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꽃 / 이용악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 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 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방울도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이 시는 묘하다. 오랑캐는 바로 여진족이고 고려 장군은 윤관(?-1111)이다. 이용악은 고려가 정벌했던 여진족을 떠올리며 애상에 잠긴다.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인 도래샘, 벼처럼 생긴 띠로 엮은 지붕의 띳집, 돌 몇 개를 고아놓은 가마솥인 돌가마, 털로 된 신발인 털메투리. 이것들은 여진족의 일상에 있던 사물이다.
제비꽃의 다른 이름인 오랑캐꽃 앞에서 시인은, 윤관장군에게 쫓겨가던 여진족의 슬픈 삶을 동정하고 있다. 비록 고려가 우리 겨레였고 여진이 이민족이었을망정, 쫓기는 자의 심정은 다 같다는 감정이입이었을 것이다. 마치 슬픈 사람을 껴안아주듯 제비꽃을 감싸며, 실컷 울어나 보라고 말하는, 1947년의 시.
이상국 .시인
오랑캐꽃은 1940년 10월 인문평로네 실렸던 작품이다. 이용악은 1914년 함경북도 경성읍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상지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유학 중이던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분수령(동경, 삼문사, 1937), 낡은 집(동경 삼문사, 1938), 오랑캐꽃(아문각, 1947), 이용악 시집(동지사, 1949), 이용악 시선집(창작과 비평사, 1988) 등이 있다. 해방 후 좌익운동에 가담,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이 시는 이용악의 대표적인 시로 이용악이 이 시를 발표한 후 서정주의 귀촉도에 비유하며 좋아했다는 말이 있다.
이 시에는 제목 다음에 "긴 세월을 오랑캐와 싸흠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라는 제사가 붙어 있다. 흔히 제사는 시의 본문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비유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제사는 시의 내용을 혼돈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 것처럼 보인다. 이 제사와 관련하여 오랑캐꽃의 의미를 찾는 연구들이 전체적인 시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실패하는 원인도 거기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시에서 오랑캐꽃은 오랑캐가 아닌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 시인이 이 제사를 넣은 이유는 아마 일제의 눈을 의식해서 의미에 혼란을 가져오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3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첫 번째 부분은 고려 시대 국경을 넘나들며 우리 민족을 괴롭히던 오랑캐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려는 변방을 침입하던 오랑캐들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구성을 쌓는 등 북방정책을 전개한다. 이런 북방정책으로 인해 오랑캐들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버리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쫓겨갈 수밖에 없었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경황없이 쫓겨났는지를 말해준다. "도래샘", "띳집"은 오랑캐들이 사용하던 샘과 띠로 이은 집을 의미한다. 고려장군들이 쳐들어와 오랑캐는 도래샘, 띳집 같은 누대로 살아온 정든 것들을 돌볼 새 없이 가랑잎처럼 굴러갔다고 말하고 있다.
2연은 역사적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랑캐들이 북방으로 쫓겨난 골짜기마다 구름이 모여들고 또 흘러가고 몇백년이 흘러갔고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시대에 이르렀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오랑캐꽃은 오랑캐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현재 시인과 더불어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마지막 3연은 오랑캐가 아닌 오랑캐꽃에 대한 진술이다. 오랑캐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고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른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즉 오랑캐와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r오랑캐와 아무 관련도 없으면서 오랑캐꽃이라 불리는 꽃은 무엇인가. 앞 부분에서 이 시는 오랑캐가 고려장군에 의해 쫓겨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오랑캐꽃은 단순하게 모양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오랑캐가 아니면서 오랑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존재, 즉 고향과 터전을 버리고 쫓겨날 수박에 없는 존재를 의미해야 한다. 고려 시대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일제시대에 오랑캐도 아니면서 오랑캐처럼 쫓겨나는 처지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이다.
마지막 두행에서 시인이 오랑캐꽃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느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20년대 이래 가혹한 경제수탈로 고향을 등지고 만주 등지로 떠나는 유랑민이 급증했다. 30년대에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수탈과 만주 침략을 위한 이민정책은 유랑민의 수를 더욱 급증하게 만들었다. 이 땅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빼앗기고 오랑캐 아닌 오랑캐 처지가 되어 강 건너로 쫓겨나야 했던 반어적인 현실을 이용악은 오랑캐꽃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움 /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1945년 겨울에 창작되고 네 번째 시집 '이용악집'에 수록된 이 시는 이용악의 시에서는 보기 드문 연가풍의 작품이다. 1939년 이용악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최재서가 주관하던 '인문평론'의 편집 기자로 근무하다가 1942년 고향 경성(鏡城)에 돌아가 있던 중, 1945년 해방되자마자 귀경(歸京)하여 그 이듬해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이 시는, 해방 직후 혼자 상경하여 서울에서 외롭게 생활하던 그가 무산(茂山)의 처가에 두고 온 그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진 자유시이지만, 의미상으로는 기·승·전·결의 전형적 형식에 수미 상관의 구조를 곁들인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연[기]에서 시인은 '북쪽 작은 마을'에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으며, 2∼3연[승]에서는 어느덧 시인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북쪽의 가족을 찾아가는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 그 곳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 백무선 철길'을 이용해 '느릿느릿 밤새어 달려'야 다다르는 깊은 산골이다.
지금쯤이면 그 곳으로 향하는 화물열차의 검은 지붕에도 눈이 내릴 것이며, 가족들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4연[전]에서 화자는 그들이 못견디게 그리워진다.
그러므로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이라는 시행의 '차마'라는 시어 속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 어쩌자고 잠을 깨어'라는 구절은 바로 시인이 머물고 있는 서울도 잉크병마저 얼게 할 정도로 추운데, 그 곳 무산의 가족들은 얼마나 추울까, 하는 화자의 가족들에 대한 염려가 잘 드러나 있다. 5연[결]에는 '북쪽 마을'에 함박눈이 쏟아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1연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묻는 단순한 질문이라면, 5연은 동일한 시행이면서도 시인의 그리움 내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마침내 눈으로 화하여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잉크도 얼어붙게 할 정도의 추위를 몰아오는 '함박눈'임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것을 '복된 눈'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태도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가족들을 처가에 남겨 두고 상경하였던 그로서는 '눈'을 새 시대를 위한 하늘의 축복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시는 '북쪽'에 두고 온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함박눈'과 추위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으며, 잉크마저 얼어붙게 하는 모진 추위는 역설적으로 시인의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 주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씩의 별 / 이용악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 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도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 얼마전 '이용악 특집'을 했기에, 당분간 이 시인의 시를 피해야겠다 싶었는데, 이 시를 읽고는 다시 그 매혹에 지고 말았다.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누워서 별을 보는 사람들. 땅 위에서야 정처없이 유랑하는 존재들이기에 별만은 하나씩 굳은 자리를 차지하여 앉고 싶었다.
두만강, 쟈무스(중국의 러 국경), 남도, 함경도가 덜컹거리는 느린 열차 위에 나란히 누웠다.
<닥터 지바고>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부럽던가. 1949년 이용악이 내놓은 저 생생한 서사시를 모른 채 지나치는 인생은 얼마나 슬픈가.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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