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風水.命理

[조용헌의 八字기행] 꿈과 비보(裨補)

경호... 2012. 7. 19. 14:35

꿈과 비보(裨補) "죽을 운명도 살리는 땅의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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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1월 초에 갑작스럽게 천정궁(天正宮)에 가게 됐다. 천정궁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의 장락산(長樂山, 630m)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통일교의 본부 건물로 문선명 총재가 자주 머무르는 곳이다. 건물 전체가 온통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돼 있어 매우 독특한 분위기다. 그 규모도 대단할 뿐더러, 바깥 외양도 미국 국회의사당 비슷하게 생겼다. 돌기둥 하나가 지름 2m에 육박할 정도로 육중하면서도 압도하는 힘이 있는 건축물이다. 여기에 가게 된 이유는 문 총재가 갑자기 만나자는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2002년 당시 대선 주자였던 노무현 후보를 스라소니로, 이회창 후보를 매(鷹), 권영길 후보를 산양(山羊), 이한동 후보를 황소에 비유해 설명했던 내용이 일간지 기사로 났었는데,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문 총재가 이 동물 관상 기사를 보고 필자 이름을 기억해두고 있었다. ‘레버런드 문(외국에서 주로 부르는 호칭)’은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난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안 만난다고 한다. 이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석조로 된 바로크 분위기의 VIP 접견실에서 문 총재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풍수 이야기를 꺼냈다.

“이 천정궁 마당에서 보니까 주변의 산들이 이 터를 중심으로 호위하듯이 둘러싸고 있다. 주변 산들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든다. 이 터는 군신봉조(群臣奉朝·여러 신하가 인사를 드리는 형국) 자리로 보인다.”

그러자 문 총재는 “군신봉조가 아니라, 군왕봉조(群王奉朝) 자리다. 신하가 아니라 여러 왕들이 와서 인사를 드리는 자리다.”

“천정궁이 장락산 7부 능선쯤의 높은 곳에 자리 잡아서 터가 매우 세게 느껴진다. 총재께서는 어떻게 보시는가?” “센 편이다. 그래서 내가 적어도 3년간은 이 터에 자주 머무르면서 터를 눌러 줘야 한다.”

통상 터가 센 곳은 이를 눌러 줘야 하는데, 그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첫째는 젊은 학생들 수백 명이 자주 들락거리도록 하면 된다. 터가 센 곳엔 학교를 만들면 된다. 군인들이 상주해도 된다. 젊은 기운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머무르면 그 센 기운을 여러 사람이 흡수해주는 작용이 일어난다. 아울러 사람에게서 품어지는 기운이 그 터에 또한 작용을 일으킨다. 아니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게나 집회장으로 이용하는 것도 터를 누르는 방법이다.

 

둘째는 큰 돌탑을 세우거나, 연못을 파는 방법이 있다. 이는 불교 사찰에서 많이 쓰는 방법이다.

셋째는 땅에서 올라오는 지기(地氣)를 몸으로 흡수해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고단자가 그 터에 머무르는 방법이다. 고단자는 땅에서 올라오는 지기를 흡수해도 오버를 하지 않을 정도의 심리적 단련이 돼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보통 사람들은 기운이 강한 터에 있으면 이상하게 오버하는 경향이 있다. 터가 좋지 않은 곳은 사기(邪氣)나 악령(惡靈)이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이때도 고수가 밤에 잠을 자거나 명상을 하면서 잡들이를 해야 한다. 잡들이를 못 하면 역(逆)트랜스에 걸려 오히려 자기가 다친다.

문 총재는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천정궁 건물을 짓고 이사를 온 뒤에 꿈을 꿨다. 시커먼 먹구름이 이 천정궁 쪽으로 몰려오는 장면을 봤다. 이 먹구름을 보고 뭔가 불길한 기운이 오고 있구나 하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다가 집을 하나 샀다. 살아보니까 꿈보다 해몽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문 총재의 말을 듣다 보니 이해하기 힘들고 궁금한 대목이 많았다. 통일교 같은 거대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영발(靈發)의 소유자도 자신의 꿈을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느낀단 말인가? 먹구름이 오는 것과 도박판인 라스베이거스에다가 집을 샀다는 이야기는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필자도 지난 20년 넘게 한·중·일의 도교와 불교계의 수많은 도사들을 만나 얘기를 해본 사람인데, 얘기를 나누다가 면전에서 “이 두 개가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하고 물어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존심이 있으니까. “그런 것도 몰라?” 하고 상대가 반문하는 상황이 되면, 그 순간 나는 대화에서 완전히 을(乙)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몰라도 적당히 아는 척하면서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는 배짱과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고단자는 설명을 자세하게 하지 않는다. 점을 찍듯이 한마디씩 톡톡 던지기만 하는 화법을 쓰는 경우가 많다. 자세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절대로 논리적인 서술형 화법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는데 지나고 보면 그게 그물코처럼 다 연관이 있다.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다차원과 입체적 측면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선가(禪家)의 횡설수설(橫說竪說) 화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날 대화는 점심 이후부터 시작해서 4시간쯤 이어졌다. 정감록(鄭鑑錄)과 풍수, 그리고 미륵신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어렸을 때부터 앞일이 눈에 보였다는 이야기, 14살에 처음 학교에 가게 됐던 사연, 일본에 유학 갔을 때 겪은 여러 가지 경험, 인간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대한 이치, 세계의 유명 지도자들에 대한 에피소드, 팔자가 좋으려면 적선을 많이 해서 복을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2시간쯤 하다가 갑자기 그 연관 관계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렇구나! 먹구름 꿈은 헬기 추락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구나!’

레버런드 문은 2008년 7월 19일에 탑승하고 있던 헬기가 장락산에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당시 언론에 이 헬기 추락 사건이 보도됐다. 보통 헬기가 추락하면 90%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다고 한다. 헬기는 공중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사고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 사고에서 레버런드 문은 죽지도 않았고, 중상을 입지도 않았다.

이거 드문 일이다. 운이 좋았던 것인가? 먹구름이 몰려오는 꿈은 누가 생각해도 좋지 않은 징조에 해당한다. 안 좋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안 좋다는 것인가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인수분해 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대응을 할 것 아닌가. 먹구름이 몰려오니까, 레버런드 문은 라스베이거스에 집을 샀다.

이건 비보책(裨補策)이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판이다. 돈을 따려고 눈에 불을 켜는 도박장 아닌가. 상갓집에 가면 통상 고스톱을 많이 치는 이치와도 같다. 라스베이거스는 건조한 사막이라는 입지조건, 거기에다 불이 밤새도록 켜져 있고, 돈에 대한 욕망이 돌처럼 뭉쳐진 곳이기 때문에 음기(陰氣)가 침입하기 매우 힘든 곳이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데 대한 대비책으로 라스베이거스에다 집을 사놓고 레버런드 문은 한 번씩 도박판을 순례했던 것이다.

물론 돈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박판을 정화하기 위한 조치였겠지만 말이다. 이 양반도 먹구름이 헬기 떨어지는 사건인 줄은 몰랐다는 얘기도 된다. 해몽하기가 어렵다는 말은 이 뜻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불길하니까 대비는 하자. 그래서 라스베이거스로 한 번씩 갔고, 그 비보책 덕분인지 헬기가 장락산에 떨어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겪었어도 본인은 죽지 않고 살아났다. 이런 식의 설명방식은 물론 필자의 매우 주관적인 관점이다.

왜 헬기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89세 노인이 죽지 않고 살아났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이해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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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동양학자·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 정윤정  / 매경

 

 

 

 

[江湖동양학-24]

붓끝 모양 산봉우리 주위엔 '큰 문장' 수두룩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다'.

나의 변함없는 화두다. 인물은 과연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아 태어나는 것인가. 아파트에서는 인물이 태어날 수 없는 것인가. 지령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20년 가까이 고민하고 있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다.

문자와 먹물에 집착하다 보니 영안(靈眼)이 열리지 않아 '지령'을 시원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간접적인 단서는 포착할 수 있었다.

그 단서란 문필봉이 보이는 곳에서 학자들이 많이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문필봉은 붓 끝의 모습처럼 생긴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흔히 삼각형처럼 뾰쪽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문필봉이 바라다 보이는 동네에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학자와 문필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대표적인 동네 세 군데를 꼽는다면 경남 산청의 필봉산(筆峰山) 주변과, 전북 임실의 삼계면(三溪面), 경북 영양의 주실(舟室) 마을이다.

산청에는 아주 잘 생긴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다. 이름을 아예 '필봉산'으로 붙였을 정도다. 나는 항상 함양.산청을 지날 때마다 멀리서 필봉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설렌다. 차를 세워놓고 한참 동안 감상하는 버릇이 있다. 예부터 함양.산청 일대에서는 이 필봉산이 붓 끝처럼 보이는 지점에다가 집을 지으려고 경쟁이 심했다.

필봉산이 바라다 보여야 인물이 배출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보면 필봉산 주변에서 팔선생(八先生)이 배출됐다. 일두(一) 정여창(鄭汝昌.1450~1504), 옥계(玉溪) 노진(盧示眞.1518~1578), 구졸암(九拙庵) 양희(梁喜.1515~1581),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1449~1498), 뇌계(雷溪) 유호인(兪好仁.1445~1494), 청연(靑蓮) 이후백(李後白.1520~1578), 춘당(春塘) 박맹지(朴孟智.1426~1492). 이 여덟 명의 학자가 함양 일대에서 팔선생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필봉산이 잘 보이는 지점인 산청군 생초면에서도 근래에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두희를 비롯해 여러 명의 판.검사가 배출됐다. 동양철학의 대가이면서 풍수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던 배종호 교수도 역시 필봉산이 잘 바라다 보이는 산청군 금서면 출신이다. 지금도 함양.산청 일대에서 필봉산 바라다 보이는 집터는 시세의 2~3배다.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서는 박사가 지금까지 1백3명이 나왔다. 요즘 박사 시세가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1개 면에서 1백3명의 박사 배출은 이색적인 기록이다. 삼계면은 궁벽진 산골이면서도 산세가 빼어난 곳이었다.

삼계(三溪)라는 명칭 자체가 '3개의 냇물'이 합쳐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냇물이 합쳐지는 곳은 기운이 모이는 곳이므로 명당으로 간주한다. 조선 초기에 이름난 사대부 집안들이 산수가 빼어난 이곳으로 낙남(落南)하여 터를 잡고 살았다. 삼계면 일대에 수백년간 살고 있는 경주 김씨, 풍천 노씨, 청주 한씨, 경주 정씨 등이 그런 집안들인데, 1백3명의 박사 가운데 70~80%는 이 집안의 후손들이다.

예를 들면 서울대 교수로 있다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한상진 박사도 청주 한씨로서 삼계면 어은리 출신이다. 6 ~ 7년 전에 필자가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삼계면 어은리에 들린 적이 있다. 동네 정면에 문필봉이 아주 힘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문필봉이 잘 보이는 지점을 역추적해 찾아 들어가다 보니 나타난 동네가 삼계면 어은리의 청주 한씨 집성촌이었던 것이다. 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문필봉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의 집 대문을 열고 '누구 집이냐?'고 대뜸 물어보았다. 노인네 이야기가 '상진이네(한상진) 집이다!'는 대답이었다. 어은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문필봉은 남원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온 천황봉(天皇峰) 이었다. 삼계면에서 쳐다보면 천황봉이 문필봉으로 보인다.

경북 영양의 주실마을은 일월산 밑의 첩첩산중이다. 한양 조씨들 집성촌으로서, 청록파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다.
50~60 가구가 사는 이 산골마을에서 박사가 16명이 나왔다. 서울대 조동일 교수, 독립운동사 전공인 국민대 조동걸 교수,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낸 조동원 교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유명 교수를 많이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정면 4백m 전방쯤에는 선이 분명한 문필봉이 자리잡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문필봉 정기를 받아 인물이 많이 나왔다고 믿고 있다. 1백% 수긍하기도 어렵지만,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어렵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문필봉이 어디 있는지를 보라!


 

[조용헌 살롱] [832]

四溟大師와 德川家康

사명대사와 덕천가강

 

여행을 다니면서 한시(漢詩)를 배울 때가 있다. 낯선 음식점 벽이나 우연히 방문한 사무실의 액자, 명문가의 고택 병풍에 쓰여 있는 '명문장'과 한시를 보고 공부를 많이 했다. 이렇게 배운 실전 한시는 쉽게 잊혀지지가 않는다. 몇 년 전에 용인에 있는 '세중옛돌박물관'에 석인상(石人像)을 보러 갔던 적이 있다.

일본에 반출되어 있던 문인석, 무인석, 동자석, 벅수등 70여 쌍을 이 박물관에서 다시 찾아다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박물관 한쪽 벽면에 두 사람의 한시가 걸려 있는게 눈에 띄었다.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4년에 전후 처리문제로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통일을 성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를 처음 만났을 때 주고받은 문답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죽은 히데요시 추종 세력인 서군(西軍)과 이에야스 세력인 동군(東軍)이 격돌하여 큰 전쟁을 치렀다. 1600년 9월 15일에 천하 패권을 놓고 맞붙은 '세키가하라 전투'가 이것이다. 여기에서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면서 일본 열도는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고, 그 여세를 몰아 이에야스의 기세가 최고조로 달해 있던 시기에 사명이 방문한 것이었다.

먼저 이에야스가 사명대사에게 선제공격을 날렸다.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石上難生草),

방안에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렵거늘(房中難起雲),

너는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기에(汝爾何山鳥),

여기 봉황의 무리 속에 끼어들었는가(來參鳳凰群)'.

 

당시 조선과 일본은 사용하는 언어는 달랐지만 한문은 같이 썼기 때문에 붓으로 쓰는 필담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곧바로 사명이 맞받아쳤다.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인데(我本靑山鶴),

항상 오색구름을 타고 놀다가(常遊五色雲),

하루아침에 오색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一朝雲霧盡),

잘못하여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誤落野鷄群)'.

 

사명은 과연 고승이다. 그 담대한 배짱과 칼날 같은 선기(禪機)가 이 시 한 수에 담겨 있다. 사명이 일본에 잡혀간 조선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귀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이에야스와의 통쾌한 문답도 작용했던 것 같다. 올해가 임진왜란 420주년이 되는 흑룡의 해이다.

당쟁(黨爭)이라는 국론 분열로 무너졌던 조상들의 전철을 또 밟아서는 안 된다.

 

/ 조선

 

 

 

 

 

내 생각에 위 글은 일본이 만들어낸 얘기 같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무식한 사람이다. 당시에 일본에서 글을 아는 사람들은 중,승려들이였다

임진왜란에 온 일본군 장수들이 옆에 승려를 데리고 다닌 것은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없어서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다. 

쇼군.將軍의 소설이 있다. 제임스 크라벨이 쓴 장군이 따로있다.

당시의 일본 생활을 대강 알수있다.( 아주 아주 무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