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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책진(禪關策進) - 1, 조사들의 법어

경호... 2012. 3. 1. 00:39

선관책진(禪關策進)

 

선의 관문을 뚫다

 

- 운서 주굉 선사 -

 

 

 

1 . 조사들의 법어

 

 

  

● 균주 황벽 운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미리 철저히 해 두지 않으면 납월 삼십일(죽음)에 이르러 그대들, 틀림없이 마음이 초조하고 어지러울 것이다.

외도들은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으며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한다. 내가 그대들에게 묻나니, 갑자기 죽음이 닥치면 그대들은 무엇으로 생사와 맞서려 하는가?

한가로울 때 준비해 두어야만 바쁠 때 쓸모가 있어 수고로움을 덜 수가 있는 법, 목마를 때에 이르러서야 샘을 파지 마라! 손발이 서로 어긋나고 눈앞이 아뜩하고 정신이 갈팡질팡하여, 참으로 괴로울 것이다.

평소에 구두(口頭)삼매(三昧)만을 배워 선()을 말하고 도()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짖지만, 이때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남이야 얼마든지 속일 수 있겠지만 오늘 자기 자신은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형제들에게 권하노니, 몸이 건강할 때 분명히 다스려라. 이 문의 빗장을 열기란 매우 쉬운 일이건만, 그대들이 죽을 각오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어렵다, 어렵다!” 라고만 한다.

대장부라면,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조주 스님이 ()”라고 했던 공안을 참구해라. 하루 종일 이 자만을 간()하되, 밤이고 낮이고, 길에서나 집에서나 앉아서나 누워서나, 옷 입고 밥 먹을 때나 똥 누고 오줌 눌 때나, 생각을 끊지 말고 돌아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자를 지켜가라.

날이 지나고 세월이 깊어지면 한 덩어리를 이루어 문득 마음 꽃이 활짝 피어 불조의 기틀을 깨달을 터이니, 천하 노화상의 혀에 속지 않고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일은 바람 없는 곳에 파도가 일어난 일이요, 세존이 꽃을 든 일도 한바탕 허물이다.” 하고 당당히 말할 줄 알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염라대왕이나 뭇 성인도 어찌하지 못하리라.

다만 그것이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지 마라. 어째서 그런가? 일이란 뜻을 품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이 일로부터 뒷날에 공안을 제시하여 화두를 간하는 일이 비롯되었다. 다만 굳이 자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자든, ‘*만법귀일(萬法歸一)이든, ‘*수미산(須彌山)이든, ‘*사료소료(‘死了燒了), ‘*참구염불이든, 한 가지만을 지켜 깨닫기에 애를 써라. 의심하는 대목은 같지 않아도 깨달으면 두 가지가 아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라는 화두. 조주 스님의 공안이다.

 

*수미산(須彌山) : 한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수미산!” 이라고 답했다.

 

*사료소료(‘死了燒了) : 죽어서 태워져 재 한 줌이 되면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화두.

 

*참구염불 : 이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 하고 참구하는 공부법. 원나라 이후에 이 공부법을 많이 썼다.

 

 

 

● 조주 심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그대들은 오직 이 도리만을 궁구하여 스무 해고 서른 해고 고요히 앉아서 간()해라. 만일 그래도 알지 못하겠거든 내 머리를 베어 가라.

 

나는 마흔 해 동안 잡다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두 끼 죽과 밥을 먹을 때만큼은 예외로 하여 더러 잡생각을 하곤 했다.

 

 

 

● 현사 비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반야를 배우는 보살이라면 큰 근기와 큰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만일에 근기가 더디고 둔하다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것같이 밤낮으로 피로를 잊고 참으면서 힘써야 한다. 그토록 급하고 간절히, 또한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아 가며 뼈에 사무치게 사실을 궁구하면, ()를 만나기 어렵지 않으리라.

 

 

 

● 아호 대의 선사

 

가르치고 타이르다.

 

몸을 잊거나 마음을 죽이게 되기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 이것이 가장 고치기 어려운 고약한 병이다. 당장 반야검을 빼어 들고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베되, 눈을 부릅뜨고 눈썹을 치켜세우고서 거듭해서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간해라.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고 공을 들이지 않으면 언제 시험에 붙고 마음이 공()함을 깨닫겠는가?

 

 

 

● 영명 수 선사

 

가르치고 타이르다.

 

도를 배우는 일에 별나고 기묘한 비결은 따로 없다. 다만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속에 있는, 무량겁 동안 쌓인 업식종자(業識種子)를 없애기만 하면 된다. 그대들은 오직 정념(情念)을 없애고 그릇된 인연을 끊어 세간의 온갖 애욕 경계에 대해 마음이 목석같이만 되면, 아직 도안(道眼)을 밝히지 못했더라도 저절로 청정한 몸을 이룰 것이다.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 가까이 모시면, 참구하되 아직 철저하지 못하거나. 배우되 이루지 못했더라도, 이근(耳根)에 뚜렷이 남아 영원히 도의 종자가 되어 세세생생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잃지 않아서, 다시 태어나자마자 하나를 듣고는 곧 천 가지를 깨달을 것이다.

 

 

 

● 황룡 사심 신 선사

 

수시로 설법하다.

 

상좌들이여! 사람의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듣기 어려우니, 이번 생에 이 몸을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에 제도하겠는가?

그대들이 선()을 참구하고자 하는가? 반드시 놓아 버려라! 무엇을 놓아 버릴 것인가?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을 놓아 버리고, 무량겁 동안 쌓은 숱한 업식을 놓아 버리고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추궁하되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간()해라.

추궁하고 추궁하면 문득 마음 꽃이 활짝 피어 시방세계를 비출 것이니, 참으로 마음에 맞고 손에 익어 쉬이 대지를 황금으로 바꾸고 강물을 저어서 우유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찌 평생이 창쾌하지 않겠는가!

책 속에서 문자를 새기거나, 말을 기억하여 선을 구하고 도를 찾지 말라! ()과 도()는 책 속에 있지 않다. 경전의 방대한 가르침과 제자백가를 다 외더라도 쓸데없는 언어일 뿐이니, 죽음에 다다라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경전을 헐뜯거나 법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문자에만 집착하여 수행하지 않는 사람을 경계한 말이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을 편들어 붉은 기를 세운 것은 아니다.

 

 

 

● 동산 연 선사

 

행각을 떠나려는 제자에게

 

()’()’ 두 글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고 이 일을 분명히 밝혀라. 그저 무리를 따라 떼를 지어 부질없는 이야기나 주고받으며 세월을 보낸다면 뒷날에 염라대왕이 밥값을 내놓으라고 할 것이니,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진작 일러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라.

공부를 할 때는 어떤 곳이 힘을 얻는 곳이고 어떤 곳이 힘을 얻지 못하는 곳이며, 어떤 곳이 잃는 곳이고 어떤 곳이 잃지 않는 곳인지를 시시각각 점검하며 분발해야 한다.

어떤 무리들은 포단(蒲團 : 좌선할 때 깔고 앉는 깔개) 위에 앉자마자 마냥 졸기만 하다가 깨어서는 터무니없는 망상이나 피우고, 또 포단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모여 앉아 난잡한 이야기나 하니, 도를 이렇게 공부해서는 미륵이 이 세상에 오시는 날이 되어도 결코 손에 넣을 수가 없다.

용맹스럽게 정신을 모아 화두를 들되 밤낮으로 힘써 참구하여 그것과 겨루어야지, 일 없는 껍질 속(구해야 할 부처도, 행해야 할 도()도 없는 경지)에 앉아 있어서도 안 되며, 포단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어서도 안 된다.

맞서 싸울수록 잡념이 더욱 많아지거든 가만히 화두를 내려놓고 땅에 내려와 한 바퀴 거닐어라. 그런 다음 다시 포단위에 올라가서, 두 눈 부릅뜨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척추뼈 곧추세우고서 전과 같이 화두를 들면, 마치 펄펄 끓는 솥에 찬물 한 국자를 부은 것처럼 시원해질 터이다. 이렇게 공부하면 반드시 고향에 다다를 때가 올 것이다.

 

 

 

● 불적 이암 진 선사

 

널리 설하다.

 

믿음이 충만하면 의심하는 마음도 충만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충만하면 깨달음도 충만하다. 평생 듣고 본 그릇된 지식이나 그릇된 이해, 기묘한 말이나 어구, 그리고 선도(禪道)나 불법(佛法)에 대한 아만심들을 철저히 비워 버리고, 오로지 아직 밝히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공안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척추 뼈를 곧추세우고는 밤낮을 가리지 말고 애를 써라.

그리하여 동서를 따지지 않고 남북을 나누지 않게 되어 마치 숨을 쉬고 있는 죽은 사람과 같은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경지에 따라 변화하여, 앎은 여전하되 저절로 안으로 생각이 사라지고 밖으로 심식(心識)의 길이 끊어져서 문득 정식(情識)을 깨부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다른 데서 얻어진 것이 아니니, 그때 어찌 평생이 경쾌하지 않겠는가!

 

 

 

● 경산 대혜 고 선사

 

물음에 답하다.

 

요즘 어떤 이는 자신의 안목이 밝지 않은데도 학인들에게 망설임 없이 죽은 짐승같이 쉬고 또 쉬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인연에 따라 마음에 단단히 붙여 생각을 잊고 묵묵히 비춰라하거나 어떤 일도 상관하지 마라한다. 이 같은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를 해서는 결코 깨달을 수가 없다.

오직 한 곳에 마음을 두기만 하면 얻지 못할 사람이 없으니, 때가 되면 저절로 철컥철컥 들어맞아 대번에 깨달을 것이다.

 

자기의 심식(心識)과 세간에서 비롯된 번뇌를 반야로 바꾸기만 하면, 비록 금생에 철저하지 못하더라도 죽음에 이르러 악업에 끌리지 않고, 내생에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반야 가운데서 지금 이 자리에 이루어져 있는 절대 진리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니, 이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분명한 일이다.

 

오로지 화두만을 들어, 망상이 일어날 때도 그치려거나 막으려 하지 말고 오직 화두만을 간해라! 길을 걸을 때도, 앉아 있을 때도 끊임없이 화두를 들어, 마침내 아무 맛도 없어지면 그때가 참으로 좋은 곳이니 놓아 버리지 마라. 문득 마음 꽃이 활짝 피어 시방세계를 비추면, 가느다란 털끝에서 보왕(寶王) 세계가 나타나고 한 점 티끌 속에서 큰 법륜을 굴리게 될 것이다.

 

[] 대혜 종고 스님이 다른 이는 정()을 우선하고 혜()를 뒤로 두지만, 나는 혜를 앞에 세우고 정을 뒤에 둔다했다. 그것은 아마도 화두의 의정(疑情)을 깨부수고 나면, 이른바 쉬고 또 쉰다는 것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 몽산 이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나는 나이 스물에 참선 공부를 알게 되어, 서른두 살이 되기까지 열일곱 명의 장로에게서 법문을 들으며 그들에게 공부하는 법을 물었으나, 도무지 분명하고 확실한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완산(脘山) 장로를 뵈었더니 내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 자를 간하되 종일 분명하고 또렷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고 닭이 알을 품듯이 끊어짐이 없게 해라. 아직 투철하지 못하면 마치 쥐가 널빤지를 갉듯이 바꾸지 마라. 이처럼 공부를 지어 가면 반드시 분명히 밝힐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궁구하여, 열 여드레가 지나 차를 마시다가 홀연히 세존이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한 도리를 알았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서너 분의 장로를 찾아가 공부를 결택(決擇)해 줄 것을 청했으나 아무도 한마디 법어도 내려 주는 이가 없었는데, 어떤 분이 다만 해인삼매로써 하나의 도장으로 도장 찍듯이 하고 다른 것은 전혀 상관하지 마라했다.

나는 이 말을 믿고 두 해를 보냈다.

경정(更定) 5(1264) 유월에 사천(四川) 중경부(重慶府)에서 이질을 앓아 밤낮으로 백 번도 넘게 설사를 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해인삼매도, 전에 알던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입을 열어 말을 할 수도 없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눈앞에 죽음만이 있을 뿐, 갖가지 업연(業緣)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 무섭고 두려운 데에다 여러 가지 고통이 끊임없이 나를 짓눌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뒷일을 당부하고는, 포단을 높이 괴고 향로를 차린 뒤에 천천히 일어나 좌정하고 묵묵히 삼보(三寶)와 용천(龍天)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불선업(不善業)을 참회하노니, 만일 내 목숨이 다한 것이면 바라건대 반야의 힘을 입어 정념(正念)에 의해 태어나 일찍 출가해지이다. 만일에 병이 나으면 바로 세속을 버리고 스님이 되어 하루빨리 깨달음을 얻어 널리 후학을 제도해지이다.”

이런 원을 하고 나서는 ()’ 자를 들고마음을 돌이켜 스스로 간하니, 얼마 뒤에 오장육부가 서너 번 꿈틀거렸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고 또 잠깐 동안 몸이 보이지 않았으나 화두만은 끊어지지 않았다. 밤이 늦어서야 비로서 일어나니 병은 반이나 물러나 있었다. 다시 앉아 자정 가까이 되니 병이 모두 물러가고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팔월에 강릉에서 머리를 깎고, 한 해 뒤에 포단에서 일어나 행각하던 도중에 밥을 짓다가, “공부는 반드시 단숨에 해 마쳐야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을 깨닫고는, 황룡산에 가서 승당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수마(睡魔)가 닥칠 때는 자리에 앉은 채로 정신을 차려 가볍게 물리쳤고, 두 번째도 이렇게 물리쳤으며, 세 번째 수마가 심할 때는 땅에 내려와 불전에 예배하며 수마를 물리치고는 다시 포단에 앉곤 했다. 이런 규칙이 정해졌으나 수마가 심할 때는 수마에 맞서지 않고 함께하여, 처음에는 베개를 베고 잠깐 잤고, 뒤에는 팔을 베었으며, 나중에는 아예 눕지 않았다.

이렇게 이틀 사흘이 지나자, 밤이고 낮이고 피곤하던 끝에, 발밑이 둥둥 뜨는 듯하다가 갑자기 눈 앞의 먹구름이 갠 듯하고 몸이 갓 목욕을 마친 듯이 상쾌하더니, 마음의 의단(疑團)이 더욱 뚜렷하여 힘들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눈앞에 있었다. 성색(聲色)이나 오욕(五欲), 팔풍(八風 : 수행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여덟 가지 장애. 내게 이익이 되는 것, 세력이 줄어들어드는 것, 나를 비난하는 것, 나를 칭찬하는 것, 내 마음에 맞는 것, 나를 비난하는 것, 고생되는 것, 즐거운 것)이 어느 것도 들어오지 않게 되니, 마치 은쟁반에 눈을 담아 둔 듯이 깨끗하고 가을하늘처럼 맑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부는 조금 나아간 듯했으나 선지식에게서 결택할 길이 없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절() 지방에 들어갔다가, 길에서 고생하고 공부도 뒷걸음질 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승천사(承天寺) 고섬(孤蟾) 화상 처소에 와서 승당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결단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다짐하니, 한 달 남짓 지나자 전처럼 공부가 회복되었다.

그때 온몸에 부스럼이 났지만 이도 돌아보지 않고 목숨을 버릴 각오로 공부를 밀어붙였다. 자연히 힘을 얻어 병중공부(病中工夫)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날 재()에 참석하려고 산문을 나와 화두를 들고 길을 가다가 재()를 지내는 집을 지나친 줄도 몰랐으니 또한 동중공부(動中工夫)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경계는 마치 물속에 잠긴 달이 급한 여울을 만나도 흩어지지 않고 거센 물결에 쓸려도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활발발한 것이었다.

삼월 초엿샛날, 포단에 앉아 한참 자를 들고 있는데, 수좌 스님이 승당에 들어와 향을 피우다가 향로 뚜껑을 때려 소리를 내니, 문득 !’ 하는 소리가 터지면서 나를 알고 조주를 움켜쥐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어처구니 없구나!

길이 다하니

파도가 곧 물임을 깨달았네.

발군이라는 조주 늙은이여

면목이 다만 이것뿐인가?

 

가을에 임안에서 설암, 퇴경, 석갱, 허주를 비롯한 여러 장로들을 뵈었는데, 허주 화상이 완산으로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완산에 가서 스님을 뵈었더니, 완산 화상이 “ ‘광명이 온 세상을 고요히 비추니…’ 라고 한 것이 어찌 장졸(張拙 : 오대(五代) 송초(宋初) 사람으로, 일찍이 수재에 천거되었다. 선월 대사 관휴의 지시에 따라 석상 경제 선사를 뵈니, 경제가 수재의 이름은 무엇인가?” 하니, “성은 장이요 이름은 졸이라고 합니다했다. 그러자 경제가 교묘한 것(교巧)도 얻을 수 없는데 서투른 것(졸拙)은 어디서 왔는가?" 하니, 그 순간 활연히 크게 깨닫고, “광명이 온 세상을 고요히 비추니…” 하는 게송을 지었다.) 수재의 말이 아닌가?” 하고 묻기에, 내가 답하려고 하자 스님이 곧 !’을 외쳤다.

그 뒤로 길을 가거나 앉거나 음식을 먹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여섯 달이 지난 다음 해 봄, 어느 날 성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돌계단을 오르다 문득 가슴속의 의심 뭉치가 얼음 녹듯 하기에, 몸이 길에서 걷는 줄도 모르는 채로 바로 완산 회상을 뵈었다. 스님이 이번에도 앞에서 한 말을 묻기에 내가 곧 선상(禪狀)을 엎어 버렸고, 또 지금까지 몹시 까다롭기만 하던 공안 몇 가지를 낱낱이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어진 사람들이여, 참선은 반드시 간절히 지어 가야 한다. 이 산승이 만일에 중경부에서 병이 나지 않았더라면 세월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 중요한 것은 바른 지견을 가진 선지식을 만나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고인이 아침 저녁으로 참청(參請)하여 몸과 마음을 결택하고 부지런하고 간절히 이 일을 구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다른 사람은 병이 나면 뒷걸음을 치게 되지만 이 노인은 병으로 말미암아 간절히 정진하여 마침내 큰 그릇을 이루었으니, 어찌 쉬운 일이랴! 참선하는 사람은 병이 났을 때 반드시 이 말씀을 거울삼아 간절히 힘써야 한다.

 

 

 

● 양주 소암 전 대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요즘은 독실하게 선을 참구하는 자도 드물지만, 화두를 참구하더라도 혼침과 산란 두 가지 마()에 묶여 있을 뿐 의정과 맞상대하여 혼침과 산란을 끊어야 함을 알지 못한다.

믿음이 깊으면 의정도 반드시 깊고, 의정이 깊으면 혼침과 산란은 저절로 없어진다.

 

 

 

● 처주 백운 무량 창 선사

 

널리 설하다.

 

하루 종일 화두를 따라 걷고 화두를 따라 머무르며 화두를 따라 앉고 화두를 따라 눕되, 마음이 마치 밤송이와 같이 일체의 인아(人我)와 무명(無明)과 오욕(五欲)과 삼독(三毒) 따위에 먹히지 않으면, 걷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는 온갖 행동거지가 의심덩어리일 터이다. 오로지 의심덩어리뿐이어서 종일 어리석은 듯 그저 말뚝같이 지내면, 소리를 듣거나 색()을 보는 사이에 틀림없이 !’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될 것이다.

 

 

 

● 사명 용강 연 선사

 

수좌의 편지에 답하다.

 

공부는 반드시 큰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그대의 공부가 한 달이나 보름이 지나도록 아직 한 덩어리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진실한 의정이 눈 앞에 있어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으면, 자연히 미혹과 산란이 두렵지 않게 되리라.

오로지 용맹스럽게 분심을 내어 하루 종일 마치 어리석은 듯이 공부를 지어 가라. 그러면 이때는 옹기 속에서 달아나는 자라가 두렵지 않으리라.

 

 

 

● 원주 설암 흠 선사

 

널리 설하다.

 

때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에 금방 내생인데, 어찌 몸이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철저하게 타파하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가?

이 명산대천의 신룡세계(神龍世界), 조사법굴(祖師法窟)의 승당이 깨끗하고, 죽과 밥이 정결하며, 뜨거운 물과 따뜻한 방이 편안하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여기에서 철저히 타파하지 못하고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이것은 그대가 자포자기하여 스스로 세상을 피해 달아나 비천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말 까마득히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왜 선지식에게 나아가 두루 묻지 않는가? 오참(五參 : 닷새마다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하는 의식) 때마다 곡록상(曲彔牀 : 승가에서 쓰는 의자) 위의 늙은이가 이렇게도 설하고 저렇게도 설하는 것을 보는데, 어찌 새겨듣고 또 거듭거듭 찾고 생각하며 필경 이것이 무엇인가?” 하지 않는가?

 

산승은 다섯 살에 출가하여, 상인(上人)을 모시면서 스님이 손님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는 이 일이 있음을 알았고,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확신하고는 곧 좌선을 배웠다.

열여섯 살에 수계하고, 열여덟 살에 행각하여 쌍림사 원() 화상 회상에서 만사를 제쳐 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뜰에 나가지 않았으며, 비록 대중방에 들어가고 세수간에 가더라도 소매를 가슴에 붙이고 좌우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겨우 석 자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자를 간할 때, 문득 생각을 일으킨 곳에서 한 번 돌이켜 관하니, 이 일념이 곧 얼음처럼 차갑고 참으로 맑고 고요하여 움직이지도 흔들리지도 않으니, 하루가 마치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사이에 지나가는 듯, 종이나 북소리도 듣지 못했다.

열아홉 살에 영은사에 방부를 들였는데, 처주(處州) 화상이 보내온 편지를 보니, “() 수좌야! ()과 정()이 두 가지로 갈라지는 네 공부는 마치 썩은 물 같아서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다. 참선은 반드시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의정이 작으면 깨달음이 작고 의정이 크면 깨달음도 크다하였다.

화상의 말을 듣고는 곧바로 화두를 간시궐(幹屎 : 마른 똥 막대기. 한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물으니, 운문 스님이 간시궐이다했다)로 바꾸어 한결같이 이렇게도 의심하고 저렇게도 의심하며, 이렇게도 간하고 저렇게도 간하였으나, 도리어 혼침과 산란이 쳐들어와 청결함을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정지사로 방부를 옮겨 도반 일곱 명과 결사하고 좌선했는데, 이불을 치우고 눕지 않았다. 밖에서는 수() 상좌가 마치 쇠말뚝처럼 날마다 포단에 앉아 있었는데, 땅을 걸을 때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 두 팔을 늘어뜨려 또한 쇠말뚝과 같았으니, 가깝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두 해 남짓한 동안 한 번도 눕지 않았더니 정신이 흐릿하고 기운이 까무러져, 한번 놓아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가 두 달 뒤에야 다시 전과 같이 가다듬을 수 있었다. 결국 한 번 놓아버림으로써 비로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 일을 끝까지 밝히고자 하면 잠을 자지 않을 수가 없으니, 한밤중에 푹 자고 깨니 비로서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하루는 낭하에서 수 상좌를 만나 비로서 가까이 할 수 있었다. 그때 지난해에 스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왜 늘 나를 피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상좌가 진정으로 도를 판단하려는 사람은 손톱을 깎을 틈도 없는 법인데, 스님과 어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지금 저는 혼침과 산란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하니, “스님이 맹렬하게 도를 닦지 않은 탓입니다. 포단을 높이 괴고 척추뼈를 곧추세워 혼신을 다해 한 가지 화두를 지으면 어찌 혼침과 산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수 상좌의 가르침대로 공부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과 마음을 모두 잃고 사흘 동안 청정했다. 그 사흘 동안 두 눈을 한 번도 붙이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오후에 산문(山門)아래에서 좌선하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또 수 상좌를 만났다.

수 상좌가 물어 왔다.

스님은 여기서 무얼 합니까?”

도를 판단합니다.”

무엇을 도라고 합니까?”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더욱 답답해져서 곧 승당으로 돌아와 선을 참구하려다가 또 수좌를 만났다. 수좌가 이렇게 말했다.

스님은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간하기만 하십시오.”

이 한 말씀을 듣고 승당으로 돌아가 막 포단에 오르려는데, 마치 땅이 푹 꺼진 것처럼 눈앞이 활짝 열렸다. 이때의 경계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세상 어떤 것으로도 비유 할 수 없었다. 곧 자리에서 내려와 수 상좌를 찾으니, 수가 기쁘다 기뻐!” 하고는, 손을 잡고 산문 앞 버드나무 언덕 위를 한 바퀴 거닐었다.

천지간 삼라만상을 보니,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는 것, 전에 싫어하여 버렸던 물건이나 무명 번뇌가 본디 모두 나 자신의 묘명진성(妙明眞性) 가운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이런 모습이 보름 동안이나 흔들리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높은 안목을 가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해 여기에서 머무르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것을 견해를 벗어나지 않으면 정지견(正知見)을 장애한다.” 고 한다. 잠이 푹 들었을 때는 두 가지로 나뉘었고, 뜻의 길(義路)이 있는 공안은 알 수 있으나 은산철벽과 같은 것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비록 무준 선사 회상에서 여러 해 동안 입실(入室 : 학인이 혼자 방장이나 조실 스님의 방에 들어가 참선 수학에서의 문제나 공안에 대해 교시와 점검, 시험 등을 받는 것)하였으나 선사께서는 자리에 올라 내 마음 속 일에 관해 한마디도 일러 주시지 않았고, 경교나 어록에도 내 마음 속 병을 풀어 줄 만한 말씀은 한마디도 없었다.

이 병이 이렇게 열 해 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었는데, 하루는 천목산에서 법당에 올라갔다가 한 그루 늙은 잣나무에 눈 길이 닿자마자 깨달았으니, 마치 어두운 방에서 햇빛 속으로 나온 것처럼 지금까지 얻은 경계와 가슴속에 걸린 것이 와르르 흩어졌다.

이로부터는 삶도 의심하지 않고 죽음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며, 부처도 조사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비로서 무준사범(無準師範) 노인의 입지처를 보니 몽둥이 서른 대를 먹이기에 꼭 알맞아 보였다!

 

 

 

● 천목 고봉 묘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이 일은 오직 그 사람의 간절한 마음만이 필요하다.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참다운 의정이 일어나니, 의심하고 의심하여 애써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쫓아도 달아나지 않으며 분명하고 뚜렷이 나타나 늘 앞에 있으면, 이것이 바로 힘을 얻은 때이다.

또한 그 올바른 생각을 확고히 하여 두 가지 마음이 없어야 한다. 길을 걸어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 모르며,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목마름도 느끼지 못해야 한다. 이 경계가 앞에 나타나면 이는 곧 집에 돌아온 소식이니, 단단히 끌어당기고 꼭 붙잡아 그저 때를 기다리기만 해라.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구해서도 안 되고, 마음속으로 깨닫기를 기다려서도 안 되며, 또한 마음대로 놓아버려서도 안 된다. 다만 올바른 생각을 굳게 지켜 깨달음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이때는 팔만사천의 마군이 네 육근(六根)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온갖 기이한 선과 악 등의 일을 네 마음에 따라 나타나게 할 것이다. 네가 언뜻 마음 속에 조그마한 생각이라도 일으켜 집착하면 곧바로 마군의 함정에 떨어질 터이니, 마군이 주인이 되어 너를 지휘하여, 입으로는 마의 말을 하고 몸으로는 마의 일을 행하여, 반야의 정인(正因)이 이로부터 영원히 끊어지고 보리 종자가 다시는 싹트지 않게 될 것이다.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마치 시신을 지키는 귀신처럼 지키고 또 지키면, 의단이 탁 하고 터지는 한 소리에 틀림없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소스라치게 할 것이다.

 

나는 열다섯 살에 출가하고, 스무 살에 옷을 바꿔 입고 정자사에 들어가 세 해를 기한하고 죽을 각오로 선을 배웠다. 처음에 단교(斷橋) 화상에게 나아가 뵈니, “생은 어디서 왔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하는 화두를 참구하게 했다. 그러나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져 마음이 한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중에 설암(雪巖) 화상을 뵈니 자를 간하게 하고, 또한 길 가는 사람이 노정을 알아야 하듯이, 날마다 일전어(一戰語 : 지금까지 말한 바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말)를 일러라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두서가 있음을 보고서는 나중에는 마침내 공부하는 것을 묻지 않고, 문에 들어가 스님을 뵐 때마다 누가 네게 이 송장을 끌어다 주었느냐?” 하고 묻고는,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곧 내쫓아 버렸다.

나중에 경산사 승당으로 돌아왔는데, 꿈속에서 문득 만법귀일 일귀하처화두가 생각나더니, 이로부터 단박에 의정이 일어나서 동서도 구별하지 못하고 남북도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엿새째가 되던 날, 대중을 따라 조사전에서 경을 읽다가, 머리를 들어 문득 오조 연 화상 진찬(眞贊)의 마지막 두 구절에 백 년 삼만육천 일 반복하는 것이 본디 이것이구나!” 한 것을 보고, 일전의 송장을 끌고 온 놈의 화두를 문득 타파하게 되었다. 이로써 실로 혼비백산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계를 얻었으니, 어찌 120근의 짐을 벗어 버릴 뿐이랴. 그때가 스물네 살 때였고, 마침 세 해 기한이 다 찬 해였다.

그 뒤에 일상 생활이 번잡한 가운데에서도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받고서, “주인 노릇을 합니다하고 답하니, 또한 꿈에서도 주인 노릇을 하는가?” 하고 물어서, “그러합니다라고 답했다. 깊은 잠이 들어 꿈이 없을 때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었지만, 그때는 대답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고 보여 줄 이치도 없었다.

그러자 화상이 지금부터 너는 부처를 배우고 법을 배우며 옛일을 궁구하고 지금을 궁구할 필요 없이, 다만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다가 잠에서 깨면 정신을 차리고 나의 이 일각 주인공(一覺主人公)은 필경 어디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 하는가?’ 만 의심하라." 하기에 일생을 버려 어리석은 사람이

될지언정 반드시 이 일착자(一着子)를 분명히 보리라고 서원했다.

다섯 해가 지난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마침 이 일을 참구하고 있는데, 함께 자는 도우(道友)가 목침을 땅에 떨어뜨린 소리에 문득 의단을 타파하니, 마치 그물에 걸렸다가 풀려난 듯, 모든 불조의 까다로운 공안과 고금의 여러 가지 고칙인연(古則因緣)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로부터 나라가 편안하고 국가가 안정하며 천하가 태평하니, 한 생각도 함이 없이 시방을 꼼짝 못하게 했던 것이다.

 

[] 이처럼 대중에게 공부를 지어가는 전 과정을 지극히 간절하고 절실하게 말했으니, 배우는 사람들은 마땅히 마음속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잔다한 것은 깨달은 뒤의 일이니,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

 

 

 

● 철산 애 선사

 

널리 설하다.

 

산승은 열세 살에 불법이 있음을 알고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스물두 살에 수계하고 승려가 되었다.

먼저 석상(石霜) 화상 회상에 갔는데, 상암주(祥庵主)늘 코 끝의 흰 것을 관하라한 가르침을 기억하고, 마침내 청정함을 얻었다.

나중에 설암 화상 회상에 있던 어떤 스님이 왔는데, 그에게서 설암 화상의 <좌선잠坐禪箴>을 구해 베끼어 읽어 보니, 내 공부는 역시 아직 그에 이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설암 스님 회상으로 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하되 오직 ()’ 자만을 들었다.

나흘째 되던 날 밤에,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나자 매우 상쾌하여 그대로 승당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오로지 좌선에만 힘썼다.

나중에 원묘 고봉 화상을 뵈니, ‘하루 종일 끊어짐이 없게 하되 사경(四更 : 오전 2시쯤)에 일어나 화두를 들어 얼굴 앞에 뚜렷이 있게 해라. 졸음이 오면 곧 몸을 일으켜 땅에 내려오되, 그때도 화두를 놓치지 말고, 걸을 때도 걸음걸음마다 화두를 여의지 마라. 자리를 펴거나 발우를 펼 때, 숟가락을 들거나 젓가락을 놓을 때, 대중을 따라 울력을 할 때도 언제나 화두를 여의지 말고, 낮이나 밤에도 또한 그렇게 하여 한 덩어리를 이루면, 환히 깨닫지 못할 사람이 없다했다. 고봉 화상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했더니, 정말 한 덩어리를 이룰 수 있었다.

3 20일에 설암 화상이 자리에 올라 형제들이여, 포단위에서 마냥 졸기만 하는구나! 반드시 땅에 내려와 한 바퀴 거닐고 찬물에 세수하고 두 눈을 씻고는 다시 포단위에 올라가, 만 길 벼랑 위에 앉은 듯이 척추뼈를 곧추 세우고는 오직 화두만을 들어라. 이와 같이 힘써 공부하면 이레 만에 반드시 깨달을 것이니, 이것은 산승이 사십 년 전에 이미 경험했던 공부과정이다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랐더니, 공부가 전과 다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둘째 날은 두 눈을 감으려고 하여도 감아지지 않았고, 셋째 날은 몸이 허공 속으로 걸어가는 것과 같았고, 넷째 날은 세상 일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 밤에 난간에 기대어 잠깐 서 있자니, 몸은 있는 줄도 몰랐으나 화두를 점검해 보니 여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몸을 돌려 포단에 오르니, 문득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마치 해골이 쪼개진 것 같고, 만 길이나 되는 우물 속에서 공중으로 높이 들려 올라간 것과 같았다. 이때가 걸림 없는 환희처(歡喜處)였다.

이러한 경계를 설암 화상에게 말씀드리니, 스님이 아직 멀었다. 더 공부해라했다. 법어를 청하니, 마지막에 불조를 잇는 향상사(向上事)는 뒤통수에 여전히 한 방망이 모자라네했다. 마음속으로 어째서 한 방망이가 모자란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역시 의혹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결단하지 못한 채로 날마다 오롯이 선을 참구하는 사이에 반년이 흘렀다.

하루는 머리가 아파 약을 달이는데, 마침 각적비(覺赤鼻) 스님이, “나타 태자가 뼈를 부수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살을 발라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라는 화두를 묻는데, 예전에 내가 오지객(悟知客) 스님의 물음에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던 일을 생각하는 순간 문득 이 의단을 깨뜨렸다.

나중에 몽산에 갔는데, 몽산 화상이 참선은 어떤 곳에 이르러야 공부를 마친 것이 되겠는가?” 하고 물었으나 끝내 두서 있는 답을 하지 못하자, 스님이 다시 정력(定力) 공부에 힘써 번뇌와 습기를 깨끗이 씻어라했다. 그 뒤로도 입실하여 하어(下語 : 고칙(古則)이나 송()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밝히는 것)를 드릴 때마다 다만 아직 멀었다!” 라고 할 뿐이었다.

하루는 해질 무렵에 자리에 앉아 새벽이 될 때까지 정력(定力)으로 밀어붙이니, 참으로 깊고 미묘한 경계가 이루어졌다. ()에서 나와 스님을 뵙고 그 경계를 말씀드리니, 스님이 어떤 것이 네 본래면목이냐?” 라고 묻기에, 막 대답하려는데 스님이 문을 닫아 버렸다. 이때부터 날로 공부에 묘처(妙處)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설암 화상을 너무 일찍 떠난 탓에 세밀한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다행이 본분 종장을 만나 여기에 이를 수가 있었다. 본디 공부란 알차고 탄탄하게 하면 날마다 깨달음이 있고 걸음마다 벗겨져 떨어짐이 있기 마련이다.

하루는 벽 위에 걸린 삼조(三祖) 화상의 <신심명>뿌리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라가면 종지를 잃는다한 것을 보고는 껍질을 한 꺼풀 더 벗었다. 스님이 이 일은 마치 구슬을 가는 것과 같아 갈수록 더욱 광채가 나고 밝을수록 더욱 깨끗해지니, 차츰차츰 한 꺼풀씩 벗겨 가면 몇 생에 걸친 다른 공부보다 낫다하고는, 내 경계를 말씀드릴 때마다 다만 아직 멀었어!” 라고만 했다.

하루는 정에 들어 있다가 스님이 아직 멀었어!” 라는 말뜻을 문득 깨달았다. 몸과 마음이 툭 터지고 골수까지 환해져서 마치 눈이 쌓였다가 녹아 없어진 듯했다. 기쁨을 참을 수 없어 땅으로 뛰어 내려와 스님의 멱살을 잡고 내가 무엇이 모자란단 말입니까?” 하니, 스님이 손바닥으로 세 번 때렸다. 내가 세 번 절하니, 스님이 철산아! 이 일착자(一着子)가 몇 년 만이냐? 오늘에야 비로소 해 마쳤구나!” 했다.

 

잠깐이라도 화두를 놓치게 되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으니, 온갖 경계가 몸을 괴롭히더라도 오직 화두만을 들고 그것과 겨루되, ()이나 정() 중에서 힘을 얻었는지 힘을 얻지 못했는지를 수시로 화두에서 점검해라.

마찬가지로 정()에 들어 있는 동안에도 화두를 잃지 말라. 화두를 잃으면 사정(邪定)이 되고 만다. 마음속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말고, 문자로 알려고 하지 말며, 조그만 각촉(覺觸 : 좌선할 때 기연(機緣)을 접촉하여 자심(自心)을 깨닫는 것)으로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지 마라.

다만 어리석은 듯이 둔한 듯이 할 따름이니, 불법이나 세상법을 한 덩어리로 만들고, 하는 일이나 행동거지를 그저 평상시처럼 하고, 예전의 행리처(行履處)를 고치기만 해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대도는 본디 말 가운데 있지 않으니, 현묘(玄妙)를 말하려고 하면 하늘과 땅만큼 벌어지네. 반드시 주객을 모두 잊어버려야 비로소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고 할 수 있으리하였다.

 

 

 

● 천목 단애 의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지위에 들어 영원히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꾸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마치 식은 재에서 다시 불꽃이 일어나고 죽은 나무에서 다시 꽃이 피듯 해야 하니, 어찌 쉬운 일이랴.

내가 선사(先師) 회상에서 오랫동안 늘 큰 방망이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잠깐이라도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았으니, 지금까지도 아픈 곳을 만져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곤 한다. 어찌 그대들이 조그만 고통을 당하여 머리를 가로저으며 돌아보지 않는 것과 같으랴.

 

 

 

● 천목 중본 본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선사(先師) 고봉 회상은 사람들에게 오직 자신이 참구하는 화두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걸어갈 때도 이렇게 참구하고 앉아 있을 때도 이렇게 참구하라. 이렇게 참구해서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과 생각이 머무르지 못하는 때에 이르러 문득 타파해 벗어나면 성불한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불조(佛祖)가 진작에 증엄한, 생사를 벗어난 삼매이다. 중요한 것은, 철저히 믿어 오랫동안 물러서지 않는 데에 있다. 그렇게 하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사람이 없다.” 하시곤 했다.

 

화두를 간하고 공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입각처가 분명하고 깨닫는 곳이 진실해야 함이니, 비록 금생에 깨닫지 못하더라도 신심이 느슨해지지 않으면, 한두 생을 넘기지 않아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스무 해, 서른 해 동안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더라도 다른 방편을 찾지 마라. 기이한 인연에 이끌리지도 말고, 여러 가지 망념을 끊으며, 부지런히 힘써 오직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를 바라보고 굳게 지키되,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기로 작정하면 3생이나 5, 10, 100생으로 이어진들 어떠랴.

철저하게 깨닫지 못했다면 쉬지 마라. 이러한 정인(正因)이 있으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다.

 

병중공부를 할 때는 용맹정진도 필요 없고 눈썹을 치뜨고 눈을 부릅뜰 필요도 없다. 다만 그대의 마음을 목석과 같이 하고 생각을 식은 재와 같이 가누는 것이 필요할 따름이다. 사대(四大) 환신(幻身)을 다른 세계 밖으로 던져 버리고, 병이 들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 누가 돌보아 주어도 그만, 돌보아 주는 이가 없어도 그만, 향기가 나도 그만, 더러운 냄새가 나도 그만, 병이 나아 건강해져도 그만, 살아서 일백이십 살까지 살아도 그만, 혹시 죽어서 숙세의 업으로 지옥에 끌려들어가도 그만이라 생각해라.

이와 같은 경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말고, 다만 간절히 아무런 재미도 없는 화두를 들고, 약탕기 곁이나 침대 위에서 묵묵히 묻고 참구하여 놓아버리지 마라.

 

[] 이 노인의 여러 가지 말씀은 오직 사람들에게 화두를 간하되 진실하게 공부하여 올바른 깨달음만을 기약하게 한다. 정성스럽고 간절하며 뛰어나고 유쾌하여, 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마치 얼굴을 마주하여 귀를 잡고 일러 주는 듯하다.

 

 

 

● 사자봉 천여 칙 선사

 

널리 설하다.

 

태어났으나 온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을 태어남의 큰일(生大)’ 이라 하고, 죽었으나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을 죽음의 큰일(死大)’ 이라 한다. 납월 삼십일이 닥치면 손발이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게다가 앞길이 아득하여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일에 있어서랴. 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하고 급한 일이니, 이것이 생사 과보의 경계다.

생사업의 근본을 말하자면, 지금 잠깐 동안 소리를 따르고 색을 좇아 허둥지둥하는 이것이다. 그러므로 불조께서 큰 자비를 베풀어, 어떤 때는 너희에게 참선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또는 염불을 가르치시기도 하여, 망념을 여의고 본래면목을 깨달아 훤칠한 대해탈인이 되게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영험을 얻지 못하는 것은 세 가지 병통 때문이다. 첫째는 진정한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생사의 일이 큼을 사무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그럭저럭 무사(無事)의 껍질 속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세상의 허망하고 덧없는 명예나 이익을 관조하여 떨치거나 내려놓지 않고, 망연(忘緣)의 악습에 주저앉아 끊지도 털어 벗어나지도 못한 채, 경계의 바람이 부는 곳에서 저도 모르게 온 몸이 업의 바다 가운데 빠져 동서로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참된 도류(道流)라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래와 같이 조사가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잡념이 분분할 제

어떻게 손을 쓸까?

하나의 화두

마치 쇠빗자루 같네.

 

쓸면 쓸수록 더욱 많아지니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열심히 쓸어내라.

쓸리지 않으면

목숨 바쳐 쓸어내라.

 

문득 하공마저 쓸어내고 나면

천차만별이 한 길로 통하리.

 

선덕들이여, 노력하여 금생에 반드시 일을 마치고 영겁토록 재앙을 받지 않게 해라.

 

어떤 이는 염불과 참선이 다를 것이라고 의심한다. 이는 참선이 마음을 알고 성품 보기를 도모하는 것이며, 염불은 자성미타, 유심정토를 깨닫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선과 염불이 어찌 두 가지랴. 경전에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지금이나 후세에 반드시 부처님을 뵈리라하였으니, ‘지금 눈앞에서 부처님을 뵙는다면 참선의 오도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답혹문>“ ‘아미타불넉 자를 화두 삼아 온종일 빈틈없이 공부를 지어 가서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경계에 이르면, 차례를 밟지 않고 바로 불지(佛地)에 오른다하였다.

 

 

 

● 지철 선사

 

정토의 현묘한 문

 

염불을 한 번이나 세 번, 다섯 번이나 일곱 번 부르고는 묵묵히 이 염불하는 소리가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하고 되묻거나, 또는 이 염불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어서, 의심이 생기면 오로지 의심만 해라. 만일에 묻는 곳이 분명하지 않고 의정이 절실하지 않으면 다시 과연 염불하는 이가 누구인가?” 묻고, 그래도 그 물음에 의문이 적고 의심이 적으면 다시 염불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를 물으며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물어라.

 

[] 앞의 물음은 생략하고 다만 이 염불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만 간해도 괜찮다.

 

 

 

● 여주 향산 무문 총 선사

 

널리 설하다.

 

산승이 처음 독옹(獨翁) 화상을 뵈니, 스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란 것을 참구하게 했다. 나중에 운봉, 월산 등 여섯 도반과 함께 끝까지 공부를 마칠 것을 서원했다. 그런 다음에 회서(淮西) 화상을 뵈니, “이것으로는 공부를 이루지 못한다하시고는, ‘()’ 자를 들게 했다.

다음에는 장로(長蘆)에 가서 도반과 결사하고 정진했다. 그 뒤에 회서(淮西)의 경() 형을 만났더니, “너는 육칠 년 동안 어떤 경지가 있었느냐?” 하고 묻기에, 내가 날마다 마음속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경이 너의 이 말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알 것 같기도 했으나 알지 못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경이 내 공부가 큰 진척이 없음을 알고는 너의 정중(定中) 공부는 어지간하나 동처(動處)는 아직 멀었다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이 큰일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경이 너는 천( : 야보도천冶父道川) 노인의 분명한 뜻을 알려면 북두(北斗)를 남쪽을 향하여 보라고 한 말씀을 듣지 못했느냐?” 하고는 휙 가버렸다.

나는 이 물음을 받고는, 걸어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 모른 채 일 주일 남짓한 동안 자는 들지 않고 그 대신 분명한 뜻을 알려면 북두를 남쪽을 향하여 보라는 것만을 간했다.

어느 날, 정두료(淨頭寮 : 변소 청소를 하는 소임인 정두淨頭가 거처하는 집)에 갔다가 대중과 함께 나무 위에 앉아 있었는데, 한동안 의정이 풀리지 않더니 조금 지나자 마음속이 텅 비고 가볍고 맑아짐을 몰록 느꼈다. 마치 피부가 벗겨지듯이 망정(妄情)이 부서지고, 마치 허공인 듯이 눈앞의 사람이나 사물이 보이지 않았다. 반 시간 만에 깨어나니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고, 북두를 남쪽으로 향하여 보라한 화두를 깨달았다.

경 형을 만나 내 생각을 말하고 게송(偈頌)을 짓기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으나, 향상(向上)일로(一路)에서는 여전히 맑고 고요한 경지에 들지 못했다.

나중에 향암산에 들어가 여름 안거를 나는데, 모기가 물어뜯어 두 손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옛사람은 법을 위해 몸을 잊었는데 어찌 모기 따위를 두려워하랴하고는,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어금니를 꼭 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는 오직 자만을 들며 참고 또 참았더니, 불현듯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마치 방의 네 벽이 터진 듯하고 몸이 허공과 같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진시(오전 7시부터 9)에 앉아 미시(오후 1시부터 3)에 정에서 일어나니, 불법이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다만 공부가 철저하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견해는 분명했지만 미세하고 은밀한 망상을 아직 다 여의지 못하여, 또 광주산으로 들어가 여섯 해 동안 정을 닦았고, 육안산에서 여섯 해 동안 머물렀으며, 광주산에서 또 세 해 동안 머물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 옛사람은 이와 같이 힘쓰고 고생했으며, 이와 같이 오래 공부하고서야 비로소 성취가 있었는데, 요즘 사람은 총명과 알음알이로 찰라 만에 깨쳤다고 돈오(頓悟)를 자부하려 드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 독봉 화상

 

대중에게 설법하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어디에서 일을 시작할 것인가? 화두를 드는 일로 시작해야 한다.

 

 

 

● 반야 화상

 

대중에게 설법하다.

 

형제들이여! 세 해씩. 다섯 해씩 공부를 하다가 견처(見處)가 없으면 들고 있던 화두를 내버리니, 이것은 길을 가다가 중도에 그만 두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처사다! 지금까지 애써 온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뜻을 세웠으면, 이 회중에 물은 넉넉하고 땔나무는 잘 말랐으며 승당은 따뜻하니, 원을 세우고 세 해 동안 문을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얻을 날이 있을 것이다.

어떤 무리는 공부를 하다가 간신히 심지가 맑아져 어떤 경계가 나타나면 금방 사구(四句)를 짓는 둥 큰일을 마쳤다 여기고 입을 함부로 놀리고 일생을 그르치니, 그 세치 혀가 기운을 잃으면 장차 어떻게 보임(保任)하려는가?

불자여!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참구는 반드시 진실해야 하고 깨달음 또한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

 

때로 화두가 면밀하고 끊어짐이 없어서 몸이 있는 줄도 모르게 되는 경계에 이르면, 이것을 ()은 잊었으나 법()은 아직 잊지 못했다한다. 또 본신(本身)을 잊고 있다가 홀연히 기억하는 경계에 이르면, 마치 꿈속에서 만 길이나 되는 높은 절벽에서 미끄러져 그저 목숨을 구하기에만 열중하다가 결국 실성하고 마는 것처럼 되니, 이럴 경우에는 반드시 화두를 단단히 들어 문득 화두조차 모두 잊게 되면 이것을 ()과 법()을 모두 잊었다라고 한다.

갑자기 식은 재에서 콩이 튀듯 해야만 비로소 장씨가 술을 마셨는데 이씨가 취하는 도리를 알 수 있지만, 내 문하에 와서 방망이로 맞기에 꼭 좋다. 왜냐하면 다시 여러 조사의 중관(重關)을 타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지식을 두루 만나고, 얕고 깊은 모든 경계를 다 안 뒤에, 다시 물가나 나무 아래에서 성태(聖胎)를 기르다가 용천(龍天)이 떠밀어 낼 때를 기다려 비로소 세상에 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으켜 세워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 하리라!

 

 

 

● 설정 화상

 

대중에게 설법하다.

 

하루 종일 씻은 듯이 가난한 마음으로 부모가 낳기 전에 어떤 것이 나의 본래 모습인가?”를 간하되, 힘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혼침하고 산란하거나 혼침과 산란이 없거나 상관하지 말고 오로지 화두만을 들어라.

 

 

 

● 앙산 고매 우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용맹심을 내고 확실한 뜻을 세워, 평생 깨달았던 것이나 배웠던 것이나, 모든 불법이나 사륙문장(四六文章 : 육조(六朝)시대에 발달한 문체, 네 자 또는 여섯 자의 대구(對句)를 써서, 읽는 자에게 미감을 주는 화려한 문체. 병려문(騈儷文))의 언어 삼매를 한꺼번에 쓸어서 바닷속에 넣어 버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마라. 팔만사천 가지 미세한 생각들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본디 참구하던 화두를 단단히 들어 의심하고 의심하며 밀어붙이고 밀어붙이되,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분명하게 찾아 깨닫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

공안을 알음알이로 헤아리지 말고 또한 경서 속에서 찾지도 말아야 하니, 반드시 툭 끊어지고 탁 터져야만 비로소 집에 돌아오게 되리라.

화두를 들어도 들리지 않거든 연거푸 세 번 들면 힘을 얻을 것이요.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산란하거든 가만히 땅으로 내려와 한 바퀴 거닐고 다시 포단 위에 올라가 참구하던 화두를 들고 전과 같이 간절히 밀고 나가라.

만일에 포단 위에 앉자마자 마냥 졸기만 하다가 눈을 뜨면 온갖 망상을 피우고, 몸을 돌려 포단에서 내려오면 또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는 뱃속 가득 기억하고 있는 어록이나 경서로써 말재주나 자랑한다면, 이 같은 공부는 납월 삼십일이 되면 아무 쓸 데가 없다.

 

 

 

● 구주 걸봉 우 선사

 

오대산 선() 강주에서 설법하다.

 

문수가 금빛 광명을 비추며 네 머리를 어루만져 주고, 사자가 너를 등에 태우며, 관음이 천 개의 손과 눈을 나타내며, 앵무새가 네 손에 잡힌다 해도, 이것은 모두 색()을 좇고 소리를 따르는 것이니, 네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자기의 큰일을 밝혀 생사의 관문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성인이나 범부의 허망한 견해를 끊어 버리고, 하루 종일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오직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만을 간하되, 부디 밖을 향하여 찾지 마라!

조그만 불법이나 신통이나 성스러운 견해가 마치 쌀 한 톨 크기만큼 생기더라도 모두 자신이 속은 것이니, 결국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는 일이다.

힘써 참구하여, 몸을 벗어나 의지할 데가 없고 털 한 올도 세울 수 없는 곳에 이르러 한쪽 눈(명안(明眼), 뛰어난 견식, 탁월한 견해)을 얻으면 곧 청주포삼(靑州布衫 :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만 가지 법은 하나로 돌아가지만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 스님이 내가 청주에서 베 장삼 한 벌을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했다)진주라복(鎭州蘿蔔 :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스님께서는 저 유명한 남전 보원 스님을 직접 모시고 배우면서 그의 법을 이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전주에서는 큰 무가 난다지했다)이 모두 내 집에서 쓰는 물건임을 알게 될 것이니, 다시 따로 신통이나 성스런 견해를 구할 필요가 없다.

 

 

 

● 영은 할당 선사

 

임금의 물음에 답하다

 

송나라 효종 황제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대승도(大乘道)를 깨닫지 못하면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누구나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을 오랫동안 갈고 닦으면 깨닫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 대승산 보암 단안 화상

 

대중에게 설법하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화두를 간하지 않고 공정(空靜)만을 지키며 앉아 있지 말고, 화두를 생각하며 의정 없이 앉아 있지 마라. 만일에 혼침과 산란이 있으면 생각을 일으켜 애써 버리려 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용맹스럽고 정미롭게 화두를 들어라!

그래도 안 되거든 땅에 내려와 천천히 거닐다가, 혼침과 산란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면 다시 포단 위로 올라가라. 들지 않아도 문득 저절로 들리고, 의심하지도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며, 걸어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 있어도 앉은 줄 모르고, 오직 참구하는 생각만 있어 쓸쓸하고 훤칠하며 또렷하고 밝으면, 이것을 번뇌가 끊어진 곳이라 하고, 또한 ()가 없어진 곳이라 한다.

이렇게 되었더라도 구경처(究竟處)는 아니니, 다시 채찍질을 더하여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를 간해라. 여기서는 화두를 들되 절차가 없으니, 오직 의정만이 있게 하고 의정을 잃어버리면 곧 다시 들어라. 그리하여 반조(返照)하는 마음이 다한 경지에 이르면 이것이 ()이 없다는 경지니, 비로소 무심한 곳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구경처인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무심을 도라고 말하지 마라. 무심이 오히려 한 중관(重關)으로 막혔네하니, 문득 성색(聲色)을 만나 부딪치고 마주치게 된다면 크게 한번 웃고 돌아와서 회주 소가 여물 먹으니, 익주 말이 배가 터지네하고 말해도 좋으리라.

 

 

 

● 고졸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대덕들이여! 어찌 큰 정진을 일으켜 삼보(三寶) 앞에서 생사를 밝히지 못하고 조사관을 뚫지 못하면 맹세코 산에서 내려가지 않으리라하고 큰 원을 세우지 않는가?

장연상(長連牀 : 승당 안의 대중이 앉는 자리는 다섯 사람부터 열 사람까지 앉게 되어 있다. 장연탑(長連榻)이라고도 한다) , 칠척단(七尺單 : 자기의 좌상. 승당 안 한 사람의 단(, 좌구)은 폭이 석 자, 길이가 일곱 자로 되어 있다) 앞에 바랑을 높이 걸어 놓고, 천 길 벼랑 위에서처럼 꼿꼿이 앉아, 일생을 다 바쳐 철저하게 공부를 지어라.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결코 속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발심이 진실하지 않고 뜻이 용맹스럽지 않으면, 여기서 겨울을 지내고 저기서 여름을 나며, 오늘은 나아가고 내일은 뒷걸음질 치며, 오래오래 찾아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고도, “반야가 영험이 없다하면서 도리어 밖을 향하니, 뱃속 가득 문장을 기억하거나 한 질 경전을 베껴 지닌 것이 마치 냄새 나는 술지게미 같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토악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렇게 한다면,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쭉 공부를 하더라도 아무 쓸데가 없다. 애석한 일이다.

 

 

 

● 태허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아직 깨닫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포단 위에 꼿꼿이 앉아,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가 지나도록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 면목을 간해라.

 

 

 

● 초석 기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형제들이 입만 벌리면 나는 선승이다하고 말하지만, 누가 무엇이 선()인가?” 하고 물으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입이 마치 멜대(저울로 무게를 달 때 물건을 다는 봉. 입이 뿌루퉁하니 모양이 되는 것을 이른다)와 같이 되니, 참으로 딱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불조의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본분사를 알지 못하는 주제에, 문언(文言)이나 속구(俗句)를 다투어 익히고 큰소리치면서도 거리낌이 없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구나. 또 어떤 이는 포단 위에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은 밝히지 않고, 때아닌 품팔이 방아질이나 배워 마음속으로 복을 구하며 업장을 참회하거나 여의기를 바라니, 이는 모두 도와는 까마득히 멀다.

 

마음을 엄히 하고 생각을 거두고 일을 거두어 공()으로 돌아가, 생각이 일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내리누르니, 이런 견해는 곧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外道)요 혼이 돌아오지 않은 죽은 사람이다.

또 어떤 이는 성낼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것을 잘못 인식하여, “분명히 알아차리는 이것이 곧 일생의 참학사(參學事)를 마친 것이다한다. 내가 그대에게 묻겠다. “무상이 닥칠 때 불태워져 한 무더기 재가되면, 이 화낼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이것이 어느 곳으로 가는가?”

이렇게 참구하는 것은 약홍은선(藥汞銀禪 : ‘약홍은(藥汞銀)’은 은과 비슷하게 생긴 수은을 말하니, 실참실오(實參實悟)가 없는 거짓 깨달음을 뜻한다)일 따름이니, 진짜 은()이 아니라서 불에 달구어지면 곧 흘러 내리고 만다.

그대는 평소 무엇을 참구하는가?” 하고 물으면, “어떤 이가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를 참구하라 했습니다하거나, 또는 저에게 다만 이렇게만 알면 된다했으나, 오늘에야 옳지 않은 줄 알겠습니다. 스님께 화두를 청합니다한다.

내가 옛 사람의 공안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 그대의 눈이 본래 바르건만 스승 탓에 삿되게 되었구나하고 말했으나, 거듭 청해 마지않기에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간하여 문득 칠통을 타파하더라도 다시 돌아와서 산승의 손에서 방망이를 맞아야 한다했다.

 

[] 저 앞의 사자봉 천여 칙(天如則) 선사뒤로는 모두 원나라 말과 명나라 초의 존숙들이며, 그 가운데 걸봉과 고졸과 초석은 원, 명 두 대에 걸쳐서 살았던 분들이다.

초석은 묘회(대혜 종고) 5세 손이니 그 견지가 햇빛이나 밝은 달과 같고, 기변(機變 : 진리를 정곡으로 일러 주는 말)이 우레처럼 맵고 바람처럼 날쌔서 단도직입으로 근원을 끊고 곁가지를 쳐 버리니, 참으로 묘희 노인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

천여 칙 선사는 오늘에 이르도록 그 아름다움이 짝할 사람이 없다. 그의 말은 모두 향상(向上)의 극칙사(極則事) 만을 들었기에, 처음 공부 길에 든 학인에게 공부하는 법을 가르치는 말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간신히 한두 가지를 얻어 적었다.

 

 

 

● 고려 보제 선사

 

이상국의 편지에 답하다

 

이미 자 화두를 들었다 하니, 굳이 화두를 바꾸어 참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다른 화두를 들 때도 자 화두를 참구하게 된다고 하니, 이것은 자 화두에 웬만큼 익은 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디 뜻을 옮기지 말고, 화두를 바꾸어 참구하지 마십시오.

 

다만 하루 종일 걷거나 앉거나 머무르거나 눕는 네 가지 행동거지 속에서 한결같이 화두를 들되, 언제 깨치고 깨치지 못할까에 얽매이지 말고, 또한 재미가 있고 없고, 힘을 얻고 힘을 얻지 못하고에 끄달리지 말고 힘차게 정진하여,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분별이 생기지 않는 곳에 이르면, 이곳이 모든 부처와 조사가 몸과 목숨을 버린 바로 그곳입니다.

 

[] 이 어록은 만력 정유년(조선 선조 임금 30, 1597)에 복건의 허원진이 동정(東征 :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가 우리나라에 출정한 것을 말한다)했을 때 조선에서 얻어온 것이라서 중국에는 아직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기록하여 적었다.

 

 

 

● 초산 기 선사

 

해제 법어

 

대덕들이여! 구십 일 안거 동안에 증오(證悟)를 했는가? 아직 깨닫지 못했으면 이 한 겨울을 또 헛되이 보낸 셈이다. 본분 납자라면 시방 법계로써 원각(圓覺) 기일을 삼아, 장기든 단기든, 백 일이든, 천 일이든, 결제든 해제든 상관없이 화두를 드는 순간을 시작으로 삼아라. 그리하여 한 해 만에 깨닫지 못한다면 한 해를 더, 열 해 만에 깨닫지 못하면 열 해를 더, 스무 해 만에 깨닫지 못하면 스무 해를 더 참구해라. 평생을 다 바쳐도 깨닫지 못하더라도 뜻을 바꾸지 마라. 진실한 구경처를 보아야만 비로소 제대로 해제하는 날이다.

 

아직도 말하기에 앞서 뜻을 깨닫지 못했으면 다만 아미타불한 구절을 깊이 생각하고 묵묵히 궁구하며 늘 채찍질하여 의정을 일으키되. “이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를 간하라.

생각생각 끊어짐이 없고 마음마음 빈틈이 없으면, 마치 사람이 길을 갈 적에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에 이르면 자연히 응접이 자재(轉身)한 도리가 있는 것과 같이, ‘!’ 하는 소리와 함께 심체(心體)에 계합할 것이다.

 

[] 화두를 드는 일로 결제를 삼고, 진실한 구경처를 보는 일로 해제를 삼는다 하니, 부디 이 말을 명심해라.

 

 

 

● 천진 독봉 선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진실로 생사에서 해탈하고자 한다면 큰 신심을 내어 내가 참구하는 화두를 타파하여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면목을 분명히 보아, 미세한 현행생사(現行生死)를 완전히 끊지 못하면, 맹세코 본참 화두를 버리거나 진실한 선지식을 멀리하거나 명리를 좇거나 하지 않으리라. 이 서원을 고의로 어기면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리라는 서원을 세워야 하리라. 이러한 큰 서원을 세우고 그 마음을 막아 지켜야만 비로소 공안을 받을 만하다.

자 화두를 참구한다면 어찌하여 개에게는 불성이 없는가?” 라는 것을, ‘만법귀일을 참구한다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라는 것을, ‘참구염불일 때는 염불하는 이 놈이 누구인가?” 라는 것을 궁구해야 하니, 회광반조하여 깊이 의정에 들어가야 한다.

화두 들기에 힘을 얻지 못하면 다시 앞 문장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들어서 머리와 꼬리가 일관되게 하면 비로소 두서가 있어서 의정을 이룰 것이다. 의정을 끊지 않고 간절한 마음을 내면, 저도 모르게 발을 내딛고 몸을 돌려 허공에서 한바탕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니, 이때 다시 와서 산승한테서 방망이를 맞도록 하라.

 

 

 

● 공곡 융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정신없이 우두커니 앉아 화두를 생각(念話頭)하지도 말고, 또한 도리를 구명하거나 헤아리지도 말고, 오직 늘 분심을 내어 이 일을 밝힐 것만 생각해라. 홀연히 천 길 벼랑에서 손을 놓아 몸을 굴리면 마침내 뚜렷하고 역력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탐착하는 마음을 내지 마라. 다시 뒤통수에 방망이를 맞아야 하니, 이곳이 매우 뚫기 어려운 곳이다. 그대들은 이와 같이 참구해라.

 

참구하지 않고 스스로 깨친 이가 예전에는 가끔 있었다. 그들 말고는, 힘써 참구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직 없다.

 

우담 화상은 염불하는 이 놈이 무엇인가?”를 간하라고 했으나, 꼭 이 방법을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여느 때처럼 염불하되, 염불을 잃지만 않으면, 문득 경계에 부딪치면 부딪치는 대로, 인연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응접이 자재한 한 구절((轉身一句)을 얻어, 적광정토(寂光淨土)가 이곳을 여의지 않았고 아미타불이 자심(自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늘 분심을 내어 이 일을 밝혀라하니,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하다. 이 한 마디로 화두 참구하는 방법을 모두 섭수했다.

 

 

 

● 천기 화상

 

대중에게 설법하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결정심을 내어 밤낮으로 본참 공안을 단단히 잡고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간하여, 이 일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에만 힘써라. 날이 오래되고 세월이 깊어지면 혼침은 단련하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가고, 산란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순수하고 섞임이 없게 되니, 심념(心念)이 일어나지 않아 마치 꿈속에서 깨어난 듯 문득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날이 모두 허깨비이고 그 자체로서 본디부터 이루어져 있음을 다시 간하니, 삼라만상의 완전한 기용(機用)이 우뚝 드러난지라. 이 드넓은 명나라에 사람으로는 굽힐 이가 없고, 우리 승가를 돌아보아도 스님으로는 굽힐 이가 없으니, 다시 와 인연 따라 날을 보내게 된다면 어찌 창쾌하지 않겠는가!

 

종일 부처를 염()하면서도 완전히 부처가 염()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니, 모르겠거든 반드시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를 간해라. 눈을 똑바로 뜨고 마음을 굳건히 하여 낙처(落處)를 밝히는 일에만 힘써라.

 

[] 독봉과 천기는 모두 참구염불을 가르쳤는데, 공곡은 왜 굳이 이런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했을까? 아마도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니, 편할 대로 해도 괜찮으리라 본다.

 

 

 

● 고음 금 선사

 

대중에게 설법하다

 

좌선 중에 보이는 선악 경계는 모두 좌선할 때 살피지 않았거나 올바르게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할 뿐, 마음이 정밀하지 않거나, 생각이 경계를 따라 흐르며 꿈속인 듯 생시인 듯 하거나, 또는 고요한 경계에 붙들려 그것으로 즐거움을 삼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 경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올바르게 공부하는 자는 잠이 오면 자고, 한숨 자고는 다시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두 눈을 비비고 어금니를 꼭 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화두의 낙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간해라.

부디 혼침에 끌려가지 말고 터럭만큼이라도 바깥 경계를 취하지 마라.

 

행주좌와 하는 가운데서 아미타불한 구절이 끊이지 않게 해라. 염불 공덕이 인()도 깊고 과()도 깊음을 믿어,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되게 하라. 생각생각 공()하지 않게 되면 틀림없이 생각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염불하는 그 자리에서 염불하는 놈을 알아 미타와 내가 함께 나타날 것이다.

 

 

 

● 이암 등 선사

 

<석의집(釋疑集)>

 

학인이 선지식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구했다.

어떤 이는 화두를 들게 하시고, 어떤 이는 화두를 의심하게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화두를 들자마자 곧바로 의정을 일으켜야 하니 어찌 이치가 서로 다르겠는가? 화두를 들면 의정이 바로 나타나니, 이리저리 온갖 힘을 다 써서 정밀히 궁구하고 추궁하여 공부가 깊어지고 힘이 지극한 곳에 이르면, 깨달음은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 <석의집> 가운데서 이 한 문장이 가장 요긴하다. 요즘 사람은 이 두 가지에 막혀 경정을 짓지 못하니, 아마 아직 실답게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 월심 화상

 

대중에게 설법하다

 

참신한 뜻을 분연히 일으켜 화두를 들되, 반드시 끝 문구에서 의정이 길고 깊고 간절하게 해라.

어느 때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참구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소리를 내어 추궁하고 살피되,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고서 직접 되찾으려고 힘쓰는 것과 같이 해라. 그리하여 일상생활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다시는 두 가지로 구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