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위반/ 이대흠
기사양반! 저 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
쓰잘데기 읎는 소리하지 마시요
저번착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착에도 내가 모셔다 드렸는디
-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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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된 정류소가 아닌 곳에 까닥 잘 못 정차했다간 운전기사 입장에서는 교통위반도 위반이려니와 자칫 경을 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서울에서 삼청각과 경복궁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탄 일이 있는데 하도 손님이 내려달라 보채는 통에 잠깐 세워 손님을 내려준 어느 기사가 한 승객의 고자질로 회사에서 짤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기사로부터 들었다. 회사에 일러바친 그 승객이 회사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참 정의롭고도 무서운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서 중간에 내려달라는 요구를 한 적은 없으나 나도 기다리던 버스가 신호대기를 위해 서있을 때 앞문을 두드리며 태워달라고 사정한 일은 몇 번 있다. 그 경우 대개는 쉽게 문을 열어주어 탈 수 있었으나 간혹 문을 두드리는 날 보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기사가 있는데 속으로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 기사는 아마 그렇게 해서 벌금을 맞은 전례가 있거나 철저하게 법을 지키겠다는 굳건한 시민정신의 소유자 일 것이다.
이 시는 전라도의 한적한 한 시골마을을 오가는 털털한 군내버스에서의 노파와 운전기사 사이에 오고간 말을 고스란히 담화 시로 엮었다. 아직 그래도 시골에는 이런 따뜻한 정과 인심이 보존되어 독자로 하여금 가슴을 짠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예전에는 도시에서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기사가 기꺼이 노인을 도중하차케 하여 편의제공 하는 것을 보았지만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광경이 되어버렸다.
무릎이 아픈 노인은 운전기사에게 이미 낯익은 동네 어르신이다. 모르는 노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가는 길도 아니고 아예 정해진 코스에서 벗어나 ‘쪼깐 돌아서’ 가달라는 무지막지한 억지며 횡포임에도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란 짤막한 면박으로 본분을 밝히는 게 고작일 뿐 내심 기사는 그렇잖아도 이미 돌아가려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수록 눈이 어둡고 물팍이 아린 노인네를 보며 ‘아름다운 위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운전기사의 ‘미친’ 짓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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