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怡雲)’이라는 말이 있다. ‘구름을 즐긴다’는 뜻이다. 중국 남조의 제·양나라때 유명한 도사이자 의가인 도홍경(陶弘景ㆍ452~536)이 제나라 고제의 부름을 받았다. “산중에 무엇이 있길래 그대는 미련을 두고 조정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도홍경은 이렇게 답시를 썼다. 이 시에서 이운이란 말이 나왔다.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구요?(山中何所有)
산마루에 흰 구름이 많지요.(嶺上多白雲)
다만 홀로 즐길 뿐이지(只可自怡悅)
그대에게 가져다 줄 순 없습니다.(不堪持贈君)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지면 그리워지는 게 있다. 세속을 벗어나 산중에서 경(經)을 읽으며 약초뿌리나 캐고 사는 삶이다. 필자에겐 그렇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혹여 꿈만 꾸다가 이 세상의 연기(緣起)에 묶여 그저 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아무 근심걱정 없이 자연을 벗하며 사는 은자(隱者)의 소요로운 경지. ‘이운’이 담고 있는 뜻이다. 그러나 ‘구름을 즐긴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번뇌와 탐욕으로 물든 의식을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시쳇말로 입에 풀칠하기 바빠 마음 편히 하늘의 구름을 쳐다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모산(茅山)의 도사 도홍경은 일찌감치 ‘이운’의 삶을 꿈꾸었다. 40세가 되자 그는 제나라의 꽤 높은 관직을 내팽개치고 식솔을 끌고 강소성 모산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영명(永明)의 치(治)’로 이름높은 제나라 무제가 그를 못잊어 모산에 여러번 사람을 보냈지만 응하지 않았다.
후에 양나라의 무제도 그에게 하산하여 국정을 보필하기를 권했다. 도홍경은 한폭의 그림을 무제에게 보냈다. 무제가 그림을 펼쳐보니 물소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소 한 마리는 청산녹수사이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금으로 된 멍에를 쓰고 힘들어했다. 무제는 이를 보고 더 이상 하산을 권하지 않았다. 다만 국가에 중대한 일이 생기면 사람을 그에게 보내 자문을 구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그를 ‘산중재상’이라 불렀다.
도교 모산종의 창시자인 도홍경은 모산의 산중에서 유불도 삼교를 겸수(兼修)하면서, 도교의 외단술과 양생술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갈홍(葛洪) 이후 가장 뛰어난 연단가로 알려지는 그는 의학에도 정통하여 ‘본초경집주’, ‘명의별록’ 등을 남겼다. 그의 ‘본초경집주’는 처음으로 약초의 분류체계를 세워 오늘날까지 줄곧 인용된다.
<그림삽입>역대 본초서에 실린 삽주 그림
선학(仙鶴)이 천년을 지킨 약초
도홍경이 은거한 모산은 도교 모산파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모산 삽주(茅蒼朮)라는 약초의 산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삽주는 중국에서는 출(朮)이라고 하는데, 국화과의 식물로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의 야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약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삽주는 중국의 그것과 종이 좀 다르다. 어쨌든 수년전 사스가 유행일 때 중국 당국에서 이 삽주를 활용한 처방들을 사스예방 및 치료약으로 내놓아 한동안 중국에서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삽주는 위와 장을 튼튼히 하는 작용이 뛰어나 장기능이 허약한 이에겐 최고의 영약이라 할 수 있다. 위장의 찬 기운과 담음을 몰아내 밥맛이 좋아지고 몸이 가벼워지게 한다. 또 관절이나 체내의 풍습을 치료한다. 그래서 식욕부진, 복부창만, 오심, 구토, 설사를 비롯해 몸이 무겁고 나른한 증상에 쓰인다. 관절에 물이 차는 삼출성 류마티스와 수족저림, 관절통, 부종 등을 치료하며, 습사가 심한 유행성 질병과 감기 등에도 많이 사용된다.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본초서 ‘신농본초경’은 삽주에 대해 “맛이 달고 쓰며 따뜻하다. 독이 없다. 풍한습으로 인한 비증(수족이 저리고 아픈 증상)을 치료한다. 죽은 기육을 살리고 경(몸이 뻣뻣해지는 증상)과 저(악성 종기, 피부병)를 다스린다. 땀을 그치게 하고 열을 제거한다. 음식을 잘 소화시킨다. 오래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배고픔을 잊게 된다. 일명 산계(山?)라 한다”고 하고 있다.
이 삽주는 흔히 창출(蒼朮)과 백출(白朮)의 두 종류로 나뉜다. 그런데 도홍경 이전에는 구분이 없이 그냥 출로 통용됐다. 북송때의 구종석은 “상한고방과 신농본초경에는 출이라고만 하였지 창출과 백출로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도은거(隱居·도홍경의 호)가 출에 두가지가 있다고 하여 그 후 창·백의 두종으로 나뉘었다”고 쓰고 있다.
모산의 도사 도홍경은 단면이 붉은 색을 띠는 모산 삽주를 주의깊게 관찰해 이를 적출(赤朮)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출을 적출과 백출의 두 종으로 구분했다. 또 잎의 생김새와 뿌리줄기의 맛, 약성 등의 차이를 소상히 기술했다. 그 내용을 보면 적출은 잎이 적고 백출은 잎이 크다, 또 적출은 잎자루가 없는데 반해, 백출은 잎자루가 있고 털이 있다. 뿌리는 적출이 조금 쓴 맛이 나며 기름(정유성분)이 많은데, 백출은 맛이 달고 기름이 적다 등등이다. 도홍경은 약재의 생산지와 채집시기, 채집방법과 약물의 감별법, 제련과정 등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견해를 덧붙혔다. 모두 도홍경 스스로 경험하여 얻은 내용으로 당대의 어느 의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홍경이 모산 삽주의 특징을 살려 이름지은 적출은 어느 틈에 이름이 바뀌어 송나라 이후에는 의가들이 모두 창출로 표기하게 된다. 오늘날 중국 약전에선 창출을 모(茅)창출과 북(北)창출로 나누고 있는데, 이 모창출이 바로 모산의 삽주를 가리킨다. 북창출은 만주삽주로 불리며 모창출과는 잎의 생김새나 뿌리의 기미가 조금 차이가 난다.
요즘의 식물명으로 ‘가는잎삽주’라고 부르는 모창출은 남(南)창출이라고도 하며 유감스럽지만 우리나라에선 나지 않는다. 북창출도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에서 자생하는 삽주는 중국의 관동지방에서 많이 나는 관(關)창출의 일종인데, 중국에서는 약전에 수록하지 않은 식물이다. 약재로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약재로 쓰기 때문에 주로 관동지역에서 수출용으로 재배되고 있다. 그래서 도홍경이 “동경출(東境朮)은 크지만 매운 맛이 없어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이 관창출, 곧 우리나라 삽주를 가리키는 것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중국의 창출을 구하기 어려운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이를 창출로 써왔다.
도홍경이 ‘본초경집주’를 써 6세기까지의 동아시아 본초학을 집대성했다면, 이시진은 ‘본초강목’으로 16세기까지의 본초학의 정화를 집대성한 약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도홍경이 모산에서 삽주를 찾은 뒤 거의 1천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모산 삽주와 관련해 마침 이시진의 이야기가 하나 전해진다.
모산의 도관을 참배하고 이 산에서 약초를 캐던 이시진은 바위틈에서 자라는 큰 삽주를 보았다. 향기가 멀리까지 코를 찔렀고 신령한 기운이 감돌았다. 삽주가 자라고 있는 바위도 생김새가 한마리 학과 같았다. 그는 바위를 타고 올라가 삽주뿌리를 캤다. 괭이질을 하는 도중에 조그만 돌이 하나 떨어져 나왔다. 학의 벼슬처럼 생긴 부위에서 부러진 돌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난데없이 피가 일곱방울 뚝뚝 떨어졌다. 이시진이 놀라 뒤로 물러서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학으로 바뀌어 하늘 높이 날아갔다. 삽주뿌리를 캐서 보니 신기하게도 쪼개진 면에 피빛 반점이 일곱개가 있었다.
그 후 모창출은 단면에 적색의 반점이 일곱 개가 있으며 선학이 지키는 신성한 약초여서 다른 곳의 삽주 보다 약효가 월등하게 높은 것으로 알려진다.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했다는 도홍경의 유지가 있어 혹시 선학이 1천년동안 이시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담이지만 도홍경은 85세에 승천해 신선들이 사는 봉래도로 갔다고 한다. 고서시(告逝詩) 한 수를 쓴 후 하늘로 올라갔는데, 지상에 남아있는 몸에서 수일동안 향기가 진동했고 구름과 연기가 모산의 온 산천에 자욱하였다고 전한다.
<그림삽입>모산 도사 도홍경이 제자들과 도를 논하고 있다.
음벽을 치료하는 위장병의 특효약
판소리 흥보가를 듣다보면 ‘남양 초당 경좋은데 만고지사 와룡단’이란 말이 나온다. 만고지사는 삼국지에 나오는 촉의 제갈공명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초려를 짓고 살았던 곳이 하남성 남양현이라고 한다. 이 무렵의 일인 듯하다. 갈홍의 ‘포박자’에 전하는 얘기가 하나 있다.
전쟁과 기근으로 사람들의 삶이 피폐하기 짝이 없었던 한나라 말 하남성 남양현에서 문씨 성을 가진 여자가 난리를 피해 호산(壺山) 산속으로 도망을 갔다.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굶주림으로 다 죽게 되었는데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삽주를 캐먹으라고 일러줬다.
그녀가 삽주의 뿌리를 캐먹자 배고픔이 없어지고 점점 몸에 기력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삽주를 캐먹으며 산속에서 10여년을 살다 고향을 찾아 돌아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모두 놀라워했다. 문씨의 안색은 마치 앳된 아가씨 같았고, 기력도 젊은 남자 못지 않았다. 문씨의 얘기가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남양현 인근에선 삽주가 신약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 남양현에 진자황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부인 강씨가 문득 병에 걸렸다. 식욕이 고르지 못하고 얼굴빛이 누렇고 몸이 무거워져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진자황은 사방에서 의원을 청하여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느날 그는 문씨의 이야기를 듣고 삽주를 캐다 처에게 복용을 시켰다. 그랬더니 강씨의 병이 낫은 것은 물론, 안색과 기력이 20대와 같이 되었다.
북송때의 한림학사이자 의가인 허숙미의 ‘보제본사방’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허숙미 본인이 음벽(飮癖)이라는 병을 앓은 지 30년이 되었다. 음벽은 소화기질환으로, 명치가 더부룩하고 식욕이 없으며 음식을 먹지 않아도 배가 차있는 것 같고 신물을 토하기도 하는 증상이다. 병이 깊어지면서 희안하게 여름이 되면 몸의 한쪽은 땀이 나지 않고 다른 한쪽은 땀이 났다.
<그림>삽주의 꽃. 국화과에 속하는 삽주는 7~9월경 꽃이 핀다
그는 소싯적부터 매일 시를 읊고 문장을 짓는데 시간을 보내다보니 운동이 매우 부족했다. 세월이 흘러 어린 시절의 건강한 체력이 점차 쇠약해지고 식욕도 부진해졌다. 독한 약을 써도 큰 효과가 나질 않아 모든 약을 물리치고는 다만 삽주를 가루내어 대추살과 섞어 환으로 만들어서 하루 3번씩 3개월을 복용했다. 그랬더니 음벽이 나아 배가 아프고 구토하던 증상이 다 없어졌고 답답하던 흉격이 편해지고 식욕이 살아났으며 땀도 정상이 되었다. 시력도 좋아져 등불아래서 조그만 글씨도 쓸 수 있었다. 모두 삽주의 뛰어난 효과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본초학에서 방향화습약으로 분류하는 삽주는 건위제로 소화불량증에 널리 쓰이지만 신장기능이 약해져 소변량이 적을 때, 몸이 붓고 어지럼이 있을 때, 습사로 인해 온몸이 아플 때도 쓴다. 아트락틸론이라는 정유성분이 있어서 진정작용과 방향성 건위작용을 한다. 비타민A 및 비타민D도 함유되어 있어 야맹증에도 효과가 있다. 항암작용도 있어서 중국에서는 폐암과 위암에 효과를 보았다는 보고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민간에서 위암에 좋은 효과를 보았다는 사례들이 꽤 있다.
최근 국내에선 삽주 추출물이 비듬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효능이 있고 치주질환과 치은염에도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다. 피부미백을 위한 식이섭취물로 연구되기도 하고 또 삽주에 쑥과 안신향을 가미해 멸균향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7월경부터 9월 사이에 흰 꽃이 피는 삽주는 야생화로도 제법 품격이 있다. 국화과 꽃답게 향기도 좋다. 겨울이나 초봄에 잎이 떨어지고 줄기가 남아있을 때 캔다. 우리나라 삽주는 섬유질이 많은 모근, 숫삽주를 창출로 쓰고 전분이 많은 덩이진 어린 뿌리줄기, 암삽주를 백출로 쓴다.
슬슬 삽주꽃을 보러 인근 산을 오를 때가 됐다. 하지만 모산의 삽주를 캐며 구름을 즐기던 도홍경의 '이운'은 마음으로도 시절로도 아득히 멀다.
자연마을한의원 김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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