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風水.命理

선견몽. 공주갑부 김갑순 [조용헌의 八字기행]

경호... 2015. 7. 14. 03:16

[조용헌의 八字기행]

미래를 보는 꿈 ‘선견몽’…한덕수 총리 관운 맞춘 부인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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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종류는 4가지가 있다.

먼저 선견몽(先見夢)이다.

미래를 미리 보는 꿈이다. 앞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미리 예시해주는 꿈이라 하겠다.

 

둘째는 전생몽(前生夢)이다.

전생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꿈이다. 이 전생몽은 아무나 꾸는 게 아니다. 의식이 아주 맑은 사람들이 꿀 수 있다.

 

셋째는 혼백불화몽(魂魄不和夢)이다.

사람이 잠을 잘 때는 의식이 쉬기 때문에 혼(魂)과 백(魄)이 화합을 하게 된다. 혼은 ‘개체의식’이고, 백은 ‘집단의식’에 해당한다. 낮에 활동할 때는 혼과 백이 서로 분리돼 작용을 하지만, 밤에 잠을 잘 때는 다시 뭉치게 된다. 혼백이 화합해야 깊은 잠에 들어간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정신이 너무 산란하면 잠을 잘 때에도 혼백이 화합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때 꾸는 꿈은 개꿈이다. 개꿈의 특징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꿈 갖고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넷째는 천상몽(天上夢)이다.

천상세계의 장면을 보여주는 꿈을 말한다. 천상몽은 총천연색으로 꾸는 수가 많다. 보통 꿈은 흑백인데, 컬러로 꾸면 천상몽이 많다. 보통 꽃밭이나, 아름다운 광경이 컬러로 보이면 천상몽이다.

이런 천상몽을 꾸는 사람들은 의식이 고양된 사람이다. 1달 이상 기도에 집중적으로 몰입하면 평소 잘 안 꾸던 천상몽을 꾸는 경우를 봤다.

이 가운데 실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꿈이 선견몽이다. 이럴까 저럴까 하는 갈림길의 상황이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직면해서 꿈을 꿀 수 있는데, 이때 나오는 꿈이 선견몽이 많다.

주미대사를 하다가 몇 달 전에 무역협회장을 맡게 된 한덕수 씨 부부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지난 정권에서 총리를 지냈으면서도 이번 정권에서 주미대사와 무역협회장을 지냈으니 관운(官運)이 좋은 팔자다.

이 관운은 어디에서 왔는가? 한덕수 씨는 상대방에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자기를 별로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이 장점이다. 그런 데다 성실하니까 대통령의 인정을 받는 것 같다. 그런데 한덕수 씨 부인이 인물이었다. 서울대 미대를 나온 화가이기도 하지만, 이 사모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꿈의 세계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어서 필자도 한 수 지도를 받았다. 한덕수 씨가 공무원 시절 초반에는 승진이 늦었는데, 어느 날 부인이 꿈을 꾸니까 어느 높은 산을 등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헬기가 나타나더니 헬기에 탄 조종사가 한덕수 부부를 향해서 권총을 여러 발 쏘아댔다.

권총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꿈인가 싶어서 평소에 한번씩 찾아가던 영발도사(靈發道士)에게 자문을 해보니, 권총은 권세 ‘권(權)’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벼슬하는 꿈이다. 얼마 있다가 한덕수 씨는 그렇게 고대하던 정부부처 국장보직으로 승진을 했다. 총리가 되기 전에도 부인에게 특별한 꿈이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골목길처럼 복잡한 미로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꿈이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보니까 위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빛을 따라가 보니 맨홀 뚜껑의 틈새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맨홀 뚜껑은 무쇠로 돼 있어서 무겁다. 있는 힘을 다해 두 손으로 그 맨홀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꿈을 꿨다. 이게 무슨 꿈인가 싶어서 기다려 보니까, 1주일 있다가 총리로 임명됐다. 무거운 맨홀 뚜껑을 열고 나갔다는 대목이 포인트다. 무거운 뚜껑을 열고 나왔으니, 경쟁을 뚫고 총리에 임명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뚜껑 못 열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올해 초 무역협회장이 되기 전에 특별한 꿈이 없었느냐고 필자가 물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있었다. 꿈에 대통령 내외가 잠옷만 입고 한덕수 씨 부부 침실에 들어왔다. 대통령 내외가 잠옷만 입고 침실에 들어오니 깜짝 놀랄 수밖에. 그 꿈을 꾸고 나서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무역협회장을 맡게 된 것이다.

정치인 서청원. 지뢰를 밟고 다니는 험난한 삶을 사는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양반은 꿈이 정확하다. 지난 4·11 총선이 끝나고 선견몽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투표 일주일 전에 꾼 꿈인데, 커다란 비단구렁이 2마리가 나란히 기어가는 꿈이었다. 무늬가 아주 화려한 구렁이였다. ‘아하! 나하고 친한 사람 2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겠구나’라고 짐작했다. 보통 구렁이나 뱀 꿈은 길몽에 속한다.

아니나 다를까 투표함을 열어보니 2명이 실제로 당선됐다. 인생의 주요 고빗길마다 선견몽을 꿨는데, 지나고 보면 그 꿈이 거의 다 맞았다고 한다. 왜 꿈이 맞는가 하고 생각해보니 돌아가신 부모님이 못난 자식을 도와주려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 같아, 매일 저녁 잠을 자기 전에 벽에 걸린 부모님 사진을 향해서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절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한덕수 씨 부인의 말에 따르면 본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신문로의 단독주택에 40여년 전 처음 이사 오기 전에도 홍수가 집을 덮치는 꿈을 꿨다고 한다. 이때는 물의 청탁(淸濁)이 기준이 된다.

맑은 물이 덮치면 좋은 꿈이고, 탁한 흙탕물이 덮치면 나쁜 꿈이다. 맑은 물이 집에 가득 차는 꿈을 꿨으니, 그 뒤로 인생행보에서 신문로 집터의 덕을 봤다고 볼 수 있다.

전남 구례의 섬진강을 걸어가다가 접하게 된 어떤 사업가의 꿈도 흥미로웠다. 이 사업가는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해서 구속될 지경에 몰려 있었다.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을 하루 앞두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낚싯대를 들고 나타나는 꿈을 꿨다. 자신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상황에서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 낚싯대 줄을 자기에게 던졌다.

그 낚시 갈고리로 허리띠를 걸어 잡아당기니, 자신이 단번에 강변의 뭍으로 끌어올려졌다. 다음 날 희한하게도 구속이 연기되는 결정이 나왔다고 한다. 이 일을 겪은 뒤로 무신론자였던 그는 제사 때마다 외조부 영전에 술잔을 정성스럽게 올려놓는 습관이 생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명(神明)의 세계가 있는 것이구나!’ 하고 말이다.

필자의 꿈도 소개 하나 해야겠다. 2000년 무렵에 꾼 꿈이다. 꿈에 나의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제사상의 높이가 좀 높았다. 보통 밥상이 아니라 1m가 좀 넘는 높이의 제사상이었다. 양쪽에서 각각 아주머니 한 사람씩이 제사상에 백설기 떡과 피 묻은 돼지고기를 올려놓고 있었다.

백설기 떡은 제사상에 올려놓을 때마다 계속 쌓여서 높이 올라가는데, 피 묻은 돼지고기는 제사상에 올려놓을 때마다 바닥으로 계속 떨어지는 게 아닌가! 올려놓으면 또 떨어지고, 올려놓으면 또 떨어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왜 백설기는 계속 높이 올라가는데, 돼지고기는 땅바닥으로 떨어진단 말인가?

무슨 조짐이란 말인가? 12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까, 백설기는 글 쓰는 일이고, 돼지고기는 돈이 아닌가 싶다. 글을 써서 이름은 계속 알려지지만 돈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시해주는 예지몽(豫知夢)이었다.

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의식(意識)을 3단계로 설명한다. 6식(識), 7식, 8식이 그것이다.

6식은 지성과 판단력을 의미한다. 7식은 에고(ego)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축구공이 머리를 향해 날아오면 반사적으로 몸을 숙인다.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는 행동은 7식에서 나온 것이다.

8식이 가장 깊숙이 들어 있는 근원의식인데, 이 8식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우주 전체와 통하는 의식이다. 인간은 누구나 8식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기 내면에 미래를 알 수 있는 거울을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이 8식에서 영험한 꿈이 나온다.

 

 

 

[조용헌의 八字기행]

조상 묫자리 덕에 구한말 갑부 된 김갑순

 

…노비로 태어나 부동산 투기로 축재

 

나라의 운세가 흥할 때도 부자가 나오지만, 나라가 망해가는 난리의 시대에도 새로운 부자가 나온다. 국운이 융성할 때 등장하는 부자는 ‘석세스 스토리’로 포장돼 주목을 받지만, 나라가 망할 때 등장한 부자는 어두운 그림자가 붙어 다닌다. 우리 근대사에서 그 어두운 그림자의 이름은 매국노와 친일파라는 딱지였다.

돈을 버는 일은 도덕과 윤리, 민족, 애국 등등과는 상관이 없다는 세상사의 이치를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돈과 정신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 역사적 이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 1872~1961년)이다.

김갑순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여러 갈래의 구전(口傳)에서 들을 만한 내용이 전해질 뿐이다. 필자가 10년 전쯤 기차를 타고 서대전(西大田)역을 지나가다가 나이 지긋한 70대 중반의 영감님이 옆자리에 올라타면서 우연히 김갑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 영감님의 아버지가 생전에 김갑순과 교류가 있어서 김갑순에 대한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다고 했다. 김갑순은 공주 장터의 주막집 주모(酒母)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국밥과 술을 파는 주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천민(賤民)에 해당한다. 관의 심부름을 하는 관노(官奴)였다. 노비 신세로 태어난 팔자가 어디 갈 데가 있었겠는가? 10대 초반 시절부터 공주 감영의 사또(?) 요강 청소 담당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조선시대 사또는 밖에 있는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일이 귀찮으면, 방 안에다가 요강을 갖다 놓고 여기다가 용변을 보았다. 그러면 아랫것들이 이 요강의 똥과 오줌을 수시로 비워내고 씻어 두었다. 김갑순은 하루에도 7~8번씩 사또의 방안을 들락거리며 이 요강 씻는 일을 했는데,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보여줬다.

겨울이 되면 놋쇠요강을 씻어서 자기 품 안에 안고 있다가 사또 방안에 갖다 두는 재치가 있었다. 사또 궁둥이가 놋쇠요강에 닿을 때 차갑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 말잡이를 할 때 노부나가 신발을 자기 품 안에 넣어 따뜻하게 해서 갖다 놓았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겨울에 눈이 오면 새벽부터 감영 마당에 쌓인 눈을 부지런히 쓸었다.

 

“갑순아! 이리 와서 화로에 손을 녹였다가 쓸어라!”

“아닙니다 나으리. 이거 마저 쓸겠습니다.”

 

이렇게 성실하니 윗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요강 당번이 최하층 천민의 더러운 일이지만, 바꿔 생각하면 윗사람들과 직접 얼굴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렇게 윗사람의 인정을 받아서 김갑순은 공주감영의 아전(衙前)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천민이 가장 말단 9급이기는 하지만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노예가 시민권을 딴 셈이다. 김갑순은 공무원 월급을 타면 윗사람에게 모두 상납할 만큼 처세를 잘했다. 자신은 부스러기 부수입으로 생활을 했으니, 윗사람이 볼 때 ‘저놈은 참 기특하고, 사람 되었다’였다. 그러니 승진할 수밖에. 이 대목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김갑순이 어느 날 투전판으로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인질로 붙잡혀 있던 젊은 여인을 구해주고 의남매를 맺었는데, 나중에 이 여자가 충청감사의 소실로 들어가게 됐고 감사에게 김갑순 이야기를 잘해서 아전이 됐다는 설도 있다. 이런 걸 보면 김갑순이 의협심도 있고 사람에 대한 인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김갑순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또 다른 대목.

어느 날 석양 무렵에 공주감영에 허름한 행색의 선비가 공주 목사에 대한 면회 신청을 했다.

공주 목사의 어릴 적 친구였는데 목사가 면회를 거절했다. 면회를 거절당한 이 선비가 낙담해 터벅터벅 돌아가려는 것을 보고 불쌍하다고 여긴 김갑순이 어떤 사연으로 왔는지 묻게 됐다.

 

“집으로 돌아갈 노잣돈은 있소?”

“노잣돈이 어디 있겠소. 간신히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는데 해는 지고 돈은 없고 돌아갈 길도 막막하오.”

“공주감영에는 뭣 땜에 온 거요?”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려는데 혼수비용이 하나도 없소. 어릴 적 친구인 공주 목사에게 어떻게 부탁을 할까 했는데 만나주지도 않는구려.”

 

딱한 이야기를 듣게 된 김갑순은 요즘 화폐가치로 400만~500만원 정도의 돈을 그 낙담한 선비에게 빌려줬다고 한다.

“나중에 잘되면 갚으시오.”

몇 년 뒤에 공주감영으로 서울에서 보낸 심부름꾼이 김갑순을 찾았다. 호조판서께서 김갑순을 무조건 서울로 모시고 오라 하셨다는 분부였다.

서울의 품계 높아 보이는 어느 기와집에 도착해 보니 집주인이 서 있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몇 년 전에 김갑순이 돈을 보태줬던 그 선비 아닌가. 그 선비는 그 뒤로 호조판서가 된 다음에 공주감영의 김갑순에게 신세 진 것을 잊지 않고, 아전 신분이었던 김갑순을 고위 벼슬로 끌어올려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갑순이 세금을 걷는 요직인 봉세관(捧稅官)을 비롯해 충남 일대의 여러 지역 군수를 지내게 된 계기가 바로 이 호조판서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김갑순은 친일파였다. 그가 친일로 가게 된 계기는 언제였을까.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동학에서 가장 크고 인명 살상이 많았던 전투가 공주 우금치(牛禁峙) 전투다. 우금치 전투가 동학혁명의 분수령이었고, 이 전투에서 동학군이 일본군에게 패배해 실패하게 된 것이다.

우금치는 현재 공주교대 뒷산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동학군 1만1000명과 관군이 일본 연합군 2500명 정도와 맞붙은 전투였다.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 구식 화승총 몇십 정과 나머지는 죽창, 쇠스랑으로 무장한 동학군은 전투가 아니라 거의 학살을 당했다고 봐야 한다.

동학군은 마지막에 500명 남고 다 죽었다. 김갑순은 우금치에서 처절하게 일본군에게 당하는 장면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김갑순이 1872년생이니까, 1894년 동학은 그의 나이 23세 때 사건이다. 이후부터 김갑순은 ‘시대가 바뀌었구나. 일본에 철저하게 붙어야겠다’고 판단하지 않았나 싶다.

김갑순은 봉세관과 군수를 지내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특히 일제가 대대적으로 토지조사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요직에 있었던 그는 공주와 대전 일대의 많은 땅을 헐값에 사들이거나, 주인이 애매한 땅들은 자기 앞으로 돌려놓았다. 일제가 1910년 무렵부터 조선의 토지등기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까지는 대강 눈짐작으로 ‘네 땅 여기까지, 내 땅 여기까지’를 가늠했기 때문에 눈먼 땅이 많았던 것이다. 1930년대에 김갑순이 공주, 대전 일대에 갖고 있던 땅은 대략 1011만평이었다. 대전의 땅 40%가 그의 땅이었다.

1900년 초에 경부선이 대전을 통과하게 된다는 정보를 일본으로부터 미리 입수한 김갑순은 논밭과 구릉지대였던 대전의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이후 대전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땅값이 수백 배로 뛰었고, 김갑순은 떼부자가 된 것이다.

그는 1961년에 죽었으니까 90세까지 장수했다. 구한말, 동학혁명, 일제시대, 해방정국을 모두 겪은 그가 남긴 명언이 하나 있다. ‘민나 도로보데쓰!(전부가 도둑놈이다)’ 돈이라는 것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다.

노비로 태어나 90세까지 장수하면서 당대의 재벌이 된 김갑순의 팔자는 드라마틱하다. 풍수가에서는 그의 조부 묘가 명당이라서 큰 부자가 됐다고 믿는다. 근래까지 그 묫자리가 전국 풍수가들의 사례 연구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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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동양학자·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 정윤정]

 

/ 매경.

 

 

 

 

 

 

김갑순에 대해 소문으로 들은 얘기가 많습니다.

과거에는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 있었습니다. 대전은 말그대로 허허벌판에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 산다는 곳이지요. 뭘 알았는지 그곳의 땅을 엄청 사들였는데 도청이 이전하면서부터 발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땅을 거의가 정부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말이 많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기부한 땅값보다 남은 땅값으로 번돈이 더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지금의 고속터미널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후손이 누군지 말없이 조용하니 대단한 집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