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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삶과 업적

경호... 2015. 7. 13. 00:10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

 

朴 敏 喆

 

The Life and Work of Sigmund Freud*
Min-Cheol Park, M.D.**

 

 

머 리 말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을 개괄하고자 한다. 약 120여 년 전부터 프로이트에 의해 시작한 정신분석은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가장 기본 분야 중의 하나이다. 무의식을 알게 하여 인간의 마음을 보다 깊고 보다 넓게 이해하게 한 정신분석은 다양한 형태의 정신치료적 중재에 대한 기본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에 영향 을 주고 있다.

 

프로이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정신분석을 창시한 일이며 그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Jones 1961)(Table1). 그리고 샌들러 등은 정신분석의 역사를 간략하게 4기로 나누고 있다(Sandler J 등 1972;Meissner 2005)(Table 2).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은 프로이트의 삶 그 자체가 업적이었기 때문에 분리하여 따로 기술하지 않고 함께 기술하며, 프로이트의 초기생애, 정신분석의 탄생, 마음의 이해, 정신분석 증례와 역사적 운동, 프로이트의 평가라는 소제목 하에 연대순으로 정리할 것이다. 여기에 기술되지 않은 그 세세한 부분은 참고문헌이나 프로이트의 다른 많은 참고문헌을 통해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본 논문은 한국 정신분석학회에서 개최한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 기념 심포지움에서 발표되었음(2006년 11월 24일, 서울대학교병원).

 

This paper was reported in the symposium for the 150th Anniversary of Sigmund Freud’s birth held by Korean Psychoanalytic Association at Nov. 2006.

이 논문은 2005년도 원광대학교 교비 지원에 의하여 수행됨.

This paper was supported by Wonkwang University in 2005. **원광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

Department of Neuropsychiatry, School of Medicine, Wonkwang University, Iksan, Korea

 

 

Table 1. Major works of S. Fre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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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Studies on hysteria
1900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1901 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
1905 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
1910 Five lectures on psychoanalysis
1913 Totem and taboo
1914 on the history of the psychoanalytic movement
1917 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s
1920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1923 The ego and the id
1925 An autobiographical study
1926 Inhibitions, symptoms, and anxiety
1927 The future of an illusion
1930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
1933 New 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s
1939 Moses and monoth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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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2. Historical development of psycho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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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출생 - 1897, affect-trauma theory, <손상이론 시기>, 의학 전공하고 신경학자로서 중추신경계의 실어증, 마비, 뉴론 이론 연구, 코카인 연구하다가 최면, 히스테리 연구. 히스테리 원인은 성적 유혹(유혹설), 욕망이 성적 환상으로 표현(환상설)
제2기 1897-1923, Id psychology, topographical theory, <지형학설 시기>, 고유 정신분석 발달 시기, 역동적 무의식과 정신결정론, 본능이론, 꿈해석, 무의식적 소망, 성욕, 외적세계에서 내면세계로, 증상은 환자의 소망, 욕망과 관련된다. 자유연상과 해석, 저항과 전이현상 등의 정신치료적 가치를 발견, 활용
제3기 1923-1939 사망까지, ego psychology, structural theory,<구조론 시기>, 자아와 불안 발달, 불안신호 이론, 본능이론 수정 죽음 본능 상정, 자아심리학 구축, 자아의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기능과 장치, 정신분석 치료 목표 본능, 욕구→갈등(본능, 초자아, 자아내부, 현실)→불안→방어기제(타협)→증상
제4기 1939-현재, 프로이트 이후 발전, 체계화, 끝없는 이론적 수정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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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초기 생애

 

1. 프로이트의 탄생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지금은 체코)의 모라비아(Moravia)에 있는 작은 마을 프라이버그(Freiberg)에서 7남매 중 장자로 태어났다. 모직물 상인인 아버지 야곱 프로이트(Jacob Freud)는 40세, 모친은 20살 어린 그의 두 번째 아내 아말리아(Amalia)로 모두 유대인이었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지기스문트 프로이트(Sigismund Freud)였으나 22세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로 줄여 개명하였다.‘지기(Sigi)’는 어린 시절 친척들이 부르던 애칭이다. 부친에겐 세상을 떠난 전처 아들이 둘 있었는데, 배다른 큰형 에마누엘(Emmanuel)의 나이는 프로이트의 엄마보다 많았고, 작은형 필립(Philip)은 엄마와 동갑이었다. 어린 시절 종종 아버지가 할아버지처럼 여겨졌고, 이복 둘째형이 엄마와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특히 에마누엘에게는 조카 존(John)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한 살 위로 어렸을 때 가장 친한 소꿉친구였다. 어려서부터 프로이트는 인간들 사이의 묘하고 복잡한 관계에 대해 강한 의문과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지기는 원래 8남매이었으나 둘째 Julius는 8개월 만에 죽고, 그 밑으로 5명의 여동생 Anna, Rosa, Marie, Adolphine, Pauline이 있고 막내는 남동생 Alexander이다. 지기는 어린 시절 호기심이 많았고, 대담함과 끈기가 있었으며 정복자와 모험가의 기질이 있었다.

 

1958년 프로이트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독일의 라이프치히(Leipzig)로 이사했는데, 이사하는 도중 기차 안에서 본 가스 등의 불빛이 사람의 영혼을 연상시켜 공포증을 일으켰다. 이 공포증은 나중에 자기분석을 통하여 치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60년 4살 때 공황으로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자 비엔나의 가난한 유대인 지역 Leopoldstradt로 이주했다. 그 후 프로이트는 비엔나에서 1938년, 82살까지 살았다

(이무석 2003;Freud 1925;Gabbard 2005;Gay 1988;Isbister 1985;Schur 1972).

 

2. 초기 생애와 교육

 

비엔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아주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아주 총명하고 공부도 잘 했기 때문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부모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인생의 모든 희망을 그에게 걸고 살았다. 그래서 특별대우를 받았는데, 김나지움에 입학한 후부터는 집에 있던 두 개의 방 중 하나를 그만의 공부방으로 제공해 주었고, 촛불 대신 기름램프를 제공받았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높은 기대는 훗날 그의 정서에 양가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비난에 꺾이지 않고 자기 관점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유지하는 근원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뭔가 특별한 힘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적 초조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 결과 9살에 김나지움(중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8년 중 6년간 수석을 했다. 초중고 시절 책벌레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괴테, 셰익스피어, 졸라, 세르반테스 등의 문학 작품과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고 수재로써 이름이 나 있었다.또한 졸업 당시 이미 수개 국어로 셰익스피어 등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태였다. 잠시 16세 때 한 살 어린 기젤과 짝사랑했다

(이무석 2003;Freud 1925;Gay 1988; Isbister 1985;Schur 1972).

 

3. 대학시절

 

성경 이야기에 몰두한 것이 그의 진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의사라는 직업을 선호한 적은 없었으며, 후에 유명한 정치가가 된 학교 친구의 영향으로 법을 공부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하고도 싶었다 한다. 당시 다윈의 <진화론>이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세계에 대한 이해를 크게 증진시킬 수 있다는 기대였기 때문이다.

김나지움 졸업 시험 직전, 칼 부릴 교수의 괴테의 <자연론>에 관한 강연을 듣고 1873년(17세) 가을에 자연계열 중 비엔나 대학 의학부에 들어갔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으로 비엔나 의과대학은 5년제로써 유럽에서 가장 좋은 의과대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여러 과목의 강의를 듣고, 철학, 법학, 문학 등 인
문·사회 분야 서적을 접했다. 대학 입학 후 반유대주의적 편견을 발견하고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유대인이란 이유로 국민이 아니고 열등하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고, 당시 회자하기 시작한 인종 문제 때문에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국민권을 갖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자리가 틀림없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태인으로 출세가 비교적 무난한 자연과학, 의과대학을 선택하게 했다는 설명도 있다.

 

차츰 생물학, 생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해부학 교수의 권유로 장학금을 받고 잠시 북부 이태리 Trieste에 가서 뱀장어 생식선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
1876년 당시 유명한 생리학자인 브뤼케 Brucke 생리학 연구소에 들어가 안정과 만족감을 느끼며 그곳에서 6년간 일했는데, 프로이트의 자연과학적 태도는 상당 부분 브뤼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대학 3학년 때 처음으로 논문을 썼고, 주로 중추신경계 해부에 대해 연구했다. 1878년 21세 때 칠성장어 유충의 중추신경계통에 대한 조직학적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이 때 Vienna Academy에서 브로이어를 만났다

(이무석 2003;Freud 1925;Gay 1988;Isbister 1985; Schur 1972).

 

4. 정신분석 서막

 

‘연구소 생활을 포함하여 3년 늦게, 8년 만에 의학부 졸업시험을 통과하여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에도 15개월 동 안 브뤼케의 생리학 연구소에 있었고 뇌의 조직학적 연구, 실어증, 뇌성마비 연구, 코카인의 생리작용 등을 연구하면서 연구원으로서 생활을 만족했다. 대학시절 처음 여러 가지를 알고자 했던 시기와는 대조적으로 이때부터는 한 가지 주제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이런 연구 성향은 내가 편협하다는 원인이 되었다’(Freud 1925).

 

그러나 1882년 베르나이스를 만난 후, 누구보다 존경했던 스승의 강권으로, 대가족 집안을 부양하기엔 재정 형편이 너무 열악하여 행복했던 연구원 생활을 포기하고 임상의사의 길을 택해 비엔나 종합병원 근무를 시작했다. 임상조수로 시작하여 외과, 내과 일반의사로 승급하고 여러 과에서 일했다. 후에 승진할 때 도와준 내과 Nothnagel 교수도 만났다. 또 한 학생 때부터 감명을 받았던 마이너트(The Theodore Meynert’s Psychiatric Clinic)와 반년을 함께 일했다(1882- 1883). 그러나 정신질환의 원인 설명에 있어서 정신병리학의 한계를 느꼈다.

 

신경학은 비교적 좋아하고 능통했는데, 1884년 1월 신경과로 옮기고 7월 수석 의사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특히 신 경병리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내과의 다른 분야와 특별히 구분되지도 않을 때였다. 신경질환에 에르프(W. Erb)의 전기 요법을 시도하기도 했고, 신경계통의 기질성 질환 보고, 신경 단면의 착색 방법, 시체 부검을 통한 진단으로 유명해지기도 해서 찾아온 미국 의사에게 한 때 짧은 영어로 가르 치기도 했다. 또한 MerK 회사 연구비로 코카인의 생리작용을 연구했다. 진통 효과를 발견한 뒤, 2년 동안 만나지 못한 약혼녀 베르나이스를 만나기 위해 잠시 중단하고, 마취 효과는 친구 안과의사 Konigstein에게 연구를 계속할 것을 권했는데, 휴가에서 돌아와 보니 역시 코카인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는 다른 친구 Carl Koller가 코카인 마취 효과를 연구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약혼녀 때문에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회고한다. 프로이트는 어 떠한 발견을 해서라도 유명해지고 싶었다

(이무석 2003; Freud 1925;Gabbard 2005;Gay 1988;Isbister 1985; Schur 1972).

 

1) 조셉 브로이어(Josef Breuer, 1842-1925) 만남

 

14년 연상의 유대인 내과의사 브로이어는 프로이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정신분석을 탄생하도록 도움 준 인물이다. 1878년 학생시절 논문 발표장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고 어려운 상황에 빠질 때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브로이어는 1880년 백만장자의 딸,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21세 베르타 파펜하임(Bertha Pappenheim), 일명를 치료하기 시작하여 1882년 6월에 중단하였는데, 그해 11월 프로이트에게 처음으로 얘기해 주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이 증례에 대해 들으면서 히스테리 증상의 원인과 의미를 깊이 통찰할 수 있었다.

 

<안나 O>는 늑막염을 앓고 계신 아버지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면서 발병했는데, 두통, 시각장애, 마비, 환각, 언어장애 등이 있었고 서로 다른 의식상태가 병존했다. 시커먼 뱀이 아버지에게 다가오는 꿈을 꾸고 오른쪽 팔이 마비되었으며 공수증으로 물을 마시지 못하고 과일로 물을 공급했다. 심한 언어장애로 말을 못했고 기도할 때 영어로는 가능했다.

 

브로이어는 환자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정동적인 환상을 말로 표현하면 몽롱한 의식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창안하여, 환자를 최면상태에 빠지게 하고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게 했는데, 그러면 증상이 회복되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증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몰랐고, 증상과 어떤 인상을 연결하지도 못했다. 반면 최면하에서는 가능했다. 환자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통해 해방되어 이를 담화치료(talking cure) 라 했고, 브로이어는 자신의 불안과 증상을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제거한다고 해서 <감정정화요법 cathartic cure>이라고 불렀다.

 

 

2) 쟝 샤르코(JM Charcot, 1825-1893)와의 만남

 

1885년 4월 자신의 모든 논문 파기하고,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이민갈 생각을 잠시 하는데, 일대 전환기가 찾아왔다. 브뤼케 교수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고 1885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당시 신경병리학의 성지라고 알려진 파리 살페트리에르(Salpetri) 병원에서 내과의사 쟝 샤르코의 수련생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수많은 들러리 의사 중의 하나였지만, 샤르코 강의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을 자원하면서 가까워졌다.

프로이트는 최면과 암시에 의해 히스테리 증상을 유발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고, 남자도 히스테리가 있다는 샤르코의 강의와 임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샤르코의 히스테리 환자들이 최면상태에서 어린 시절 성폭행과 근친 상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고, 최면에서 깨어나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샤르코와의 만남을 통해 신경학자에서 정신병리학자로 전환하면서 정신분석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프로이트는 두 가지 즉‘최면에 의한 해리현상과 환자의 해리현상에 공통점이 있다’와 ‘히스테리 병인은 과거 중요한 심리적 충격, 성적 문제가 있다’ 를 가정했다.

 

1886년 부활절에 신경병리 의사로 개업했으나 새내기 의사였기 때문에 환자가 없었다. 귀국 후 의사회의 요청으로 히스테리아에 대한 샤르코의 경험을 보고하면서 ‘최면과 암시에 의해 히스테리 증상을 유발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고, 남자도 히스테리가 있다’고 발표하여 비엔나 대학 의학부 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또한 비엔나 종합병원은 신경병리학 강사 자격을 박탈하고, 뇌해부학 실험실 사용조차 금했다. 그 후 프로이트는 1902년 비엔나 의과대학 교수로 임용되기 직전까지 무려 15년 동안 사회적·학문적으로 심각 한 고립 상태에 처한다.

 

 

3) 마르타 베르나이스(Martha Bernays, 1861-1951)와 결혼

 

1882년 4월에 브뤼케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훗날 아내가 될 유대계 지식인의 딸 베르나이스(Bernays)를 만났다. 베르나이스는 덕망 높은 랍비였던 할아버지와 괴테와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큰 삼촌 미하엘 교수, 카타르시스 문제를 연구하여 유명한 작은 삼촌 야곱 교수, 그리고 인생을 통찰하는 데 깊은 관심이 있었던 아버지 밑에서 정신적으로 큰 혜택을 누리며 함부르크에서 자랐다. 프로이트는 그 해 6월에 약혼했으나 경제적 사정으로 결혼까지는 4년 3개월이 걸렸고 그 간 1,500통 이상의 편지를 보냈다. 명문가의 작고 소중한 공주님을 얻기 위해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출신이었던 프로이트는 많은 노력을 하였다.

1886년 9월 13일 결혼했고, 결혼 후 9년에 걸쳐 세 딸과 세 아들, 6명의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그녀는 평범한 교수 의사 아내로 그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녀는 1887년 첫째 딸 Mathilde (존경하는 브로이어 부인 이름을 따라)를 낳고 이어 1889년 에 아들 Jean-Martin(샤르코의 이름), 1891년 Olivier(크 롬웰의 이름), 1892년 Ernst(브뤼케의 이름)를 낳은 후, 1893 년에는 둘째 딸 Sophie와 1895년 막내 Anna를 낳아 길렀 다. 주로 가사일과 애들의 교육에 충실했고 남편의 일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으며, 1951년 런던에서 사망했다(이무석 2003;Freud 1925;Gay 1988;Isbister 1985;Schur 1972).

 

 

정신분석의 탄생

 

1. 플리스(Wilhelm Fliess, 1858-1928)와 만남

 

1886년 히스테리아 강연으로 고립된 그에게 정신적 위로를 준 사람은 베를린의 이비인후과 의사 플리스였다. 플리스는 프로이트보다 2살 아래로 당시 유일한 친구이자 학문적 동료였다. 일반 생물학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좀 특이한 이론을 주창했지만, 누구보다 프로이트를 잘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많은 초고와 더불어 비교적 자유스럽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자신의 정신분석 관점에 대해 이해와 조언, 격려해 주던 플리스와 14년간 주고받은 편지(1887~1902) 속에서, 그는 사적인 고민을 포 함해 자신에 대한 솔직하고 철저한 자기분석을 통해 정신분석을 탄생시킨다. 이 시기는 프로이트가 1896년 ‘정신분석’을 명명하고 학문적 절정을 이루는 시기로 정신분석의 탄생과정에서 일어나는 환희와 고통을 편지로 주고받았다.

이 편지들은 나중에 <정신분석의 탄생>으로 출간되었다. 그 렇지만 14년의 이런 오랜 친밀관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사람은 1901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하여 표절 문제 때문에 다투고 1904년 결별한다(Freud 1954).

 

그가 정신분석이라는 치료방법을 세상에 내놓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았다.

 

1887년 히스테리성 마비 증상을 없애기 위해 최면 암시요법을 치료에 적용하고, 이후 1896년 <꿈의 해석>이 거의 완성될 때까지 약 10년간 부분적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다. 이 치료방법을 통해 마음의 갈등이 마비 같은 증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절감하게 되고, 이것이 신경 손상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히게 된다.

 

1889년 여름에는 최면치료를 완성시키려고 프랑스 낸시의 베른하임(Bernheim)과 레보(Liebault)를 몇 주일 방문한다. 낸시학교(Nancy school)에서 최면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 즉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된다. 그리고 베른하임의 환자가 최면에서 깨어나 최면 상태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을 보고, 최면보다 더 편안한 자세에서 자유스럽게 말하는 자유연상 기법을 더욱 확고히 한다.

 

1891년 Berggasse 19의 공동주택으로 이사했다. 그 곳은 80년이 지난 1971년에 프로이트 비엔나 박물관(The Freud Museum Vienna)으로 바뀌었다.

 

 

2. 브로이어 J Breuer와 히스테리 공동연구(1893-1895년)

 

프로이트는 <안나 O> 단 한 번의 증례에서 발견한 사실을 일반화할 수 없어서, 다른 히스테리 환자들에게도 적용하여 보고 1895년 <히스테리아에 관한 연구 Study on Hysteria> 를 브로이어와 공동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정동을 억누르고 막아 증상이 발생하게 하는 역동적인 요소와 증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다르게 사용되었을 일정한 크기의 에너지 전환 (conversion)을 생각하고 경제적 요소를 도입한다. 이는 정신분석 최초 논문이고, 이를 통해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된다.

 

1893년 프로이트는 여러 히스테리 사례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신경증이 단순한 정서적 흥분 때문이 아니라, 성적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임을 발견한다. 1895년 10월 신경증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확신하고 비엔나 의사회에서 성적 유혹이론을 발표한다. 프로이트가 신경증의 성(性) 원인론을 주장하고 세인과 학자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자 브로이어는 자기주장에 회의를 느끼고 프로이트와 단절한다.

환자들이 말하는 성적 상처가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증명할 길이 없고 또 실제로 섹스 유혹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어른들은 파렴치한이 되어야 했다. 1897년 프로이트는 성적 유혹이 허구라 생각하고 성적 환상으로 그 이론을 바꾼다. 이를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이 나타난다. 유혹에서 환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분명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성적 유혹이 허구라고 깨달았다고 해서 성적 유혹을 전적으로 배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Fliss에게 쓴 편지에서 환자 진료와 자기분석을 통해 그러한 오류를 시인했다(이무석 2003;Freud 1925, 1954;Gay 1988;Isbister 1985; Schur 1972).

 

마음의 해석

 

점차 환자를 치료하면서 최면에서 자유연상으로 대치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숨기지 않고 자유스럽게 얘기하게 하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런 방식을 자유연상에 의한 정신분석이라고 명명했다. 1900년 이후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치료에서 얻은 지견을 꿈, 실수, 농담 등의 정상 심리 등을 연구하여 정신분석이라는 심층심리학을 확립하였다.

 

1895년 8월 프랑스 벨레뷰성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 <이르마> 꿈을 꾼다. 이 꿈은 정신분석의 탄생을 알리는 최초의 꿈이었다고 말한다. 꿈의 해석(1900)에 잘 소개되어 있는데, 이 꿈은 사실 악몽이었지만 의사와 여자 환자사이의 관계, 남녀 간의 관계, 그리고 정신분석 운동 초기의 여성관을 밝혀주는 열쇠가 된다.

꿈속의 인물 이르마와 동일인 이라고 생각되는 엠마 엑크슈타인(1865~1924)은 프로이트와 플리스의 치료를 받을 당시 30세의 지적 여성이었다. 플리스는 1895년 2월 프로이트의 소개로 엠마의 코를 수술하고 잘못을 범했지만 묵인된다.

 

1896년 용어 정신분석를 처음 소개했다. 프로이트는 분석(analysis)라는 용어를 1894년 <방어 신경정신병>이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썼다. 그러나 ‘정신분석 psychoanalyse’ 라는 표현은 1896년에 불어로 발표한 <유전과 신경증의 병인>에서, 독일어로는 같은 해에 <방어 신경정신병에 대한 부언>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Freud 1925;Gay 1988;Isbister 1985;Schur 1972).

 

 

1. 자기 분석

 

프로이트의 많은 논문과 증례가 자신과 관계되는 것이었지만 자기분석에 관한 이론적인 논문을 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의 자기분석과 함께 태어났다.

 

1896년 10월에 팔순 노인 아버지 야곱 프로이트 사망으로 자신의 뿌리가 뽑혀 나간 듯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나흘간 반복된 자신의 꿈을 집요하게 분석했는데, 꿈을 분석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보편적이고 획기적인 방법을 발견한다. 그 후 4년간에 걸친 자기 분석과 꿈 해석에서 자유연상기법을 이용하였다.

 

Fliess에게 쓴 편지를 보면,‘자기분석은 현실적으로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그것을 완성한다면 아마 가장 중요한 가치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나의 가장 중요한 환자는 나 자신이다’(Freud 1897)라고 쓰고 있다.

프로이트는 자기분석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자기 분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것의 위험성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자기분석의 필요 성은 아주 분명하다. 그것은 어린 시절 모든 사건을 가로질러 나를 인도하는 일련의 꿈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정신 분석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분석해야 한다”(Freud 1937). 반면“진정한 스스로의 자기분석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전이가 일어나지 않고 자기 자신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Freud 1897)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자기분석 과정에서 플리스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남자의 대상선택 특별한 유형(S Freud 1910)>이지만, 처음 발견은 자기 분석을 통해서이다. 1897년 10월 플리스에게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 경우에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아버지에 대한 질투 감정을 발견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모든 어린 아이들의 공통된 감정이고, 모든 사람은 언젠가 오이디푸스의 싹을 품었고, 상상 속에서 오이디푸스였다’(Freud 1897).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원인을 성적 유혹(유혹설)에서 찾으려다 차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도입하면서 성적 환상 (환상설)을 주장한다.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의 성생활에 호기심을 보이고 성적 자극을 유혹적으로 감지하며, 이것이 미숙한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환상을 사실로 착각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써 실제적 현실 외에도 심리 내적인 현실이 존재함을 받아들이게 되고 환상의 힘과 기능에 대한 연구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3. 꿈의 해석(Dream Interpretation, 1900)

 

이 책에서 정신분석 이론의 토대를 이루는 무의식, 지형학적 모델, 1차 과정과 2차 과정, 소망, 억압, 유아 성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이 언급된다.

 

1897년 자신의 꿈 분석을 통해 꿈이 ‘무의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꿈이 왜 생기며 어떻게 작용하는가 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다. 꿈은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이고, 꿈은 변형된 소망 충족(wish fulfillment)이며 신경증의 증상과 마찬가지로 정신 내부의 욕망과 이를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 사이의 갈등이 타협한 결과로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으로 자신이 이룩한 인간 정신에 관한 획기적인 탐구 업적이 인류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고, 학자들도 자신을 주시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당대 의사 집단은 이 책에 대해 또다시 무시와 비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자신이 받은 수모와 냉대를 평생 동안 잊지 못한 그는 암 수술을 앞두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쓴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서“나는 결코 나 자신을 의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신경생리학에 기초한 의학과 정신 분석학은 매우 다른 것이다.”라고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Freud 1925).

 

1905년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에서 아이들도 성욕을 가지 고 있다 하여 당시 매우 부도덕한 주장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유아기 성욕(infantile sexuality)을 발표했다.

성욕이란 인간의 타고난 본능에서 유리하는 것으로 성적 욕구의 기저에 본능적 욕구가 깔려 있다는 처음 소개되는 본능이론 (instinct theory)과 유아 성욕은 각 단계별로 발달하는데 이때 과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퇴행과 고착이 일어난다 는 정신성발달 이론을 소개했다.

 

4. 투병과 정신분석 이론의 변화

 

프로이트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두 번째로 찾아온 하나의 전기는 1차 세계 대전이었다. 그 전쟁은 프로이트의 생애와 학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독일군을 상대로 한 임상 연구는 정신질환의 다양성과 미묘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반유태주의 사상이 고조됨에 따라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암에 걸려 나머지 인생을 병마와 싸워야 했다.

 

1923년 4월 구강(턱)암 진단 받고 그해 10월과 11월 두 차례 수술이후, 총 33회의 수술을 받으며 신체와 정신 양면으로 고통을 겪는다. 매일 음식 섭취에 불편을 겪었으며, 수시로 엄습하는 격렬한 통증을 견뎌야 했다. 죽음의 불안과 유혹에 시달리는 상황을 그는 무려 16년 동안이나 버텼다. 이러는 와중에도 1923년 <자아와 이드>에서 종전 이론 크게 수정하여 정신구조를 자아, 초자아, 이드로 나누고 자아이상 개념을 말했다.

그리고 정신분석은 자아가 이드를 점차적으로 정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작업도구이다 라고 정의 내렸다(Freud 1923).

 

1933년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에서 정신분석의 치료 목표를 기술했다. Freud는 짧게 이드이었던 곳이 자아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표현하였다. 덧붙여 이것은 바다를 말려 간척사업을 하는 것 같은 문화 작업이다(Freud 1933)라고 하였다.

 

1937년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에서 분석의 한계에 대하여 논의했다. ‘분석을 완전히 하고 나면 모든 욕심이 없어지고 갈등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라고 하면서, Freud는 분석을 산파에 비겨 얘기하곤 하였 다.‘산파가 아기를 낳거나 아기가 무슨 성이 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분석도 영혼을 잉태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변화하고 변화하고자 하는 사람은 환자 자신이다’ (Freud 1937).

 

1933년 프로이트는 히틀러 집권이후 베를린에서 유태인 프로이트의 책이 모두 불태워지는 것을 보았고, 1938년 나치군이 오스트리아에 침입해 국제 정신분석 출판소를 몰수하며 압박을 가하고, 비밀 경찰이 안나를 조사하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프로이트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외교 노력으로 특히 Bonaparte, Bullitt, Roosevelt의 도움을 받고, 그해 6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1939년 9월 23일 런던에서 그의 83세로 본인의 요청에 의해 morphine 주사를 맞고 천재적인 삶을 마감한다.

 

 

정신분석 증례와 역사

 

1. 프로이트의 증례

 

프로이트의 주요 증례는 Table 3과 같다(이무석 2003; Gay 1988;Isbister 1985).

 

Table 3. S Freud’s c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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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Katharina, Emmy von N, Frau Cacilie M
1892년 Elizabeth von R
1895년 Irma(Emma Eckstein 1865-1924)
1905년 Dora(Ida Bauer 1882-1945)
1909년 Little Hans(Herbert Graf 1903-1973)
1909년 Rat Man(Ernst Lanzer 1878-1914)
1911년 Paul Schreber(1842-1911)
1918년 Wolf Man(Sergei Pankejeff 1887-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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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례 카타리나 Katharina>는 프로이트가 잘 가는 산장의 여종업원으로 1895년 증례이다. 유년기에 당한 아버지의 성희롱 때문에 숨이 가쁜 증세가 생겼다. 단 한 번의 면담으로 증세가 성적 흥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 었다.

 

<증례 체칠리아 마티아스 Cacilie>는 1895년 남편에게 들은 욕설이 치통으로 표현된 증례로 증상이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부부 싸움을 하는 중 남편이 부인에게 냉정하게 비난하면서 모욕적인 말을 했다. 그 순간 부인은 비명을 지르 며 한쪽 뺨을 손으로 감싸야 했다. 모욕적인 말이 폭행으로 받아졌고 이 상징적 폭행을 치통이라는 신체증상으로 바꾼 것이다.

 

<증례 Elizabeth von Reihart>는 1892년 처음으로 충분한 기간, 자유연상을 이용해서 분석한 최초의 환자이다. 최면술을 적용하기 어려워, 의식이 명료한 상태로 장의자에 눕히고 눈을 감게 한 후 암시요법을 써서 충격적인 경험을 기억하도록 했다. 이 때 환자는 무엇을 기억하라고 재촉하고 다그쳐 묻고 하는 것이 자기의 생각을 이어가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불평했다. 책임이 강하고 적극적인 처녀는 언니 남편을 사랑한 죄책감 때문에 하반신 마비를 일으켰다.

 

<증례 Dora>는 대부호 집안 출신의 18세 처녀 히스테리 증례로 전이의 중요성을 강조한 증례이다. 1900년 10월에 분석을 시작하여 3개월 치료했는데, 기간이 짧고 전이를 다루지 못해 실패했다. 증례는 1901년 거의 완성했지만 발표하지 않다가 익명성을 지키기 위해 1905년에 발표했다. 이 웃집 아저씨에 대한 성적 욕구가 문제였는데 사실은 아버지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구를 이웃집 아저씨에게 옮겨 놓고, 오이디푸스 욕구가 히스테리의 원인임을 보여준다. 그 원인이 복합적이어서 일회적인 작업으로서는 효력을 낼 수 없고, 증상 하나 하나를 밝혀 나가는 방법이 복합적인 구조의 신경증 치료에 맞지 않음을 설명한다.

 

<다섯 살 꼬마 한스 Little Hans> 1909년 프로이트는 한스를 직접 치료하지 않고 수요모임 회원이기도 했던 아버지 막스 그라프의 얘길 듣고 거세불안을 확인한 흥미로운 증례이다. 5세 한스의 말 공포증은 거세공포증이다. 어머니 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욕망이 생겨서 라이벌 아버지를 제거 하고 싶었다. 말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도 쓰러뜨 릴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런 욕망이 아버지의 보복을 불러올 것이라는 공포를 일으켰던 것이다.

 

<쥐인간 Rat Man>은 1907년 10월 시작하여 11개월 동안 치료한 성공 증례이다. 깔끔하고 빈틈없는 똑똑한 29세 변호사였다. 쥐가 아버지와 연인의 항문을 통해서 내장으로 들어간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쥐 사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강박 관념의 무의식에는 아버지와 자신의 여인을 죽이고 싶은 소망이 숨어 있었다.

 

<편집증 환자 슈레버 Schreber> 이 증례는 프로이트가 직접 치료한 증례가 아니고, 1910년 슈레버 판사가 자신의 정신병 경험에 대해 저술한 책 <어떤 정신장애자의 회상> 을 읽고 쓴 것이다. 슈레버는 담당의사가 자신을 해치려한다는 피해망상이 심했다. 그런데 이 피해망상이 사실은 담 당의사에 대한 동성애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망상 밑에는 동성애 욕구가 숨어 있다는 이론을 내놓고 있다.

 

<늑대사나이 Wolfman>는 1918년 몇 차례 예비면담을 한 뒤 1주일에 6회씩 정신분석을 했던 젊고 돈 많은 러시아 청년으로 어릴 때 꾼 늑대의 꿈을 분석하다가 유년기 거세 공포증을 발견한 증례이다. 늑대사나이 이름은 늑대 꿈에서 따온 것이다.

 

2. 정신분석 운동

 

프로이트는 1902년 10월 정신분석에 공명하는 사람(슈 테켈, 아들러, 융 등)들과 함께 정신분석 수요모임 Psychological Wednesday Society을 결성한다. 1903년 첫 제자들(페더른, 슈테켈 등)이 생기고, 1904년 블로일러와, 1906 년에는 스위스 정신병원 의사 융과 서신 왕래를 한다. 1907 년 스위스에서 블로일러의 제자 아이팅곤, 융, 아브라함이 방문하고, 부다페스트에서 페렌치가 방문하여 그의 이론에 동조를 표한다. 그 후부터 그의 정신분석 이론은 유럽 전역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1908년 4월 비엔나 정신분석협회(Vienna Psychoanalytical Society)가 설립되고, 부활절을 맞이하여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아들러, 융과 같은 유럽 정신분석가들이 잘츠부르크에 모여 첫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열고, 기관지 <정신분석 및 정신병리 연구 연보(1908~1914)>를 발행하기로 한 다. 학회가 결성된 후부터, 정신분석 이론은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시대적 주목을 받는다. 프로이트의 고립 생활은 청산되고, 그는 국제적인 유명 인사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정신분석을 학문으로 정착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아들러와 융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

 

1909년 9월 미국 매사추세츠 우스터 클라크 대학의 총장이며 심리학자인 스탠리 홀 Stanley Hall의 초청으로 융, 페렌치와 함께 미국에 가서 다섯 차례의 <정신분석에 대하여> 강의하면서 국제적으로 더욱 알려진다.

 

1910년 뉘른베르크에서 <국제정신분석학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여 초대 의장에 융이 된다. 프로이트는 외국인이며 비유대인인 융을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정신분석의 타당성을 검증해 줄 가장 탁월한 인물로 여겼고, 자신이 아닌 융을 국제정신분석학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여 자신을 대변하는 후계자가 되어 정신분석을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최신 학문으로 정착시켜 주길 바랐다. 그런데 이 열망은 뜻밖의 실망과 상처로 돌아온다.

 

1911년 아들러가 탈퇴하고, 1912년 정신분석을 다른 인문사회과학에 응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잡지 <이마고>를 창간한다. 1913년 융과 결별하고 학회에 계속 이탈자가 생기자 정신분석의 장래를 위해 프로이트를 지키자는 핵심 멤버 즉, 페렌치(Sandor Ferenczi), 아브라함(Karl Abraham), 존스(H Ernest Jones), 아이팅곤(Max Eitingon), 작스 (Hanns Sachs), 랑크(Otto Rank)로 구성된 위원회(inner circle), 일명 반지모임을 결성한다. 이 위원회는 1919년 아이팅곤, 랑크가 결별하고, 1920년 안나가 반지를 받지만 1927 년 와해된다. 프로이트는 훗날 관대하고 충실한 후원에 감사하는 의미로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또 살로메에게 이 반지를 선물하였다.

 

1914년 이탈자가 생기자 프로이트는 장차의 학회를 위해 <정신분석 운동 역사> 발표한다. 1922년 막내딸 안나가 정 신분석학회 회원이 되어 프로이트의 비서, 대변인 역할을 한다.

 

1920년 노년의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이례적으로 과학적 검증영역을 벗어나는 죽음 본능 death instinct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관점만으로는 복잡한 인간 현실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사회학, 인류학, 교육학, 예술, 문학, 철학 등의 다양한 인접 학문들에 정신분석 지식이 결합되어 활용되기를 기대했다. 정신분석학의 거대한 힘은 인문·사회과학 이론과 접맥될 때 비로소 드러날 것이라는 그의 예견은, 19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인문사회학을 비롯한 다양한 제 학문 분야와 문화 전반에 걸쳐 검증되고 있다.

 

브로이어와는 히스테리의 원인이 어린 시절 성적 유혹에 기인한다는 이론이 여론의 지탄을 받자 반대하고 헤어졌고, 플리스와는 표절 문제로 결별한다. 정신분석 운동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1911년 아들러, 1913년 융, 1923년 랑크, 1932 년 페렌치가 차례로 떠나간다. 왜 그토록 가깝던 동료와 묘하게 다투어 결별하는 현상이 반복되었을까? 프로이트는 60 세가 넘어서야 가까웠지만 경쟁관계였던 자신보다 한 살 위 조카와의 어린 시절 관계가 이후의 인간관계 패턴에서 반복 되었음을 자기분석을 통해 생각하고 반복강박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이무석 2003;Freud 1925;Freud Museum Publications 1992;Gay 1988;Isbister 1985;Schur 1972).

 

 

프로이트의 평가

 

1. 프로이트의 성격 특성

 

프로이트는 자신의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은밀한 사람이었고, 완벽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강박적 성향이 있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해야 했다. 그래서 다수의 인간들에게 호감을 주는 호방한 사람은 아니었다. 매우 지적이고 민감하고 섬세한 성격을 지녔던 그는 자신의 이론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들과 고집스런 대립 태도로 인해 가까운 동료들과도 고통스럽게 결별했다. 아주 빛나는 고립상태에서 관례를 무시하고, 견해차이가 있으면 종종 언쟁했지만 친구도 있었다. 구강암 후에도 담배를 피우고 심장마비 후에야 금연했던 지독한 담배 골초, 때로 심한 변덕과 히스테리 발작이 있었고, 기차 여행 공포증이 있었다.

모성에 대한 갈증과 여성 관계에 있어서의 미숙함,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이상적 아버지상에 대한 갈망, 가까운 사람에 대한 복잡한 애증 등은 자신이 스스로 인정한 신경증적 특성이다. 그렇지만 부인 베르나이스와 한 번도 말다툼하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아주 검소해서 세벌의 양복, 세벌의 속옷, 세벌 구두로 생활 했으며, 그렇다고 구두쇠는 아니어서 말년에는 친구 학생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성격적 부족함을 은폐하기보다는 그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 자신과 인간 정신내면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다. 바로 창피하고 고통스런 자기 문제의 원인들에 대한 집요한 자기 분석을 탄생시켰다.

 

시간이 있을 때는 친구들과 카드놀이나, 오랫동안의 산책, 버섯 찾기등을 즐겼고 쉴 때는 아이들과 야외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엄격하지는 않았다. 간혹 부인, 처제, 동료 등과 여행을 즐겼다(Freud 1925;Freud Museum Publications 1992;Gay 1988;Isbister 1985).

 

2. 프로이트의 타이틀

 

프로이트는 연구소 조교를 시작으로 1882년 비엔나 종합병원 임상 조수를 거쳐 1885년 봄 신경조직학 논문과 임상 논문 덕택에 비엔나 종합병원 신경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샤르코에게 연수하고 귀국보고 결과 1886년 비엔나 종합 병원은 신경병리학 강사 자격을 박탈한다. 그 후 15년이란 긴 기간 동안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적극적인 로비로 1902년 비엔나대학 의학부의 특채 교수 자리를 얻게 된다. 이후 정신분석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무시와 냉대는 급격히 해소되고 환자의 증가로 인해 생활의 여유도 생기게 된다. 1909년 비엔나 대학 의학부 신경생리학 전임이 되고, 1919년 10월 비엔나 대학 정교수가 된다.

 

1926년 70회 생일에 아인슈타인, 로맹 로랑의 축전을 받았고, 츠바이크는 축하의 글을 신문에 발표했다. 1936년 80 회 생일 앞두고 토마스만이 <프로이트와 미래>라는 제목으로 축하 강연을 했고, 프로이트는 <토마스 만의 회갑을 축하하며>라는 글 발표했다. 1930년 괴테 문학상을 수상하고 만족감을 표현한다.

<괴테와 정신분석>에는 프로이트가 수상 소식을 듣고 감사의 뜻을 밝힌 프로이트의 편지와 건강 상의 이유로 그가 직접 가지 못하고 딸 안나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하우스에 가서 대신 발표한 연설문이 실려 있다. 1936년 영국 왕립 학술원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고, 1938 년 일각에서 노벨상 후보로 추천 움직임이 있었으나 사양 했다(Freud 1925;Gay 1988;Isbister 1985).

 

3. 프로이트와 예술

 

모든 예술 활동은 소망충족이고, 꿈과 비슷하며 성적 에너지가 승화한 것이고 환상을 작품화시킨 것이다. 프로이트는 초기에 정신분석 이론을 예술작품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1989년 마이어의 <여판사>라는 단편소설에 대하여 짧은 작품분석을 해서 플리스에게 보낸 적이 있고, 괴테의 베르테르를 분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0년 꿈의 해석에서 오이디푸스 왕과 햄릿을 다루었다. 1902년 옌센의 소설 그라 디바(Gradiva)에서 봄베이의 역사적 운명과 인간 영혼의 심리적 억압 현상의 유사성에 매료된다. 화산폭발이 성적 오르가즘의 분출과 같고, 화산재로 덥히는 폼페이를 억압현 상으로, 고고학적 발굴처럼 잊었던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을 정신치료 과정으로 표현한다. 1913년 <상자 고르기의 동기> 에서, 동기를 퇴행적으로 구사하는 작가의 능력과 원초적인 것과의 만남을 통하여 일어나는 영향력을 설명한다(윤순임 2000;조두영 1999).

 

1925년 <나의 이력서>에서‘나의 관심은 그동안 자연과학과 의학 및 정신분석 치료를 거치면서 멀리 우회한 뒤, 오래 전에 사로잡혔던 문명의 문제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문제를 고찰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종교, 전쟁 죽음, 문명, 정치, 예술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쓰고 있다.

1927년 <미래에 대한 환상>에서 예술은 문화에 대해 대리만족을 제시한다. 또 1930년 <문명 속의 불만>에서, 인간은 예술작품을 즐기면서 삶의 고통에서 약간 벗어나 마취 상태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예술이 결코 인간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하지는 않는다(Gay 1987).

 

프로이트는 아름다운 것에 민감했다. 존스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문학작품을 가장 좋아했고, 그다음 조각품(특히 고대), 그리고 건축과 미술작품에 심취했었다. 또한 그의 문장력은 문학적 경지를 충족시킬 정도로 훌륭했고 구강암 판정 후에도 16년간 철학과 문학을 계속 저술했다. 프로이트는 우선 무의식에 대한 그의 이론을 예술가와 예술작품,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에 적용하였다. 1913년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에서‘도대체 예술가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창조능력을 가지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무의식이 의식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불쾌감와 불안이 유발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무의식의 욕망을 불쾌감와 불안 없이 향유하게 하는 할 수 있다(윤순임 2000;Freud 1925).

 

4. 프로이트의 평가와 영향

 

프로이트의 삶은 평탄치 못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태어날 당시부터 복잡했던 가족관계, 가난, 유대인으로서 청년기 이후에 겪은 사회적 냉대, 15년간에 걸친 의사 집단으로부터의 따돌림, 가까웠던 정신분석학회 동료들과의 결별, 정신 분석 치료의 실패에 따른 위기감 등은 그로 하여금 안정된 생활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16년간 33회의 구강암 수술은 그에게 혹독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위기 상황을 자기계발을 위한 자극제로 역이용할 줄 아는 독특한 능력과, 정신분석을 인류 문화에 공헌하는 독보적인 학문으로 정립시키겠다는 집념이 대단했다. 그는 인간정신에 대한 연구와 정신분석 활동을 84세, 사망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 계속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인간에게 충격을 준 3대 사건을 1) 코페르 니쿠스의 지동설, 2) 다윈의 진화론, 3) 프로이트의 무의식, 정신분석을 들고 있다. 프로이트가 등장한 19세기 전반기까지 사람은 의식 즉 자신의 자유 의지에 산물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충격을 준 것이 바로 인간은 의식의 지배보다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무의식에 의해서 지배 된다는 이론을 제기한 것이다.

 

1999년도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미국의 시사 주관지인 타임스(TIME) 사는 지난 100년간 20세기를 빛낸 가장 위대한 사람을 세계 석학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첫 번째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이었고 두 번째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다(1999, 3월 29일자 TIME 특집 참고). 뿐만 아니라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사상가가 니체, 칼 마르크스, 프로이트 순이었다. 프로이트는 글도 잘 써서 작가도 아니면서 괴테 문학상을 받았다.

프로이트가 어릴 때 어떤 사람이“이 아이는 세계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는데, 그 말대로 되었다(이무석 2003). 프로이트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실제로 과학자가 아니며 관찰자도 아니며, 실험가도 사상가도 아닙니다.

나는 본질적으로 신대륙의 정복자와 같은 모험가로 호기심이나 불굴의 정신,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 가져야 하는 집요함을 가졌을 뿐입니”(Freud 1900).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마음을 이해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 프로이트를 떠난 Adler, Jung, Neo-Freudian, Binswanger 등도 모두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예술, 인문학(종교학, 사회학, 교육학, 문화인류학, 신화학, 민속학, 언어학, 역사학, 미학, 경영학, 범죄학, 문예비평)>, 생물학 등에 영향을 주었다.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관점만으로 복잡한 인간 현실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는 없다. 프로이트는 다양한 인접 학문에 결합되어 활용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는데, 1960년대 이후 학문, 문화 전반에서 그것이 검증되고 있다(이무석 2003;Freud 1925;Gay 1988;Isbister 1985;Schur 1972).

 

 

맺 는 말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프로이트의 초기 생애, 정신분석의 탄생, 마음의 해석, 정신분석 증례와 역사, 프로이트 평가라는 소제목아래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인간의 마음을 보다 깊게, 보다 넓게 이해하도록 해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프로이트 자신이 수정 발전시켰던 것처럼 지금도 많은 분석가에 의해 발전해가고 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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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Life and Work of Sigmund Freud

Min-Cheol Park, M.D.

 

For celebrating the 150th anniversary of Sigmund Freud’s birth, the author tried to explain the S. Freud’s life and work under the subtitle:the beginning of S. Freud, the birth of psychoanalysis, decoding of the mind, the psychoanalytical cases and historical movement, and the evaluation of him according to the chronological age. As Freud’s psychoanalysis was developed and could understand the human mind more deeply and more widely, the theory and technique of the psychoanalysis were developed more and more. The author did not explain all of Freud's life and work. I hope that other aspects which were not explained here consider other references of S. Freud.

 

KEY WORDS:Freud·Life·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