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63>
철학, 본질과의 대면
철학의 본질은 앎 속에서 제 생각을 키워가는 것
적잖은 사람들이 점집을 찾아가 제 미래를 물어본다. 요즘도 소문난 점집들은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서 문턱이 닳는다. ‘철학관’들은 번성하지만 철학은 쇠퇴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다.
이 ‘철학관’들에서 행해지는 관상술에 관해 철학자 서동욱(1969∼)은 이렇게 쓴다.
“관상을 보는 행위는 ‘이론적으로’ 인식하는 행위가 아니다. ‘인식’은 개념의 매개가 불가결한데, 얼굴의 징표들은 개념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상을 보는 행위는 공동체의 감각에 따라 판단하는 ‘실천적 기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동욱, ‘일상의 모험’)
골상의 구조가 미래 운명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을까? 관상을 보는 이들은 골상의 구조와 미래 운명은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골상과 그것을 덮은 얇은 피부는 어떤 이들에겐 훌륭한 재화(財貨)다. 그러니 골상의 구조와 미래 운명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관상은 ‘학(學)’이 아니라 ‘술(術)’이다.
관상은 ‘개념의 보편성’이라는 구조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감각의 보편성’이라는 직감에 기초한다.
철학은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존재의 기원과 의미의 근거를 따져 묻는다.
하지만 점쟁이들은 내일에 닥칠 길흉화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객의 호기심에 응답한다.
그것도 아주 애매모호하게.
괴테의 ‘파우스트’에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네 이름이 뭔가?”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대답한다.
“그 질문 시시한 것 같은데요. 말이란 걸 그다지도 경멸하시고 일체의 외관을 초월해서 본질의 깊은 곳만을 탐구하시는 분으로선 말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한 것은 철학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철학자가 “일체의 외관을 초월해서 본질의 깊은 곳만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은 맞다. 철학의 바탕은 존재라는 ‘빅 퀘스천’에 대한 ‘생각함’이다. 이때 생각함은 의미가 만들어지는 기원들과 연관되는 문제다. 철학은 의미의 의미, 그 의미의 시초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철학관에서 의미와 그것의 기원들은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길흉화복을 몰고 오는 미래를 예측함이다. 위기들을 회피하고 생존의 최적화를 위해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를 아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가시계(visible world) 안에서 은하수는 작디작은 파편이고, 그 파편 속에서 태양계는 무한히 작은 얼룩이며, 그 얼룩 속에서 지구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점 하나다. 이 점 위에서 약간 특이한 물리화학적 성질에 복잡한 구조를 가진, 불순물이 섞인 탄소와 물로 구성된 작은 덩어리가 몇 년 동안 기어다니다가 다시 분해되어 자신을 구성했던 원소들로 되돌아간다."(버트란트 러셀·줄리언 바지니, ‘빅 퀘스천’, 재인용)
인간은 우주 속에서 우연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수수께끼다. 진화의 역사에서 끝없이 이루어진 생식세포의 고리 속의 하나를 이루는 고리, 유전자의 전달자, 지각을 가진 ‘생존기계’다. 그리고 인간은 죽는다. 이로 인해 인간은 더욱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단세포 해조류와 균류에게 생각이 필요없는 것은 그것들이 개체로서의 죽음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는 것들에게는 살아남으려는 노력도 무의미하다. 죽음에 잇대어져 있는 생명체는 제 체세포를 환경에 최적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형태를 바꾸며 진화해온 긴 여정으로 제 역사를 써간다.
철학이 예전의 영광을 뒤로한 채 사양화되는 학문이 된 것은 그게 먹고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철학을 먹고사는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치부한다. 아주 가끔 철학을 입에 올릴 때에도 ‘개똥’과 연관해서만 그 어휘를 사용한다. 그만큼 철학이 현실에서 멀고, 그만큼 현실에서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물론 철학을 모른다고 해서 사는 데 불편한 것도 아니다.
철학은 우리는 누구이고,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따져 묻는다. 당연히 철학은 삶과 세계를 구성하는 본질들과의 대면이다. 철학자들이 일견 자명한 것들마저 자명하게 여기지 않고 그걸 따져 묻는 까닭도 그 안에 본질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새롭게 사유하기 위함이다.
철학은 관습적 이해를 껍질을 벗겨내고 주체로 하여금 스스로 제 생각을 키워가도록 돕는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앎을 지향하고, 앎에서 길어낸 지혜를 먹고 살아간다. 이때 그 모든 동력이 생각함에서 나온다. 우리가 굳이 철학자로 살 필요는 없고 그렇게 살 수도 없다.
철학자처럼 생각함의 바탕 위에 삶을 세우되, “인생의 취약성과 예측불가능성, 우연성을 직시하고”(줄리언 바지니, 앞의 책) 가치를 향하여 선 존재로 사는 게 중요하다. 데이비드 흄이 했다는 말을 기억하자.
“철학자가 되라. 하지만 당신의 그 모든 철학의 한복판에서 여전히 인간으로 있으라.”
철학은 본질적으로 앎을 지향하고, 앎에서 길어낸 지혜를 먹고 살아간다. 모든 동력은 생각함에서 나온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일상의 모험’을 읽고 철학자 서동욱을 주목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 지루하고 하찮은 것, 욕망의 유예와 행복의 지연으로 진부한 지옥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바로 그것. 앙리 르페브르가 “혁명의 장애물·둑·난간”이고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말한 그것. 진리와 구원이 없는 부재와 목마름의 자리. 서동욱은 바로 그 일상의 구체적인 맥락들, 즉 소통·잠·자기기만·유령·관상술·얼굴·패션·웰빙·이름·분열증의 문학·애무의 글쓰기·해방의 글쓰기·노스탤지어·춤·예언 등에 철학의 빛을 비춰 그것들을 의미의 층위로 끌어낸다.
오늘의 철학을 만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철학 연습’은 철학을 향한 첫걸음을 떼려는 사람에게 유용한 도움을 주는 책이다. 철학자 서동욱은 난삽한 ‘현대’ 철학의 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 운동’을 시킨다. 그래서 스피노자·키르케고르·니체·프로이트의 세계로 안내한다.
스피노자는 당대 사람들이 잘 빠졌던 미신과 미신에의 예속에 대해 숙고한다.
키르케고르는 우리 마음 안에 도사린 ‘불안’이라는 심리적 경험을 따져 그 의미를 밝혀낸다. 아울러 실존·반복·신앙심에 대해 알아야 뒤에 오는 ‘실존주의’를 제대로 알 수가 있다.
니체는 기독교와 플라톤에서 시작된 서양의 가치체계를 해머로 부수고 다시 세운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차라투스트라’라는 가상의 예언자를 창조하고, 의지·힘·영원회귀·넘어선 사람(위버멘슈), 그리고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에 대해 깊이 사유했다.
들뢰즈와 푸코 같은 스타 철학자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철학자다.
프로이트는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다. 무의식에 억압된 성욕·은폐 기억·트라우마 등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학문으로 승화한다.
이어지는 하이데거·사르트르·메를로퐁티·레비나스·레비스트로스·자크 라캉·푸코·질 들뢰즈·자크 데리다 등은 이른바 20세기 철학 전성기를 구가한 스타 철학자들이다.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피겨스타 김연아 선수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 철학자들이다.
철학에 무지한 사람들조차 이들 중 몇 사람은 귀에 익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 사르트르는 실존과 존재, 메를로퐁티는 몸, 레비나스는 타자, 자크 라캉은 욕망과 무의식, 들뢰즈는 차이의 존재론,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연구, 자크 데리다는 해체와 ‘차연’에 대해 독보적인 사유를 끄집어낸다.
들뢰즈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 더 중요한 위상을 가진 현대 철학자다. 서동욱은 들뢰즈의 ‘차이’라는 개념을 알아듣게 설명한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다.”(들뢰즈, ‘차이와 반복’)
너와 나는 다르고, 이 다름은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존중되어야 할 가치다. 차이와 차별은 그 뜻이 다르다. 차별은 위계적이지만, 차이는 위계적 질서가 없는 다양성이다. 차별은 인종주의의 뒷배다. 차이는 공존의 윤리 속에서 평등과 평화 세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다. 이거 다 설명하려면 한이 없다.
‘존재와 무’는 오랫동안 철학적 사유의 핵심이었다. 철학자들은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무(無)가 아닌가라고 묻는다. 존재와 무는 한 몸으로 된 쌍생아와 같은 무엇이다. 존재는 무를 향하고, 무는 존재를 물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 스스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무에 대한 가능성을 알려오고, 이와 같은 가능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신을 알려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에서 태어나고 무로 돌아간다. 따라서 무는 존재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본질이다. 철학은 삶의 구체적 맥락에서 발현될 때 그 힘과 의미가 또렷해진다. 이를테면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고 복제된 것과 진짜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이밖에 돈·사랑·신체·관상술·터치스크린 같은 주제들에 대해 오늘의 철학은 어떻게 사유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어느덧 우리는 성큼 철학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는다.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0>
디지털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
디지털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속도’
… 잉여의 속도는 편리함을 주는 대신 군중과 자아의 균형을 앗아가버려
인터넷을 끄고 스마트폰을 놓아라
디지털세상에서도 자아의 행복은 광속이 아닌 아날로그 속도로 온다
우리는 디지털 세상으로 들어와 있다. 그 말은 우리 삶이 무수히 많은 ‘외부’들과 끊임없이 ‘접속’하고 ‘연결’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활방식이 디지털 맥시멀리즘(Digital Maximalism)이 펼치는 네트워크에 구속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가. 눈을 뜨는 순간에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의 작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새 스마트폰을 마련한 내 여자친구는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내 얼굴보다 더 자주 스마트폰의 화면을 넋을 놓고 들여다본다. 내 여자친구는 내가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너머에 있는 세상과 연애하는 중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내 여자친구가 그 전보다 나를 덜 사랑해서 스마트폰의 화면에 더 자주 눈길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뇌가 새 자극에 더욱 반응하게끔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낯선 물건이나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뇌에서는 보상체계가 활성화되고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나와 뇌수를 적신다. 아마도 선사시대에 포식자들이 널린 자연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진화했을 터다. 포식자들의 위험을 빨리 감지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아울러 피식자를 빨리 포착하고 반응해야만 굶지 않을 수 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계되고 진화된 내 여자친구의 뇌가 디지털 기기에 호응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나는 내 여자친구의 스마트폰을 조금도 질투하지 않는다.
디지털의 네트워크 세상 속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음성 메시지, 포크와 프로드와 트윗, 알림과 댓글, 링크와 태그와 포스트, 사진과 동영상, 블로그와 비디오로그, 검색과 다운로드, 업로드, 파일과 폴더, 피드와 필터, 담벼락과 위젯, 태그와 태그 구름, 아이디와 비밀번호, 단축키, 팝업과 배너, 신호음과 진동.”(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들이다.
디지털은 외부 세계와 더 긴밀한 연결을 만들지만, 반면에 자신의 내면에서는 멀어지게 한다. 삶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
“이제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따라 움직인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자주, 그리고 쉽게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윌리엄 파워스, 앞의 책)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우리는 디지털 군중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디지털 군중은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그럴수록 우리는 외부지향적 사고를 강요당한다.
디지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더 빠른 ‘속도’다. 우리는 이 속도를 끝없이 업그레이드하면서 디지털 문명인으로 진화한다. 이 잉여의 속도가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행복이지만, 우리가 받은 것은 편리함과 즐거움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삶의 핵심인 ‘깊이’를 잃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인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윌리엄 파워스, 앞의 책)
그들은 하루 종일 참을 수 없는 디지털의 분주함에 빠져 외부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을 쏟는다. 그런 사이에 개인의 삶에서 충분히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고, 그 시간과 함께 삶의 깊이를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진다. 뇌, 두 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창조하는 사이버 세계에서 사는 디지털 군중의 삶 속에는 깊이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깊이는 우리가 세상에 뿌리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삶의 본질이자 정수다. 깊이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맺는 관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을 풍요롭게 만든다. 또한 훌륭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자 우리가 타인의 모습에서 감탄해 마지않는 특징 혹은 자질이다.”
(윌리엄 파워스, 앞의 책)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우리가 얻은 것은 편리함과 즐거움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삶의 핵심인 ‘깊이’를 잃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삶에서 깊이를 앗아간 속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물론 속도는 우리에게 권태의 지루함을 면제해주고, 기다림의 수고가 필요 없음이라는 선물을 준다. 그러나 속도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수단에 불과한 그것이 내 정체성과 지위, 그리고 삶의 외피에 덧씌워지면서 목적으로 뒤바뀌어버렸다. 그것은 오히려 더 빠른 속도에 대한 갈망과 그 갈망으로 마음이 그르렁거리는 상태, 즉 ‘형이상학적 조급증’에 빠뜨린다. 디지털 맥시멀리스트로 진화한 우리에게 디지털 세상이 준 것은 편리함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를 더 창의적이고 똑똑한 방식으로 진화시키지는 않았다.
반면에 그것은 느림의 숭고함, 고요한 시간의 평화, 충만한 삶, 활력이 넘치는 건강, 세계와 나의 조화 속에서 느끼는 행복을 앗아갔다.
디지털 문명은 우리 삶에 끼어든 침입자다. 그로 인해 우리는 “군중과 자아,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 사이의 균형”(윌리엄 파워스, 앞의 책)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깊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디지털을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과 거리를 두고,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지나친 외부지향적 삶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컴퓨터를 꺼라!
휴대전화도 꺼라!
디지털 기기들과 물리적 거리를 두면 딴 세상이 보일 것이다. 디지털 세상이 조장한 거품들이 꺼지면 우리 생은 오로지 진짜 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생이 생으로 가득 찰 때 기쁘다. 생에서 생이 다 빠져나가버리면 괴롭다. 저 자신이 된 삶은 조화롭고, 자기에게 낯선 삶은 찢어진다. 우리는 이 조화와 찢김 사이에서 산다. 나뉘고, 주저하고, 불안해하며, 자주 길을 잃고, 하지만 또 다행히 가끔은 의기양양해하면서.”
(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디지털 맥시멀리즘이 분명 더 문명화된 삶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행복은 무관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행복이란 항상 자아의 행복이다. 이때 자아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마음의 주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물 너울이 크게 일 때 우리는 바람이 있음을 안다. 마찬가지로 욕망이 나타날 때 우리는 내 속 깊은 곳에 웅크렸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은 욕망함이라는 무의식적 돌진력이 촉발하는 시원(始原)이자, 변화무쌍한 세계에 수시로 출현하는 악과 잔인함에 대한 훌륭한 방어막이다.
부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다. 원효가 밤의 어둠 속에서 물을 달게 마셨는데, 이튿날 밝은 빛 속에서 보니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 같은 물인데, 어제의 물은 갈증을 가시게 한 단 물이고, 오늘의 물은 더럽고 구역질나는 물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이게 다 마음의 장난 때문이다.
마음은 불변하는 실재가 아니다. 항상 변화하고 유동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 이것이 붙잡은 행복이라는 것도 항상 변화하면서 유동한다. 행복은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고, 그 가능성 속에서 우리가 갖는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행복은 마음이 욕망하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뭔가를 얻는 순간 마음은 그것의 덧없음을 깨닫고 이미 다른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
마음의 욕망함은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마음의 욕망함에는 만족이란 게 없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적응’, ‘습관화’, ‘쾌락주의의 쳇바퀴’라고 부른다.”
(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
우리가 그토록 행복의 지속을 원하지만 그것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여정이 목적지보다 더 중요하며, 활동이 성과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에 비춰보자면,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행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기에 돈, 물건, 쾌락, 성공, 명성, 지위 따위를 손에 쥠으로써 갖는 즐거움이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행복의 가능성이 불러일으키는 전율이다. 그 가능성의 전율 속에서 우리는 “갑자기 세계가 다시 마법을 발휘하고 자아가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것이 더 풍부해지고 낯설어지고 더 흥미로워진다. 눈은 더 명료하게 보고, 마음은 더 예리하게 생각하며, 심장은 더 강하게 느낀다 이 세 가지가 열광과 환희와 열정 속에서 통합된다.”(마이클 폴리, 앞의 책)
디지털 세상에서도 행복은 디지털의 광속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속도로 온다.
그러니 인터넷을 끄고, 손에 꼭 쥐고 있는 스마트폰도 놓아라!
멈추고, 깊이 호흡하고,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감싼 세상을 돌아보라.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추구하고 거기에 집중함으로써 돌연 얻어지는 기쁨 속에서 느끼고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의 유예만이, 그러니까 행복이 전적으로 결핍된 불행과 불운만이 오로지 행복을 발견하게 한다! 행복은 그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만 얻어진다.
이게 행복에 깃든 부조리함이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행복도 부조리하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임현경 옮김,21세기북스, 2011
●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심민화 옮김, 개마고원, 2008
●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 김병화 옮김, 에크로스, 2011
/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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