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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다도/ 중국차문화사 9.10.

경호... 2013. 1. 21. 01:27

중국차문화사

(9)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다도

 

선회의 ‘다선일미’ 정신, 원오?극근(圓悟?克勤)이 중흥

 

 

경산사 전경

 

 

1) ‘다선일미’의 연원

차를 마시는 일은 참으로 즐겁기도 하거니와 바쁘거나 또는 지루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유일한 탈출구이며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에게서의 ‘차 생활’이란 이미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처럼 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나와 더불어 차를 마시는 여러 지인들의 생활 속에서도 어느덧 깊이 뿌리를 내리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기호품 내지는 취미생활로 정착한 모습을 자주 보곤 한다.
  
이렇듯 차를 즐겨 마시는 이나 혹은 음차생활에 심취한 나머지 아예 차학(茶學)의 연구에 몰두하는 이들, 더 나아가 정식으로 다도를 전공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늘 차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 한구석에는 어느덧 찻잔 속에 피어나는 수연(水煙)처럼 어느새 알 듯 모를 듯 묘연한 화두로 뇌리 속을 맴도는 문구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20여년의 음차생활은 현실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숱한 번민으로부터 나를 편안하고 즐겁게도 해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끊임없는 정신세계로 향하도록 매섭게 채찍질하는 화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선일미(茶禪一味)’혹은 ‘선다일미(禪茶一味)’였다.

 

 

경산차와 엽저

 

비록 불가(佛家)에서 비롯된 화두이긴 하나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기본적인 음차생활에서부터 다도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인이라면 한번쯤은 반드시 짚어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많은 다인들이 ‘차 모임’을 갖거나 ‘차 문화행사’를 하거나 혹은  다도에 관한 연구 토론을 할 때면 심심찮게 자주 거론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불가의 다실이 아닐지라도 적지 않은 일반 다실에 ‘다선일미’라고 쓴 편액이나 족자가 걸려 있는 것을 아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의미를 알고 걸어 놓거나 또 그 실체를 진정으로 깨닫고 걸어놓은 이들은 오히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그 심오한 의미를 이해했거나 깨닫거나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심오한 뜻이나 깨달음은 각자의 개인적인 근기(根器)에 따라 맡기도록 하고, 필자는 단지 ‘다선일미’의 문구가 나오게 된 배경이라도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서툰 식견으로 감히 ‘다선일미’의 연원이나마 간략하게 살펴볼까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일반적인 상식 속에서 자주 거론되는 ‘다선일미’는 대저 그 뿌리를 ‘일본다도’에서 자주 찾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마치 ‘일본다도’의 전유물인 것처럼 고정 관념화되어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물론, 다도에 전문으로 종사하거나 연구하는 이들은 제외되지만) 그 이유는 아마도 일본이 동양 삼국(한?중?일) 중에서 ‘다선일미’ 일구를 가장 널리 선양하고 체계화한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선일미(일본 다도) 표지

 

 

일반적으로 ‘다선일미’의 정신은 그 기원을 중국 송(宋)나라 때로 보지만, 그러나 사실 그 기원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당나라 때로 볼 수 있다. ‘다선일미’ 정신을 일본에 직접적 영향을 준 근원지는 중국 절강성 항주시 여항(余杭)의 경산사(徑山寺)이다. 경산사의 ‘다선일미’ 정신은 다시 당나라 때의 고승이자 협산(夾山)의 개산종조(開山宗祖)이며 협산사(夾山寺)의 주지로 있던 선회선사(善會禪師)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선회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다선일미’의 정신은 송나라 때에 이르자 협산사에서 선회선사의 ‘다선일미’의 법통을 이어 받은 원오?극근(圓悟?克勤)스님에 의해 더욱 일어나게 된다.

원오?극근 선사는 20여 년간 협산사 주지로 있으면서 ‘차와 선(禪)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마침내 ‘다선일미’의 참뜻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하여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네 글자를 썼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선풍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 원오선사의 문하에 크게 촉망받는 제자가 두 명 있었는데 바로 대혜종고(大慧宗?:1089~1163)선사와 호구소륭(虎丘紹隆:1077~1136)선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출가하여 협산사에서 원오 선사를 20여년이나 스승으로 모시며 정진하였다.
 
그 뒤, 남송(南宋) 소흥(紹興) 7년(1137년) ‘종고(宗?)’선사는 승상 장준(張浚)의 추천으로  황명(皇命)을 받들어 항주 여항의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아울러 ‘다선일미’의 선풍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종고선사가 경산사의 주지로 온 이듬해 여름에는 설법을 듣고자 참가하는 승속(僧俗)이 무려 1,700여명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을 위한 각종의 다연(茶宴)이 베풀어지고, 이에 따라 《선원청규(禪院淸規)》를 바탕으로 한 각종의 사찰다례의 의식 등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바로 그 유명한 ‘경산다연(徑山茶宴)’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또 일본에도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남송말년 일본다도의 비조격인 에이사이(榮西禪師1141~1215)는 두 차례나 중국을 다녀가게 되고,  에이사이선사는 이때 원오선사가 지은 《벽암록》과 함께 원오선사가 친필로 쓴 ‘다선일미’의 묵적까지 함께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뿐만 아니라 1191년에는 일본의 ‘다경(茶經)’이라 할 수 있는 《끽다(喫茶)양생기》를 저술하여 광범위하게 선도와 다도를 전파하였다.

‘다선일미’의 선풍과 함께 크게 성행했던 ‘경산다례’는 그 맥이 끊어져 현재 실체를 알 길이 없다. 단지 일본의 다도와 다례가 항주 여항의 경산다례를 전승하였다고는 하나 이미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환경에 맞게 적절히 변화하여 고착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경산다례’ 실체라고는 할 수 없다.

 

경산사 뒷산 차밭

 

 

그러나 해마다 일본의 많은 다인과 차문화답사단이 ‘경산사’를 잊지 않고 찾는 이유는 “아마도 다도생활을 통해 참된 자아와 그 뿌리를 찾기 위한 열정, 그리고 일본 다도의 최고경지로 일컬어지는 ‘다선일미’의 발원지를 친견하고 싶은 흠모의 마음과 존경심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가 중국 유학시절 ‘다선일미’의 중흥조 격인 원오?극근 선사의 묘소를 어렵게 찾았을 때, 거기에도 어김없이 일본인 방문시찰단들이 몰려 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묘소를 돌보고 있는 스님의 말에 의하면 참배자들 중에 한국인은 필자 일행이 최초라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솔직히 마음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주1) 협산(夾山):호남성(湖南省) 상덕시(常德市) 석문현(石文縣)에 있는 산.

 

 

경산사

 

 

경산(徑山) 대나무 숲

 

 

 

 

(10)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다도 2

 

일본의 '차조(茶祖)' 에이사이 선사, 일본의 다도 발전에 큰 공헌

 

 

▲ 다선일미(일본의 다도)의 책 표지

 

 

‘끽다거’라는 말은 당대(唐代) 고승이었던 ‘종심(從?)’(주 1)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종심선사가 조주(趙州) 관음사에 상주(常住)하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 칭하였다. 그래서 ‘종심’선사란 이름보다 ‘조주선사’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다. 조주선사의 ‘끽다거’에 얽힌 일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종심(從?:778~897년) 선사는 산동성 조주부(曹州府)에서 출생했으며 속성 학(?)씨, 법명은 종심(從?)이다.

 

어느 날 조주선사는 자신을 찾아 조주선원에 새로 온 학인에게 물었다.

“여기를 온 적이 있느냐?” 학인이 답하여 말하기를 “온 적이 있습니다.” 하자, 조주선사는 “차나 먹고 가게!”라고 하였다. 다른 학인에게 또 물었다. “여기 온 적이 있는가?” 학인이 “온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조주는 또 “차나 한잔 마시게!” 라고 하였다. 이를 보고 있던 주지가 괴이하게 여겨 조주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째서 온 적이 있어도 ‘차나 한잔 마시게’ 하시고, 온 적이 없다고 해도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조주는 주지에게도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답하였다. (주 2)

2)《五燈會元》卷4.

 

조주선사가 세 번씩이나 똑같이 “차나 마시게!”라고 한 의도는 학인들의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제거해 주기 위함이었다. 즉, “불법은 다만 평상 중에 있는 것이니, 기이하고 특이한 생각을 짓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일단 한번 망상분별에 빠지게 되면 곧 ‘본성(本性)’과 더불어 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선종에서 자주 말하는 ‘평상심’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차를 보면 차를 마시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으면 되는”(주 3) 평상시의 자연스러움 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선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3)《祖堂集》卷10. “遇茶喫茶, 遇飯喫飯”

 

선종에서는 또한 ‘자오(自悟)’를 강조한다. 즉, 스스로 깨달으란 것이다.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로(理路:이치)에 빠지지 말고, 순전히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참선수행을 하다가 문득 마음의 꽃이 피게 되면 곧 전혀 다른 신천지와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직 평상심만이 청정무구한 마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요, 오직 청정한 심경에 도달하는 것만이 비로소 스스로 선기(禪機)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주 4) 이후, ‘끽다거’ 세 글자는 불가와 다도에서 뿐만이 아니라 널리 승·속(僧俗)을 초월하여 많은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는 명구가 되었다. 4) 葛兆光《佛影道踪》

3) 일본의 에이사이(榮西)선사와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

 

 

▲ 에이사이 선사

 

 

중국에서 ‘다신(茶神)’, ‘다성(茶聖)’, ‘다선(茶仙)’등으로 불리어지는 당대의 육우(733~804)나, 우리나라에서 다성(茶聖)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의 초의(艸衣,1786∼1886년)선사처럼, 일본에서도 ‘차조(茶祖)’로 불리어지는 에이사이(榮西:1141∼1215) 선사가 있었다. 여기서 잠깐 한?중?일의 차의 시조 격이라 불리 우는 위의 세 인물들의 각각의 출생연대와 그들이 각기 저술한 다서(茶書)들의 연대를 가만히 비교하여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다도문화가 왜 동양 삼국 중에서 가장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이유와 그 역사적 배경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에이사이(榮西) 선사는 송(宋)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 가 불교를 배우고 돌아 간 일본의 유학승 중의 한 명이었다. 에이사이 선사(禪師)는 남송(南宋), 효종(孝宗)의 건도(乾道) 4년(1168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절강(浙江)의 천태산(天台山)과 육왕산(育王山) 등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아울러 장강 이남의 유명사찰 들을 두루 찾아 다녔다.

 

에이사이 선사가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기간은 마침 남송(南宋)의 사회경제가 소강상태에 놓여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음차풍속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은 물론, 장강 이남의 각지에는 종차(種茶), 제다, 음차 등의 풍속이 도처에 흥행하여 실로 가관이었다. 에이사이는 폭 넓게 불경을 연구하면서도 남는 시간에는 차의 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몰두하였다.

 

남송 광종(光宗)의 소희(紹熙) 2년(1191년)에 이르러 에이사이 선사는 드디어 유학을 마치고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 때, 그는 수많은 불교경전을 가지고 왔음은 물론, 동시에 대량의 차 종자까지도 함께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에이사이 선사는 귀국 후, 가져온 차 씨를 비전(肥前:현,佐賀縣)의 세부리산(背振山)에 심었다. 동시에 차 씨를 도가노오(?尾)에 있는 고우잔사(高山寺)의 묘우에상인(明惠上人)에게 주었다. 묘우에 상인은 에이사이 선사의 지도에 따라 차 씨를 도가노오(?尾)― 현, 우지(宇治)지방 ―에 심었다. 《日本의 茶道》에 의하면, 도가노오차(?尾茶)는 그 후로 “본차(本茶)라는 명성을 얻었고, 다른 고장의 차는 비차(非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우지(宇治)에서 생산되는 ‘옥로차(玉露茶)’는 이미 일본에서는 명차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에이사이 선사는 그 밖에도 차에 관한 저술을 남겼는데, 1211년에 그가 쓴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는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광범위하게 전래되었다. 이후, 일본의 독특한 다도는 점차적으로 그 학술적 체계를 확립해가며 발전되어 갔다.

 

《끽다양생기》의 저술 시기는 비록 중국 당나라의 육우의 《다경》(서기 780년에 저술)보다 약 400여년이나 늦긴 해도, 그러나 일본 내에서 음차건강법을 널리 보급하고 선전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다. 《끽다양생기》는 상?하 두 권으로 편찬되었는데, 상권 제일 첫머리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차는 말세(末世)에는 양생의 선약(仙藥)이요,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목숨을 연장하는 기묘한 술법이다. 산골짜기에 이것이 자라면 그 땅은 신비스럽다. 이것을 따는 모든 사람은 목숨이 길어진다.” (주 5)

 

5) 金明培 譯著,《日本의 茶道》(서울, 保林社)의 115쪽에서 재인용함. 이 책에는《끽다양생기》의 원문과 해석 및 주석이 상세함으로 참조 바람.

 

이어서, 에이사이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변증법을 이용하여 끽다(喫茶)가 강심(强心)과 오장의 건전(健全)은 물론 양생에 유익한 도리를 논술하였다.

 

그는 책 속에서 차(茶) 및 차의 공능과 효능에 관계있는 중국 고문헌들을 대량으로 인용하여 논술하였다. 하권에서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는 각종 질병에 대해 중점 분석하고, 그 예방과 치병(治病)의 묘술(妙術)로 ‘끽다법(喫茶法)’과 ‘상죽법(桑粥法:뽕죽을 쑤어 먹는 법)’을 제시하였다.

 

에이사이 선사는 차(茶)가 능히 만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신이 《끽다양생기》〈하권?끽다법〉에서 당나라 진장기(陳藏器)의《본초습유(本草拾遺)》를 인용한 뒤,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귀(貴)하느니 차(茶)로다. 위로는 여러 천상계의 신령에 통하고, 아래로는 배불리 먹어서 침해를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준다. 다른 약들은 오직 한 가지 병만을 치료할 뿐이나, 차는 만병(萬病)의 약일 뿐 이다.” (주 6)


6) 전게서(前揭書) 135쪽~136쪽. 원문:

“貴哉茶乎, 上通神靈諸天境界, 下資飽食侵害之人倫矣, 諸藥唯主一種病, 各施用力耳, 茶爲萬病之藥而已.” 166쪽~167쪽.

 

 

당시, 에이사이 선사는 손수 직접 찻잎을 이용하여,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대장군을 치료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오랫동안 낫지 않던 그의 당뇨는 곧 완치되었다. 이로 인해 에이사이 선사의 《끽다양생기》는 일본에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음은 물론 당시의 일본인들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들 "차가 도대체 무엇인가?"하며 그 실체를 무척 궁금해 하고 알려는 욕망이 고조되었다. 이런 것을 볼 때, 비록 중국으로 전래받은 일본의 다문화가 현재 일본만의 독특한 ‘다도(茶道)’로 발전된 것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닐 것이다.

 

 

 

▲ 경산 흥성의 만수선사 비석

 

 

 

 

-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 불교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