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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명학의 정신과 그 발전 / / 정인재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경호... 2012. 7. 2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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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가?(Ⅰ)

 

인문학 강의 _ 양명학의 정신과 그 발전

 

현재 중국에서 양명학은 주자학과 함께 신유가 철학(Neo-Confucianism)의 양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주자학은 이학(理學)혹은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부르며, 양명학은 심학(心學) 혹은 육왕학(陸王學)이라고도 한다. 주자학은 송 대에 일어나서 처음에는 위학(僞學)이라고 비판받았지만 관학(官學)이 됐고, 양명학은 명 대에 일어나 민간강학(民間講學)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주자학과 양명학 모두 한국과 일본에서 이를 수용하여 동아시아 철학의 주요한 사조의 하나가 됐다.

 

먼저 심학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 양명학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와 같은 이단(異端)의 대상이 됐다. 심지어 정통을 자부하는 주자학자들은 양명학을 불교보다도 더 위험한 학문으로 보았다.

조선시대에 양명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1569-1618)이 양명학자이며, 『우서(迂書)』를 저술한 농암(聾巖) 유수원(柳壽垣;1694-1755)도 역시 사민평등을 주장한 양명학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자학자 집권 세력의 탄압을 받아 처형됐다.

현대에 우리는 한국 현대 양명학자 두 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분은 일제 시기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양명학의 정신으로 유학을 새롭게 정립하려고 노력했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이며, 다른 한 분은 하곡학을 계승해 현대 한국양명학의 길을 가르쳐 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다.

 

 

▲ 왼쪽부터 백암 박은식과 위당 정인보

 

 

백암 박은식 VS 위당 정인보

 

우리나라 현대 양명학의 개척자인 백암 박은식 선생은 19세기는 서구의 시대이지만, 21세기는 동양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백암은 독립운동가로서 제2대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 젊어서는 주자학을 공부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유학이 새롭게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했다.

이것이 바로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이다.

백암은 당시 서양에서 들어 온 진화론(物競天擇)을 천지만물이 일체라는(天地萬物爲一體) 양명학의 사상에 결합시켜 세계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진화론은 대외적 경쟁원리는 될 수 있어도 동포끼리 또는 개인 사이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포 사이에는 다만 대동(大同)의 원리만이 있다는 것이며, 대동원리는 사덕사리(私德私利)를 극복하고 공덕공리(公德公利)를 추구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사상이다.

경쟁의 시대에 그는 종교에서 세계 평화의 기초를 찾았다. 박은식은 양명학에서 유불야 삼교의 합일을 도모했고, 그것은 오늘날 종교 간의 대화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조선시대의 하곡학을 계승하고 현대 양명학을 열어준 위당 정인보 선생은 조선시대 주자학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는데, 주자학을 하는 사람은 오로지 존화파(尊華派) 와 사영파(私營派) 둘뿐이라고 했다. 위당은 진실과 가식(眞假)을 엄격히 구분하는 난곡의 비판 정신을 계승했다.

1930년대 위당이 주축이 돼 조선학 운동을 일으킨 것을 실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실학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실제적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추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학은 중국이 아닌 우리의 역사 문화 어학 제도 등을 실심으로 연구하는 것이었고 양명학은 위당을 통해 실심실학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이다. 위당 이후 실학의 개념은 근대화라는 구호에 맞춰 도덕적 실심이 빠진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치용(經世致用) 등 이익추구의 실학으로 변질됐다.

 

오늘날 양명학이 왜 필요한가?

 

현대 우리 사회는 모든 면에서 서구화됐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방식은 여전히 전통적인 것이 많이 남아있다. 따라서 서양의 이론 잣대로만 우리 사회를 잴 수 없고 그렇다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우리 사회를 이해할 수도 없다. 양자(兩者)가 다 필요한 시대에 이를 종합할 창조적 사고가 요구되는 때이다.

양명학을 통해 잃어버린 덕성(德性)의 회복이란 화두를 던진다. 덕성이란 한 마디로 말해 감성(感性)과 영성(靈性)을 모두 포함한 도덕적 생명의 이성(理性)을 말한다. 덕성이 없는 감성은 감각적 욕구에 내맡겨 향락과 퇴폐에 빠질 수 있고 덕성이 없는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도구 역할을 할 우려가 있으며, 덕성이 없는 영성은 구복의 신앙에 빠질 우려가 있다.

지금 우리는 양명학의 새로운 부흥, 좀 더 정확히 말해 하곡학의 르네상스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과거에 유학은 불교와 노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뒤에야 새로운 철학을 창조했는데, 이것이 신유학(Neo-Confucianism)이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간신히 이어져 온 하곡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유학의 르네상스 = 신유학

 

철학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송 대에, 양명학은 명 대에 각각 발전하였다. 그러나 주자학과 양명학은 둘 다 신유학(Neo-Confucianism)에 속한다. 이 유학은 공자, 맹자, 순자의 원시유학(原始儒學, Original Confucianism)과도 다르며 한당대(漢唐代)의 경전유학(Classical Confucianism)과도 다르다.

이 유학은 불교와 노장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생명 중심의 새로운 유학체계를 만들어 낸 것으로, 유학의 르네상스(文藝復興)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신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성학(聖學), 둘째 도통(道統), 셋째 경전(經典), 넷째 서원(書院), 다섯째 정치 제도의 5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학은 신유학의 주자학이나 양명학을 막론하고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학문이란 뜻이다. 신유학에서 성인이 되는 길은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없애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자학이나 양명학 모두 성인이 되기 위해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없애는 것(存天理 滅人欲)을 수양의 목표로 세워놓은 것이다.

또한 성인이 성인에게 전해준 학문을 도학(道學)이라고 하며, 이들이 전해준 도(道)의 전통을 도통(道統)이라 한다. 도학이란 성학의 다른 표현이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또는 주자학을 도학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주자학만이 유학의 정통(Orthodox)이라는 말이자, 그 이외의 학문은 모두 이단(異端)이라는 것이다.

한편 성학을 강의하려면 경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서(四書)』이다.

『사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가리킨다. 그런데 송 대 주자에 이르러 『사서』는 신유학의 새로운 경전으로 태어났는데, 그 이유는 주자가 도통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경전을 배우고 강의하는 학교를 서원이라고 한다. 신유가는 개인적인 자격으로 서원을 창설했는데, 이 점에서 국가에서 세운 학교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저명한 스승과 그의 제자들이 공부하던 곳이 점차 서원으로 바뀌었다.

또한 신유가는 요순 및 삼대를 이상적 정치 모델로 삼았다. 이것은 성학에서 이미 밝힌 대로 도덕 정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북송시기 정호(程顥)는 10가지 사항을 황제에게 올려 논했는데, 이것이 신유가 정치 이론의 가장 좋은 사례가 됐다.

 

 

 

양명학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가?(Ⅱ)

인문학 강의 _ 양명학의 정신과 그 발전

 

 

 

 

주자학과 양명학은 무엇이 다른가?

 

친민과 신민

 

친민과 신민은 『대학』의 삼강령을 달리 해석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대학』에 “대학의 길(大學之道)은 밝은 덕을 밝히는(明明德) 데 있고, 백성을 친애(親民)하는 데 있고, 지극히 선함(善)에서야 그치는(止於至善) 데 있다”는 명제가 있다.

주자는 『사서집주』의 「대학장구」를 해석하면서 둘째 구절인 친민을 신민(新民)으로 바꿨다.

그런데 왕양명은 『대학고본』대로 친민을 그대로 두고 해석했다. 이 문제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주자의 신민설은 덕을 밝힌 지도자(士)가 일반 백성(農工商)을 계몽해 낡은 구습을 버리고 새로운 백성이 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백성은 다만 새롭게 만들어지는 교화의 대상이 되는 타율적 존재일 뿐이지 스스로 새로워지는 능력을 갖춘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된다.

 

왕양명은 ‘스스로 새로워지는 백성’으로 신민을 해석해 백성이 스스로 새로워지는 자율적인 존재임을 확인했다. 이것을 백성을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의 백성을 대상화시키고 타율적 존재로 보는 견해와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것이다. 왕양명의 ‘친민’은 이런 자율적인 백성을 가까이 하는 것을 말한다.

주자학에서의 명명덕과 신민은 자기와 타인을 엄격히 구분해 간극(間隙)이 생기는데 반해 양명학에서의 명명덕과 친민은 서로 나눌 수 없이 생명이 감통(感通)하는 것이다.

 

이기론(理氣論)

 

신민은 주자학이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 즉 이기론(理氣論)에서 나온 산물이다. ‘이(理)’란 궁극적 표준 곧 태극이며 형이상의 도(道)인데, ‘기(氣)’는 음양과 오행으로써 끊임없이 운동·변화하고 있는 형이하의 그릇(器)이라고 본 것이다.

주자학은 이(理)와 기(氣), 마음(心)과 본성(性)을 둘로 나눠 본성은 천리(天理)요 마음은 기(氣)의 작용이라고 보았다. 양명학은 이기(理氣)는 물론 마음과 본성을 구분하지 않고 마음이 바로 천리라고 본 것이다.

마음이 본체인 동시에 작용인 체용일원(體用一源)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理)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지도자와 기(氣)에 따라 사는 백성 둘의 관계를 상하(上下)와 본말(本末)로 본 것이다.

 

이것은 특히 사(士)가 형이상의 근본적인 상위의 지도자인데 비하여 공상(工商)업은 형이하의 말단적인 직업이라고 본 사민론에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주자학은 ‘이(理)’를 궁극적 실재요, 표준(太極)으로 보는 이본론(理本論)의 이학(理學)이다.

이와 달리 양명학은 이기(理氣) 합일론과 도기(道器) 합일론을 주장한다. 마음에서 이기가 합일되고 도기가 합일되기에 마음(心)을 궁극적 실재요, 표준인 태극(太極)이라고 본다.

이것을 심즉리(心卽理)라고 하는 심본론(心本論)의 심학(心學)이다. 이와 기, 도와 기가 서로 나눠지지 않는(不相離) 관계로 본다. 여기에서는 형상과 형하의 차별이나 근본과 말단의 구별도 없게 된다.

지도자나 백성 모두가 같은 마음(本心)을 가지고 있으므로 상하의 차별이 생기지 않는다. 벼슬한 선비나 농사짓는 농부나 공장에서 기술을 발휘하는 노동자나, 상품을 유통시키는 상인이나 모두 자기 마음의 표준인 천리(天理)에 따라서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면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심성론(心性論)

 

주자학에서의 심성론은 이기론에서 연역된 것이다. 주자는 마음(心)과 본성(性)뿐 아니라 본성과 정감(情)을 엄격히 구분했다. 본성(性)은 마음(心)속에 내재한 천리(天理)이지만 마음(心)은 본성(性)과 정감(情)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는 기(氣)의 정상(精爽)이다(心統性情). 따라서 본성은 천리이기 때문에 성즉리(性卽理)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마음(心)은 결코 양명학에서처럼 천리(心卽理)가 될 수 없다.

 

마음은 정감(情)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 정감은 본성이 발현된 것(性發爲情)이다. 정감에는 도덕적 정감인 사단(四端)과 자연적 정감인 칠정(七情)이 있다.

사단은 맹자가 말한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 네 가지이며, 칠정은 기쁨(喜), 성냄(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惡), 욕심(欲) 일곱 가지를 말한다. 정감을 제어하기 어려운 이유는 정감이 바로 인간의 욕심(人欲)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양명학은 본성과 마음 그리고 정감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심성(心性)이 합일되고 성정(性情)이 합일돼 있다. 따라서 심성정(心性情)은 하나로 돼 있는 것이다. 마음은 옳고 그름을 직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 원리(天理)이므로 심즉리(心卽理)라고 했다.

 

주자학에서의 마음은 순자(荀子)적인 인식심이 강하고, 양명학은 맹자(孟子)적인 도덕심이 위주다. 이런 도덕심을 맹자는 본심이라고 했고, 양명학에서는 이런 본심을 천리인 실체로 보았는데 주자학에서는 본심을 천리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마음이 바로 천리이므로 마음은 자율적 도덕의 주체이다.

따라서 시비판단을 마음의 양지가 한다. 이런 마음은 사농공상 모든 백성이 다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가 어떤 직업에서 일을 하건 양지인 천리를 실현하기만 하면(致良知)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주자학은 성인이 되는 길을 선비(士)위주로 생각했는데, 양명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개방한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본성이 실체이다. 따라서 마음은 항상 본성(天理)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마음은 자율적 판단 능력이 없고 본성을 판단 능력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 본성인 천리가 외재화된 것이 예(禮)이다.

이에 따라 마음은 예를 잘 인식하고(格物致知) 이를 잘 지켜야 인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禮)는 바로 외적으로 정해진 이치(定理)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정해진 예법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제도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예법도 때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마음의 자율성에 의하여 시대에 맞게 드러나는 이치를 조리(條理)라고 한다.

 

공부론(工夫論)

 

인간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그 무엇이 되기 위해 부단히 자기를 초극해야 하는 존재이다. 신유학은 바로 성인(聖人)이 되려는 것이다. 주자학이나 양명학은 모두 다 성인이 되기 위해 자기 수양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 성인이 되려는 목표는 같다.

그러나 어떻게 성인이 되는가 하는 길(方法)은 서로 달랐다. 주자는 내적 존덕성(尊德性) 즉 거경(居敬)과 외적 도문학(道問學) 즉 궁리(窮理) 두 가지 공부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양명은 두 가지를 나누지 않고 간단히 치양지(致良知)를 공부 방법으로 삼았다. 이것은 양지를 어떻게 사물 하나하나마다(事事物物) 다 실현시키는가(事上磨鍊) 하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다.

 

 

 

도덕적 주체로서의 양지란 무엇인가?(Ⅰ)

인문학 강의 _ 양명학의 정신과 그 발전

 

 

▲ 왕양명의 초상과 그의 어록인 전습록

 

 

이성은 모두 도구적인 것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도덕적 이성도 있다. 양명학에서는 이것을 덕성(德性)이라고 불렀다. 그 자체가 덕성이면서 그것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양지(良知)이다. 양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양심(良心)과 같은 말이다. 양심 그 자체를 아는(知) 것이 양지이다.

이 마음에 따라서 반듯하게 살아야 참된 사람이라고 했던 조상들의 교훈은 오늘날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성인이 되지 못하면 현인이 되고, 그렇지도 못할 경우는 군자(君子)가 돼 자기 일보다 남을 우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공부하고 수양을 했다.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

해석에 대한 회의(懷疑)

 

신유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업적 위주의 학문(爲人之學)보다는 자기의 훌륭한 인격 완성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그것은 인간을 미완성의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 완성의 최고 목표는 바로 성인이 되는 것이다.

 

성인이 되는 주자학의 격물치지란 무엇일까? 격물치지라는 말은 『대학』에 처음 나온다. 격물치지설은 주자의 인식론의 핵심이다. 주자는 분명하게 알아내는 주관과 알려지는 대상을 구분했다. 인간 마음의 영특한 지각 능력으로 천하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캐물어 간다. 이런과정을 오래 거듭하게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사물에 대한 현상과 본질, 상세한 내용과 그 전체 대강을 환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 하는데 이때에는 주관과 대상이 하나됨을 말한다.

 

여기서 인식 주관인 마음의 영특한 지각 능력과 인식 대상인 천하 사물의 이치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각이 마음 밖의 사물의 이치를 캐묻는다. 이것을 궁리(窮理)라고 한다. 그것은 마음이 사물에 다가가서 그 사물 속에 있는 이치를 캐물어 그 이치를 알아내는 즉물궁리(卽物窮理)이다.

격물은 인식주체가 사물의 이치를 찾아내는 것을 말하고, 치지(致知)의 지(知)는 지식을 말하고 치(致)는 넓히는 것이다. 사물 속에 가지고 있는 이치를 캐물어서 끝까지 알아내어 사물에 대한 지식을 넓힌다는 말이다.

 

주자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그리고 한 포기 풀, 한 그루 나무도 모두 이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자학의 격물치지는 사물,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이치를 캐물어 그것을 알아서 지식을 넓히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가 그렇게 쉽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귀납적 연구를 거듭하여 쌓였을 때 비로소 비약적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자학에서의 외물은 궁리(窮理)의 대상이 됐고, 마음속의 본성은 거경(居敬)의 대상이 됐다. 그러니까 본성은 늘 마음에서 볼 때 타자(他者)였다. 본성이 외재화(外在化)된 것이며, 마음이 본성을 따라가든 예를 따라가든 마음의 기능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스스로 입법한 도덕 판단의 능동적 자율적 주체로 본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인 본성에 늘 복종해야 하는 수동적 타율적 존재로 파악한 것이다.

 

주자학적 사고의 역기능

 

주자학적 전통 탓인지 우리 학교 교실엔 질문이 없다. 좀처럼 자기의 견해를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을 펼칠 줄 모르고 또 이런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어린이가 착하다고 칭찬을 듣는다. 낙타처럼 순종하는 이 착한 어린이가 주입식 교육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통한다. 그래서 부모가 선행학습을 시키면 왜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워도 그대로 따라한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갑자기 사자로 변해 반항을 하거나 가출하여 비행 청소년이 되기도 한다. 학교에서 수업은 물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선진국을 따라잡느라고 앞만 보고 내달려 왔다. 마음 밖에 있는 모델을 잘 배워 내 것으로 만드는 주자학적 사고가 순기능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역기능으로 작용할 소지도 없지 않아 한 사람을 우상화시키고 이를 모델로 하는 경우 그를 무조건 따르는 신도만 양산하게 된다. 조직 속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할 뿐이다.

짜여진 틀(조직 사회) 속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직의 비리를 알고도 말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여기서는 자율적 도덕 주체를 가진 양심적인 사람이 살아남기에 어려운 환경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각자가 스스로 모델이 돼 창조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개체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양명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깨달음과 마음=이치(心卽理)

 

왕양명은 20년간 주자의 격물치지를 놓지 않고 체험하고 사색하다가 자연과 사회 환경이 열악한 유배지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며 돌무덤을 파놓고 죽을 각오를 하면서 마침내 그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는 양명이 도를 깨치는 과정에서 자신은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겪고 시종하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는 상황 속에서도 시를 짓고 유행가를 부르는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양명은 극도의 외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도 내적인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성인이라면 이런 곤경에서 어떤 길을 찾았을까? 깊이 사색하다가 그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것이 착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자의 사물에 다가가서 이치를 궁구한다는 ‘즉물궁리(卽物窮理)’를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주자의 격물설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천하의 사물은 본래 연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양명은 인식론적 회의론에 부딪혔다. 그리고 인식의 문제와 도덕의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인식론으로는 도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자학에서 마음은 사물을 대상화시키는 데 반해 양명학에서는 사물이 나의 마음과 의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마음 밖에 이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바로 이치’라는 말이다.

하지만 양명이 결코 스스로 피었다가 지는 꽃나무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꽃을 보는 의식과 연관됐을 때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깊은 산속의 꽃은 아무도 보지 않아도 저절로 피고 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아직 꽃을 보지 않았을 때는 즉 의식 활동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않았고, 와서 보았을 때 즉 ‘의’가 이 꽃에 드러나 있다.

양명은 와서 꽃을 보지 않았을 때 “자네의 마음과 꽃이 다 같이 고요함에로 돌아갔다”고 했다.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꽃에 의식이 작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양명은 고요함으로 표현했다. 마음이 아직 꽃과 감응되지 않았을 때는 이 의식이 아직 발동되지 않은 것이며, 마음이 고요하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덕적 주체로서의 양지란 무엇인가?(Ⅱ)

인문학 강의 _ 양명학의 정신과 그 발전

 

격물치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

 

왕양명은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마음과 사물의 관계에서 의식을 떠나서 어떠한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이런 입장에서 격물치지를 다시 새롭게 해석했다.

왕양명은 물(物)을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사건[事; event]으로 해석하고 ‘격’을 바로 잡는다(正)고 해석했다. 이것은 행위를 바로 잡는 것을 격물로 간주한 것이다.

행위물(行爲物)인 사건은 ‘의(意)’가 붙어 있는 곳의 산물이다. ‘의’란 의식(onsciousness), 의지(will), 의도(intention)로 해석할 수 있는 낱말인데 모두 지향성(intentionality)을 가지고 있다. 현상학에서 의식은 무엇에 관한 의식(Bewusstsein von etwas)이지 사물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명학에서의 ‘의’는 마음이 발동해 생긴 지향성을 말한다. 현상학에서는 의식 활동인 노에시스(Noesis)가 지향성을 가지고 만난 어떤 것을 노에마(Noema)라고 한다. 그것을 외물(thing)이라고 하지 않는다. 왕양명 역시 “의가 건너가 붙어있는 곳을 물(物)이라 한다”고도 했다.

왕양명은 앞서 “의가 발동된 곳에 반드시 어떤 일이 있다고 언급했는가 하면, 여기서는 의가 작용하는 곳에 물(物)이 있다”고 말했다.

 

이때의 물(物)은 자연계의 산천초목 등의 물(物)같은 외적인 대상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연관돼 일어난 일(事)을 가리킨다. 산천초목이라 하더라도 이미 마음의 본체인 양지가 구성한 의미세계에 들어와 있는 사물인 것이다. 양명은 “사람의 양지는 바로 풀 나무 기와 돌의 양지이다. 만약 풀 나무 기와 돌이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풀 나무 기와 돌이 될 수가 없다. 어찌 풀 나무 기와 돌뿐이겠는가? 천지도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역시 천지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왕양명이 용장에서 도를 깨우친 후 지행합일 심외무물 심외무리 입성(立誠) 등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양지 두 글자의 뜻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 그의 철학은 양지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왕양명은 이렇게 말했다.

 

“남을 경멸하고 오만해짐을 스스로 아는 능력이야말로 양지이다. 이 양지를 실현해 남을 경멸하고 오만해짐을 제거하는 것이 사물을 바로잡는 격물이다. 치지 두 글자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성학(聖學)의 깊은 뜻이며…. 이것은 공자 문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으로 종래 유자들은 대부분 여기까지 깨달음이 이르지 못했다.”

 

양지란 무엇인가?

 

도덕적 자각은 경험적 지식과 반대로 내면적인 각성을 통해 이뤄진다. 인의(仁義)라는 도덕성은 선천적인 양능이 실제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지(도덕적 자각)이고, 도덕을 행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양능양지이다. 따라서 왕양명이 말하는 양지 속에는 이미 양능이 내포돼 있다. 양명은 이렇게 말했다.

 

“양지란 맹자가 말한 바의 옳고 그름을 따질 줄 아는 마음이며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선택적 생각을 기다리지 않고도 알고 배움을 기다리지 않고도 잘 할 수 있다. 이 까닭에 그것을 양지라고 했다.”

 

이처럼 양지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법칙이다. 왕양명은 시비지심을 첨가해 양지의 법칙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것은 마음을 궁극적 실재인 태극으로 간주하는 심학사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왕양명의 철학에서 ‘양지’는 핵심 용어이다.

 

“양지는 보편적 천리(天理)이지 감각적 지각(知覺) 작용이 아니다.”

 

이것은 양명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명제이다. 주자학은 양지를 마음의 본체인 천리로 인정하지 않고 다만 마음의 훌륭한 지각 작용으로만 파악했기 때문이다. 왕양명이 양지를 천리로 본 것은 바로 양지 본체의 보편성을 강조했기 때문이고, 주자 후학들이 양지를 지각으로 본 것은 그 보편성을 부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양지를 단지 지각 차원에서 놓고 보면 이에 따라 양지도 달라진다고 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양지는 상대적인 지각일 뿐 그 절대성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양지가 주자학자의 말대로 지각일 뿐이라면 그것은 각 사람의 환경과 익힘에 따라서 각기 다른 상대적인 습심(習心)일 뿐이다.

그러나 왕양명이 말하는 양지는 바로 천리라는 것이다. 왕양명은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마음의 본체는 바로 천리이다. 천리의 환하게 밝고 영묘하게 깨닫는 것이 이른바 양지이다. 양지는 천리의 환하게 밝고 영묘하게 깨닫는 곳이다. 그러므로 양지가 바로 천리이다.”

 

주자학에서의 천리는 정감과 의지도 없고 계획하고 헤아림도 없으며 만들고 지어냄도 없는 정태적인 도덕원리이다. 이에 반해 왕양명의 천리는 역동적인 도덕원리로서 옳고 그름을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마음이다. 양명은 이렇게 말했다.

 

“양지는 천리(天理)의 환하게 밝고 영묘하게 깨닫는 곳이다. 그러므로 양지가 곧 천리(天理)이다. 생각은 양지의 펼쳐진 작용이다. 만약 양지의 펼쳐진 작용이 생각이라면 생각한 내용도 천리가 아님이 없다. 양지가 펼친 작용의 생각이 자연히 명백하고 간이 하므로 양지는 역시 알아차릴 수 있다. 만약 사사로운 의도가 안배한 생각이라면 자연히 어수선하고 힘들고 흔들리겠지만 양지는 또 저절로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생각의 옳고 그름 나쁘고 바름은 양지가 저절로 알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양지는 결코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경험적인 축적에 의해 만들어진 습심(習心) 혹은 식심(識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적인 축적은 모두 양지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양지는 인간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이다. 양지는 경험적인 지각에 의해 막히지 않지만 또한 경험적인 지각과 분리되지도 않는다.

양명학은 양지가 결코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경험적인 지각은 양지의 작용이라고 했다. 따라서 양지는 경험적 지각과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여기에 방해를 받지 않고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양지는 감각기관의 근거가 되는 것이어서 양지가 아니면 눈이 밝게 볼 수도 귀가 또렷하게 들을 수도 없으며 사유와 지각도 양지가 아니면 깊고 밝게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양지가 바로 도덕적 주체이며 준칙인 천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자학의 경험적 지각을 통해 지식을 넓히는 치지와 양명학의 양지를 실현하는 치양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그 차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 양지에 대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양지는 성스러운 자기준칙(準則)이다.

2) 양지는 참된 자기(眞己)이다.

3) 양지는 자기만이 홀로 아는 독지(獨知)이다.

4) 양지는 지선(至善)이다.

5) 양지는 영묘한 밝음(靈明)이다.

6) 양지는 조화(造化)의 정령(精靈)이다.

 

 

 

현실 사회에 양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인문학 강의 _ 양명학의 정신과 그 발전

 

양지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이것은 지행합일, 치양지 그리고 발본색원과 연관돼 있다.

지행합일이라는 말은 왕양명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용어를 주자학에서는 지식과 행위의 합일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지식과 행위가 둘인데 이것을 합해 하나로 만든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지행은 원래 한 덩어리로 돼있어 본래부터 나눌 수 없다. 지행은 주자학에서와 같이 밖의 대상을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행의 본체가 양지이므로 자신의 덕성인 양지를 현실에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지행합일

 

왕양명의 지행합일은 이론적으로 추리해 안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깨달아서 안 것이다. 그는 용장의 깨달음과 마찬가지로 『오경』을 들어서 지행합일설을 증명해 석원산을 깨우치게 만들었다. 그가 귀양서원에서 처음 지행합일설을 제창했을 때 석원산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너무도 독창적인 학설이라 다른 사람들과 이해의 지평을 공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왕양명이 “예전에 귀양에서 지행합일의 가르침을 거론하자 분분하게 동조(同調)도 하고 이견도 내놓아 들어갈 곳을 알지 못했다”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양명의 지행합일설은 바로 주자의 선지후행설의 폐단을 구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양명은 자기주장의 근본 취지를 알아야 지행합일설을 이해할 수 있다며 “여기서 모름지기 나의 입언종지(立言宗旨)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학문은 단지 지행을 두 사건으로 나눠 놓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왕양명이 말하는 지(知)는 양지를 가리킨다. 양지는 도덕 판단의 앎에 속한다. 그러므로 지각으로 외물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밖의 사물을 안다는 지각 자체는 벌써 나의 인식과 대상을 이원화 시킨 것이며 여기서 앎과 행위는 서로 분리가 된다. 지각의 현상에서 보면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행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 돼 앎과 행위는 분리된다.

그러나 본체 상에서 보면 양지와 행위는 일체가 된다. 양지 자체에 이미 행위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행위는 바로 양지의 행위이다. 그리고 양지와 지각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지각한 속에 이미 양지가 들어있어 오히려 양지가 지각의 초월적 근거가 된다.

또한 왕양명은 앎과 행위의 문제를 시작과 완성의 역동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관된 사건으로 생각했다. 주자학에서의 지는 블랙박스에 쌓여지는 정보와 같은 지식을 뜻하지만 양명학에서의 지는 양지를 말한다.

양지는 선악을 알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는 행위까지 한다. 블랙박스에는 양지가 없다.

왕양명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예를 들어 지행합일을 설명했다. 그는 “길이 험한지 평탄한지는 반드시 몸소 걸어 다녀 본 뒤에 아는 것이지 몸소 걸어 다녀 보지 않고 미리 길이 험한지 평탄한지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행위는 앎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학행합일

 

왕양명은 앎이 참되고 절실하며 독실하지 못하면 허망한 생각이고, 행위가 밝게 깨닫고 자세히 살피지 못하면 맹목적 행위라고 하면서 학문사변은 참되고 절박하며 독실해야 하고 독실한 행위는 또랑또랑 깨어있어 정밀하게 살펴야 함을 역설했다. 허망한 생각이나 맹목적 행위는 모두 지행을 둘로 나눴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따지는 것도 모두 독실한 행위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학행(學行)은 일체다. 학문사변을 지(知)로 독행을 행(行)으로 보는 견해는 모두 지행을 둘로 나눈 것이다.

우리가 보통 교실에서 배운다[學]고 말할 때 단지 입시위주의 기능성 배움만을 주로 말한다. 따라서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은 나의 실천과는 별개의 것이다. 물론 배운 것을 실습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 교실 밖을 떠나지 않는다. 양명의 지행합일은 교실에서 언어 문자를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부터 체득해 실천한 것을 말한다. 언어 문자로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미궁에 빠져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언어 문자로 이해한 앎과 이것을 행위로 옮기는 행위는 이미 둘로 나뉘고 지행은 별개의 것이 돼 버린다. 양명은 이러한 치우친 폐단을 바로 잡으려고 지행합일을 말한 것이다.

 

치양지

 

양지와 행위가 한 덩어리인 것이 지행합일이라면, 구름에 덮인 태양을 환하게 드러나게 하듯이 사리사욕에 가려진 양지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아 현실 사회에 실현하는 것을 치양지라고 한다.

양명이 말하는 치양지의 치(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까지 이른다는 지극(至極)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양지를 실천한다는 실행(實行)을 뜻한다. 주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치지를 지식을 넓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양명은 양지를 실현하는 것, 즉 치양지라고 했다. 실현한다는 말은 천지 만물이 각자 타고난 천리를 자기 자리에서 발휘하게 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치양지를 강학의 종지로 삼은 뒤부터 성의(誠意)보다는 치지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성의의 근본은 또 치지에 있다. 이른바 ‘남은 비록 모르지만 자기가 홀로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내 마음의 양지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선을 알고도 이 양지에 의거하여 행하지 않고 불선(不善)을 알고도 이 양지에 의거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이 양지는 곧 가려지게 된다. 이것은 ‘치지(致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양지가 이미 지극하게 확충될 수 없다면 선이 비록 좋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좋아할 수 없고 악이 비록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미워할 수 없다. 어떻게 뜻이 참될 수 있겠는가?”

 

발본색원(拔本塞源)

 

발본색원이란 용어는 오늘날 경찰이나 법조계에서 많이 사용하는데, 범죄를 뿌리 뽑아 더 이상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근원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도덕적으로 내 자신의 욕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근원을 막고, 도덕원리를 간직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사욕을 일으키는 근원을 막아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양명은 자기 사욕을 위해 서로 다투는 사람들과 진정한 자기(眞己)를 천하에 실현하는 사람을 구분해 전자는 식심 혹은 습심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본심 즉 양지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라고 봤으며, 육체적인 감각기관의 욕구에 따라서 사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불렀고 본심에 따라서 양지를 실현하는 사람을 대인 혹은 성인이라고 말했다. 사랑을 어린아이, 새와 짐승, 초목, 심지어 기왓장에 이르기까지 감통(感通)해 천지 만물을 일체로 보는지, 그렇지 않으면 사적인 욕심에 갇혀 서로 공격해 무너트리는가에 따라 대인 소인을 나누기도 했다.

왕양명은 양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일러 줬다. 그것은 곧 지행합일, 학행합일, 치양지를 통해 가능하며, 치양지의 구체적 내용은 발본색원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하곡학(霞谷學)과 실심실학

인문학 강의 _ 양명학의 정신과 그 발전

 

 

▲ 하곡 정제두의 묘(왼쪽)와 『근역서휘』에 수록된 하곡 정제두의 필적

 

 

우리나라의 하곡학은 민족의 수난과 더불어 생겨난 학문이다. 조선 시대 중기 임진왜란(1592년~1598년)과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이라는 대 전란을 치루고 난 뒤에 민족 자각적 의식에서 두 가지 사조가 생겨났는데 하나는 주자학적 예학이요, 다른 하나는 양명학적 실학이다.

조선 시대 신유학은 이학(理學), 예학(禮學), 실학(實學)으로 발전했다. 이에 비해 중국의 신유학은 이학(理學), 심학(心學), 박학(樸學)의 길로 나아갔다.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학자들이 첫째 동강(東岡) 남언경(1527~1594), 둘째 경안령(慶安令) 이요, 셋째 교산(蛟山) 허균(1569~1618), 넷째 지봉(芝峯) 이수광(1563~1628), 다섯째 이항복의 아들 이세필, 이세구(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선조), 여섯째 지천(遲川) 최명길(1586~1647), 일곱째 계곡(溪谷) 장유(1587~1638) 등이었다. 이들 모두가 하곡(霞谷) 정제두(1649~1736)의 선구적 인물들이었다. 하곡은 양명학과 양명후학까지 공부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양명학을 이어받아 퇴율학(退栗學)의 수준 높은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하곡학을 정립시켰다.

 

어둠 속에서 횃불을 높이 든 하곡 정제두

 

하곡학이란 하곡 정제두(鄭齊斗)의 철학과 그 후학들의 학문을 총칭한 말이다. 정제두는 호를 하곡(霞谷)이라 하고 자는 사앙(士仰)이라 한다. 그는 300여 년 전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양명학을 목숨 걸고 연구하고 전수해 하곡학파를 이뤄 냈다.

정제두 선생은 만년(환갑 때, 1709)에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계곡, 강화도 하일리의 하곡에 이사 와서 제자들에게 하곡학을 전수했기에 그를 ‘하곡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의 학문을 가리켜 ‘하곡학’이라고 하며 그의 학문을 이은 학파를 하곡학파라고 부른다.

 

하곡 정제두는 한국 성리학의 두 학파인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와는 달리 제3의 새로운 학파를 형성해 우리나라 철학계에 공헌이 매우 지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아직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유학은 퇴계와 율곡 두 학파만이 조명을 받고 하곡학파는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는 데는 그 학파를 주창한 인물이 있어야 하고 그 학파가 갖는 독특한 주장이 있어야 하며 또 사승(師承)관계가 명확해야 한다. 이 조건이 만족되면 우리는 그것을 학파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하곡 정제두는 스승 박남계와 윤명재가 간곡히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양명학 공부를 했다. 더욱이 친구 민이승은 생명이 위태롭다면서 양명학을 그만두라고 했으나 하곡 정제두는 이에 굽히지 않고 목숨을 걸고 양명학을 공부했다.

하곡 정제두는 일찍이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한 뒤 일생 동안 심학 수양 공부에 치중했던 남언경을 비롯해 병자호란 때 심학 입장에서 현실을 직시한 지천 최명길 그리고 계곡 장유의 학설과 수양 공부를 계승해 조선 심학을 건립했다. 이는 하곡이 중국 양명학과 다른 자신의 철학 즉 하곡학을 창립한 것이다.

 

하곡의 실심실학

 

그러면 하곡이 말하는 실심은 무엇이며 그의 실학은 무엇인가? 하곡의 학문은 외적인 남의 학설로 기준[定理]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내적인 기준[良知]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이것이 바로 실심에 의한 판단인 것이다.

 

그의 실심은 생명이 약동하는 실상과 원리[生理]를 참되게[眞理] 그대로 나타내는 마음이며, 그의 학문은 명분과 대의를 내세워 죽음으로 내모는 의리학(義理學)이 아니라 생명의 내실과 그 원리를 중시하는 삶의 학문[仁學]이다. 그의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는 바로 이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본체와 작용이 하나의 근원[體用一源]이라는 입장에서 전개된다. 그리고 양지는 하곡에 의해 실심으로 해석돼 참됨[誠]=실심(實心)=양지(良知)=실리(實理)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하곡은 실리의 본체[仁]가 있기 때문에 생명이 약동하는 생리(vital reason)가 그 끊임없이 낳고 낳는 생명 현상을 갖는다고 했다.

 

하곡은 우리 마음의 신묘(神妙)한 작용이 바로 살아있는 주체[活體]인 삶의 결[生理]이고 이것이 타자의 마음을 헤아려 아파하는 측달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이성[理]은 기(氣)의 영통(靈通)한 곳이며 신령한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실리(實理), 실심은 기(氣)가 운행하는 모든 생명체와 신령스럽게 감통[靈通]할 수 있다. 하곡은 주자학과 양명학의 다른 점을 만 가지 차이[萬殊]와 하나의 근본[一本]에 있다고 보아 양명학이 생명이 영통할 수 있는 양지 하나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그는 대학의 해석에서 옛 판본[古本]에 의해 친민(親民)을 그대로 놓아 둘 것을 역설하고 격물치지의 격을 바로잡다[正]로, 물(物)을 의(意)가 있는 곳이라고 풀이해 양명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심체(心體)의 무선무악을 주장한 것도 역시 양명과 함께하는 면이다.

 

하곡은 양명학을 받아들여 자신의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하곡은 주자학과 양명학의 장단점을 다 알고 이를 종합해 자기 독자적인 학문 하곡학을 세워놓은 철학가이다. 하곡학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주자학[萬殊]과 양명학[一本]을 회통시켰다는 것이다. 둘째, 참과 거짓[眞僞]을 따져서 밝혔다는 것이다. 셋째, 도덕 주체의 본원(本源)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이 실심실학으로 요약됐다.

 

하곡집을 살펴보면 적지 않은 문인들이 그의 학문을 칭송하고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을 거론하면 윤순(尹淳), 이진병(李震炳), 정준일(鄭俊一), 이광사(李匡師), 이광명(李匡明), 이광신(李匡信), 송덕연(宋德淵), 최상복(崔尙復), 이선협(李善協), 성이관(成以觀), 오세태(吳世泰), 이선학(李善學), 김택수 등이 그의 문인들이다. 이들 중에서 심육의 부친 심수현(沈壽賢)은 하곡과 이종숙(姨從叔)의 관계에 있었으며 최상복은 하곡의 죽마고우인 최규서(崔奎瑞)의 아들이며 이광명은 하곡의 손서(孫壻)이다. 이렇게 하곡의 문인들은 친척과 친우의 아들 등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그의 문인들이 모두 다 양명학을 존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심육은 실심실학으로 주자학을 수용해 자기 철학을 전개했다. 그들은 모두 실심실학의 정신으로 학문을 하였기에 주자학도 양명학도 모두 수용해 자기의 철학을 전개했다.

하곡을 창시자로 하는 하곡학파는 심육, 이진병, 윤순 등을 비롯해 유수원, 심대윤 등이 안성(安城)에서 활동했고 환갑이 돼 강화에 온 뒤에 이광신, 이광사 그리고 하곡의 아들 정후일과 그의 사위인 이광명과 이광려, 하곡의 손서인 신대우 등 초기와 정후일의 고손인 정문승, 정기석, 정원하, 그리고 신대우의 아들인 신작, 신순, 이광사의 아들인 이긍익, 이영익 그리고 이광려의 제자 정동유, 이광명의 양아들인 이충익, 이시원, 이지원 등의 중기, 그리고 이시원의 학문은 이상학, 이건창, 이건승에게, 이지원의 학문은 이건방을 통해 정인보에게 계승됐다.

 

 

 

* 본고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인문강좌’(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정인재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양명학의 정신과 그 발전’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발췌 수록한 것입니다.

/ 독서신문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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