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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여성해방론자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Q 선생의 閑談]

경호... 2012. 12. 5. 23:40

[Q 선생의 閑談]

최초 여성해방론자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의 주제

 

 

1922년(26세)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1971, 평남 용강출신)는 「일체의 世慾을 斷하고」라는 글을 통해 “슬프고 아프던 때는 사라져 버렸다”고 선언하고, 자신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를 통렬히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결의를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내 인격을 후욕(?辱)하고 내 이름을 더럽히던 속상(俗尙)에서 나는 뛰어나왔다.

나는 지금 인생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허영도 다 ? 버렸다. 나의 행동을 변호해 줄로 믿었던 소위 재래의 모든 전통적 사상을 파괴한다는 사회주의자 무리에서도 나는 뛰어나왔다.

아! 나는 절실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개인주의!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 말인가?

나를 이제부터 살리고 나를 완성해줄 이는 오직 신개인주의 밖에 없다.

나를 완성하자. 그리고 내 자아 가운데서 엄숙한 인생을 창조하자.”

 

김원주는 1920년 도쿄 영화(英和)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여 그해 4월 재산이 있었던 남편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해방 잡지 『신여자』를 4호까지 발행한다. 남편 이노익(李老翊)과의 결혼(1918년∼1921, 4년간)은 김원주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 없는 무의미한 생활이었다.

여성이 주체가 되어 만든 최초의 잡지는 무의미한 생활의 청산(자유이혼)과 이로 인한 재정결핍으로 좌절된다. 그 후 김원주는 경제적 독립을 여성해방의 선결조건으로 절감한다.

당시 일본의 다이쇼(大正) 생명주의 시기에 민주주의와 여성해방론과 연관하여 유미주의적 개인주의 사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여성해방론은 스웨덴의 엘렌 케이(Ellen Key)의 진화론적 모성주의와 아동보호론을 배경으로한 ‘연애의 자유(freedom of love)’가 거친 ‘자유연애(free love)’로 중국과 한국에 유포되었다.

 

김원주를 비롯한 당시 신여성들은 엘렌 케이의 개인의 존엄성에 바탕한 연애론에서 인격존중에 의거한 연애와 충실한 사랑이 없는 결혼의 무의미성 및 자유이혼론을 수용했다. 이러한 사상은 봉건적 가부장 문화를 배경으로 한 조기 강제결혼을 비인간적인 처사로 인식하게 했으며, 여성의 자각적 주체성을 모색하게 했다.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1971)

 

 

그는 일본 유학을 통해 두 가지 개인주의 사조(엘렌 케이의 합리적 개인주의와 오스카 와일드류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의 흥기를 목격한 것으로 보이며, 도쿄에서 김명순과 동거하다가 귀국한 노월 임장화(蘆月 林長和)와 1923년 경부터 1925년까지 동거생활을 한다.

김원주는 이른바 자본주의적인 경쟁적 개인주의가 아닌 내적 인격의 형성을 지향하는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예술지상주의적 개인주의 철학을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보들레르, 쇼펜하우어, 니체 등을 통해 수용한 임장화와의 만남을 통해 그와 공유하는 개인주의를 심화한다.

김원주의 개인주의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장화의 사상과 연계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임장화의 사상이 그의 고백체 소설 전체가 그렇듯 관능성과 퇴폐성을 보여주는 반면, 김원주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완성을 위한 강한 의지적 노력을 보여준다. 임장화가 순간적 감각인상에 몰입하거나 부르주아적 규범에서 탈출하려는 분열된 자아를 향유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김원주는 엘렌 케이의 영향으로 보이는 ‘영육일치(靈肉一致, unity of soul and senses)’의 정신에 바탕하여 자아의 형성과 구원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원래 서구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상주의 영향 아래 사적인 감각인상에 몰입하거나 기성제도성에서 탈주하려는 개별성(singularity)을 절대시하기 때문에 자폐적 나르시즘이라는 비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개인주의도 멋부리기(댄디즘)나 반항적 글쓰기를 통해 나름의 사회적 소통을 추구했다.

김원주는 스스로 ‘영원한 저주’로 본 ‘서러움’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사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격존중’의 시대’가 도래하는 ‘때’에 ‘충실’한 태도를 갖고자 한다. 그는 고백을 담은 서간체 형식의 글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사회적 소통을 찾는다. 김원주는 근대적 산업체제에서 나온 효용주의적(utilitarian)인 개인주의나 집단적 실천이 아닌 인격적 관계의 확산을 통한 보편적 유대의 길을 찾는다.

 

“인생이 개인주의적 사상에서 다 ? 같이 완성되고 세계가 한없이 자유롭고 아름답게 될 때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고 향락하기 위하여 남의 생활을 간섭치 않으며 또는 자기의 생명과 인격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 때가 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적 확신은 예술지상주의의 주요 특징인 내적 자기분열의 고뇌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파괴적 소외를 극복하고 이를 지배하는 결단을 동반한다. 이 결단은 “자기 생명가운데 남의 생명을 발견하며 남의 인격가운데 자기 인격의 존엄을 보게 될 거인적 개인주의 시대가 올 것을 믿는” 역사적인 결의가 된다. 김원주의 신개인주의는 유미주의적 개인주의가 갖는 유아론적 성향을 벗어나려는 예술 정치학을 포함한다.

 

김원주의 ‘거인적 개인주의’는 ‘나의 부드러운 정서’와 ‘내 본성에 깊이 파묻힌 겸양’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설움 쌓인 한 줄기 희망’으로, ‘따듯한 한 줄기 일광’으로 받아들인다. 서구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나듯 부르주아의 산업주의와 가부장적 규범주의에 반항하는 탈주행위가 주는 악마적 자기 파괴성을 동반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반항적 탈주의 강도가 약할 때는 부르주아에게 귀여운 응석받이가 되었다가 도를 넘을 때는 퇴출과 감옥행을 겪는다(오스카 와일드).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기소외를 관능적으로 즐기는 퇴폐성과 부르주아적 도덕규범에 저항하는 악마성에 집착하거나, 내적 망명을 택하여 신비주의 철학에 몰입하거나, 현실을 떠나 부랑(浮浪) 지식인이 되거나 예술프로레타리아가 된다.

 

근대적 합리적 자아의 이면에 있는 가공할 분열성이 낭만주의적 유미주의에서 새어 나왔다. 가장 무서운 허무주의는 랭보(A. Rimbaud)의 도망이다.

랭보, 그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 신경쇠약자, 하릴없는 건달패, 갈 데까지 심성이 비뚤어진 위험인물, 떠도는 어학선생, 길거리 장사꾼, 써커스단의 인부, 부두노동자, 농장의 날품팔이, 선원, 네델란드 군대의 지원병, 기사, 탐험가, 잡상인 따위로 지내다가 아프리카 어디에서 전염병에 걸려 마르쎄유의 어느 구호병원에서 한 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37세의 나이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 사나이.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개인의 존엄을 함몰시키는 산업사회에 대한 저항은 세계상실과 인본주의적 자아의 상실을 특징으로 갖는다.

세계는 허공에 떠있고 당당한 계몽적 주체성은 죽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술지상주의가 경험한 세계와 인간의 종말은 근대산업의 분업체계가 낳은 산물이었으며, 그들 이전 선배들의 고상한 낭만주의가 뿌린 씨앗의 결과였다.

 

 

나혜석(1896~1948)

 

 

김원주의 지적 동료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해방의 기치를 들었던 여류인사들 가운데 김명순은 정신병에 걸려 일본 정신병원에서 객사하고 아들은 자살한다.

나혜석은 이혼을 당하고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고향에 큰 농장이 있었던 임장화는 1920년에서 25년까지 5년간 지적 활동을 하다가 잠적하여 그의 생몰연대도 불확실하다.

 

이들은 자유로운 사랑의 주체성을 사회해방의 신호로 인식했으며, 그 결과 온갖 추문과 함께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임장화는 동인지 『영대靈臺』의 원고료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도 받았다(당시 문인들 사이에서는 원고료와 술값을 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원주가 신개인주의를 분명히 내걸며 추문을 퍼뜨리는 지성계를 통렬히 비난한 것도 자유이혼론에 따라 남편 이노익과 이혼한 직후의 일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아의 형성과 구원을 향한 의지를 확인한다.

의지는 ‘외로운 나’와 ‘충실한 생활’을 연결한다. 이러한 삶은 ‘형극이 많고 도정이 먼’ ‘순례의 길’이다.

 

“나는 가슴을 헤치고 넘치는 기쁨으로써 인생을 맞아들이겠다.

[…]

인생은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잔혹하였다.

소녀시대에 부모를 잃고 형제를 영별한 나는 철모르게 청춘시대를 맞아 개성의 눈 뜰 새도 없이 나한테 아버지뻘이나 되는 이와 이해 없는 결혼을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차차 개성의 눈을 뜨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때에는 나는 단연히 이때 애인도 돈도 없이 앞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단지 대담한 일만 하였다.

그러나 요행히 모 잡지사 경영인의 호의로 지금까지 생활비만은 얻어 쓰게 되었다.”

 

이러한 궁핍의 위협에도 김원주는 ‘완전한 사랑의 경지’를 ‘신생’의 ‘지평선’으로 바라본다.

 

“나의 가슴을 쓰리게 하던 전반생은 자취도 없이 다 ? 사라져버렸다.

나의 청춘을 완전한 사랑의 경지로 인도해줄 한 줄기 빛이 무한한 지평선 위를 빛 날리며 나에게 신생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아 ? 미쁜(진실한) 신생의 길이여. 나는 그대의 가르침을 어김없이 지키리라.”

 

개인주의의 진정한 자아완성은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노선은 1923년 만공선사(滿空禪師)의 법문을 듣고 감동받고, 1933년 수덕사 덕숭산문(德崇山門)에 입문하게 되는 예후가 된다.

그 사이 1928년에는 『불교佛敎』의 필진으로 활약하던 중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불교이론에도 조예가 있었던 백성욱과 만나 동거하게 되면서 불교의 ‘절대적 사랑’,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는 사랑’의 이념을 심화하여 종교적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조실부모한 서러움과 함께 사물의 무상함과 무근거함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1920년 『신여자』의 발간 이전부터 그를 떠나지 않는 제2의 천성이었다. 입센의 노라가 당시 신여성에게는 여성이면서도 진정한 독립적 인간성을 집약하고 있는 해방의 모델이었다.

김원주는 「노라」(1922)에서 ‘우리 조선 여자 사회에 나타난’ ‘노라라는 여성’은 ‘잠을 깨어 자기의 의식을 분명히 알게’하는 ‘새벽빛’이다. ‘각성치 않은 노라’는 ‘인문 발달상에 방해가 되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이 사회는 고만한 암흑한 지옥’이 된다.

김원주는 ‘우리 여자 사회도 무수한 노라가 쏟아져 나오길 충심으로’ 바란다. 김원주의 노라가 동양의 일엽선사로 변화되는 것은 무상과 자아완성에 대한 관심 속에 이미 그 징후가 있었다. 이는 오스카 와일드가 서구 신비주의 철학과 장자(莊子)의 ‘지인무기(至人無己, 초인은 자기가 없다)’의 철학을 선호한 것과 유사성을 갖는다.

 

 

수덕사

 

 

표면상의 차이로 보면 김원주의 생애와 사상은 대체로 『신여자』발간기(1920∼1921)의 여성해방론, 『신여자』 폐간 후 여성해방론과 연계된 신개인주의론과 불교적 자아론(1922∼1933), 덕숭산문에서의 수도시기(1933∼1960), 그리고 다시 문예활동을 시작하여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임장화나 다른 신여성들과는 달리 김원주의 생애에는 무정한 세상과 서러움을 이기는 창조에의 포부가 일관된 흐름으로 있다. 그의 자아는 인격적 사랑과 예술을 형성하는 창조적 활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교에 입문해서 존재의 극치에서 만나는 무(無)는 창조성으로 가득한 우주적 자아의 본체이다. 우연이지만 그의 스승 만공선사의 법명은 ‘가득 찬 공[滿空]’으로 일엽선사는 이 개념을 자신의 불가적 세계상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충만의 철학은 빔을 통과해서 도달된다. 빔은 우주 삼라만상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한다. 우주가 부처[佛]인 바, ‘님’인 부처를 향한 사랑이란 다름 아닌 우주와의 일치이다.

잃어버린 세계, 분열된 자아는 우주와의 일치에서 회복되고 구원된다. 사바세계 속에서의 애욕의 대립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의 합일에서 비로소 통일된다. 대립의 통일, 이것이 사랑의 절대적 이념이다.

 

일엽선사는 과거 자신의 연애가 비록 거기에 사랑의 이념이 불완전한 형태로 현현되어 있었지만 상대적 대립을 면치 못한 미로였다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되찾는 사랑에서 무대립의 평안과 자유를 얻었다고 선언했다. 여성해방과 신개인주의 철학은 충만과 공의 철학에서 그 완성을 보게 된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평안과 자유 그리고 창조는 대립의 초극에서 결실에 도달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세계지혜는 그에게 차가운 세계였던 겨울 ‘밤’의 여로를 통과한 것이다.

 

김원주의 님을 향한 사랑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함께 20세기 한국 불교철학의 두 금자탑이다.

한용운의 절대적 사랑은 부재 가운데서 애달픈 동경의 이념으로 작용하고,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는 반면, 김원주의 절대적 사랑은 침묵 속의 선 수련을 통한 자각의 순간에 현전한다.

이러한 차이는 이른바 1920년대 연애담론이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전략이라는 정치적 자장(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를 통한 문화적 동화정책) 속에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원주와 그의 동료들은 개인주의 특유의 비정치적 사고를 고집한데에도 기인한다. 그들의 실천은 추한 외부세계로부터 내부로 망명한 개인의 상상력과 문예활동을 통해 조선의 상황을 구제한다는 예술 정치학이었다.

동학혁명에 두 번이나 가담했던 한용운은 민중과의 평등한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변혁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김원주의 개인주의적 사고는 봉건유습에 저항하는 저항성을 갖지만 식민지 상황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냉담했다. 그는 유미주의적인 실존적 퇴폐성과 분리되지 않는 문예활동을 현실을 고통으로 경험하고 이를 초극할 수 있는 새로운 자아의 창조로 나아가는, 선가(禪家)의 용어로는 ‘향상(向上)’의 길에 주력했다.

 

김원주는「단장斷腸」(1927)에서 화자인 나를 통해 임장화의 퇴폐적 감각을 연상시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아!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이 고통을 어찌 차마 견디나. 아! 모두 잊어버리자.

무슨 기억이고, 생각이고 하여서는 무엇하랴. 그저 모두들 모르고, 모두들 잊어버리고, 그저 어제 모양으로 혼몽 천지로 지냈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나 같은 놈은 내 정신, 내 의식만 돌아오면 쓰리고 아리고, 매운 고통뿐이니 …….

아아, 술 가운데 세상도, 사회도, 집도, 나도, 고통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아무것도 없는 오직 술 가운데만 살고 싶어라.”

 

세계의 실재성이 가하는 자아 분열적 고통은 세계를 혼몽 천지로 보고 싶어 하는 유아론적 공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내적 착시가 보는 환상 세계에는 구체적 감정들의 기복이 없다. 여성해방론에서는 영육을 갖춘 인격의 독립성이 세계의 본질적 존재로 격상되었지만, 이제 나는 세계 밖으로 축출된 비본질적인 우연적 존재로 격하된다. 퇴폐적 관점을 상징하는 술은 세계의 실재성을 파괴하는 무기이지만, 세계를 붕괴시킨 대가로 건실한 인간적 주체의 파멸이 다가 온다.

김원주는 서구 근대성에 잠재된 그리고 결국 낭만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허무주의적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술이 맨 정신으로 세계를 환상으로 보는 불교적 자아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절대적 사랑의 자아에서는 세계는 거울에 비친 영상으로 경험되고 감정들은 순화된다.

 

이상의 맥락에서 볼 때 김원주의 사상은 (1) 여성해방론 (2)신개인주의론 (3) 만공(滿空)의 철학으로 나누어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관된 관심은 개인주의와 개인의 창조적 완성이다. 그리고 개인은 사랑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진화에 의해 성숙한다.

사랑은 오늘의 인류가 아직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한 심연으로 남아있다.

사랑은 김원주에게 아마도 누구에게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대립의 고통을 구성하게 하는 어렴풋한 선험적 이념이며, 따라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찾게 하여 구체적으로 구성하게 하는 상상력의 원천일 것이다.

사랑은 미망의 원천이자 이로부터의 해방의 추동력이다.

 

이규성(e-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화여대 교수)

 

Oct 26th, 2012 / 시대와 철학

 

 

 

 

 

김일엽의 ‘침입자’

 

고적(孤寂)도 설어움도
모도 다 잊고서는
한세상 웃음웃고
살아볼까 하건마는
불의(不意)에 나타난 님은
눈물의 씨 되여라


- 동아일보 1926년 12월 8일자

 

 

1920년 <신여자> 창간인 일엽 김원주. ⓒ 한국여성사지식정보시스템

 

 

일엽 김원주는 ‘자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자식의 사랑으로 인하여 내 전 생활을 희생할 수는 절대로 없나이다.”

 

그러나 ‘인격 창조에’라는 글에서는 그 고백의 내용이 상반되게 나타난다.

“사실 여성이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것은 모성을 잘 발휘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나혜석, 김명순, 김일엽의 삶과 문학을 다루고 있는 책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생각의나무, 2000)의 저자 최혜실은 “김원주로 하여금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종교로 귀의하게끔 한 저변에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여성으로서 아니 이 세상의 한 사람으로서 “한세상 웃음웃고” 살고자 했던 일엽 김원주의 꿈은 오늘날 현재진행중이다. 시조 ‘풍속(風俗)’(신여성, 1932.11)에서 노래하듯 “볕이 귀애한다 잎피우고 꽃웃기다/ 볕의 손길 멀어진다 몸부림쳐 떨고지우니”가 아닌 “언제나 같이 푸르른 송죽(松竹)”으로 웃음웃는.

 

/국정넷포터 김주석

 

 

 

휴지(休紙) / 一葉

 

뒤뜰에 흘린 종이

날려 온 휴지임을

모름이 아니지만

하도 아쉬움 맘에

해여 나 님 던진 편지인가

만적 거려 보노라.

 

 

"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일엽(一葉)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 김원주(金元周)이고, 목사의 딸 이었던 그는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영화(英和)학교에 다니다가 이내 귀국하여, 잡지인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고, 시인으로서 신문화운동, 신여성 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으며, 신여성인 그는 당시 사회적 도덕률에 도전하는 대단한글과 처신으로, 숱한 화제에 올라 신여성인"나혜석" "윤심덕"과 함께,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었다.

 

일엽(一葉)스님은 동경 유학시절 통학기차 안에서, 당시 큐슈대학생 이었던"오다도켄(太田道灌)"가문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오른팔 격이라고한다}과, 불태운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유일한 혈육인, 김태신(훗날 법명:日堂스님)이란 아들이 하나있다.

김태신(金泰伸)은 스님이 된 어머니 일엽에게,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고아처럼 자랐지만, 아버지덕에 이당(以堂)김은호선생 문하에서 공부 했으며, 동경제국 미술대학을 졸업하고,北宗畵의 대가로 일본 화단에서 명성을 쌓았다.

 

또한 그는 학도병으로 끌려간뒤 곧 바로 광복이 됐는데, 38선을 넘어 양아버지가 계신 신천으로 가다가, 북한군에게 잡혀 해주경찰서 유치장 에 수감됐을때, 동경제국미술대학을 나온것을 알고는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해서 그렸고,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역시 14년전에 불교에 귀의(歸依)하여, 日堂이란 법호를 가진 스님으로서,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있다.

 

그리고 어머니인 일엽스님이 동경 유학시절, 한창 정열이 넘쳐 흐를때 쓴, "그대여 웃어주소서"라는 시를 옮겨보면,

 

"으셔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영역은 이좁은 내가슴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뒷담을 넘는것을 창공은 보았다 잖아요"

 

뜨거운 정열을 소진하고 난 다음에, ?아오는 허망을 노래한 일엽은, 훗날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만나 발심(發心)하여,견성암(見惺庵)에서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모험적인 연애끝에" 훗날 자신이 쓴 인생회고록의 책제목 처럼, "청춘을 불사르고" 기거하다 1971년 열반(涅槃)에 들었다.

 

 

...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직지사 중암에서 일당스님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일당(日堂)스님 90평생 맺힌 한이 黃岳山 直指寺 계곡에 잦아들고 있다....

1993년 6월 어느 날, 직지사 경내를 지나 황악산을 오를 때만해도 그가 직지사 중암(中菴)에 머물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화폭에 쏟아 붓고 있는 줄을 몰랐었다. 뒤늦게 그의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와 ‘화승, 어머니를 그리다’를 읽으면서 일제강점과 조국분단의 기구한 역사 틈바구니 속에서 한 인간이 겪어야 했던 통한의 삶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직지사를 둘러보는 이번 여행에 앞서 그를 좀 더 가까이 바라볼 기회를 갖게 되지 않을 가 하는 바램을 가졌었으나 우리가 당도해 보니 그는 이미 오래 전 직지를 떠나고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김태신(金泰伸), 그의 속명이다.

그의 어머니의 삶의 타래를 풀면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신여성 김원주(金元周), 그의 어머니는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일본의 명문가의 자식 오다 세이조(太田淸藏)와 자유연애를 하며 사랑을 나눈다.

당연히 명문가는 조선여성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한다. 1922년, 26세의 나이로 아들을 낳아 던지고 현해탄을 건너는 귀국선을 탄다. 이렇듯 자유연애를 구가한 김원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인 나혜석과 가까이 지내며 시를 발표하고 ‘폐허’ 동인으로 춘원 이광수 등과 사귀기도 한다.

뜻한 바 있어 1928년 32세의 꽃다운 나이에 출가하여 수덕사 비구니가 된다.
그의 법명 일엽(一葉)!

한 편, 세이조는 던져진 아들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온다. 일본인으로 받아드려지지 않을 자식의 터전으로 황해도에 사는 조선인 친구에게 자식을 맡긴다.
아이의 유년기 이름은 설촌(雪村). 소년 설촌은 14세 되던 때에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되고 머나먼 낮선 길을 물어 물어 수덕사에 당도하게 된다.

‘어머니~~~~’

그가 목매어 흐느끼며 누더기에 쌓인 두 무릎을 꿇는다.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거라! 나는 스님이니, 스님이라 부르거라!’

어머니의 냉냉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차디찬 법당 허공에서 메아리칠 뿐이다.

소년 설촌은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에 입학한다. 방학 때 마다 바다 건너 수덕사 어머니스님을 찾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간 데 없고 스님만이 있어 대면을 허락치 않는다.

설촌은 어머니의 친구 나혜석 화백을 이모처럼 따르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고 이당 김은호 화백에
입양되어 그림을 배우고 직지사 탄옹스님을 통해 불교에 마음을 기우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수료하고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해방 당시 유년기에 살던 황해도 신천에 있다가 남으로 내려 오지 못하고 남아 있다가 명령에 의해 그린 그의 김일성 초상화는 김일성대학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후 어렵사리 월남하여 1948년 일본의 최고 권위인 아사히미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현해탄을 건너다니면서 동양화가로 활동, 돌을 갈아 만든 석채를 사용하여 퇴락한 채색북종화의 맥을 되살리는데 힘을 다한다. 청년 雪村은 그 후 일엽스님 호적에 입적되고 어머니 조국으로 귀화하여 태신(泰伸)으로 개명한다.

어머니를 못 잊어 조선총독부 관리를 자원하고 가까이 닥아와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간 아버지 오다 세이조, 자식을 자식으로 품에 안을 수 없었던 어머니 일엽스님,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방황하는 자신의 정체성 혼돈 등 등.... 세상의 모든 것과 인연 맺음에 심한 갈등과 좌절을 느끼는 청년 태신은 눈앞에 펼처진 화폭만이 그의 자유세계이요 유일한 피난처라고 생각한다.

1988년, 청년은 어느 새 노년이 되어 66세의 나이로 직지사 관응대종사를 은사로 삼아 뒤늦게 출가하여 승이 된다. 그 후 태신은 日堂스님으로 직지사 중암에 자리 잡고 화폭 위에 한없는 고뇌를 달랜다. 일당은 그의 은사가 열반한 후 미륵종으로 개종하고 한일통합종정으로 취임하여 2008년 이래 경남 양산 법수사에서 수도와 작품활동 중이라고 한다.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던져진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하여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하였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번 여행 중 그가 떠난 직지사 경내를 거닐면서 어머니를 향한 그의 울음이 메아리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무엇이 길래 모든 것을 해탈하고 있을 법한 노승의 마음까지도 이렇게 쓰라리게 하는 것일까?!
어머니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무한사랑의 본체라고 한다. 그러나 자식을 향한 일엽의 고뇌가 어머니를 향한 일당의 고뇌만 하랴!

아직도 우리들 마음속에는 김원주 - 세이조 - 설촌 - 태신 - 일엽 - 일당 으로 연결되는 기구한 인연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는 듯하다.
덜그럭 거리며....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2011. 4. 26

 

출처 :

http://9.snubug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