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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성제의 실존 철학적 의미

경호... 2012. 2. 28. 12:10

 

 

 

 

 

사성제의 실존 철학적 의미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성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함경>에서 고성제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팔고(八苦)라고 부릅니다. 이 가운데 태어나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벙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인 생로병사를 팔고 가운데 네 가지 고통이라고 합니다.

   원증회고란 원수 지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을 의미하고, 애별리고란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괴로움을 의미하며, 구부득고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음성고는 한문의 의미만으로는 그 뜻을 알기 쉽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알아보기 위하여 팔리 어로 된 <니카야>를 보다가 그곳에서는 생로병사에서 구부득고까지 괴로움의 종류를 열거한 후에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오취온 자체가 괴로움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로병사 등의 괴로움을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이 괴로움들이다” 라는 것이지요.

   오취온이 괴로움들이라는 것은 오취온의 하나하나가 곧 괴로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존재로 취해진 색, 수, 상, 행, 식이 각각 괴로움이라는 것이지요. 생로병사가 괴로움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취온이 괴로움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어떤 것이 우리를 괴롭힐 때입니다. 가시가 나의 몸을 찌를 때 우리는 괴로움을 느낍니다. 이 때 “가시가 몸을 찌르는 것은 괴로움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몸을 찌르지 않는 가시에 대해서는 괴로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가시가 괴로움이다” 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취온은 중생들의 생각하고 있는 자기 존재입니다. 오취온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가 괴로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오취온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 않는데도 그 자체로서 괴로움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존재가 그 자체로서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오취온은 중생들의 자기의 존재로 취하고 있는 오온입니다. 중생들은 끊임없이 오온 가운데 애착의 대상이 되는 것을 자기 존재로 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들에 의해 끊임없이 취해지고 있는 오온이 괴로움이라는 것이 고성제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의 존재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오온을 취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괴롭혀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괴롭다는 의미이고 이를 고성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성제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존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인간 존재 즉 실존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존 철학에서는 인간을 불안한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철학에서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 정신적 존재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해는 인간이 이성이나 정신과 같은 불변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실존 철학에서는 인간이 그런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항상 불안에 휩싸여 있는 존재라고 이해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코끼리에 쫓겨서 우물에 들어간 사람처럼 시시 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인식하면서 한 가닥 나무 뿌리 같은 수명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불안한 존재입니다. 오취온은 그처럼 불안한 인간 존재를 의미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 존재를 해명함에 있어서 인간을 책상이나 나무와 같은 하나의 존재자로 대상화한 다음에 이 대상의 속성을 기술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이성적 동물’, ‘정신적 존재’ 등으로 정의하려는 종래의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 라는 의미에서 인간 존재를 ‘현존재’ 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책상은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성질을 가진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인간은 생각하는 성질을 가졌다”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간 존재는 고정 불변의 성질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 자신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존재자라는 말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으로 존재한다” 는 것은 언제나 “각자(各者)로 존재한다” 는 것이며, “각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가 문제되어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관해서 심려한다” 는 뜻이며,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의문을 제기하며 우려를 표명한다” 는 것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선택하려 함이다” 라고 합니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표현은 좀 복잡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소, 그 어떤 소든지 또는 돼지 같은 동물들은 살아가는 모습이 대동 소이합니다. 미국 소나 한국 소나 그 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겠다는 자신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고, 짝지을 때가 되면 짝짓기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각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까닭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항상 문제 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업가가 되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즉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그 가능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우려하면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가능성을 선택하기 때문에 인간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취온은 바로 이러한 인간 존재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몸이 마른 사람은 살이 찌기 위해서 영양이 많은 음식을 취하고, 비만인 사람은 살을 빼기 위해서 칼로리가 적은 음식을 취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자신이 선택하여 취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취온 가운데 색입니다. 감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습니다.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스스로 어떤 성격의 소유자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여 자신이 원하는 성격을 취해서 자신의 성격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오취온 가운데 수(受)입니다. 사상이나 사고 방식도 자신이 취한 것이고 의지도 자신이 선택하여 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의식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서 우리의 의식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식주증장설(識住增長說)입니다. 식은 기존의 오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식으로 자라나는데, 이 과정에서 오온이 새롭게 취해져 오취온이라는 새로운 자기 존재가 된다는 것이 이미 말한 식주증장설입니다. 이것을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인간으로 존재한다” 는 것은 “각자가 취한 오취온으로 존재한다” 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오취온으로 존재한다” 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 즉 오취온이란 욕탐의 대상이 되는 오온에 식이 머물면서 증장하고 있다” 는 이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온에 식이 머물면서 증장한다” 는 것은 ‘어떤 오취온으로 존재할 것인가?” 하는 미래의 존재 가능성을 선택하여 취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말하는 오취온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현존재와 매우 유사합니다. 부처님도 인간 존재를 육체나 영혼으로 정의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당시의 외도들은 아트만이나 영혼과 같은 정신적 실체로써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려 하거나, 물질적 요소로서 인간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 존재를 존재자로 대상화하여 그 속성을 개념으로 정의하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입장에 반대했기 때문에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가 다른가 등의 문제에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잡아함 58경>에서 자신이 이야기하는 오취온에 대해 인간을 대상화시켜 정의하는 다섯 가지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제자에게 그러한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오수음(五受陰, 五取蘊)은 색수음(色受陰, 色取蘊) 과 수, 상, 행, 식수음(識受陰, 識取蘊)입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자리에 돌아가라. 그리고 묻도록 하라. 그러면 너에게 이야기하리라.”
그러자 그 비구는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오수음(五取蘊)은 어떤 것이 근본이 되며, 무엇 때문에 모여서 나타난 것(集)이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 오수음(五取蘊)은 욕구가 근본이 되고, 욕구 때문에 모여서 나타난 것이며, 욕구 때문에 생긴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이야기하는 오취온을 색취온과 수, 상, 행, 식취온이라는 다섯 가지 종류의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비구에게 자리로 돌아가면서 좀더 깊이 생각해 본 후에 다시 묻도록 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 존재를 육체, 감정, 이성, 의지, 의식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오취온이라는 인간 존재를 다섯 가지 존재자로 대상화하여 묻고 있는 비구에게 오취온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현존재의 의미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반성의 시간을 준 것입니다. 그 비구는 자리에 돌아가면서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오취온은 인간을 이루는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각자의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래서 질문의 형식을 바꾸어 오취온이라는 인간 존재의 존재 방식의 근본을 물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비구가 오취온의 의미를 이해했다는 것을 알고서 오취온이라는 인간 존재의 존재 방식은 욕구가 근본이 되어 욕구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욕구가 기본 축이 되어 욕구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취하는 인간 존재의 존재 방식이 오취온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부처님의 인간 존재에 대한 해명은 하이데거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 의미, 즉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지향 축을 심려(sorge) 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현존재는 자신의 미래에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항상 심려하면서 그 심려를 축으로 삼아 끊임없이 미래의 자기 존재 가능성을 지향하고 있는 인간 존재를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심려와 부처님이 말하는 욕구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심려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의미한다면 그러한 심려가 나타나게 된 바탕에는 자기 자신의 존재 유지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 가능성에 대한 심려의 보다 근원적인 심리 상태는 욕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사성제의 고성제에 대하여 오취온이 괴로움이라고 말한 것에는 이러한 실존 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오취온이라는 인간 존재는 항상 욕구를 가지고 오온을 취하여 미래의 자기 존재 가능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 방식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실존 철학에서는 인간이 이렇게 괴롭고 불안한 존재라는 것, 즉 고성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운 실존에서 벗어나는 길은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존의 초월을 모색하고는 있지만 실존에서 초월하는 길을 밝히지 못하고 있고, 실존의 초월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실존, 즉 고성제를 자각하고 출가하여 이를 극복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사성제입니다. 따라서 사성제는 실존과 실존의 원인과 실존의 초월과 실존에서 초월하는 길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현대 철학의 문제를 이미 다루엇고, 그 문제를 이미 해결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가장 현대적인 의미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 Buddha Village
글쓴이 : 定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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