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시집 낸 문정희]
사막의 목마름 담은 '낙타초',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써
어차피 詩의 산은 계속돼… 절정보다 적막에 길이 있더라
"언어의 장인(匠人)이 되고 싶어 절정을 치달았던 오랜 등반, 꼭대기인 줄 알고 올랐더니 눈앞에 더 높은 봉우리가 있었어요. 거기서 부딪힌 적막과 고독. 바닥으로 내려가 알몸 같은 언어를 쓰자고 다짐했지요. 그러자 맑고 고독한 물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생(生)의 열정을 불사르고 여성의 삶을 진하게 노래해온 문정희(65·동국대 석좌교수) 시인이 열세 번째 시집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를 냈다.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넘쳤고 사랑에 대한 갈망, 관능의 언어도 거침없었지만 이번엔 슬프고 고독한 느낌에 싸인 물방울 하나를 살결에 품고 왔다. 이번 시집에는 77편의 시와 베네치아 체류 중 직접 찍은 사진 7컷을 실었다.
문정희씨는“끔찍한 장면도 특유의 언어로 아름답게 노래한 미당 선생처럼 가락이 넘실대는 관능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채승우 기자
문씨는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카 포스카리 대학이 주관하는 예술가 초청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작년 가을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다녀왔다. 그곳에 석 달간 머물며 쓴 시편들이어서 '물'을 품었나 했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피와 눈물도 실은 물. 문학의 이미지에 대입해보니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했어요. 일생을 걸고 대결할 만한 테마구나 생각했죠."
그러나 사방천지 넘실대는 물에 둘러싸여 있었더니 도리어 물이 부재한 공간에 강하게 끌렸다.
그래서 수록 시 '낙타초'를 썼다.
'사막에 핀 가시/
낙타초를 씹는다/
낙타처럼 사막을 목구녕 속으로 밀어 넣고/
솟구치는 침묵을 심장에다 구겨 넣는다//
마른 땅 물 한 모금을 찾아 천길 뻗친 뿌리가/
사투 끝에 하늘로 치솟아/
허공의 극점을 찌르는/
비장한 최후//
뜨거운 모래를 걷는 날카로운 맨발로/
어둠 속 별 떨기 같은 독침을 씹는다//
새처럼 허공을 걷지 못해/
제 혀에서 솟은 피/
제 목에서 흐르는 선혈로 절명을 잇는/
나는 사막의 시인이다.'
사막에서 목마른 낙타는 가시 달린 풀을 삼켜 입 안에 피를 내고 그 피로 혀를 적시며 나머지 길을 간다.
시인의 시 나이 어느덧 마흔세 살.
문씨는 여고 시절부터 전국의 백일장을 휩쓴 타고난 재기(才器)였지만 쫓기듯 한 이른 결혼, 그 굴레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으로서의 지난날에 의문과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
그 허무를 달래기 위해 15년간 탄 차량의 주행거리가 5만8000㎞에 불과할 만큼 외출을 삼가고 공부에 매달렸다고 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았고, 재작년엔 스웨덴이 동아시아 시인에게 수여하는 시카다상도 받았다. 그러나 올라야 할 산은 계속 나타났다.
끝없는 부재와 고독을 깨달으면서 마음의 모서리도 한결 둥글어졌다.
"장을 보고 나오는데 누가 '아줌마!' 하고 부르는 거예요. '뭐, 아줌마?' 하며 돌아보니 노숙자가 있었어요. 속으로 '구걸에도 노하우가 있는 법이라고요' 쏘아주고 획 몸을 돌렸어요. 그게 5년 전 일이야.
근데 지금은 내가 왜 그리 화를 냈을까 웃음만 나요. 그 당시 꼴을 내가 보면 아줌마도 고급이었거든."
시인은 "그게 다 내 업보(카르마)다. 모든 일은 결국 내가 한 만큼 돌려 받는 것" 이라고 했다.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물의 언어들은 여기서 스스로 극치의 고독과 처절한 비감으로 들끓다가 마침내 어떤 변명도 필요 없고 긍지도 소용없는 홀연한 즉자의 세계를 열고 있다"고 평했다.
/ 조선
물시 / 문정희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가고 가고
가는 것들 아름다워서
주고 주고
주는 것들 풍요로워서
돌이킬 수 없어 아득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 무한함으로
부르르 전율하며
흐르는 강물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미친 약속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비늘이 돋는 것이다
짐승 바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그래서 고독은 이리 깊은가
성난 발톱으로 달려드는 절벽 아래
밤바다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바다뿐인가
내 안에서 일어서고
내 안에서 무너지는
천둥의 깊이
해골과 남루와 유랑의 불빛 출렁이는
밤바다를 생포하면 알 수 있을까
지옥보다 외로운
내 안의 내가 보일까
- 부분-
물의 도시에서 물의 몸으로 태어난 시편들!
문정희 시인은 물을 통해 미의 극치를 표상하지 않고 즉자적으로 물로서 발화함으로써 미의 극치를 실연한다. 정화와 생명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대신 물의 언어들은 여기서 스스로 극치의 고독과 처절한 비감으로 들끓다가 마침내 어떤 변명도 필요 없고 긍지도 소용없는 홀연한 즉자의 세계를 열고 있다.
―조강석·문학평론가
문정희 시인의 신작 시집 『카르마의 바다』가 문예중앙시선(020)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문정희 시인이 지난 2011년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체류하던 시기에 온몸으로 빚어낸 ‘물의 시집’이다. 모든 길이 물로써 시작되어 물로써 이르고 모든 바닥이 물로 출렁이고 모든 끝이 물에 닿는 도시에서, 시인의 ‘물에 대한 감각’은 극대화되었다. 오랫동안 생명력과 정화의 상징으로써 물의 언어를 구사해오던 시인은, 이 시집에 이르러 마침내 그 언어의 정점에 이르렀다. 먼 이국에서 온 시인에게 베네치아의 물은 사랑을 이야기했고, 형벌처럼 고독을 내리기도 했고, 상처를 치유하는 정화수가 되어주기도 했다. 이 모든 물과의 만남을 시인은 ‘카르마’로 받아들인다.
1부 ‘살결’에서는 극한의 고독과 생의 비애, 사랑의 뜨거움을 노래한 시들을 묶었다.
가눌 길 없는 슬픔(“얼마를 더 가야 하는 것일까/한없이 무거운 슬픔의 무게를”, 「시이소오」)과 대작하고, 사랑에 온몸을 던지고(“나는 한 번도 사랑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씨앗처럼 온몸을 던질 뿐이다/그때마다 불꽃일 뿐이다”, 「날벌레의 시」), 유리 같은 존재를 들여다본다(“망원경이 되어 별자리를 바라보고/하늘 중에서도 깊은 하늘을 항해하다/그만 깨지고 마는 유리를 닮은/내 사랑은 어찌하여 이리도 슬픈 두께여야 하는가”, 「유리 이야기」).
2부 ‘물결’에서는 물방울 하나에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스스로 물의 몸이 되어 쓴 시들을 엮었다. 바다 앞에서 시인은 안으로 또 안으로 사유한다
(“해골과 남루와 유랑의 불빛 출렁이는/밤바다를 생포하면 알 수 있을까//지옥보다 외로운/내 안의 내가 보일까”, 「짐승 바다」). 또 바다는 시인의 눈물을 받아주고(“내가 운다/바다 앞에 서서//나는 힘과 계산 따위를 잘 모른다/오직 눈물을 알 뿐이다//슬픔의 발원지에서 솟아나는/흐름을 알 뿐이다”, 「내가 운다」), 시를 써나갈 원동력을 준다(“어디든 솟는 물은 나의 잉크, 출렁이는 상처, 으르렁거리는 표범이니/생애의 양식 충분하다/유배가 풀리더라도/결코 아는 길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물의 초대」).
3부 ‘숨결’의 시들은 시인이 삶에 던지는 물음표와 느낌표와 마침표이다(“이곳은 어디인가/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바람처럼 가벼운 질문뿐인가”, 「질문」). 시인과 세계 사이, 이심전심의 순간을 노래하고 있다(“깃털과 별과/나 사이/통역이 필요없다//그 의미를 묻지 않아도/서로 다 알아들었으니까”, 「통역」).
이번 시집에는 이렇게 66편의 시와 함께 시인이 직접 베네치아 체류 중에 직접 촬영한 사진 7컷이 담겨 있다.
저 고양된 결핍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나는 속아서 이곳에 왔다
물을 사랑하므로 기꺼이 속아버렸다
핏방울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고
물속에 거꾸로 처박히었다
―「물의 초대」 부분
시인에게 물은 실체가 아니라 상태다. 물은 고정된 형태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을 소유할 수 있는 건 그릇에 가둘 때뿐인데, 그때의 물은 그릇을 지탱하는 내부의 안간힘으로 변환된다. 그러니까 물은 그 유동성으로서만,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의 이행으로서만 거기에 있는 것이다. 고전시대의 어법을 빌어 말하자면 이 시인에게 물은 제2성질이다. 그것은 실체에 부대하는 것으로서만, 그것의 한 시간적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계기야말로 사물의 존재를 실존에 붙들어 매는 유일한 계기가 아닌가?
시인에게 그런 실존의 양태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의 움직임, 흐름, 유동성을 표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랑만이 실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양태다.(권혁웅 해설, 「물의 노래를 들어라」)
너는 책이다 바다여
네 한 장의 취기
네 한 장의 난수표
죽는 날까지 내 앞에 펼쳐진
끝내 다 읽지 못한 한 페이지다.
―「너는 책이다」 부분
파도로 비유되는 바다 한 장 한 장에는 유랑과 은유와 성욕과 취기와 난수표가 펼쳐져 있다. 끝나지 않는 사랑과 짝을 이루어 증식하는 의미와 싱싱한 욕망과 사육제와 비의(R n)와 무한함이 이곳에 있다. 시인에게 있어 카르마란 바로 이 사랑예찬에의 의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번 생이 다하고 나서도 저 의무는 계속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권혁웅 해설, 「물의 노래를 들어라」)
/ 예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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