나라에 별과 얽힌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별 중에서 특히 우리 민족과 관련이 깊은 것이 큰곰자리에 있는 북두칠성과 궁수자리에 있는 남두육성이라는 별자리다. 이 두 별자리는 별자리를 그려놓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남두육성은 우리의 삶을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은 뒤에 우리의 영혼을 돌본다고 믿었다.

 

고대 천문기록에 전하는 조상의 과학성

 

우리 조상은 단순히 신앙의 대상으로서 하늘의 별을 본 것만이 아니다. 별을 보면서 무한한 상상력을 키우고 또한 별, 달, 태양의 운행을 이용하여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달력도 만들어 사용하였다. 물론 중국으로부터 앞선 천문 관측기술과 역법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우리의 것을 발전시켰다. 『삼국사기』에만 보더라도 일식, 월식, 혜성, 별똥과 운석, 달과 행성들의 운행, 행성과 행성의 만남, 태양 활동 등 230건이 넘는 천문기록들이 들어있다.

 

현대의 컴퓨터로 계산하면 이러한 천문현상과 관련한 기록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천문학자들은 천문현상의 대부분이 사실임을 입증하여 『삼국사기』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더 많은 천문기록들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고려사』는 천문기록만 별도로 모아놓은 천문지가 있는데 일식 기록만 214회나 된다. 그 외 혜성, 행성, 유성, 태양, 신성, 운석 등과 관련된 것들을 모두 합치면 수천 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어느 중국의 역대 단일 왕조가 기록한 것에 견주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분량이다.

 

놀라운 관측기록 중의 하나는 태양에 있는 흑점을 관측했다는 기록이다. 예를 들어 1151년(의종5) 3월 계유일에 태양에 검은 점이 있는데 그 크기가 계란만 하다라는 구체적으로 흑점을 관측한 기록이 보인다.

 

이는 서양의 갈릴레오가 1610년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이용하여 최초로 흑점을 관측하기 전 무려 46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나 기기를 사용하여 태양 표면에 있는 흑점을 관측했는지 기술하지 않고 있어 아쉽게 느껴진다.

 

 

 

 

 

 

최고의 과학으로 연구된 천문지식

 

고려시대에 태양과 달의 운행을 이용하여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날과 시각을 미리 예측하는 것은 당시 최고의 과학이었다. 역법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으로부터 배워와 우리나라 나름대로 계산을 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익히는것은 역법에 관한 책만 입수하여 단순하게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고의 수학적 원리를 이용하여 계산이 뛰어난 천문학자들이 주도하여 계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고려에 이어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고 하늘의 천체운행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태조 이성계는 등극하자마자 자신의 권력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모든 백성에게 알리고 또한 천명에 따라 백성을 통치할 것임을 만방에 고하기 위해 천문도를 제작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천문도를 만들려하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천문도가 없었다. 때마침 고구려 시대 평양성에 있었던 돌판에 새겨진 천문도의 인본을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1395년에 태조는 너무도 반가운 마음으로 이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하여 길이 약 210cm, 폭 123cm, 그리고 두께가 12cm 정도 되는 돌판에 1467개의 별들을 새겼다. 이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라 하여 현재 국보 제2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천명의 뜻을 담았다는 상징물의 의미를 뛰어 넘어 천문현상을 과학적으로 관측하고 기록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세종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서두른 것 중의 하나가 천체의 위치를 제대로 관측할 수 있는 기기나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국가가 백성들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때와 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모든 백성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1432년(세종14)에 정초와 정인지에 명하여 천문기기에 관한 고전을 연구하게 하고 이천과 장영실의 주도하에 나무로 된 천문기기들을 만들게 했다.

 

그 뒤 1439년(세종21)에 이르러 청동으로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을 만들었다. 이 천문기기들은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거나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기기들이다. 이러한 관측기기가 완성되자 경회루 북쪽에 돌로 석대를 만들어 간의대를 완성했다.

 

이 간의대에 관측기기들을 설치하여 상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도록 하는 오늘날 천문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관측기기들을 완성한 뒤에 천체운행의 원리를 이용하여 달력을 만들고 천문현상인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여 오행성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는 역법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는 중국의 역법을 일방적으로 받아서 사용해야 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우리 스스로 계산할 수 있는 독자적인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1445년(세종27) 이순지와 김담에 의해서 완성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이다.

 

이러한 역법의 편찬은 세종시대의 과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세종 시대에 제작된 천문기기가 노후화되어 중종 시대에 이르러 수리 또는 새로 제작하였으나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이어 겪으면서 대부분의 기기들이 파괴되거나 망실되어 세종 시대에 제작된 기기들 중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게 되었다. 중국은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서양 신부들의 도움으로 종래 사용하던 역법을 대대적으로 바꾸어 1644년부터 시헌력을 사용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도 이에 발맞추어 1651년(효종2) 역산 전문가를 북경에 파견하여 배워오도록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653년(효종4) 조선에서도 시헌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서양의 성직자들을 통하여 서양의 천문지식과 기기들이 밀려들어왔다. 당시 조선에서도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 북경에 들어와 있는 서양인이 만든 천문 관측기기나 번역한 서양의 천문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연구했다. 이 때 서양인이 만든 다양한 천문도도 얻어와 ‘황도남북총성도’와 같은 서양식 천문도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조선전기에 만든 천문도를 구법천문도라 하고 실학자들이 서양의 천문도를 입수하여 만든 천문도를 신법천문도라 하여 구분한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많은 서양의 천문 관련 서적과 천문도들이 전래되면서 우리의 독자적인 천문연구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스 신화 속의 별자리 이야기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간직해온 사상과 과학지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면이 없지 않다. 하늘과 별을 관측하던 뛰어난 천체 관측기구들과 유적들도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박물관 안에 놓여있을 뿐이다. 별을 보며 무한한 상상력을 키우고 우리만의 역법을 완성시킨 우리 조상의 철학세계와 과학성을 조명하고 그 속에서 조상의 삶의 지혜를 본받으려는 좀 더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글·사진·이용복 서울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교수 사진·문화재청,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