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집을 떠올리면 말 그대로 황량한 느낌이다. 해남군 황산면 신성리. 얼마나 궁벽진지 황산면 장터로 나가려면 낮은 야산 잔등이로 난 길들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족히 20리를 걸었다. 보리와 고구마, 조, 고추, 담배, 면화 등 밭작물을 심었던 땅은 회백색의 박토인데다 희끗희끗한 곰팡이가 낀 갯돌같은 게 많아서 흙이 반, 자갈이 반이었다. 참외나 수박같은 것도 자라다 만 것처럼 자잘하여 도시에서 파는 번듯한 제 크기의 과채를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었다. 구황식물인 고구마와 감자가 그나마 잘 되었다. 지금 봐도 한해 농사라고 지어봐야 먹고살기 참 팍팍했겠다 싶은 곳이다. 키작은 다박솔, 사스레피, 정금나무같은 관목이 듬성등성 자라는, 역시 황량한 느낌의 산 두어개를 더 넘으면 바다가 나왔다.
광주에서 교편을 잡게 된 부친을 따라 일찌감치 우리 식구가 시골집을 떠난 뒤에도 조부모님은 그곳에서 사셨다. 하지만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접장이질 안한다는 박봉의 사립학교 선생 월급 때문이었는지,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유에서였는지,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방학이 되면 나는 해남으로 끌려 내려가서 보리밥과 조밥을 먹어야 했다. 겨울에는 고구마만으로 세끼를 때우기도 했던 것같다. 그런 곤궁한 형편이 억울했던, 젊었을 땐 궂은 일을 모르다가 나이들어 외진 땅에 들어와 뙤약볕에 호미질로 나날을 보내게 된 할머니는 팔자타령이 입에 붙었다. 조부는 척박한 고향땅으로 식솔을 끌고 들어온 죄 때문에 할머니의 진양조에 가까운 장타령을 참아내다가 어쩌다 한번씩 인내심을 잃으셨다.
뒤에 선친이 만든 가계보(家系譜)를 보니 동학때 문래면 접주(接主)를 한 증조(曾祖)께서 우수영 전투에서 패하여 도명(盜命)하기 위해 숨어 들어온 곳이 이곳이라 했다. 증조부께서 접주를 하신 게 사실이었는지 아닌지 보다 전투에 패해서 도명을 했다는 것이 더 눈길이 간다. 왜 그런 궁벽한 곳에서 땅을 갈고 살아야 했는지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힘없는 민초가 국가와 체제의 구속과 폭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 사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체제의 바깥으로 말이다.
한때는 체제의 바깥이었던 그 땅에서 태어난 할아버지는 청장년기에 멋진 카이저수염을 달고 대처로 떠났다가 노년이 다 되어 하릴없이 식솔을 끌고 돌아와 결국 증조부의 묘 옆에 묻히셨다. 그리고 손자인 나도 태를 묻은 곳도 아닌 그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땅은 더 이상 증조가 도명했던 체제 바깥이 아니다. 공간적인 바깥이 거의 사라진 이 시대에 국가와 자본의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증조할아버지의 방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 길을 찾기도 더 어려워진 것 같다.
비파열매. 한여름에 익는 과일이다.
시골집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어린 시절이 그리운 탓도 있지만 집 마당에 있던 한 그루 비파(枇杷)나무 때문이다. 왜정때 목포에서 사셨던 할아버지가 보고들은 식견이 좀 있으셔서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비파나무 말고도 앞마당에는 배나무 두어 그루와 포도나무, 복숭아와 무화과 나무 등이 있었다. 이 과일나무들 덕분에 산밑의 초가집, 신성리의 다른 민가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초라한 초가집이 그래도 사람사는 곳으로 비쳤던 것같다. 배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제법 커서 생각컨대 증조부 때나 심었을 것이다. 비파나무는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다는 것만 빼놓으면 크기나 생김새가 다른 나무에 비해 영 보잘 것 없었다. 그렇지만 한 겨울에 눈을 맞으면서도 조그만 꽃을 피우는 게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참으로 신기했는데, 열매를 맺는 것도 남달라서 뭇 과일나무의 과실들이 익기에는 아직 이른 7월 초여름에 살구 같이 싯노란 열매를 매달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비파나무의 비파란 이름은 잎사귀의 생김새가 ‘비파(琵琶)’라는 중국의 전통악기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최근에 우연히 중국 영화 ‘초한지’를 봤더니 항우의 여인 우희역의 유역비가 비파를 연주하는데,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악기의 생김새가 비파의 잎과 정말 흡사하다. 본초서를 보면 비파나무의 잎을 ‘엽대여려이(葉大如驢耳)’라 했는데 ‘큰 잎이 흡사 나귀의 귀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비파는 중국의 양자강 중상류지역이 원산지인 늘푸른 나무이며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장미과의 식물로 겨울에 노란 꽃들이 가지 끝에서 핀다. 암술과 수술을 같이 가지고 있어 자가수정이 가능하므로 특별히 다른 곤충의 도움을 받지않아도 열매를 맺는다. 학명은 ‘에리오보트리아’이다. 부드러운 털을 뜻하는 ‘에리온’과 포도를 뜻하는 ‘보트리스’가 합쳐진 말인데, 비파잎에는 연한 잔털이 많고 둥근 열매들은 포도송이같이 열리므로 꽤나 적절한 이름같다.
이 비파나무는 감나무나 밤나무처럼 온대지방 민가에서 흔히 심는 나무가 아니어서 남쪽의 해안지역을 벗어나면 잘 모르는 이가 많다. 그런 탓에 우리말 이름도 있질 않다. 그러나 중국에선 이 남방과일을 즐기는 이가 많았는지 삼국지의 조조가 비파를 너무 아껴 몰래 비파열매를 따먹은 병졸을 적발해 괘씸죄로 사형시키기까지 했다는 얘기도 있고, 또 당나라의 절세미녀 양귀비가 이 열매를 각별히 좋아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용안육이란 과일을 즐겼다고도 하는데 어느 게 사실인지 잘 모르겠다.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는 천하의 미식가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손님들을 맞으면 곧잘 이 비파를 대접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문인화 중 채색을 하는 남종화에는 비파나무를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은데, 길쭉넓쩍한 비파잎과 함께 주황색에 가까운 노란 비파열매가 꽤나 먹음직스럽게 그려진다. 비파열매의 크기는 살구보다 약간 작고, 잘 익으면 달콤한 맛에 더해 신 맛이 살짝 느껴진다. 육질이 부드럽고 수분이 많아 상큼하니 먹을 만한데, 열매속에 상수리 크기만한 굵은 적갈색 씨앗이 두세개씩 버티고 있어 정작 과육이 두껍지 않은 게 좀 아쉬운 과일이다.
중학교를 다닐 무렵이다. 여느 해 방학때처럼 시골집에서 여름을 나다가 세 살 터울의 삼촌과 대나무 낚시대를 들고 바다로 가 낚시를 했다. 별 생각없이 작열하는 햇빛을 받으며 바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 탈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숨쉬기가 힘들어져 땅바닥에 축 늘어졌다. 일사병, 흔히 더위 먹었다고 하는 것인데 한방에선 ‘서병(暑病)’이라고 한다. 모질게 더위를 먹었는지 수일을 혼수상태로 보냈다. 정신을 좀 차린 뒤에도 영 기력을 못 찾고 한동안 끙끙 앓았다. 그렇게 여름에 더위 먹어 죽기도 했다더니, 깜냥에도 보통 힘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방안에 누워서 한동안 앓던 기억이 소나무 기둥의 묵은 송진내와 변변한 벽지 한장 못바른 황토 토벽의 흙냄새, 들깨기름을 잔뜩 먹인 시멘트 포대 장판지의 냄새들과 어우러지며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그때 할머니가 단방약으로 먹였던 게 익모초와 비파였다. 소태맛처럼 쓴 익모초는 약이 되기는 했겠지만 비위가 약해서 도무지 먹지 못하자 비파를 따서 즙을 내여 먹였다. 고열로 인해 가뭄든 논처럼 말라붙은 입안으로 들어오는 달콤 새콤한 비파 즙은 감로수가 아닐 수 없었다. 더 먹일 것이 없어 속을 끓이던 조모가 나중엔 덜 익은 배까지 따서 즙을 내 주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잘 익은 비파의 맛에 도무지 비길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 감미로운 비파 즙 덕분에 어쩌면 병치레를 떨치고 빨리 회복이 됐다는 생각도 드는데, 왜냐하면 비파는 더위로 인한 병치레에 잘 부합하는 약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파는 여름날 갈증을 풀고 가슴의 기운을 시원하게 내려서 상초의 열을 다스리며, 폐의 기운을 이롭게 하고, 오장을 윤택하게 한다. 조모가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나오는 이런 비파의 약성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지만, 경험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타 지역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하는,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는 따뜻한 남쪽 해안지방, 해남이나 완도같은 섬 지역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던 비파는 어찌보면 퍽이나 귀한 과일이었는데, 시골집에 내려가도 때를 못 맞추면 천신하기 어려웠던 그 비파를 그 해에는 운좋게 독차지하게 됐다.
더위로 인해 그렇게 된통 고생하고 집으로 올라온 나는 두번 다시 해남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 후로는 방학때 시골에 내려가지 않아도 됐다. 몇 년 뒤 홀로 되신 조모가 광주로 올라오셨고 시골집을 지키던 삼촌도 서울로 떠난 뒤, 그 무렵 이농 바람으로 인해 버려진 농가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시골집은 지붕도 구들도 무너져내린 폐가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그리움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30대 중반쯤 서울에서 일이 생겨 해남에 내려갔다가 짬을 내어 시골집을 찾았다. 구들장만 남아 있는 집터 안마당엔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시덩쿨들과 산딸기, 찔레나무같은 잡목이 무성했다. 누가 다 베어버린 건지 마당 앞의 비파나무와 다른 과수들도 종적이 없어졌다.
비파나무가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때인데, 정몽주의 시문집인 ‘포은집’에 ‘식비파(食枇杷)’라는 시가 한 수 실려 있다. 이걸 보면 오래전부터 비파를 알고 있었다고는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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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한참 지난 후 우연히 해남 연동의 녹우당에 갖다가 고산 윤선도 박물관 앞에서 비파나무를 봤다. 마침 열매가 노랗게 익었다. 관리인의 눈을 피해 몰래 몇 개 따먹었는데 어렸을 때의 그 맛이 아니다. 과거와 달리 다디단 과일들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 입맛으로는 비파를 그렇게 맛있는 과일이라고 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해 전인가 완도에서 이 비파나무를 개량하여 열매를 크게 키워내는데 성공했다는 얘기를 듣고 옛날 생각도 나 수소문하여 사보았다. 그런데 크기가 기왕의 비파보다 조금 더 크긴 하지만 단맛이 더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그만한 정도다. 과일로써 돈 대접받기는 여전히 힘들겠다 싶었다.
요즘 들어 이 비파나무가 전남이나 경남의 해안가까운 남쪽지역에서 수익작물로 각광받으며 많이 재배되고 있는 것은 과일로 보다는 열매와 잎이 가진 약효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최근에는 비파열매로 만든 비파와인과 비파주스, 비파잎을 가공하여 만든 비파잎차 등이 약효를 선전하며 상품으로 나와 눈길을 끈다. 중국에선 비파나무를 ‘대약왕수(大藥王樹)’라고도 하는데 비파열매, 비파잎, 줄기와 꽃도 모두 약으로 쓴다.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대단한 약효가 있는 게 분명하다.
‘동의보감’에선 비파열매에 대해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폐의 병을 고치고 오장을 윤택하게 하고 기를 내린다’고 했다. 약리적으로는 당류와 주석산, 사과산, 비타민 A, B, C가 풍부하다. 몸의 열을 내리고 손상된 체액을 보충하며 갈증을 풀고 구토증을 가라앉힌다. 그래서 여름에 더위먹어 갈증이 심하고 땀이 그치지 않고 식욕이 없을 때 비파즙이 효과가 좋다. 기관지염 초기에 쓰기도 한다. 기침이 심하고 누런 가래가 나올 때 비파열매를 살구씨와 귤껍질, 패모 등과 함께 쓴다. 그렇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대단한 약효가 있다고 하기에는 그렇다.
비파열매는 그런다 치고 비파잎은 어떨까. ‘성질이 평하고 맛이 쓰며 독이 없다. 기침하면서 기운이 치밀어오르고, 음식이 내려가지 않고, 위가 차서 구토하고 딸꾹질하는 것과 갈증을 치료한다. 잎의 등쪽에 솜털이 있는데 반드시 불에 구워 천으로 그 솜털을 제거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털이 폐로 들어가 오히려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역시 이 정도를 가지고 약왕(藥王)의 생색을 내기에는 그렇다.
자료를 찾아봤더니 비파 잎에는 ‘아미그달린’과 구연산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다. 아미그달린은 살구씨(행인)나 복숭아씨(도인) 등 과일의 씨앗에 많은 성분이다. 포도씨, 사과씨, 아몬드나 매실에도 이 성분이 있다. 청산(靑酸)배당체의 일종인 아미그달린은 위장에 들어가서 분해되면 시안화수소와 몇가지 다른 물질로 바뀐다. 이 대목이 중요한데, 아미그달린이 가수분해되어 생긴 시안화수소는 흔히 청산가리라고 불리는 유독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이 시안화수소는 그러나 다량으로 섭취됐을 때는 독성을 나타내지만 소량일 때는 우리 몸속에서 대단한 치료효과를 발휘한다. 살구씨나 복숭아씨를 한방에서 중요한 약으로 취급하면서도 한번에 다량을 쓰지 않는 것은 이 시안화수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한 ‘파르마콘’, 곧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다.
가장 큰 효능은 진통작용이다. 신경통을 비롯한 웬만한 통증에는 다 효과가 있다. 또 진해 거담하는 효능도 뛰어나다. 최근에는 아미그달린이 시안화수소로 바뀌면서 강력한 항암작용을 한다는 연구도 나왔다. 아미그달린은 몸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혀 독성이 없지만 위장에 들어가 시안화수소로 분해됐을 때의 치사량은 405mg 정도라고 한다. 이 만한 양이 일시에 몸에 들어가려면 사과씨를 250g을 모아서 한꺼번에 먹어야 한다. 그 독성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닌 듯하다.
비파잎의 아미그달린을 활용하는 방법은 전탕하여 먹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비파엽 요법’이라 하여 일본에서 민간요법으로 쓰였다는 비파잎 압찰법이 유명하다. 일본 삿뽀로 철도병원의 후쿠시마(福島) 박사에 의해 발굴되어 알려진 비파엽 요법은 비파잎을 불에 구워서 환부에 잎을 대고 문지르는 소박한 민간요법인데 거짓말처럼 보일 정도로 거의 만병을 치료하는 기적적인 효능을 발휘한다. 그는 이 방법으로 결핵성 복막염과 소아마비, 하복부와 허리의 농양, 소화불량으로 인한 각종 소모성 질환, 야뇨증 같은 증상을 치료했는데, 암을 비롯한 각종 난치병, 성인병에도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비파잎에서 나온 시안화수소가 가스상태가 되어 몸에 흡수되면서 그런 효과를 낸다는 것인데 여기에 착안한 비파잎 뜸이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필자도 한의원에서 이 뜸을 더러 활용하고 있는데 격외의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중국에서도 이런 민간요법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생각컨대 대약왕수란 이름이 허투루 붙었을 리가 없다.
아웃도어 라이프를 실천하며 일본의 남쪽에 있는 작은 섬 야쿠시마에서 농사짓고 살았던 자연주의 철학자 야마오 산세이(山尾三省)의 글을 보면 비파나무를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다. 이 비파나무나 키우면서 나도 야마오처럼, 혹은 증조부처럼 체제의 바깥을 도모할 수는 없을까 하는, 오래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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