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의 화첩/ 김지녀
나의 캔버스엔 눈과 입과 코가 얼버무려진 얼굴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겠지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얼굴과 얼굴과 얼굴의 간격
목이 계속 자란다면
무너질 수 있겠지
붉은 흙더미처럼 나의 얼굴이
긴 목 위에서 빗물에 쓸려나가네
꼿꼿하게 앉아서
갸우뚱하게
- 계간「시향」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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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한 공동묘지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묘석엔 이탈리아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1884년 7월12일 리보르노(이탈리아)생. 1920년 1월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에는 만삭의 몸으로 그를 뒤쫓아 아파트 6층에서 투신자살한 모딜리아니의 아내 쟌느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1889년 4월6일 생. 1920년 1월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자’
두 사람의 끔찍한 사랑 외에도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화가 가운데서 가장 미남이었다든가 최후의 방랑가적인 화가라는 등속의 것들이다. 술에 취하면 옷을 홀라당 모두 벗어버리거나 길에 쓰러져 자곤 했다. 그는 가난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마약에 중독되기도 했지만 우수에 찬 파리 생활의 표정들을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필치로 그려낸 금세기의 빼어난 화가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그의 그림은 긴 얼굴, 긴 코, 긴 목 그리고 작은 입술, 아몬드 모양의 눈, 아래로 약간 처진 작은 어깨를 가진 인물묘사가 특징이다. 그는 처음 조각을 했으나 작업환경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 때문에 그림으로 방향을 틀어 독특한 그림세계를 일궜다. 조각적인 요소들을 2차원 공간인 캔버스의 평면 화면에 적용시켰기에 그의 작품은 마치 평면 조각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목이 계속 자란다면 액자의 바깥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파리로 온 후부터 그린 그림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대부분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대체로 슬픈 표정이다. 표정이 얼버무려지고 지워졌기 때문에 그리 보일 것이다. 15도쯤 갸우뚱하게 기울어진 긴 목의 단순화된 여인상은 무한한 애수를 품고 있다. ‘눈동자가 없어도 밤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고, ‘웃는 입이 없어 조용해진 세계에서’ 관능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아니, 그 또한 광기의 눈으로 바라봐야만 가능한 미학이다.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기 직전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쟌느의 초상’을 그렸다. 이 그림에는 전과 달리 눈동자가 또렷이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말한다. “이젠 광기를 멈출 때가 됐어” “너의 영혼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너의 눈동자를 그릴 수 있지” 그는 쟌느의 아름다운 영혼의 눈동자를 그려 넣으며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쟌느 에뷔테른 역시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 드릴께요”라며 영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꼿꼿하게' 창가에 앉아서 '갸우뚱하게'
권순진
Rare Bird - Sympa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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