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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무의 기원과 음차의 발전과정 / 중국차(茶)문화사 1.2.3.4.

경호... 2013. 1. 21. 01:30

중국차문화사

 

(1) 차나무의 기원과 음차의 발전과정

 

제1장 차나무의 기원과 음차의 발전과정

 

1. 세계 최초 찻잎의 발견과 차나무 기원의 논쟁

 

1) 최초 찻잎의 발견자 신농씨(神農氏)의 전설

 

 

神農嘗茶圖

 

일찍이 중국에는 “신농(神農)이 백(百) 가지의 풀을 맛보며 매일 72가지의 독(毒)을 발견했는데, 차(茶)로써 그것을 모두 해독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까닭에 중국인들은 신농씨를 최초로 차를 발견하고 이용했던 사람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예부터 이미 신농과 차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신농은 수정같이 투명한 배(腹)를 가지고 있어서 무엇을 먹든지 간에 사람들은 그의 위장 속을 자세하게 훤히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직 불로써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몰랐었다. 그래서 그들은 화초나 들판에 열린 과실, 또는 독이 든 생선이나 짐승 등을 잡아 날것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주 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신농은 사람들을 음식물을 통한 중독이나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눈에 띄는 식물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모두 맛을 보게 되었고, 이 식물들이 뱃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지를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독이 없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어떤 것이며, 또 어떤 식물이 독이 있어 먹을 수가 없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신농은 백가지 풀을 맛보게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흰 우유 빛’의 꽃송이가 열린 나무 위에 싹튼 연한 나뭇잎을 맛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이 푸른 잎이 매우 희귀한 것임을 발견하고 한입에 뱃속으로 삼키고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위장에 들어간 그 푸른 잎은 들어가자마자 곧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위장의 곳곳을 유동(流動)하며, 위장의 내부를 깨끗하게 세척하는 것이었다. 마치 뱃속에서 무언가를 검사라도 하듯이 위장을 깨끗이 청소하였던 것이다.

신농은 이에 곧 그 신비한 푸른 잎을 가리켜 ‘사(査,cha?)’라고 불렀고, 이에 후대 사람들은 ‘사(査,cha?)’와 발음이 같은 ‘차(茶,cha?)’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천년차수왕

 

 

신농은 오랜 세월동안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풀들을 다 맛보았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중독되기가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차로써 해독하였던 것이다. 후인들의 전설 중에 “신농이 백가지의 풀을 맛보고, 날마다 일흔 두 가지에 중독되었는데 차로써 해독했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신농도 미처 찻잎을 챙겨 먹지 못하는 바람에 독초에 중독되어 죽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신농은 조그만 노란 꽃이 피어있는 풀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꽃받침이 벌어졌다 오므려졌다 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여 그 잎을 따서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배가 몹시 아파 옴을 느끼고 차를 먹어 해독하려 했으나 차를 먹을 겨를도 없이 곧 그의 위장은 한 마디 한 마디씩 동강이나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신농본초

 

 

신농은 이렇게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했던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신농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 황색의 독초를 가리켜 신농의 창자를 끊어지게 한 풀이라 하여 ‘단장초(斷腸草)’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이 개벽한 이래 신농이란 사람도 실제로 존재했었는지의 여부도 아직 불분명하다. 어쩌면 후인들은 누군지는 분명치 않지만, 농업과 의학을 발명한 누군가 무명의 발명자가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은 후인들로 하여금 그 무명의 발명자의 공적을 숭상하고 기리기 위해 마침내 ‘신농’이라는 하나의 우상을 창출해내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신농이 역사의 사실적인 인물이 아닌 전설적인 인물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그 전설의 배경조차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작된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2) 차나무 기원의 논쟁

차나무는 원래 대자연 속에서 자라난 일종의 야생식물이다. 그러나 최초의 인류는 차의 공능과 용도를 결코 알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중국인에 의해 발견되고, ‘음료의 공능’을 가진 차로써 공인되었다. 근세에 와서 차가 세계적인 음료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게 된 후부터, 세계 각국의 전문가 및 학자들은 비로써 차의 원산지 및 차가 최초로 전파된 시기에 대한 문제로 한바탕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논쟁은 “서기 1824년 당시 인도에 머물고 있던 영국 장교 브루스(R?Bruce) 소령에 의해 인도의 동북부지역인 아삼(Assam)주의 사디야(Sadiya)에서 야생차수를 발견한 이후, 차나무가 파생된 원산지는 인도다” 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발생된 논쟁의 관점을 종합적으로 귀납해 보면, 대략 다음의 네 부류의 주장으로 집약해 볼 수가 있다.

제일설(第一說) : 인도가 차나무의 원산지라는 주장
제이설(第二說) : 중국이 차나무의 원산지라는 주장
제삼설(第三說) : 소엽종의 원산지는 중국이고, 대엽종의 원산지는 인도라 는 주장
제사설(第四說) : 각기 자연조건이 허락하는 지역은 모두 차나무의 원산지이다.

최근 수많은 전문가들은 점차적으로 “중국이 차나무의 원산지다”라는 주장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실제로 중국에는 지금까지 차수가 가장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연대가 아주 오래된 거대한 야생차나무가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일찍이 고대(古代)에 발견된 차수는 중국의 남방뿐만 아니라 북방에서도 있었다.

당대(唐代) 육우(陸羽)의《다경》과 송대(宋代)의《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는 이미 야생차나무의 발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아울러, 서남지구의 방지(方志) 등에 기록된 것은 더욱 많다. 1939년, 어느 한 중국인에 의해 귀주(貴州) 무천(?川) 노응암(老鷹岩)에서 거대한 야생차수가 발견된 이래, 잇따라 또 사천?운남?귀주 등지의 심산유곡 중에서도 모두 대량의 차나무가 발견되었고, 심지어 복건?안휘?대만에서도 발견되었다. 1960년에는 또 운남 맹해(?海) 대흑산(大黑山) 원시삼림 중에서 거대한 차나무 한 그루가 발견되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32.12미터이고, 나무 직경은 무려 1.03미터에 달했으며, 수령은 약 천 수백여 년에 이르는 그야말로 세계 최대의 차나무였다. 중국인들은 곧 이 거대한 차나무를 가리켜 ‘차나무의 왕이’란 뜻으로「차수왕(茶樹王)」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古茶樹에 올라 찻잎을 채취하는 운남의 나시족(納西族)

 

 

차나무는 식물분류학상에 있어서 산다과(山茶科)?차속(茶屬)에 속하며, 조사 자료에 나타난 것에 의하면 전 세계에 분포하는 산다과 식물은 모두 23속(屬)?380여 종(種)이 있다. 중국에 소속된 토지상에는 15속?260여 종이 있는데, 대부분 운남?귀주?사천 일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미 발견된 산다속(山茶屬)만 약100여종이며, 그 중 운남에서 발견된 것이 약 60여종으로 가장 많아 전 세계 차속 분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까닭에 중국인이 최초로 차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중국어 발음으로 ‘사(査)’와 ‘차(茶)’는 모두 “차(cha?)”로 발음됨

2)神農嘗百草, 日遇七十二毒, 得茶而解 (신농상백초, 일우칠십이독, 득차이해)

3)唐.陸羽《茶經》六之飮。程.坤外3人共著《飮茶的科學》(上海科學出版社)5쪽。

4)姚國坤<茶樹原産地之爭的由來>,文載於陳宗懋 主編《中國茶經》(上海文化出版社)6쪽。

5)吳智和《中國茶藝》2쪽.(正中書局 / 臺北). 또《中國茶經》6쪽에 더욱 상세히 보임

6) 唐.陸羽《茶經》卷上, <一之源>에 “茶者,南方之嘉木也.一尺二尺乃至數十尺;其巴山陝川有兩人合抱者, 伐而?之”라고 기록하고 있다.

7) 방지(方志): 혹은 지방지(地方志)라고도 하며, 지방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을 뜻한다.

8)吳智和《中國茶藝》3쪽. (正中書局 / 臺北).

9)胡先?《植物分類學簡編》에 자세히 밝힘(陳宗懋 主編 《中國茶經》에서 再引用)

 

 

 

 

(2) 중국 음차(飮茶)의 시작과 전개

 

“오래 마시면 힘이 나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원)趙原-육우팽다도-종27.0, 횡77.0cm(대북고궁박물원).

 

 

2. 중국 음차(飮茶)의 시작과 전개

 

자고로 문자를 사용해서 역사를 기록한 이래 차를 마시기 시작한 기원에 대한 기록은 각종의 역사문헌 기록에서 대단히 많이 나타나고 있고, 또한 이에 대해 이론(異論)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김명배(金明培)선생은 자신의 저서인 《중국의 다도》 첫 장, 첫 문장에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한 기원은 알 수가 없다.”라고 명쾌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한편 또 다른 한쪽으로는 문헌적 고증을 통해 그 기원을 추적하고자 굉장히 애쓰고 있는 흔적을 볼 수가 있었다.

“오래 마시면 힘이 나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 기원이야 정확히 알 수는 없을지라도 문헌적 고증의 방법을 통해 가능한 최대로 사실적으로 근접한 음차기원의 시기를 유추해 볼 수는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각종 문헌상에 나타나는 음차기록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신농씨의 《식경(食經)》에는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있게 하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주례(周禮)》<지관(地官)>편과 송나라 왕관국(王觀國)의 《학림(學林)》에는 “주례(周禮)에 ‘장도(掌?)’는 차를 모아서 상례에 제공하는 일을 맡아 본다.”라고 하였으며, 또《중국풍속사》에서는 “주(周)나라 초에서 중엽에 이르기까지 음물(飮物)로는 술, 단술(醴), 미음(漿), 갱즙(?)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또한 각종의 음료가 있는데 그중에서 차가 가장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는 “진(秦)나라 사람들은 촉(蜀)을 얻은 뒤에 비로소 차를 마시는 일이 있었다.” 여기서 ‘촉(蜀)’은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를 중심으로 한 그 일대의 옛 지명이다.

송나라 구양수(歐陽修)의《잡록(雜錄)》에는 “차는 전대(前代)의 역사에 보이는데, 대저 위(魏)나라와 진(晋)나라 때부터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송나라 배문(裴文)은《다술(茶述)》에서 “차는 동진(東晉)에서 비롯되어 본조(송나라)에 성행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들은 우리에게 중국음차의 시작과 보편화, 그리고 음차풍속의 정착화 및 성행하였던 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문헌상에 음차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어떤 것은 신빙성이 없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것은 사실을 토대로 꾸며지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대단히 믿을만한 것으로 보인다.

 

 

항주시 여항(餘杭) 육우천(陸羽泉).

 

 

대략 서한(西漢:BC·206-219)시대 장강 상류의 파촉(巴蜀:중경과 성도)지구에는 이미 음차의 기록이 있었는데 바로 왕포(王褒)의 《동약(童約)》이다. 이는 일종의 노비문서로서 노비가 해야 할 일들을 조목조목 기록해 놓은 것인데 그 내용 중에는 집에서 “차를 다리고, 다기를 씻어서 정리해 두는 일과 무양(武陽)까지 가서 차를 사오는 일” 등도 포함되어있다. 여기에 나오는 ‘무양(武陽)’은 현재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팽산현(彭山縣)으로 중국 도교(道敎)의 시조인 팽조(彭祖)의 분묘가 있다. 1999년 필자가 답사했을 때, 그곳엔 차의 집산지였던 강구고진(江口古鎭)을 따라 형성된 차를 팔던 점포들이 좁은 길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서 노변촌(路邊村)을 이루었음을 짐작케 하며, 민강(岷江)을 따라 팽산현과 인접해 있는 인수현(仁壽縣)에도 그 흔적과 차의 유통을 관리했던 사찰 유적지가 아직 일부 남아 기록과 함께 전해지고 있었다. 답사 당시 그 곳 사찰의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상세히 확인하지 못했지만, 잠긴 대문을 손으로 밀쳐서 빼꼼히 문틈으로 보이는 사찰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비석에는 ‘인수현(仁壽縣)’이란 글자와 ‘사천차(四川茶)의 집산지(集散地)’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외, 삼국시대(三BC.220-280) 때에도 장강 하류의 오(吳)나라에 음차의 기록이 보인다. “오나라 군주 손호(孫晧)는 주연을 할 때마다 연회에 참가한 신하들에게 최소한 7되의 술을 마시게 하는데 유독이 ‘위요(韋曜)’라는 늙은 신하만이 술 2되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자, 손호는 특별히 그를 우대하여 술 대신 몰래 차(茶)를 건네주었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의 남방에서는 차를 음식으로서가 아닌 일반적인 음료로서 마셨음은 확실히 추정해낼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 보다 훨씬 앞선 서한(西漢)시대 때부터 차가 보편적인 음료로서의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물론 그것을 마시던 계층이 왕공귀족에만 제한적으로 전파된 것인지 혹은 평민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된 음료였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더 연구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항주시 여항(餘杭) 육우천-다경 저술 유적지 표석.

 

 

이상의 여러 가지 문헌적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정리해 볼 수가 있다.

첫째, 차나무의 기원이나 차를 마신 기원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 시대가 빠를수록 모두 중국 서남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시대가 현재와 가까워질수록 그 기록은 모두 서남쪽에서부터 동쪽으로까지 확대하여 분포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서남쪽에서 동쪽으로까지 널리 확대되어가던 기록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 북쪽 지방의 음차에 대한 기록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역사적 개념과 통념적인 관점으로 중국차를 살펴볼 때 서한시대로부터 당(唐)나라 중엽의 시기는 음차(飮茶)의 시험단계인 ‘상시(嘗試)의 단계’를 거쳐 차가 사람들로부터 음료로써 인정받기 시작하는 ‘긍정의 단계’로 진입함과 동시에 음차문화가 본격적으로 ‘추진(推進)’되고 그 이론이 막 정립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라고 볼 수가 있다. 아울러 이 시기는 바로 세계최초의 차전문서적인 육우의《다경(茶經)》이 집필?완성된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회?경제?문화에 큰 영향

무릇 차나무 생장(生長)의 자연환경과 차풍(茶風)의 전개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임을 감안해 볼 때, 지금의 중국 사천에서부터 강소?절강에 이르는, 장강 유역을 연하는 지역과 아울러 사천에서 한중(漢中)지구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중국의 식차(植茶)와 차풍(茶風)의 발상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학술적으로 ‘차의 발상지’를 엄밀히 따지어 볼 때, 중국 차학계의 공통된 견해는 역시 사천지역이며,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異見)이 없다.

서한에서부터 대략 동진(東晋)에 이르는 그 중간시대의 차는 여전히 왕공귀족들만의 일종의 소일거리였지, 민간에서 일반적인 생활음료로 마시는 것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한 단계였다. 동진(東晉:서기317~420년)에 이르러서 차는 남방에서 점차적으로 일종의 보편적인 일상 생활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문헌 중에도 차와 관련 있는 기사(記事)가 상대적으로 현저하게 증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음차습관은 단지 부분적으로 남방인 들에게만 있었을 뿐이다. 북방인 들에게는 이러한 음차의 습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 늘 차를 마시는 남방인 들을 비웃기까지 하였다. 북조(北朝:서기386~581년) 때에는 고관대작들의 연회석 상에서 간혹 때에 따라 차를 마시는 일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북방인 들은 자기본위주의의 관념이 매우 강해, 모두 수치로 여겨 먹지 않았다. 단지 멀리 장강 이남지역에서 북조(北朝)로 투항해 온 남방인 들만이 차를 즐겨 마시는 오랜 생활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여전히 차를 좋아 하였다.

 

항주시 여항(餘杭) 육우천-다경 저술 유적지-소계초당.

 

 

수(隋)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고, 이어서 중국문화의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당나라가 출현하게 되자, 그동안 중국대륙에서 둘로 갈라져 발전하였던 남북의 문화는 다시 한바탕 대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 인해 둘로 나뉘어졌던 남북지역의 생활습성은 서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로 인해 남방 한족(漢族)들의 ‘음차풍기(飮茶風氣)’는 오로지 기름진 버터와 치즈만을 즐겨 먹던 북방 호인(胡人)들로 하여금 점차 차를 기호하는 습관에 물들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 음차문화에서 쉽게 찾아 볼 수가 있겠다. 예를 들어 몽골의 나이차(?茶: 우유차), 티베트의 쑤여우차(?油茶:치즈?버터차) 등이 그러하다.

호북(胡北)의 한족들 및 북방에 남아 있는 남방인과 같은 종족인 한족들의 경우는 더욱 쉽게 그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후로는 그야말로 먼 지역과 가까운 곳이 모두 같은 풍속으로 동화되어가는 ‘원근동속(遠近同俗)’의 국면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더욱이 차를 기호하는 자가 많아짐에 따라 ‘음차의 풍기’ 또한 점점 더 확산 전개되었으며, 마침내 대중화된 음료로 발전하게 된 차는 당시의 사회?경제?문화에까지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항주시 여항(餘杭) 육우천-육우상.

 

 

1)김명배 역저《中國의 茶道》(明文堂)

2)唐?陸羽《茶經》卷下<七之事>중에 “神農食經, 茶茗久服, 令人有力悅志”라고 기록

3)《周禮》<地官>. / 淸?顧炎武《日知錄》拳七<茶>條. / 金明培《中國의 茶道》21쪽 참조.

4)程?坤 外 3人 共著《飮茶的科學》(上海科學出版社)5쪽, 재인용。

5)淸?顧炎武《日知錄》拳七<茶>條. "知自秦人取蜀而后始有茗?之事。"

6)김명배 역저《中國의 茶道》(明文堂) 21쪽~22쪽 참조。

7)淸?顧炎武《日知錄》拳七<茶>條. “烹?盡具, 武陽買?”

8)《二十五史 ? 三國志》〈吳志 卷二十 ? 韋曜傳>(上海人民出版社)

 

 

 

 

(3) 중국 차풍(茶風)의 흥기와 형성

 

 

▲ 당나라의 청명차연회도(淸明茶宴會圖)

 

 

1) 중국 차풍 양성과 흥기의 배경

 

중당(中唐)이후, 차를 마시는 풍속은 그야말로 장강 이남과 이북을 휘몰아치며 최고 극성기에 이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차를 마시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매우 새롭고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심지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까지도 “차는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 되었으며, 이러한 찻잎의 대량소모로 인해 차를 심고 재배하는 지역 또한 상대적으로 증가 확산되어 갔다.

 

이후, 찻잎은 곧 정부의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거대한 재원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잡세(雜稅) 중에서도 단지 소금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조세의 일급 품목’이 되었다. 실제로 중국의 정사(正史)인《이십오사(二十五史)》의 당대(唐代) 이후, 각 왕조의<식화지(食貨志)>의 기록을 보면 가장 먼저 ‘염법(鹽法)’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으로 ‘차법(茶法)’이 기록되어 있음을 봐도 중국의 역대왕조가 얼마나 차세(茶稅)를 중요시 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당나라 중엽이후, 차를 마시는 풍속은 해가 중천에 떠서 세상을 두루 비추듯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원인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성당(盛唐)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육조(六朝) 이전에 중국의 음차풍속은 여전히 보편적이지 못하다가 당대에 이르러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선부경수록(膳夫經手錄)》에 “개원(開元:712~741년)?천보(天寶:742~756년)사이에, 점차적으로 차가 있더니, 지덕(至德:756~758년)?대력(大歷:766~799년) 연간에 이르러 곧 많아졌다.”  

 

 

▲ 五代 백유자풍로와 차복(차솥)

 

 

당의 부국(富國)ㆍ강성(强盛)의 기초는 이미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貞觀)의 치(治)’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당초의 ‘정관지치(貞觀之治)’는 부국강병만은 물론 영토의 확대와 정치ㆍ경제ㆍ문화는 물론 통치 등 여러 각 분야에서 이미 공고이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으며 대당제국의 기초를 확고히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개원ㆍ천보 연간에는 당나라의 번영과 부국강병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다.  

 

양귀비(楊貴妃)로 인해 우리들에게 만고의 혼군(昏君)으로 알려진 당 현종(玄宗)은 실제로 집권초기에 거대한 포부와 창업정신을 가진 군주로써 요숭(姚崇), 송경(宋璟), 장구령(張九齡) 등과 같은 능력 있고 덕망 있는 현인(賢人)들을 대거 등용하여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불합리한 ‘서민(庶民)정치’를 많이 개선하였다. 이로 인해 개원ㆍ천보 연간의 경제는 당대의 어느 황제 때보다 매우 견실하게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국가와 사회가 번영함에 따라 일상적인 사회소비품은 날로 증가하였고, 그 중에도 차(茶)의 소비는 당시 사회경제를 결정짓는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둘째는 수나라의 천하통일이후, 양자강 이남과 이북의 교통이 급격히 발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던 천하가 한 나라로 통일을 이루고 사회와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또 하나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바로 교통의 발달이다. 교통의 발달은 오래 동안 단절되었던 중국의 남북경제와 문화를 연결하고 빈번한 교류를 촉발시켰다. 이에 남방의 전유물이었던 차와 차문화가 북방으로 빠른 속도로 전파ㆍ보급되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험악하여 육상교통이 불편한 곳은 수대(隋代)에 이루어 놓았던 대규모 수로(水路)인 ‘대운하’로 인해 남북 간의 교통이 원활해짐으로 인해 황하와 장강의 양대 유역의 문화가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의 경제국면을 출현시켰고, 아울러 물건의 대량운반이 용이하게 되었다. 

 

 

▲ 육우의 다경(청나라 사고전서 판본)

 

 

셋째는 육우의《다경》저술로 인한 차산업(茶産業)의 발전과 음차문화의 창도(唱導)이다. 북송(北宋)의 대시인 매요신(梅堯臣)은《차운화영숙상신차잡언(次韻和永叔嘗新茶雜言)》이란 시 중에서 “육우로부터 사람들 사이에 차가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서로 배우며 봄차 따는 일에 종사하네.”라고 하였다. 이는 육우가 당대 차산업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 《신당서(新唐書)》?〈육우전(陸羽傳)〉에는 “육우가 차를 좋아하여 다경(茶經) 3편을 저술하였다. 차의 기원과 차의 제조법, 차의 도구에 대해 모두 갖추어 말하였는데, 이로써 천하가 더욱 차 마실 줄을 알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육우가 차의 생산과 제조 등의 차산업(茶産業)은 물론 일반백성들의 차를 마시는 음차풍속(飮茶風俗)까지도 창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넷째, 승려(僧侶)와 도사(道士)들의 수도(修道)생활 중의 차의 재배와 음차생활이다. 당대(唐代)의 차문화와 차산업의 발달은 ‘당대의 불교와 도교의 흥성’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ㆍ문화ㆍ경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국의 도교와 불교는 일찍이 한나라(漢代)에서부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를 거쳐 당대에 이르러서는 황제들의 관심과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그야말로 극성기(極盛期)를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사원경제도 덩달아 발전?번영하게 되었으며 당대(唐代)의 경제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은 물론 이후 역대왕조에까지 이르러서도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육우의 다경(항주차엽박물관 소장)

 

 

특히, 승도(僧?道) 양교의 주된 수련법은 모두 참선과 좌망(坐忘)인데 주로 밤에 많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련에 있어 가장 큰 장애는 잠(睡眠)의 유혹이다. 그래서 이들은 수련 중에 쏟아지는 잠을 쫓는 수단으로는 차를 마시게 되었다. 원래 수련 중에는 어떠한 간식도 허락되지 않았으나, 오직 차만큼은 수행 중일지라도 마시도록 허락하였다. 이들의 차 소비량은 그야말로 폭발적이며, 이는 당대 차 생산의 확대와 소비를 부추기는데 일조를 가하기도 했다. 때로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사원(寺院)이나 도관(道觀)에서는 그 사묘(寺廟) 주변에 직접 찻씨를 심고 차나무를 재배하며, 차를 직접 제다하여 마시기도 하였다. 이렇게 만든 차의 최상급은 부처님께 공양하고, 중등급은 향객(香客:신도)들에게 대접하며, 하등급은 남겨두었다가 자신들이 밤에 수행할 때 잠을 쫓기 위한 방편으로 마시곤 하였다.

 

특히, 불교의 음차문화는 점차 확대되어 ‘사원다도(寺院茶道)’라는 참신하고 특이한 차문화를 탄생시킴은 물론 도교와 함께 민간 다도를 창도해나가며, 더 나아가 ‘일본다도’의 전형적 모태를 형성하게 되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사상을 창출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까지 맥이 끊어지지 않고 전승되어온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차문화의 흔적은 역시 사원(寺院)이나 도관(道觀)을 중심으로 발달해온 차문화라고 볼 수 있다.

 

 

▲ 당대 차생산지구 분포도(항주차엽박물관)

 

 

다섯째, 당대(唐代)의 기후가 전대에 비해 차업(茶業)의 발전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제1온난기(溫暖期:BC 3000~1000년): 이 시기는 대략 앙소문화(仰韶文化)와 하남(河南) 은허(殷墟)시대로 황하유역에서 곧장 산동반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류(竹類)가 분포되어있었으며 안양(安陽) 은허일대에는 노루와 대나무 쥐(竹鼠), 개, 물소 등의 열대?아열대 동식물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제1한냉기(寒冷期:BC 1000~850년): 이 시기는 대략 서주(西周)시기로《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한수(漢水)가 2차례나 얼어붙었다고 한다.

 

㉢제2온난기(溫暖期:BC770~AD초): 대략 춘추시대에서부터 서한(西漢)에 이르는 시기로써 《시경(詩經)》,《사기(史記)》등의 기록에 의하면, 매, 죽, 귤, 옻 등 아열대 식물이 분포되었으며, 한기(寒期)때 보다 북쪽으로 많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제2한냉기(寒冷期:AD초~600년): 대략 동한(東漢)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시기로써 이 기간 중에는 3세기 후반쯤에 기온이 갑자기 저하되어 매년 음력 4월에도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제3온난기(溫暖期:AD600~1000년): 대략 수당오대(隋唐五代)시기로써 “8세기 초에 매화나무를 장안(長安)에 심었고, 751년에는 장안에 심었던 감귤나무에 열매가 열렸다”고 전한다.

 

㉥제3한냉기(寒冷期:1000~1200년): 대략 양송(兩宋)시기로써 이 시기엔 “태호(太湖)의 물이 언(結氷)적이 있는데, 마차(馬車)가 지나가도 될 정도로 두껍게 얼었으며, 그리고 동정산(洞庭山)의 동산과 서산의 감귤들이 모두 얼어 죽었고, 항주서는 매년 종일 눈이 내려 통상 늦봄까지 제설작업을 했다.”고 전한다. 

 

 

▲ 찻가루를 보관함-류금귀형차분합

 

 

이상의 기록들은 중국의 원시말기(原始末期)에서부터 송대(宋代)까지의 기후변화의 주기(週期)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기후의 변화 주기를 살펴보면, 당대 이전의 중국 차업(茶業)이 비록 빨리 시작되었지만, 왜 그렇게 더디게 발전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으며, 또한 당대(唐代)의 기후가 가장 따뜻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는 차나무의 발견과 차의 식용이 이미 오래 전에 시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도 발전이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왜 당대에 이르러 갑자기 흥성하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극명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王問의 煎茶圖(육우의 전다도)

 

 

이상에서 살펴 본 다섯 가지 당대 차문화의 흥성요인 중에서도 역시 ‘육우(陸羽)’는 중국다예(中國茶藝)의 발전에 있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공로가 큰 인물이다. 그는 중당(中唐)시기에 자신이 일생동안 쌓아 온 차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다경》 세 권을 찬술하여 음차의 품격을 한층 높임으로써 마침내, 중국 정신문화의 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육우의 《다경》이 나오게 되자, 도처에서 이를 흠모하여 좋아하는 자들이 잇따라 다투어 배우고 차를 받들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있어 육우의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은 정말로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이며, 후인들에게 대서특필 될 만한 것이라 하겠다.

 

 

 

 

(4) 송 · 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음차문화 전개

 

12세기 말 일본에 전래된 차풍(茶風)은 이후 '다도(茶道)'의 원류가 돼

 

2) 당나라 이전의 음차방식

 

당나라 이전의 음차방식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로 정리해 볼 수가 있다.

 

一. 품명(品茗) : 순수한 품다(品茶)를 가리키는 말이다.
二. 다과(茶果) : 품명(品茗)과 다과(茶菓)가 어울려 배치되는 것을 말한다.
三. 분차(分茶) : 차찬(茶餐)?다과?품명(品茗)이 함께 어울려 배치되는 것을 말한다.
四. 모차(芼茶) : 이것은 즉, 차죽(茶粥)을 말하는데, 가루 차(末茶)를 자기(瓷器)에 넣고 끓는 물을 부어 휘저은 다음, 다시 파나 생강 등을 넣고 조미하여 만든 죽을 말한다. 이러한 음차방법은 명?청시기에 지방에서 여전히 성행했으며, 현재에도 중국 호남(湖南) 중부 이북의 ‘안화(安化)’ 일대에서 ‘뢰차(?茶)’라는 이름으로 ‘객가(客家)인’들에 의해 여전히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 중국 호남 중부 이북 객가(客家)족의 토루(土樓) 내부 전경

 

 

당대의 주된 명차(茗茶) 제조법에는 ①추차(?茶), ②산차(散茶), ③말차(末茶), ④병차(餠茶) 등의 네 종류가 있는데, 육우는 전자 세 종(①②③)은 그냥 놓아두고, 후자(④) 한 종의 제다법(製茶法)만을 개량하였다.

여기서 ‘추차(?茶)’란 ‘거친 차’를 말하며 중국에서는 현재 ‘조차(粗茶)’로 통용된다. ‘산차(散茶)’란 떡차(餠茶)의 반대개념인 잎차(葉茶)를 가리키는 말이다. ‘말차(末茶)’는 가루차를 가리키는 말이며, ‘말(抹)차’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가루차의 섬세한 정도에 따라 글자를 분류하여 사용기도 한다.

 

 

▲ 뢰발에 직접 뢰차를 빻고 개는 장면

 

 

‘병차(餠茶)’란 찻잎을 떡처럼 시루에 쪄서 압착(壓搾)시킨 차를 가리키는 말이며, 보이차가 그 대표적인 차이다. 현대 제다법의 분류에서 대부분 녹차(綠茶)와 흑차(黑茶)로 분류되지만, 요즈음은 또 새롭게 제다법을 개발하여 반발효차인 오룡차 식으로 만든 후, 다시 병차로 압착하여 재가공?생산하기도 한다고 한다. 

 

 

3) 당대(唐代)의 음차법(飮茶法)

당대의 음차법에는 대략 다음의 세 종류가 있다.

 

一. 암차(庵茶):뜨거운 탕(湯)을 차완(茶碗) 속에 있는 말차(末茶) 위에 붓고 차를 우려 마시는 법인데, 이러한 방식은 후에 오대(五代)와 송대(宋代)의 표준음차법이 되었다.
二. 자다(煮茶): 이미 끓은 물이 담겨져 있는 솥에 말차를 넣고 다시 한 번 더 달여서 차완에 따라서 마시는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당대의 정통음차법이다.
三. 모차(芼茶):이것은 당대 이전의 음차방법으로 단지 일반 민간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모차에 대해서는 이미 위의 <당대 이전의 음차법>에서 설명하였다.

 

여기서 사용되는 ‘말차’는 지금처럼 녹차의 찻잎을 갈아서 만든 ‘말차’가 아니라 병차를 연마(硏磨: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낸 차를 말한다.


4) 송대(宋代)의 음차문화

 

송대(宋代)는 문풍(文風)이 흥성하고, 학문과 기예가 크게 발전하여 ‘음차문화’는 송대 사회에서 그야말로 정치한 면모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차와 관련된 상관지식 또한 폭 넓고 심도 있게 나타났던 것이다.

 

①투다풍기(鬪茶風氣)의 전개, ②다기제작의 정교함, ③식차(植茶)지식의 진보, ④제다(製茶)기교의 강구(講究), ⑤다서(茶書)?시화(詩畵)의 창조 등에 걸쳐 어느 한 분야라도 송나라 사람들의 지혜가 출중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대형 공과차(貢瓜茶)

 

 

중국의 음차문화는 송대에 이미 그 심후한 기초를 건립되었으며, 아울러 음차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은 단계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영향은 후대에까지 미치게 되어 ‘명?청 양대(兩代)의 음차풍상(飮茶風尙)’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송대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사랑스럽고, 존경할만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문인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 원인은 바로 당시 문인들의 문화적 소질이 높고 후실(厚實)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송대의 명인대가(名人大家)들을 살펴보면 일단은 모두 차와 연분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채양(蔡襄)같은 이는 서예에 뛰어나 일찍이 그 명성을 세상에 드러냈으며, 특히 차의 감정에 대해 아주 주도면밀하여《다록(茶錄)》을 저술하였는데,《다록》에는 건안(建安)지방의 투다풍속(鬪茶風俗)을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건안은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수길(水吉)지역이다.

 

이후, 송나라는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민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본받아 투다의 풍속이 널리 행해지게 되는 풍조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투다(鬪茶)’란 차 겨루기를 말한다.

각자가 재배하여 만든 차를 갖고 나와 서로 차의 품질을 겨루거나, 혹은 자기들끼리 상벌을 정해놓고 각자의 차를 우리는 솜씨를 상대와 겨루기도 한다.  

 

 

 

▲ 宋代鬪茶圖

 

 

여기서 독자들이 주의할 점은, “현재 중국에서는 ‘싸울 투(鬪)’자의 간체자를 중국어 발음이 같은 ‘말 두(斗)’의 자형을 빌려 쓰기 때문에 ‘투다’를 ‘斗茶(do?u cha?)’로 표기하지만 한국어로 읽을 때 ‘두다’로 읽어서는 안 되고, ‘투다’로 읽거나 ‘투차’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 중국의 ‘斗(do?u)’자는 ‘말 두(斗)자’와 ‘싸울 투(鬪)자’의 공용 글자로 사용된다.)

 

송대에 이르러, 투다의 풍조가 성행한 것 이외에도, 또 하나 제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차나무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인식이 당대(唐代)보다 한 층 더 심화?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 일찍이 다도를 통해 좀 더 거시적인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 다문화사상 최고조에 이른 송대의 차풍(茶風)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송나라에 유학 온 일본 유학승 ‘에이사이(明菴榮西)’선사는 남송(南宋) 광종(光宗) 소희(紹熙)2년(1193년)에 중국의 차 씨를 가지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묘우예(明惠) 선사에 의해 차 재배가 성공하였다. 이때 에이사이 선사는 항주 여항의 경산사(徑山寺)에 들러 당대(唐代) 고승이자 협산사 개산(開山) 종조(宗祖)인 ‘선회선사(善會禪師)’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다선일미’의 법통을 이어받은 ‘원오(圓悟)?극근(克勤)’선사에게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쓴 친필 휘호를 함께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다선일미’의 차풍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이후, 일본인들은 차를 심고, 차를 마시는 활동을 점차 전개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일본 특유의「다도(茶道)」를 성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차 씨와 차문화 또한 그 뿌리를 중국에 두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 송대 휘종의 대관다론(大觀茶論)

 

 

5) 명대(明代)의 음차문화

 

송나라 때 최고조에 이르렀던 중국음차문화의 왕성한 기운은 명대에 이르러 그야말로 또 다시 극성에 달한다. 명대에는 당(唐)?송(宋)시기의 복잡하고 번잡스러운 음차방식을 지양하고, 산차(散茶:잎차)로 우려내어 마시는 간편한 방식으로 대체하게 된다.  

 

 

▲ 명나라 사람들의 飮茶事圖

 

이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차법(茶法)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몽고족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漢族)의 왕조인 명나라를 건립하면서 가장 중요시 했던 정책 중의 하나가 바로 ‘차법’이다.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이전인 원(元)나라 지정(至正) 21년(서기 1361년)에 이미 차법을 설립하여 개인적으로 차를 국경 밖으로 수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사차출경금지(私茶出境禁止)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차에 관한 정책을 실행하였으며, 명나라 건립이후 차법은 여러 각 분야에서 더욱 구체화되어 실행된다.

 

특히 차를 사고파는 상인들에게 부과하는 ‘차세(茶稅)’와 변방민족의 통치 수단으로 진행된 ‘차마무역(茶馬貿易)’은 실로 가관이다. ‘차세’와 ‘차마무역’에 대해서는 후에 따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어쨌든 명대에 이르러 이렇게 획기적으로 개량된 음차방법(泡茶法)은 오늘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명대에는 다서(茶書)의 저술 분야에 있어서는 수적인 면에 있어서 그 어떤 왕조보다도 월등히 많았으며 음차생활에 있어서는 가히 본받을만한 방향을 확립하였다. 차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은 당나라 초기에서 청나라 말기(618년~1897년)에 이르기까지 이미 발견된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당나라 때에 육우의《다경》등 7종이 있고, 오대(五代) 때에는 전촉(前蜀)의 모문석(毛文錫)이 쓴 《다보(茶譜)》, 송대의 휘종황제 조길(趙佶)이 쓴 《대관다론(大觀茶論)》등 26종, 명대에 이르러 허차서(許次?)의《다소(茶疏)》, 나름(羅?)의《차해(茶解)》등 56종, 청대(淸代) 진감(陳鑒)의《호구다경주보(虎丘茶經注補)》등 11종 이 있다.

 

명대는 이 뿐만 아니라 음차의 유형에 있어서도 이미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표준을 마련하게 된다. 이는 음식문화에 왕성한 욕구를 보이는 중국의 한족이 송대의 까다롭고 사치스럽게 말차(가루차)방식으로 마시던 병차(餠茶)를 대신하여 출현하게 된 간결한 잎차방식의 ‘녹차(綠茶) 음용법(飮用法)’ 만으로는 도저히 차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오룡차를 대명사로 출발하는 반발효차인 ‘청차류(靑茶類)’가 등장을 하게 된다. 이는 또 하나의 참신한 차의 탄생을 알림과 동시에 새로운 양식의 다기의 출현을 예고했다.

음차법의 개혁으로 인한 다기(茶器)의 개량은 그야말로 획기적이고도 참신한 국면을 창조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의흥(宜興)의 ‘자사호(紫砂壺)’이다. 명대의 문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실생활과 예술과의 조화와 배치에도 그 능력이 아주 뛰어나 우아함(雅)과 편안함(適)을 추구하는 동시에 고요함(靜)과 흥미(趣)를 함께 강구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형적인 ‘문인(文人)?아사(雅士)’라면 당연히 차예(茶藝)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또한 실지로도 그들은 상당한 시간과 정열을 다예에 쏟기도 했다.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 불교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