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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미덕과 해악 [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경호... 2015. 7. 13. 00:41

[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술의 미덕과 해악

 

39세에 요절한 애주가 남효온

술만큼 좋은 음식 드물지만

조절하지 못하면 패가망신

 

 

 

 

우리 민족만큼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 민족도 드물다고 한다. 요즘은 경쟁이 심하고 살기가 힘들다 보니, 불안한 마음을 술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급기야 주폭(酒暴)이란 신조어까지 생기고 말았다.

술이 오히려 액운을 만났다 해야 하지 않을까. 조선 전기의 기인으로 술을 매우 좋아했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말하는 술의 미덕과 해악을 들어보자.

《추강집(秋江集)》중 ‘동봉산인에게 답하는 편지(答東峯山人書)’다.

 

‘술이 적당하면 주인과 손님을 합할 수 있고 노인을 봉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이 적당하지 않으면 봉두난발(蓬頭亂髮)로 머리를 풀어 헤치고서 늘 노래하고 어지럽게 춤추며 (…) 예의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없애며 절도 없이 행동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까닭 없이 제 마음대로 눈을 부라리다가 혹 싸움이 일어나서 작게는 몸을 죽이고 중간으로는 집안을 망하게 하고 크게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습니다.’

 

추강은 뜻이 굳지 못한 사람은 술의 재앙을 막기 위해 백배 더 노력해야 한다면서 고사(故事)를 끌어들인다.

 

‘술을 경계하는 글로 《서경》에는 ‘주고(酒誥)’가 실려 있고,

《시경》에 ‘빈지초연(賓之初筵)’이 있으며,

양자운(揚子雲)이 이로써 주잠(酒箴)을 지었고 범노공(范魯公)이 이로써 시를 지었으니,

제가 어찌 조용히 술잔을 잡고서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의 자리에서 진퇴(進退)하고 읍양(揖讓)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마음이 약하고 덕이 적은 사람이라 술맛을 탐닉하다 절제하지 못하면, 마치 초파리가 깃털 하나를 짊어질 수 없는 것처럼 저 자신 마음이 산란해져서 술을 못 이기게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술을 끊었다고 선언한 남효온에게 김시습이 아주 끊지는 말고 적당히 마시라고 간곡히 권한 데 대해 답한 것이다. 이 글을 읽으려면 인용된 고사들을 알아야 한다.

《논어》 ‘향당(鄕黨)’에 공자는 “술을 마심에는 일정한 양이 없었으나 정신이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했다.

 

진준(陳遵)은 한(漢)나라 때 사람으로 술을 좋아하고 호기가 있었다. 손님들이 집에 모여 술을 마시면 대문을 닫아 빗장을 걸고 손님들이 타고 온 수레의 굴대빗장을 죄다 우물에 던져 넣어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진준투할(陳遵投轄)이란 고사성어가 생겼다.

‘주고’는 강숙(康叔)이 은(殷)나라 고도(故都)로 부임할 때 그 지역 백성들이 술을 너무 좋아하므로 무왕(武王)이 이 글을 지어 경계했다고 한다.

‘빈지초연’은 위(衛)나라 무공(武公)이란 임금이 술을 마신 뒤 허물을 뉘우치는 뜻을 읊은 시라고 한다. 범노공은 북송의 명재상인 노국공 범질을 가리킨다. 조카 범고가 자신을 천거해주기를 바라자 범질이 “너에게 술을 즐기지 말기를 경계하노니, 술은 미치게 만드는 약이요 좋은 음식이 아니다”는 내용의 시를 지어주었다.

향음주례는 한 고을 사람들이 모여 나이 순서에 따라 술을 마시던 것이고, 향사례는 활쏘기를 한 다음 술을 마시던 것인데 모두 예법에 따라 술을 마셨던 고대의 제도다.

 

잘 마시면 술만큼 좋은 음식도 없다. 그렇지만 아예 술 조절이 안 되는 남효온 같은 사람에게 술은 자신을 해치는 독이 된다. 김시습의 편지에서 남효온의 얼굴이 수척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남효온의 건강이 이미 나빠졌을 것이다. 남효온은 이때 술을 끊는다는 뜻을 담은 ‘지주부(止酒賦)’를 짓고 10년 동안 술을 끊었다가 다시 술을 마시고 풍병(風病)이 생기자 또다시 5년 동안 술을 끊었다. 그렇지만 이미 건강을 크게 해친 터라 성종 23년(1492)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술이 없는 세상은 너무 싱겁고 섭섭하다. 그렇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갈수록 술이 무서워지고 있다. 술을 강제로 못 마시게 할 수는 없으니, 술자리에서 술잔 돌리는 규칙인 주령(酒令)이라도 다시 정해야 하지 않을까.

/ 한경

 

 

 

 

술꾼 남효온(南孝溫)이 말하는 술의 미덕과 해악

 

사람의 음식은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아마도 지구상에 술이 없는 나라, 술을 마시지 않는 민족은 없으리라. 인간에게 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좋은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술이 없으면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얼마나 싱겁겠는가. 그렇지만 술만큼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음식이 또 있을까.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범죄가 술의 힘을 빌려 자행되고 있다. 우리 민족만큼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 민족도 드물다고 한다. 요즘은 세상살이에 경쟁이 심하고 살기가 힘들다 보니, 불안한 마음을 술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급기야 주폭(酒暴)이란 신조어까지 생기고 말았다. 술이 오히려 액운을 만났다 해야 하지 않을까.

조선전기의 기인으로 술을 매우 좋아했던 남효온은 술의 미덕과 해악을 낱낱이 들면서 자신이 술을 끊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대저 술의 좋은 점은 경서(經書)와 다른 옛 기록들에 상세히 실려 있습니다. 술이 적당하면 주인과 손님을 합할 수 있고 노인을 봉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술은 가까이 방 안에서 마셔도 좋고 멀리 천지(天地)간에도 두루 어그러지지 않으며 시름겨운 뱃속은 술을 마시면 풀리고 답답한 가슴은 술을 마시면 편안해져, 흐뭇한 기분으로 천지와 그 조화가 같고 만물과 그 조화가 통하여 옛 성현이 사우(師友)가 되고 천백 년이 한가한 세월이 됩니다. 그러나 술이 적당하지 않으면 봉두난발(蓬頭亂髮)로 머리를 풀어 헤치고서 늘 노래하고 어지럽게 춤추며, 주인과 손님이 절하는 엄숙한 자리에서 제멋대로 소리치고 주인과 손님이 읍양(揖讓)하는 공손한 때에 넘어지고 자빠져서 예의를 무너뜨리고 의리(義理)를 없애며 절도 없이 행동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까닭 없이 제 마음대로 눈을 부라리다가 혹 싸움이 일어나서 작게는 몸을 죽이고 중간으로는 집안을 망하게 하고 크게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술의 나쁜 점이 이와 같지만 주공(周公)이나 공자가 마시면 정신이 흐려지지 않고, 술의 좋은 점이 이와 같지만 진준(陳遵)이나 주의(周?)가 마시면 제 몸을 죽였으니, 그 득실(得失) 사이에는 터럭만한 차이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타고난 바탕이 중간 수준 이하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잡고 술을 절제하면서 마시지 않으면 좋은 술맛이 사람을 변하게 하여 심신이 더욱 위태롭고 더욱 혼란하다가 점점 술주정을 하는 데 이르면서도 자신이 주정하는 줄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따라서 선비로서 뜻이 견고하지 못한 사람은 응당 몸소 신칙(申飭)하고 안으로 반성하여 혼란의 뿌리를 막고 끊는 노력을 보통 사람보다 백배나 더해야만 술의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술을 경계하는 글로 《서경》에는 〈주고(酒誥)〉가 실려 있고, 《시경》에 〈빈지초연(賓之初筵)〉이 있으며, 양자운(揚子雲)이 이로써 주잠(酒箴)을 지었고 범노공(范魯公)이 이로써 시를 지었으니, 제가 어찌 조용히 술잔을 잡고서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의 자리에서 진퇴(進退)하고 읍양(揖讓)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마음이 약하고 덕이 적은 사람이라 술맛을 탐닉하다 절제하지 못하면, 마치 초파리가 깃털 하나를 짊어질 수 없는 것처럼 저 자신 마음이 산란해져서 술을 못 이기게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술을 몹시 좋아하여 중년에 구설(口舌)에 오른 적이 많았기에 제멋대로 주정뱅이 짓을 하여 세상에 영영 버림받은 사람이 되는 것을 제 분수로 여겼습니다. 몸은 외물(外物)에 끌려가고 마음은 육체에 부려져서 정신력은 예전에 비해 절로 줄었고 도덕은 처음 마음을 날로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점점 부덕(不德)한 사람이 되어 집안에서 마구 주정을 부려 어머님께 수치를 크게 끼치고 말았습니다.

맹자는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님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불효라 하였거늘, 하물며 술주정이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술이 깨고서 스스로 생각건대, 그 죄가 삼천 가지 중의 으뜸에 해당되니, 무슨 마음으로 다시 술을 들겠습니까. 이에 천지(天地)에 물어보고 신명(神明)께 절하고 제 마음에 맹세한 뒤에 어머님께 아뢰기를, “지금 이후로는 군부(君父)의 명이 아니면 감히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한 까닭은 술 취하는 게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제사지내고 제육(祭肉)을 받으면 음복(飮福)이 있고, 축수(祝壽)를 올리고 술잔을 돌려받으면 맛좋은 술이 뱃속을 적셔도 정신이 어지럽지 않는 경우는, 제가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저의 뜻이 대략 이와 같으니, 선생께서 비록 술을 마시라고 권하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미 말해놓고 식언(食言)할 수 없는 사정이 이와 같습니다. 제 말은 어길 수 있을지라도 제 마음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신명을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신명은 기만할 수 있을지라도 천지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무시한다면 어느 곳에 이 몸을 두겠습니까.

더구나 어머님께서 저를 기르며 늘 술을 줄이라고 하시다가 제 말을 듣고 얼굴에 기쁜 빛을 보이셨으니, 술을 끊겠다는 맹서를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아! 술 깬 굴원(屈原)와 술 취한 백륜(伯倫)이 본래 둘이 아니고, 맑은 백이(伯夷)와 너그러운 유하혜(柳下惠)는 결국 하나의 도입니다. 선생께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저를 억지로 허물하지 마시고 제가 술을 마셔도 되는지 안 되는지 그 가부(可否)를 한 글자로 분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夫酒之爲德, 五經子史詳矣. 得其中, 則可以合賓主, 可以養耆老, 行之?席而有文, 達之天地而不悖, 愁腸得酒而解, 鬱臆得酒而泰, 怡然與天地同其和, 萬物通其化, 古聖賢爲師友, 千百年爲閑中; 失其中則囚首散髮, 恒歌亂舞, 叫呼乎百拜之間, 顚?於相讓之際, 敗禮滅義, 發作無節, 甚者, 無故而憑心怒目, 爭鬪或起, 小而殞身, 中而亡家, 大而亡國者比比有之. 是故, 酒禍如此, 而周公孔子用之則不亂; 酒德如此, 而陳遵周?用之則殺身. 其得失之間, 不容一髮, 可不愼哉!

 

是故, 中下之人, 所執不堅, 而用之不節, 則甘味移人, 愈危愈亂, 漸至於?, 而不知其所以?者, 有理之必然. 爲士而志不堅者, 當躬飭內訟, 杜絶亂根, 百倍平人, 然後可以免此禍矣.

 

是故, 書載戒酒之誥, 詩有賓筵之篇, 揚子雲以之著箴, 范魯公以之作詩, 吾豈不欲從容?酒, 進退揖讓於鄕飮鄕射之間哉! 但恐心弱德薄, 甘其味而不節, 則散亂而不自勝, 有如醯鷄之不能負一羽耳.

 

僕自少酷好麴?, 中歲遭齒舌不少, 肆爲酒狂, 自分永棄. 身爲物役, 心爲形使, 精神自耗於?時, 道德日負於初心, 不意馴致不德, 肆?於家, 大貽慈母之羞.

孟子以博奕好飮酒不顧父母之養爲不孝, 況於?乎! 醒而自念, 則罪在三千之首, 何心復擧?酒乎? 於是, 質之天地, 參之六神, 誓之吾心, 告諸慈堂, 自今以後, 非君父命, 不敢飮. 所以如此者, 惡其醉也. 若夫祭神而受?則有飮福, 獻壽而有酬則甘醇美醴沃腸而不亂者, 吾何辭焉?

 

僕之志, 大略如此; 先生雖有勸酒之敎, 言之不可食也如此. 吾言可食, 吾心可欺乎?

吾心可欺, 鬼神可?乎? 鬼神可?, 天地可忽乎? 天地可忽, 則措諸身何處?

況慈母育子, 每敎省酒, 及聞此語, 喜動於色; 斷酒之誓, 庸可?乎?

 

嗚呼, 醒屈醉倫, 本非二致; 淸夷和惠, 竟是一道. 先生不可?以不飮之穆生爲累, 冀以一字示可否. ]

 

- 남효온(南孝溫) 〈동봉산인에게 답하는 편지(答東峯山人書)〉 《추강집(秋江集)》

 

 

 

 

술친구 김시습(金時習)을 보내며

 

세상 공간이 갈수록 좁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조금만 옆으로 움직여도 남과 부딪칠까 조심하는 표정들이다. 헐렁한 옷을 걸치고 그 옷만큼이나 엉성한 모습으로 넓은 세상을 한 눈에 쓸어 담았던 옛 선비들의 큰 인품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등 조선전기의 방외인(方外人)들은 노장풍(老莊風)의 멋을 풍기며 저자거리의 술집을 거침없이 누비고 다녔다. 홍유손(洪裕孫)은 제문에서 유(儒)ㆍ불(佛), 승(僧)ㆍ속(俗)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던 김시습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술친구를 마지막 보내는 절통한 심정을 잘 표현하였다. 그는 김시습이 거짓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싫어서 저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가서, 절친한 벗 남효온과 함께 이 혼탁한 세상을 굽어보며 손뼉을 치면서 껄껄 웃을 것이라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인편에 전해 듣고 모두들 크게 놀라고 슬퍼 콧등이 시큰하고 눈물이 흐르려 했으니, 슬픈 심정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달려가 곡하려 해도, 가는 길이 너무도 멀기에 이렇게 제문을 보내어 멀리서 조문을 드리며 평생의 감회를 말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 공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다섯 살에 이름이 크게 알려졌으니, 삼각산(三角山) 운운한 절구 한 수를 짓자 노사(老師) 숙유(宿儒)들이 탄복하였고 온 세상이 놀라 떠들썩하였으며, 이에 사람들은 “중니(仲尼)가 다시 태어났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은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머리를 깎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여, 공맹(孔孟)의 밝은 도에 통하는 한편 천축(天竺)의 현묘한 학설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무(空無)의 가르침에서 물아(物我)를 모두 잊고 일월(日月)과 같은 성인과 성정(性情)이 같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이에 문하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과(因果)와 화복(禍福)의 설을 물었으나, 공은 이윽고 그 설이 허탄함을 싫어하고 술에 의탁하여 화광동진(和光同塵)하였습니다.

 

이에 모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들 했지만, 그 내면에 온축된 참된 세계에 탄복하였으니, 많은 벼슬아치들이 공과 어깨를 나란히 벗하여 격식을 따지지 않고 흉허물 없이 지냈으나 공은 오연히 세상 사람들을 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의 인물은 공의 안중에 드는 이가 없었으니, 마치 구름이 걷힌 하늘처럼 아무도 인정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명산대천들이 공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기암괴석과 빼어난 하천(河川)들이 공의 품평에 의해 그 이름이 더욱 알려지곤 했습니다.

 

만년에는 추강(秋江)과 서로 뜻이 맞아 지극한 이치를 유감없이 담론하였으며, 그리하여 함께 월호(月湖)에서 소요하였는데 헤어지고 만남이 언제나 약속한 듯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추강이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공은 그만 둘도 없는 지기(知己)를 잃고 말았습니다. 슬프다! 오늘 공이 시해(尸解)1)하심은 어찌 황천(黃泉)으로 추강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건대, 구천(九天)에서 두 분이 어울려 맘껏 시를 창수(唱酬)하고 너울너울 춤도 추면서, 필시 이 티끌세상을 굽어보고 손뼉을 치며 껄껄 웃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평소 저자 거리에서 공과 함께 술을 마시던 술꾼들이 다들 곡하며 몹시 슬퍼하고 있습니다. 아! 다시는 공과 만나지 못하다니, 길이 유명(幽明)을 달리하시고 말았습니다.

 

생각하면, 공의 말씀은 그저 심상하여 전혀 색은행괴(索隱行怪)2)를 하지 않았으니, 비록 내면의 온축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들 평소의 깊은 수양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공은 비록 세상에 숨어 살았어도 그 마음은 실로 오묘했나니, 공을 알기로는 우리만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아아! 공이 이렇게 멀리 떠나신 것은 어쩌면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 사람들을 미워해서가 아닐는지요.

 

그러나 죽음이 오히려 삶보다 나으니, 만세(萬世)의 오랜 세월도 찰나에 불과합니다. 공이야 세상을 떠나고 세상에 머무는 데 조금인들 연연하겠습니까. 마치 밤과 낮이 바뀌는 것처럼 삶과 죽음을 인식하여 조용히 받아들이실 뿐입니다.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공의 본모습을 뉘라서 보리요.

 

몽롱한 육안(肉眼)을 비웃을 뿐입니다. 환술(幻術)을 부려 기행(奇行)을 일삼는 것은 진실로 우리 공이 미워하던 바입니다.

 

공이 떠남이야 사사로운 정이 없겠지만 사람들이 슬퍼함은 사사로운 정이 있습니다. 애오라지 세상의 습속을 벗어나지 못하여, 다시금 멀리서 제문을 보내 길이 사모하는 마음을 올립니다. 공의 정신은 허공에 두루 찼으니, 지금 이 작은 정성을 응감(應感)하소서! "

 

 

1) 시해(尸解) : 도가(道家)에서 수련이 깊은 사람이 육신을 남겨둔 채 진신(眞身)이 빠져 나가는 것으로, 여기서는 죽음을 미화한 말로 쓰였다.

2) 색은행괴(索隱行怪) : 《중용》에 나오는 말로 일반적으로 남들이 하지 않는 괴이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원문]

 

人傳公之蟬?, 各驚悼而惻惻. 幾酸淚之?然, 豈其情之有極! 欲奔馳而一臨, 路江南其綿邈. 故緘辭而遠?, 敍平生之幽懷.

 

嗟我公之生世, 造五歲而名恢. 詠三角之一絶, 使老儒而心灰. 擧世爲之譁駭, 云仲尼之復生. 公不樂夫爲賓, 倚西敎以爲形. 通鄒魯之昭道, 究五竺之玄說.

 

渾物我於無家, 齊性情於日月. 人依赴之益衆, 詰因果與禍福. 公又厭其誕妄, 托烏程而光塵.

 

不知者之謂狂, 然亦服其內眞. 軒冕靑紫之貴, 皆朋?之與肩. 相爾汝於形外, 然?鮮以傲然. 眼扶桑其盡空, ?雲掃乎紺天. 彼名山與大川, 惟公迹之編著. 奇巖怪石勝水, 待公賞而增色.

 

?秋江之相遇, 談至理之無隱. 共月湖而逍遙, 離合不遺其信. 杏雨先公而廢, 令伯牙而絶絃. 哀今日之尸解, ?欲追乎玄泉? 想遊?於九天, 恣唱酬而??. 必俯視乎塵?, 亦撫掌而大?. 素市飮之酒徒, 咸哀哭而痛切. ?不再夫邂逅, 憫幽明之永隔.

 

念公言之尋常, 不怪行而隱索. 雖不講其內蘊, 誰不知夫素?? 公雖隱而心妙, 知公者莫吾曹若. 嗚呼公之遠逝, 無乃惡夫人詐?

 

然如死之逾生, 縱萬世其尙乍. 公豈意於去住? 隨晝夜而從容. 恒不滅兮誰見?

 

笑肉眼之??. 現幻術而立奇, 誠我公之惡斯.

 

公之去兮無私, 人之悲兮有私. 聊未免夫世習, 却遙薦其永思. 公之神兮?虛空, 庶幾感微誠於此時.

 

 

- 홍유손(洪裕孫),〈김열경 시습에 대한 제문[祭金悅卿時習文]〉,《소총유고(篠叢遺稿)》

 

 

 

[해설]

소총(篠叢) 홍유손(1431~1529)이 지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에 대한 제문으로, 정든 술친구를 보내는 절절한 슬픔이 잘 나타나 있다.

삼각산 운운한 시는 아래와 같다.

 

삼각산 높은 봉우리 하늘을 꿰뚫었으니 三角高峰貫太靑

올라가면 북두성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겠네 登可接撫北斗星

산봉우리에 구름과 안개가 일 뿐만 아니라 非徒岳峀雲霧興

왕성의 번영을 만세까지 이어 가도록 하네 能使王都萬世榮

 

김시습이 천재라는 소문을 들은 당시의 임금 세종이 불러 삼각산이란 시제(詩題)를 주자 겨우 다섯 살이던 김시습이 이 시를 지으니, 세종이 탄복하고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벼슬하지 않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했던 김시습과 같이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도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27세 때 어머니의 당부로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기도 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홍유손(洪裕孫), 이총(李摠)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면서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19세 연상인 김시습과는 망년(忘年)의 벗으로 절친하였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지만 조선전기에는 대개 극성하던 불교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 있어 선비들이 불교, 노장, 유교의 경계선을 엄밀히 긋지 않았다.김시습과 남효온은 모두 생육신에 속한 선비들로 절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지켜 스스로 유자(儒者)임을 자처하였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노장과 불교 풍(風)의 방달불기(放達不羈), 자유분방 그 자체이다. 대개 상식이 통하지 않는, 포악한 세상에서 힘없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저항은 술과 객기,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표출되곤 하니, 김시습과 남효온의 삶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의 모습이었다. 또한 답답한 현실을 견디지 못한 천재의 일탈(逸脫)이었다.

 

작자는 김시습의 본색은 유자(儒者)였고 색은행괴(索隱行怪)하지 않았음을 강조했지만,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공의 본모습을 뉘라서 보리요.”라고 한 말은 영락없는 불교의 말이다.

 

평소 저자에서 김시습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술꾼들이 김시습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오늘날 술꾼들이 정든 술친구를 마지막 보내는 슬픔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한편 김시습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체취가 느껴진다.

 

세상을 조롱하듯 술 취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허름한 대폿집에 앉아 있는 김시습, 남효온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인으로 이름난 홍유손도 그 자리에 끼어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이 세상 북새통에 끼지 못할세라 아등바등 다투고 있는 오늘날, 저만큼 세상을 비켜서서 득실과 영욕을 덧없는 몽환(夢幻)처럼 보았던 이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