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독서법
같은 책을 되풀이해 소리 내서 읽는 다독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이 옛 사람의 독서법이었다.
한 가지 책을 한 백번 쯤 되풀이해서 읽으면 분명치 않던 의미가 저절로 환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기본이 되는 텍스트를 무작정 읽고 또 읽었다는 것인데, 이때 읽는다는 것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락을 얹어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의미는 항상 소리의 뒤를 따라 왔다.
처음엔 긴가민가 하던 것이 목청을 돋워 읽고 또 읽는 동안 의미로 맺혀서 가슴에 새겨졌다.
옛 사람들이 다독을 했다는 말은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었다기 보다 몇 가지 책을 되풀이해서 읽었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천자문》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기초 교재를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읽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날 배운 것은 집에 가서 입에 닳도록 다 외워서, 다음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 앞에서 다 외워야 했다. 이것을 강(講)을 바친다고 한다.
돌아 앉아 외운다고 해서 배송(背誦)이라고도 하는데, 못 외우면 어김없이 서당 선생님의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홍도의 풍속화 중 서당이란 작품에 보이는 장면이 바로 이것이다.
훈장 선생님 앞쪽에 돌아앉은 녀석은 숙제를 안 해와 외우질 못했고, 당연히 선생님의
“종아리 걷어!” 하는 호령이 떨어졌다.
아이는 겁을 잔뜩 먹고 눈물을 훔치면서 바지의 댓님을 끄른다.
곁에 있는 녀석들이 고소하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는다. 그런데 그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웃으면서 눈은 책 위로 가 있는 녀석이 있고, 아예 마음 놓고 웃는 녀석이 있다.
마음 놓고 웃는 녀석은 이미 강 바치기가 끝난 것이고, 책 위로 눈이 가 있는 녀석은 아직 제
차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같은 책을 계속 되풀이해서 읽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독서다.
하도 읽어서 한지로 된 책에 보풀이 일었다. 책을 묶은 실이 다 끊어져 너덜너덜 해졌다.
입에 닳고 닳아서 어느 구절을 들이대도 자동적으로 그 다음 구절이 술술 입에서 흘러 나왔다. 정작 뜻을 모르면서도 다 외웠다.
우리 집 둘째가 여섯 살 때 일이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돌아와 ‘아빠 들어봐!’ 하더니 느닷없이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를 외우기 시작했다.
하도 신통해서 듣고 있으려니까 느닷없이 두 손을 기도 자세로 모으더니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님!’ 하는 것이었다.
‘하나니’란 말은 일상에서 쓰는 말이 아니라서 녀석은 이 표현을 의미론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나니’가 제가 아는 ‘하나님’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여섯 살 짜리가 ‘동창’은 어찌 알며, ‘노고지리’를 어이 알았겠는가? ‘우지진다’도
모르고, ‘사래 긴 밭’도 알 까닭이 없었다.
의미는 전혀 모르면서 가락만으로 단어를 바꿔가며 줄줄 외웠다.
예전 대만에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딸아이가 하루는 학교 숙제라면서 들어보란다.
“춘 미엔 뿌 지에 샤오.” 성조를 얹어 낭낭하게 읽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로 시작하는 맹호연의 유명한 한시였다.
깜짝 놀라 ‘와! 네가 대만 온 지 겨우 몇 달 만에 본토 발음으로 한시를 다 읽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래 그게 무슨 뜻이냐?’하고 물었더니,
‘나야 모르지. 그냥 선생님이 외우래서 외운 거야!’ 하면서, 제 동생과 놀겠다고 쪼르륵
달려간다.
春眠不覺曉.봄날에 취해 날 새는줄 모르니, 봄잠에 빠져 날새는 줄 모르니.
옛날에 아이들이 서당에서 글 외우던 것도 어찌 보면 이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천자문의 첫 머리에서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르 황’ 하고 읽으면,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로 이해되지 않고, ‘하늘은 친친 감고, 땅은 누른다’는 뜻으로
생각했다.
‘춘면불각효’가 ‘봄 잠이 노곤하여 새벽이 온 줄도 몰랐다’는 의미인 줄을 알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소리를 따라 기운을 얻어야 터지는 문리
이렇게 해서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을 떼고, 명심보감을 뗐다.
이 때 쯤 되면 이른바 문리(文理)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한다.
문리란 다른 게 아니라 한문 문장의 구문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한자란 것이 뜻글자라 놓이는 위치에 따라 명사도 되었다가 부사도 되었다가 동사도 되었다가
어조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자꾸 비슷한 구문들을 읽고 외우다 보면,
이때는 이 글자를 무슨 뜻으로 새겨야 할 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각이 조금 생겨나고 문리가 생기면 이제 《통감》과 같은 역사서와
《맹자》를 비롯한 사서삼경을 읽었다.
《통감》은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때까지의 역사를 주요 사건 중심으로 연대순에 따라 정리한
통사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무엇보다 재미가 있고, 그 안에 소중한 교훈이 담겨 있다.
더구나 《통감》 앞쪽에 실린 전국시대의 이야기는 대부분 사마천의 《사기》에 실려 있는
명문장 중에서 발췌한 것이어서 문장도 훌륭했다.
아이들은 통감을 읽으면서 중국의 역사를 배웠고, 위인들의 훌륭한 행동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러면서 좋은 문장의 모범을 저절로 익혔다.
《맹자》는 수사학의 보고라 할 만큼 문장의 짜임이 좋고, 기승전결의 단락 구성이 훌륭한
글이다.
또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공부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깊이 음미하고 따져보아야 할 것들이었다.
옛 사람은 《맹자》를 백 번 소리 내서 읽으면 문리가 탁 소리를 내며 터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리를 내서 입에 닳도록 줄줄 읽었다.
이런 방법을 인성구기(因聲求氣)라고 한다. 소리를 통해 기운을 구한다는 말이다.
옛글을 소리 내서 자꾸 읽으면 옛 사람의 기운이 그 소리를 타고 내 속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다. 자꾸 읽다보면 그 글의 호흡이 내 호흡과 일치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글을 지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글의 리듬과 호흡이 내 글 속에 스며들게 된다.
좋은 글과 나쁜 글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소리를 내서 읽었을 때 가락이 매끄럽고 호흡에 따라 자연스런 리듬을 타면 좋은 글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좋은 글의 축에는 못 든다.
글에 리듬이 있다는 것은 가락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자연스런 결을 살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물에 물결이 있고, 바람에 바람결이 있듯, 글에도 결이 있다.
글의 결은 바로 소리 내서 읽었을 때 느끼는 자연스런 리듬이다. 현대의 문장도 예외가 아니다.
좋은 글은 소리를 내서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예전에는 공부래야 글을 읽고 시를 짓는 공부뿐이었다.
수학이나 물리 화학, 또는 지리 같은 과목은 배우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현의 글과 역사책과 이백과 두보의 시만 읽었다.
비슷비슷한 책을 계속 읽고 외우다 보니, 나중에는 책과 책 사이에 네트워크가 생겨났다.
《논어》에서 읽은 구절이 《맹자》에서 또 나왔다.
《대학》 《중용》을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자꾸 새로운 정보를 입력하는 대신, 읽은 정보를 굳히고 다지는 공부를
했다.
과거를 공부하는 수험생들은 겨울이 되면 으레 절간에 들어가 사서삼경을 읽으며 삼동을 났다.
하루에 《논어》 한 장을 삼십 번 씩 읽고,
그 다음날은 두 장을 삼십 번 읽고, 겨울이 끝날 때 쯤 되면 아예 《논어》 한 권을 주석까지
통째로 줄줄 외워가지고 나왔다.
한번 산에 들어갈 때마다 요즘 학생들이 방학 중 생활시간표를 작성하듯 일과표를 만들어가지
고 가서, 한 두 가지 경전을 독파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한 겨울 내내 경전을 읽고 산에서 내려오면 어느새 눈빛이 듬직하고 늠름한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차례로 사서삼경의 기본 경전과 《소학》 같은 수양과 관련된 책을
다 읽고 나면 그제서야 비로소 다른 책에 눈을 돌렸다.
박람강기(博覽强記)는 옛날에 똑똑한 선비들을 칭찬할 때 늘상 쓰던 말이다.
박람은 이 책 저 책 많이 읽었다는 뜻이고,
강기는 기억력이 좋아서 한 번 읽은 글은 다 기억하고 외운다는 뜻이다.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까지 기억할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묻고 따지고 베껴 쓰는 손으로 읽는 초서(鈔書)
진정한 독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은 떠먹여주는 것을 받아먹는 독서였는데,
이제부터는 의문을 품어 모르는 것을 묻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따지는 독서를 했다.
경전을 읽다가 의문이 나면 먼데까지 스승을 찾아가서 물었다.
너무 멀어서 찾아가기가 어려우면 편지를 써서 물었다.
직접 만나 토론하고, 글을 통해 문답하면서 생각의 힘을 키우고, 생각의 깊이를 더했다.
그래도 안 풀리면 이 책 저 책을 뒤져 관련 정보를 모았다.
이러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은 초서(鈔書)였다.
초서란 책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을 밑줄 긋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베껴 쓰는 방법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의 귀양지에 있으면서 서울의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이 초서 방식의
독서를 요구했다. 텍스트를 지정해 주고, 이 텍스트 속에서 뽑아야 할 정보의 내용과 범주,
분량까지 정해서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게 했다.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던 독서가 손으로 읽는 독서의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초서 방식의 독서는 책 한권의 정보를 필요에 따라 압축해서 이해하는데 아주 위력적인 방법이
었다.
기록을 해두면 생각이 달아나지 않으니 그 점도 아주 편리했다.
초서는 말하자면 메모를 해 가며 읽는 독서다.
처음에는 그냥 책 내용을 발췌해서 베껴 쓰다가, 이것이 익숙해지면 다시 여기에 자신의 생각
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렇게 볼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과 의문들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이른바 주견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공부는 의문에서 시작된다.
의문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의문은 그때그때 메모를 통해 구체화 된다.
메모해 두지 않으면 생각은 금세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기초가 다져진 학생들은 메모의 훈련을 받았다.
이런 메모를 바탕으로 다른 책을 읽다가 이와 연관 있는 정보나 자료가 나오면 앞서의 메모에
그 내용을 추가했다.
예전에 《지봉유설》이니 《성호사설》이니 하는 책들은 다 이런 메모를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생각을 보탠 것들이다.
《지봉유설》은 지봉 이수광이 자기가 읽은 책의 메모를 주제별로 분류해서 설명한 책이고,
《성호사설》은 성호 이익이 이 책 저 책에서 메모한 것에 군더더기 설명을 덧붙였다는 뜻이다.
지금도 옛날 책을 보면 책 위의 여백에 작은 글씨로 메모를 하고, 붉은 먹으로 점을 찍고
줄을 친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생각이 쌓이고 독서가 쌓여 비로소 식견(識見)이란 것이 생겨난다.
식견이란 세상을 보고 사물을 이해하는 안목이다.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단순한 정보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내 나름대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 얻고 잃음, 검고 흰 것을 판단하는 안목이 여기서 생겨난다.
책을 읽는 목적은 바로 이 안목을 세우기 위해서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식견이 생겨나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식견이 생겨야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있다.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다면 취급하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질수록 더 위태롭게 된다.
요즘 중고등 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을 보면 이 점을 실감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문제는 잘 푸는데 실제 상황이 주어지면 아무 것도 못한다.
단순한 것은 잘 하는데 조금만 응용하면 손도 대지 못한다. 상황 대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식견은 영어 실력과도 상관없고 수능 점수와도 관련이 없다.
식견은 오로지 독서를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식견도 생기지 않는다.
읽기는 읽되 무작정 읽어서는 안 되고 제대로 읽어야 한다.
생각하고 따져보고 정리해가며 읽어야 한다. 무작정 읽어대는 것은 남독(濫讀)이다.
남독은 득보다 해가 될 때가 더 많다.
요즘 공부는 식견을 얻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지식을 얻기 위한 공부요, 문제를 풀기 위한
공부다.
그래서 점수가 높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라고 해서 덕성까지 훌륭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적과 인성은 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 배우긴 배웠는데 헛 배운 것이다.
논술시험을 잘 보려면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책을 읽고, 그 속에 담긴 핵심 내용을 파악하고, 실제에 적용하며, 생각의 힘을 키우는 훈련을
평소에 많이 해야 한다.
논술 실력은 학원에 몇 달 나가서 족집게 과외를 받는다고 절대로 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독서 습관을 기르면 논술 공부는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옛날의 과거시험이 바로 논술시험이었다.
논술시험이긴 한데, 지금의 논술 시험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어려웠다. 지금 그 문제를 보면
도대체 이런 문제에 어떻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도 그런 어려운 문제에 척척 답안을 쓸 수 있었다.
주견이 서고 식견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지 않고,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하고 따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는 대신 소신 있게 자신의 평소 생각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
다산이 강진에서 가르친 제자에 황상이 있다.
그는 열 다섯 살에 처음으로 다산에게 가서 글자를 배웠다. 그런데 불과 3년 반 뒤에는 흑산도에 귀양 가 있던 다산의 형 정약전이 황상의 글을 보고 깜짝 놀라, 어디서 이런 문장이 나왔느냐고 감탄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의 시를 보고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추사 김정희가 일부러 그를 찾아 강진에 들렀을 만큼
훌륭한 시를 쓰게 되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제대로 된 방법에 따라 책을 읽고, 열심히 익히면 지금도 누구나 그렇게 될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잘못 되고 과정이 잘못 되어 십 여 년을 배워도 발전이 없다.
옛날의 독서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독서였다.
하지만 지금의 독서는 단순한 지식과 정보만 취급한다.
지식이 식견이 되고, 식견이 지혜가 되는 독서라야 하는데, 오늘날은 지식은 정보로만 끝날 뿐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책이 쏟아져 나와도 두고두고 되풀이 해 읽을만한 책은 별로 없다.
그저 문제집 풀 듯 한번 보고 휙 내던지는 책들뿐이다.
읽을 때는 재미있는데 읽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적으려 들지 않고, 인터넷에 나온 정보만 적어 숙제로 낸다.
정보를 요리하는 힘이 필요하지 않고, 정보를 가공하고 편집하는 기술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10년만 몰두하여 독서하면 세상을 읽는 지혜와 경륜을 얻을 수 있다고 옛 사람들은 생각했다.
허생은 이 10년의 기한을 다 채우지 못하고 아내의 바가지를 견디다 못해 변부자에게 돈을 빌려
장사를 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자기가 무능해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인 뒤에,
그는 그 재물을 모두 버리고 다시 책 읽는 딸깍발이 선비의 길로 돌아갔다.
재벌이 되어 떵떵거리고 사는 즐거움으로 독서의 즐거움과 맞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목이 한번 터지면 세상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식견이 생기고 지혜의 샘이 열리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 당황하지 않는다.
애초에 독서의 보람은 여기에 있다. 이럴 때 독서는 문자의 범위를 벗어난다.
천지만물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되고, 그에 반응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다 독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의 완성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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