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風水.命理

[조용헌의 八字기행] 상갓집 개. 食神生財.

경호... 2012. 7. 1. 11:56

공자가 상갓집 개같이 산 이유…나이 오십에 천명 알 수 있었을까

 

 

 

 

 

‘연월일시 기유정(年月日時 旣有定)인데 부생(浮生)이 공자망(空自忙)이라’, 타고난 사주팔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뜬구름(浮生) 같은 인생들이 공연히 스스로 바쁘다는 말이다. 필자가 30대 중반에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긴가민가했다.

운명의 비의(秘義)를 탐색하는 학문인 명리학(命理學)을 한창 공부하던 시절이라서, 팔자를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팔자가 있다고 확신하기에는 인생 경험이 모자라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팔자가 정해져 있다면 노력해도 소용없는 것인가? 감나무 아래에서 입 벌리고 있으면 감 떨어지는가?

모든 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사주학 고전인 ‘명리정종(命理正宗)’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일어났다.

사람이 어떤 사실이나 원리를 받아들이려면 몸과 가슴의 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머릿속의 가설이나 이론만 갖고는 부족하다. 일단 이론이 머릿속에 들어와서 이게 가슴까지 내려가야만 확신이 서는 법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갈 때 거치는 관문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눈물이라는 거다. 눈물을 흘려봐야 확실히 알아진다. 눈물을 흘리면서 확인할 때 확실히 아는 거지, 눈물 없이 도서관에서 책만 읽는다고 감히 인생이 알아지겠는가? 그래서 세월이 필요한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것이 공자의 ‘인생단계론’이다. 공자는 사십에 불혹(不惑)하고, 오십에 지천명(知天命)하고, 육십에 이순(耳順)이라고 설파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생과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변화 과정을 매우 보편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한자문화권의 식자층들은 2000년 동안 수긍해 왔다.

그런데 필자는 ‘오십에 지천명’ 대목에서 의문이 드는 게 있다. 공자는 과연 오십에 천명을 알 수 있었을까, 알았다고 한다면 자신의 천명은 무엇이라고 파악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공자는 50세를 넘긴 56세 무렵부터 69세 무렵까지 약 14년간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도는 낭인 생활을 한 팔자다. 낭인 생활이 무엇인가. 그날그날 먹을 것과 잠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낭인이다.

사기(史記)에서 사마천은 ‘상갓집의 개 같은 삶을 살았다’고 공자를 평가하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개팔자처럼’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야 했던 것이 공자 말년의 삶이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14년간이나.

공자는 주유천하(周遊天下), 즉 낭인과(浪人科) 생활로 접어들기 직전에 자신의 앞날이 매우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공자는 주역의 괘(卦)를 뽑아 봤다.

공자는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주역을 공부해왔던 주역 애호가였음에 비춰 볼 때 점(占)을 쳐본 것은 당연하다. 사람은 자고로 딜레마에 빠져 봐야 점을 쳐보는 법이다.

공자와 주역의 관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황태연 동국대 교수에 의하면 공자가 50대 중반 무렵에 뽑은 괘는 ‘화산려(火山旅)’였다고 한다(공자와 세계 3권). 위에 불이 있고, 아래에 산이 있는 형상의 괘가 화산려다. 산에 불이 난 모습이기도 하다. 왜 고대인들은 이 모양을 보고 여(旅)를 추상해 냈을까?

어찌 됐든 이 괘의 핵심은 여에 있다. 여인숙(旅人宿)의 여다. 나그네로 산다는 뜻이다.

자신의 앞날에 ‘바람을 반찬 삼고 이슬을 이불로 덮어야 하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나그네 팔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감하지 않았나 싶다. 싫지만 이를 거부할 수도 없다. 오직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닌가. 공자도 거부할 수단은 없고, 오로지 자신 앞에 놓인 비포장의 험난한 팔자에 그저 순응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운명이라는데, 팔자가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주님의 섭리가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고 주님에게 맞짱 뜨겠는가?

69세에 낭인 생활 종지부를 찍고 돌아와 73세에 죽었으니 불과 4년 동안 말년의 여유가 있었고, 이 말년의 기간에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저술들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도 오십에 천명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다고 본다. 그만큼 자신의 운명을 알기는 어렵다. 운명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미리 알아본들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희랍의 철학자 세네카가 한 말이 있다.

“운명에 저항하면 끌려가고, 운명에 순응하면 업혀간다.”

어차피 가기는 가는 것인데 끌려가느냐, 아니면 등에 업혀서 가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운명을 미리 알면 강제로 질질 끌려가느냐, 등에 업혀서 가느냐의 선택은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끌려가는 것보다는 업혀가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팔자라고 하는, 운명이라고 하는 이 비의학(秘義學)에 접근하는 통로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필자도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만 줄잡아 20년은 걸린 것 같다. 이 길 저 길 가서 아니면 되돌아오고 시행착오를 겪느라고 수업료도 상당히 지불했다.

그 길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첫째, 자신의 꿈이다.

중요한 사건 사고는 자신이나 또는 주변 가족의 꿈에 미리 예시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접신(接神)된 샤먼(무당)을 만나 아는 방법이다.

셋째, 명리학 또는 주역을 공부해 아는 방법이다.

넷째, 정신수양을 많이 한 스승을 만나 아는 방법이다.

이 가운데 역술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팔자를 감정받아 보는 방법이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역술가의 수준은 대략 3단계로 나뉜다.

첫째는 칼잡이 수준이다.

십몇 년 전에 어떤 조폭을 만났는데, 이 조폭이 양복 윗도리 안쪽에 여러 개의 칼을 꽂아 갖고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왼쪽 주머니에 3~4개, 오른쪽 주머니에 2~3개를 갖고 다녔다. 상대를 제압하려고 할 적에는 칼을 갖고 있는 양복 윗도리를 활짝 열어젖힌다. 양쪽에 꽂힌 칼들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나 이렇게 칼이 많아.’ 칼을 자랑하는 셈이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칼은 책, 또는 자기가 공부한 스승을 지칭한다. 어떤 역술가를 만나면 “내가 그동안 명리학 공부하면서 읽은 책이 이렇게 많아” 하고 자랑한다. 서자평(徐子平), 명리정종, 궁통보감(窮通寶鑑), 적천수(滴天髓), 초씨역림(焦氏易林) 등등에 나오는 문구들을 입에서 줄줄 인용한다.

이론상으로는 명리학 박사급이다. 격국(格局)이 어떻고, 용신(用神)이 어떻고를 논한다. 이론에는 해박하지만 정작 실전 사주풀이에 들어가면 적중률이 떨어진다. 재물복이 없는 사람을 재물이 많다고 예측하기도 하고, 운이 좋지 않은 해에 오히려 운이 좋다고 단정해 낭패를 보게 만든다. 이론은 해박하지만 실전에는 약한 수준이 바로 칼잡이 단계다. 칼은 많지만 고기를 제대로 썰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보유했던 칼을 모두 버린다. 그리고 10㎏짜리 해머 하나만 챙겨 든다. 해머를 어깨에 메고 강호를 다니다가 적수를 만나면 이 해머로 상대방을 가격한다.

이게 해머급 단계라고 하는 것이다. 상대를 만나면 “당신 지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분야로 가겠구먼!”이라고 한마디 내뱉는다.

해머급은 핵심적인 멘트 한마디 정도는 거의 적중하는 단계를 일컫는다.

 

 

 

 

[조용헌의 八字기행]

食神生財(식신생재) …베풀어 인심을 사면 돈은 따라온다

 

 

 

 

명리학(命理學) 용어 가운데, 식신생재(食神生財)라는 용어가 있다.

식신(食神)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먹이는 기질을 가리킨다. 상대방이 맛있게 먹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이를 흐뭇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팔자에 식신이 발달돼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다른 사람 먹이는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다. 이런 기질이 큰돈을 벌어들인다는 게 식신생재의 개념이다.

주변에서 돈 버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까, 식신도 3가지로 세분화된다.

첫째는 적선(積善)이고, 둘째는 기마이이고, 셋째는 뇌물이다.

적선은 인정이 발동해 나온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행위가 적선이다. 기마이는 다분히 낭만적인 스타일이다. 마음에 들고, 기분에 맞으면 돈을 쓰는 기질은 기마이가 좋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씀씀이가 헤픈 낭비형 타입으로 전락할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베푸는 기질은 기본적으로 갖춘 셈이다. 뇌물은 대가를 계산하고 베푸는 것이다. 공짜가 아니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대방을 유혹하는 전략이다.

 

그렇지만 이 뇌물 주는 것도 밑바탕에는 베푸는 기질이 깔려 있어야만 실천이 가능하다. 배짱도 있어야 한다. 아주 인색하고 소심한 사람은 뇌물 주는 것도 아까워한다.

‘이렇게 건네줬는데도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런 의문이 꼬리를 물면 뇌물 주는 것도 벌벌 떨기 마련이다. 뇌물이 도덕적인 행위는 아니지만, 재물 그 자체는 도덕을 초월하는 속성을 갖는다.

 

 

왜정 때 경북 영천에는 문명기(文明琦, 1878~1968년)라는 이름을 가진 어물(魚物) 장수가 있었다. 경주, 포항, 영덕 등지에서 나오는 생선을 사다가 영천시장에 내다 파는 장수였다.

 

문명기는 묘한 스타일이었다. 당시 영천 경찰서장은 일본인이었는데, 이 영천 서장의 집 대문에다가 청어를 한 두름씩 몰래 갖다 놓곤 했다. 한 두름이라고 하면 20마리다.

 

일본 사람은 고등어를 특히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일본어로 고등어를 ‘사바’라고 한다. 왜정 때 일본 사람에게 부탁을 할 때 고등어를 몇 마리 갖다 주면 매끄러운 기름칠이 됐다고 전해진다. ‘사바사바’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청어는 고등어보다 한 급 위의 고급 생선이다.

 

문명기는 1달에 2~3번씩 경찰서장 집 대문 고리에다가 청어 꾸러미를 걸어놓고 사라지곤 했다. 이걸 몇 번 받아먹던 일본인 서장은 ‘누가 이 청어를 갖다 놓고 사라지는가’ 궁금했다. 마침내 그 주인공이 조선인 문명기라는 생선 장수임을 알게 됐다.

“당신은 왜 내 집에다가 청어를 매번 갖다 놓았느냐?”

“저는 영천시장에서 생선을 팔아 재미를 봤습니다. 다른 지역의 시장에서 생선을 팔 때는 치안이 좋지 않아서 깡패들에게 세금을 많이 뜯겼는데, 영천은 치안이 확보돼 뜯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천 경찰서장님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깡패들에게 뜯기지 않은 만큼을 서장님께 현물로 갖다드려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서장 입장에서도 치안이 확보돼 장사하기 좋아졌다고 하는 말은 기분 나쁜 말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명기라는 생선 장수의 얼굴 생김새도 두툼하게 돈이 붙었고, 조리 있게 말하는 스타일이 마음에 든 서장은 도와줄 마음이 생겼다.

 ‘이거 싹수 있는 놈이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너 민원 사항이 뭐냐?”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제가 어물장사를 해서 어느 정도 밑천을 모았습니다. 이 밑천을 갖고 종이장사로 전환을 해 보고 싶습니다. 종이장사를 하려면 신용이 필요합니다. 신용이 있어야 제가 외상으로 많은 종이를 매입할 수 있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종이를 매입해 놓아야만 이문이 크게 남는데, 외상 매입을 하려면 제 신원을 누군가 보증해 줘야만 그게 가능합니다.”

“그래. 내가 자네 보증을 해줄게.”

 

1907년 영천 경찰서장의 보증을 등에 업고 문명기는 자기 자본의 10배나 되는 금액의 종이를 외상으로 매입할 수 있었다. 당시 경북 영덕에서 청송 가는 길에 지품면(知品面)이 있었는데, 이 지품면에는 속곡, 눌곡이라는 유명한 한지 생산지가 있었다. 한지 원료인 닥나무가 많았던 것이다. 왜정시대 지품면 사람들은 이 종이를 만들어 판 돈으로 영해 들판을 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명기는 한지를 몽땅 구입해 놓고 팔리기를 기다렸지만, 한지를 구입해가던 중국 상인들이 태클을 걸었다. “시세의 반값이 아니면 안 사겠다”고 중국 상인들이 버텼다.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문명기는 세게 나갔다.

“반값에는 절대 안 팔겠다. 차라리 불에 다 태워버리겠다.”

실제로 장작에 불을 피워놓고 한지 다발을 던지기 시작하는 장면을 보고 중국 상인들은 문명기의 말이 엄포가 아님을 깨달았다.

“제대로 가격 쳐줄게.”

“아니야. 나 너희들 하는 행동에 열 받아서 장사고 뭐고 다 태워버릴 거야.”

“부탁이야. 팔아줘.”

“그렇다면 따따블로 값을 쳐 줘.”

이렇게 해서 문명기는 정상 가격의 몇 배를 받고 자신이 거의 독점하고 있던 한지를 중국인에게 팔았다. 떼돈을 벌었던 것이다. 문명기는 제지업에서 번 돈을 갖고 1932년 금광업에 뛰어들었다. 광산을 인수했던 것이다.

 

어느 날 문명기는 순금으로 된 명함을 2장 만들었다. 명함 전체가 순금이었으니 명함 한 장이 50돈 무게는 나가는 명품 명함이었다.

 

경성의 총독부를 찾아간 문명기는 총독 비서에게 순금으로 제작된 자기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명함 1장을 비서에게 더 주면서 “이거는 총독에게 보여 드려라. 문명기라는 사람이 면회 신청한다고.” 금덩어리로 만든 명함을 처음 봤으므로, 총독도 면회를 받았다.

“용건이 뭐냐?”

“내가 천황폐하의 은덕으로 돈을 벌게 됐다. 그 보답으로 천황에게 비행기를 헌납하려고 한다. 언제까지 하겠다.”

총독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조선 총독은 일본 천황에게 문명기의 비행기 자진 헌납 사실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 총독은 6대 총독 우가키(宇垣一成)였을 것이다.

 

그러나 헌납 약속 시일이 돼도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왜 비행기가 안 오느냐?”

“금광이 안 팔려서 그런다. 금광만 팔리면 바로 비행기 헌납하겠다.”

천황에게 한 약속을 어길지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애가 탄 우가키 총독은 문명기의 금광을 팔리게 하려고 자기가 동분서주했다.

 

마침내 당시 일본의 전기 재벌인 노구치(野口)에게 이 건을 부탁했다고 한다. 노구치는 수풍 발전소를 비롯해 장진강, 부전강 발전소를 갖고 있던 일본의 재벌이었다. 노구치도 우가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문명기의 금광을 시세보다 비싼 가격으로 매입해 줬다. 당시 금액으로 12만원이었다고 한다.

 

문명기는 이 돈에서 10만원을 떼어 비행기 값으로 헌납했고, 나머지는 자기가 챙겼다. 물론 문명기로서는 비행기 헌납하고도 남는 장사였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문명기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고, 현재는 친일파 명단에 올라 있는 문제적인 인물이다. 친일파라는 점은 비판받아야 맞지만, 그가 큰 재물을 갖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서장에게 갖다 준 청어는 적선이었고, 한지를 장작불에 던지는 배짱은 기마이에 해당하고, 순금 명함은 뇌물로 분류하면 어떨까. 이 삼위일체를 종합해보자. 문명기는 식신생재의 팔자였음이 분명하다.

 


 

 

조용헌 동양학자·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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