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古典

신영복의 고전강독 제7강 맹자(孟子)

경호... 2012. 2. 3. 01:43

 

제7강 맹자(孟子) - 1

 

 맹자(孟子)의 생몰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자 사후 약 1백년경인 BC 327년경에 태어나서 향년 74세에서 84세 94세 97세 등

 사전(史傳)에 기록이 없어서 번거롭기가 대단합니다.
 대체로 공자 사후 약 1백년 뒤에 산동성(山東省) 남부 추(芻)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가(軻)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한 사람입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많은 학자와 학파의 총칭으로서 전국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자(子)는 학자(學者)를 의미하고 가(家)는 학파(學派)를 의미합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군주(君主)는 그 지배영역도 협소하고 그가 시행하는 정치도 전통에 속박되고

  특히 군주의 권력이 귀족세력들의 제어를 받는 제한군주(制限君主)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군주는 강력한 주권을 행사하는 절대군주(絶對君主)였습니다.

  춘추시대에 비하여 국가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수많은 나라가 결국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압축되고

  드디어 진(秦)나라에 의하여 천하가 통일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사활적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모와 하극상이 다반사였으며 배신과 야합이 그치지 않은 난세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주는 사방에서 정치이론에 통달한 학자를 초빙하여 국가경영에 관한 고견을 듣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어서

  조정은 마치 일종의 사교장이었습니다. 제자백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학자들의 총칭입니다.
  맹자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물론 다른 모든 사상가의 이해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특히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물론 공자를 잇고 있는 사상가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우리의 강의에서는 공자시대의 유가학파의 중심사상이 맹자 시대에는 어떠한 사상으로

  그 중심이 이동하였는가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일치하고 있는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와서는 의(義)의 개념으로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인(仁)의 사회화(社會化)라는 것이지요.
  
  맹자의 제1장은 별로 낯설지 않은 글입니다. 이 첫 장에서 맹자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의(義)입니다.
  
        孟子見梁惠王 王曰 “?! 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뵈었을 때 왕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 오셨겠지요?”
  맹자가 대답하였다.
  “임금님!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맹자는 인(仁)과 의(義)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만 맹자는 의(義)에 무게를 두고 있는 사상입니다.

  인과 의의 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인(仁)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義)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仁)에 비하여 사회성(社會性)이 많이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예제를 통하여 이 부분을 재론하도록 하지요.
  위 예제에서는 너무 길어서 원문을 생략하였습니다만 이 첫 장은 맹자는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설파합니다.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大夫)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領地)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士人)이나 서민(庶民)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논어(論語)’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예부터 ‘맹자’로서 문리(文理)를 틔운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문(漢文)의 문학적(文學的) 모범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첫 장의 내용을 끝까지 읽어보도록 하지요.
  
  “만승(萬乘)의 천자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천승(千乘)의 제후일 것이고,

   천승의 제후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백승(百乘)의 대부(大夫) 중에서 나올 것입니다.

   일만(一萬)의 십분의 일인 일천(一千)을 가졌거나, 일천(一千)의 십분의 일인 일백(一百)을 가졌다면

   결코 적게 가졌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義)를 경시하고 이(利)를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진(仁) 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義)로운 자로서 그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리(利)를 말씀하십니까?”
  
  맹자와 이 대화를 나눈 임금은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입니다.

  당시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겼었기 때문에 흔히 양왕(梁王) 또는 양혜왕이라고 하였다고 전합니다.
  주자주(朱子註)에서는 양혜왕은 위나라 제후 앵(?)으로서 대량(大梁)에 도읍하여 왕을 참칭(僭稱)하여

  예를 갖추고 패백을 후히 하여 여러 어진 사람을 초청하여 맹자도 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연고로 양혜왕과 대면하여 대화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맹자의 태도는 단연 의연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잘 아는 동문의 한 사람으로서 최고 수준의 ‘맹자’ 역주서(譯註書)를 출간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맹자론(孟子論)을 잠시 소개하지요.
  
  맹자는 학자와 사상가로서뿐만 아니라 문장가와 문학가로서도 최고의 경지라는 것이지요.

  어떠한 고전도 ‘맹자’만큼 힘차고, 유려하고, 논리 정연하고, 심오한 뜻을 지니고, 현재에도 그 내용이 여전히 타당하며,

  사람의 정신을 분발시키는 문장들로 가득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입니다.

  사실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文句)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고 예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의문(疑問), 감탄(感歎), 부정구(否定句)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여

  한문(漢文)의 문법(文法)과 예문(例文)의 교범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숙어들의 출전으로서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이 ‘맹자’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농단(壟斷), 호연지기(浩然之氣), 인자무적(仁者無敵),

  항산항심(恒産恒心) 등 이루 다 지적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맹자는 조금 전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공자 사후 1백년경에 활동한 사상가로서

  맹자 당시에는 유가(儒家)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쇠미하여 오히려

  묵자(墨子)와 양자(楊子)사상이 크게 떨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맹자는 당시 세상에 크게 떨치고 있던 다른 사상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갑니다.

  따라서 맹자에는 농가(農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등 당시의 다른 많은 사상이 소개되고,

  또 비판되고 있기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 한 권의 고전을 택하려고 하는 경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연 ‘맹자’가 천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 제1장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지요.
  결국 양혜왕은 기대하는 해답을 결국 맹자로부터 얻지 못하고 만 셈이지요.
  맹자의 사상과 정책은 결국 당시 패권(覇權)을 추구하던 군주들에게 채용되지 못하였습니다.

  맹자 사상이 공자의 인(仁)을 사회화하였다고 하지만 당장의 부국강병을 국가적 목표로 하고 있던 군주들에게

  사회적 정의는 너무나 우원(迂遠)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활적 경쟁에 내몰리고 있었던 군주들에게 정의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혜왕이 말했던 이(利)란 오로지 부국강병의 류(類)였던 것이지요.(王所謂利 蓋富國强兵之類)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제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정책제안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7강 맹자(孟子) - 2

 

孟子見梁惠王 王立於沼上 顧鴻雁 ?鹿 曰賢者亦樂此乎
孟子對曰 賢者而後樂此 不賢者雖有此 不樂也
詩云 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 庶民子來 王在靈? ?鹿攸伏
?鹿濯濯 白鳥鶴鶴 王在靈沼 於?魚躍
文王以民力爲臺爲沼 而民歡樂之 謂其臺曰靈臺 謂其沼曰靈沼
樂其有?鹿魚鼈 古之人與偕樂 故能樂也
湯誓曰 時日害喪 予及女偕亡 民欲與之偕亡
雖有臺池鳥獸 豈能獨樂哉   (梁惠王 上)

              

               顧(고) : 돌아보다. 돌보다.
               鴻雁?鹿(홍안미록) : 고니, 기러기, 큰사슴, 작은 사슴 등 온갖 새와 짐승.
               經(경) : 度之, 재다. 營(영) : 表其位. 攻(공) : 作. 不日: 不多日 ?(극) : 서두르다.
               육(?) : 나라 동산.

               우록유복(?鹿攸伏) : 攸는 느긋이, 또는 主.述語간의 連詞. 

               ?(오인) : 오는 아!, 인은 가득하다.
               時日害喪(시일할상) : 時는 是. 이것. 日은 임금을 가리킴. 害은 曷. 언제(何時). 喪은 죽다.
               及女(급여) : 너와 함께

 


  맹자는 문장이 길어서 일일이 해석하는 방식보다는 전체의 의미를 중심으로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를 자세하게 달지는 않았습니다만 별로 부족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의미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이 장은 1장에 이어지는 글로서 여민락장(與民樂章)으로 불립니다.

  여민락(與民樂)은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뜻입니다. 맹자의 민본(民本)사상이 표명되어 있는 장입니다.
  물론 맹자의 민본사상은 진심<盡心> 하(下)에 분명하게 개진되고 있습니다. 잠시 그 내용을 읽어보지요.
  
   “(한 국가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社稷)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 천자(天子)가 되고 천자의 마음에 들게 되면 제후(諸侯)가 되고

    제후의 마음에 들게 되면 대부(大夫)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무도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그를 몰아내고 현군(賢君)을 세운다.

    그리고 좋은 제물(祭物)로 정해진 시기에 제사를 올렸는데도 한발(旱魃)이나 홍수의 재해가 발생한다면

    사직단(社稷壇)과 담을 헐어버리고 다시 세운다.”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民)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 민본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여민락장은 그러한 민본정치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盡心)> 하(下)에 표명된 민본사상이 정치권력의 구조에 관한 것이라면

  이 여민락 사상은 그러한 권력구조에 더하여 사회의 문화와 사람들의 정서에 있어서의 민본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본사상의 보다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맹자사상의 핵심을 의(義)라고 하였을 경우

  그 의(義)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민락 장의 내용을 함께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맹자께서 양혜왕을 찾아뵈었을 때, 왕은 연못가에 서서 고니와 사슴 등 갖가지 새들과 짐승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현자(賢者)들도 이런 것들을 즐깁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였다.
  ”현자라야만 이런 것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자가 아니면 비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

   시경(詩經)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大雅> 靈臺 편)
  
          ‘영대를 지으려고
          땅을 재고 푯말을 세우니
          백성들이 달려와 열심히 일해서
          얼마 되지 않아 완성되었네
          왕께서 서두르지 말라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부모의 일처럼 더욱 열심이었네.
          왕께서 동산을 거니시니
          암사슴들은 살지고 윤이 나고
          백조는 털이 희디희어라
          왕께서 못 가에 이르시니
          아! 연못에 가득한 물고기들 뛰어 오르네’

  
  문왕(文王)은 백성들의 노역으로 대를 세우고 못을 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모두 그것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며

  그 대를 영대(靈臺), 그 못을 영소(靈沼)라 부르면서 그곳에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들이 살고 있음을 즐거워했습니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그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했기 때문에 제대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입니다.)
  ‘서경(書經)’ 탕서(湯書) 편에는 (백성들이 걸왕을 저주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저놈의 해 언제나 없어지려나
      내 차라리 저놈의 해와 함께 죽어버렸으면.’
  
  만약 백성들이 그와 함께 죽어 없어지기를 바랄 지경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대와 못과 아름다운 새와 짐승들이 있다고 한들,

  어찌 혼자서 그것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맹자의 유명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사상입니다.

  주자(朱子)가 주(註)를 달아서 강조하고 있듯이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賢者而後樂此)’고 한 대목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점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즐거움(樂)과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행복의 조건 즉 낙(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려고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추구하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樂)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共感)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하여는 무지하기 짝이 없지요.

  어떤 공감의 절정에 함께 도달하는 감동(感動)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동류(同類)라는 편안함이나

  서로 비슷함에서 오는 안정감에 대하여도 이해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유행(流行)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공감이라기보다는 다른 정서입니다.

  이를테면 소외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다루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낙(樂)의 보편적 형식은 독락(獨樂)입니다.

  여민락(與民樂)과 같이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눌 때의 편안함이나 안정감은 결코 즐거운 것이 못되지요.
  그것이 즐거움 즉 낙(樂)이 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것이지요.

  평상심(平常心)이나 낮은 목소리가 주목받을 수 없는 것 역시 오늘 우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서경(書經)’ 탕서 편을 인용하여 걸왕(桀王)을 독락(獨樂)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걸왕은 일찍이 “내가 천하를 얻은 것은 하늘의 해가 있는 것과 같으니 저 해가 없어져야 내가 망한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그 말을 인용하여 저 놈의 해와 함께 죽어버렸으면 하고 노래한 것이지요.
  굳이 임금과 함께 죽자고 하는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사회적 정서와 매우 닮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맹자의 문장은 길어서 원문을 많이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한문학의 교범(敎範)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맹자’의 내용을 가능하면 많이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민락 장에 이어서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의 원전이 되고 있는

  다음 장을 읽어보기로 하지요.
  양혜왕은 자기의 치적을 자랑하였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일하게 하고

  곡식을 풀어서 먹여 살리는 등 백성들을 보살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웃 나라의 백성들의 수가 줄지도 않고

  자기 나라의 백성이 늘지도 않는 까닭을 맹자에게 물었지요.
  맹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전쟁을 할 때, 진격을 명하는 북소리가 울리고 칼날이 부딪치면 갑옷을 벗어 던지고 무기를 끌면서

   달아나는 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백보(百步)를 달아나 멈춘 자도 있고, 오십보(五十步)를 달아나서 멈춘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보를 달아난 자가 백보를 달아난 자를 보고 겁쟁이라 비웃는다면 어떻습니까?”
   왕이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백보는 아니지만 그 역시 달아나기는 마찬가지지요.”
   맹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그러한 이치를 아신다면 왕의 백성들이 이웃나라 백성들보다 더 많아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농사철을 놓치지 않으면 곡식은 먹고도 남음이 있으며,

    촘촘한 그물로 치어(稚魚)까지 잡아버리지 않는다면 물고기는 먹고도 남을 만큼 많아질 것입니다.
    (봄여름 같이) 초목이 자라는 시기에 벌목을 삼가 한다면 목재는 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곡식과 물고기와 목재가 여유 있으면 백성들은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기에 아무런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에 유감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시작입니다.

    다섯 묘(五畝) 넓이의 집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친다면 쉰 살이 넘은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기르게 하여 (새끼나 새끼 밴 어미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여) 그 때를 잃지 않게 한다면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한 집마다 논밭 백 묘(畝)씩 나누어주고 (전쟁 등으로)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한 가족 몇 식구가 굶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교육을 엄격히 하고 효도와 공경의 도리로서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준다면

    (젊은 사람들이 물건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반백이 된 노인들이 물건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서도

    천하의 왕이 될 수 없었던 자는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풍년이 들어 곡식이 흔한 해에는 개나 돼지가 사람들의 양식을 먹고 있는데도 나라에서는 이를 거두어 저장할 줄 모르고,

    흉년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뒹굴고 있어도 곡식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救恤)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서도 ‘이것은 내 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칼이 죽인 것이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왕께서 죄를 흉년 탓으로 돌리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모든 백성들은 왕에게로 귀의해 올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읽어보도록 하지요. 어떻습니까? 우선 맹자의 논리전개 방식이 어떻습니까? 그리고 그 비유의 적절함이 어떠합니까?
  문장의 간결함, 흐름의 유려함, 대비의 명쾌함, 그리고 한문 특유의 농축미(濃縮美)가 서로 어울려 이루어내는 격조(格調)를

  나로서는 약여(躍如)하게 살려낼 방법이 없습니다. 

 

제7강 맹자(孟子) - 3

 

  다음 장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나타나 있는 글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는 것이 소위 맹자의 성선설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선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본성론(本性論)에 대한 회의(懷疑)입니다.

  어떤 본성을 전제하고 그 본성으로부터 다른 많은 성정(性情)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도식(圖式)에 대한 회의입니다.
  구조론(構造論) 본질론(本質論) 원죄론(原罪論) 등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 기계적(機械的) 구조(構造)의

  단순성에 대한 회의이지요. 인간을 그 본성에서 규정하는 방식, 그리고 그러한 본성에 근거한 인간 이해를 근거로 하여

  구축하는 사회학에 대하여 아마 여러분들도 매우 회의적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서슴없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그 본성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있는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을 읽기 전에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문을 함께 보겠습니다.

  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이 장은 인간 본성보다는 본성의 확충에 무게가 실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之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 ??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勿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公孫丑 上)

  
                 不忍人之心(불인인지심) : 남의 (아픔을) 참지 못하는 마음. 남에게 차마 잔인하지 못하는
                                                    마음.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運之掌上(운지장상) : 손바닥 위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것. 아주 쉬운 일.
                 所以謂~(소이위~) : ~라고 하는 까닭은. 그 이유는.
                 乍(사): 별안간. 갑자기.
                 孺子(유자) : 어린이.
                 ??惻隱(출척측은) : 깜짝 놀라고(恐懼) 애처롭게 여김.
                 內交(납교): 납은 納, 結. 사귀다.
                 要譽(요예) : 명예를 구하다.
                 惡其聲(오기성) : 그 소문을 싫어하다.
                 端(단) : 원래의 글자는 ?. 식물의 싹.
                 羞惡之心(수오지심) : 부끄러워하는 마음.
                 辭讓之心(사양지심) : 사양하는 마음.
                 是非之心(시비지심) :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然(연) : 燃. 불타다.
                 苟: 만약

  
   맹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왕들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손바닥 위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 볼진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수치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싹이고, 수치심은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4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4가지 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이 4가지 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키우고 확충시켜 나갈 줄 안다면

   마치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나 막 솟아나기 시작한 샘물처럼 될 것이다. (크게 뻗어 나갈 것이다.)

   그 싹을 확충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는 천하라도 능히 지킬 수 있고

   그것을 확충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조차도 제대로 모실 수 없게 될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장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표명된 구절입니다.

  성선설의 요지는 모든 사람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입증하는 예로서

  우물에 빠지는 어린 아이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예를 들어 성선설을 주장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章)의 구성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모든 사람이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적인 선언을 먼저 하고 선왕의 어진 정치가 바로 이러한 성선(性善)에서 비롯되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선한 정치가 불인인지심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은 성선설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선왕 중에는 포악한 정치를 한 왕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측은지심( 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다음 그 까닭과 내용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러한 측은지심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본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을사람들의 칭찬과 비난 때문이 아니다, 등의 사회적으로 습득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일단 수긍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측은지심을 근거로 하여 4단(端)으로 나아갑니다.

  측은지심으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단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입니다.

  우물의 어린 아이 이야기로써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측은지심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仁)을 뺀 나머지, 즉 의(義) 예(禮) 지(智) 3단과 어린 아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논리적인 비약과 무리를 남겨둔 채 서둘러서 인의예지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매우 선언적 주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장의 목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단(四端)의 확충(擴充)’으로 넘어갑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장에서 맹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단과 이 4단의 확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천명론(天命論)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천명을 본성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입니다.

  중용에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하지요.
  
  맹자는 공자의 천명론과 예론(禮論)을 계승하되 천명을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하여 극기(克己)에 의한 본성의 회복에서

  예(禮)를 구합니다. 천명->본성->사회적 질서(禮)라는 체계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이르러서는

  천성이 곧 천리(天理)라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으로 계승됩니다.

  송대(宋代)의 객관적 관념론에 대하여는 ‘대학’ ‘중용’편에서 다시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맹자의 성선설은 사회원리인 예(禮)가(그것이 봉건적 사회원리이든, 또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원리이든)

  인간 본성에 순응하는 천리(天理)라는 것을 밝히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 윤리인 인(仁)보다는 객관적 구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객관적 구조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보다 효과적인 이론으로 기능하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은 ‘불인인지심’을 확충하는 체계이며 이 불인인지심의 확충이 곧

  본성의 사회화(社會化)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사회화가 곧 맹자’라는 논리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다름아니라 4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4지가 있는 것과 같다는 대목입니다.(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이것은 도덕적 차원에 있어서의 선언입니다만 ‘만민은 평등하다’는 주장으로 매우 중요한 맹자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사실 나는 사회적 관점에 있어서 측은지심(惻隱之心)보다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더 근본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곡속장(??章)에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제7강 맹자(孟子) - 4

 

  다음 구절은 유명한 곡속장(??章)의 일절입니다.

  원문을 다 싣기에는 너무 길어서 앞뒤를 자르고 가운데만 살려서 실었습니다.

  앞뒤로 잘린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제 선왕(齊宣王)이 맹자에게 춘추전국시대의 패자(覇者)인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晋文公)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선왕의 이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매우 부정적으로 대답합니다.

  무력으로 패자(覇者)가 되었던 제환공과 진문공에 대하여 공자의 제자들 중 누구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으며,

  맹자 자신도 들어본 일이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왕도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며

  이러한 왕도로 통일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고 설파합니다.
  그러자 선왕이 자기와 같은 사람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자신 있게 "가(可)"라고 대답합니다. 선왕이 그 까닭을 묻자 맹자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원문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지요.
  
               臣聞之胡?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曰 牛何之

            對曰 將以?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 若 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鐘與 曰 何可?也 以羊易之---不識有諸  (梁惠王 上)
  

                 ?鍾(흔종) : 제사의 일종. 짐승의 피를 종에 바르는 제사.
                 舍(사) : 중지하다. 그만두다. 捨.
                 ??若(곡속약) : (죽음이 두려워)부들부들 떠는 모양.
                 何可廢(하가폐) :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중지하기 어렵다.
                 以羊易之(이양역지) : 양으로 바꾸다. 양과 교환하다.
                不識有諸(불식유제) :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다. 諸는 之於의 준 말.

  
    신(臣)은 호흘(胡?)이라는 왕의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大殿)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양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이 원문의 번역입니다. 맹자가 제 선왕이 왕도(王道)를 실천할 자질을 판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제 선왕의 신하인 호흘한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보지 못하여 양으로 바꾸라고 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제선왕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질문에 대한 선왕의 답변과 맹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왕: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왕: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齊)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以小易大) 하였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牛羊何擇焉)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선왕: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금수(禽獸)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주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關係)'를 의미합니다.
  
  브리짓드 바르도. 프랑스의 유명한 여배우입니다만 한국의 보신탕에 대하여 공격적인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발상에는 2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동물애호가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제는 애완견을 알제리의 어린이들보다 더 아낀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극우파가 그러하듯이 아마 애완견을 알제리 어린이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한국에서도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아시아인은 애완견도 먹을 수 있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극우파다운 인종 우월주의입니다.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빗나갔습니다만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實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만남이 없는 사회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의 전제가 되는 만남(見)이 없는 사회라는 것이지요.
  두부에 석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두부 생산자가 두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두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하였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느 특정 상품의 생산-소비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모든 물류(物流)와 인적 교류(交流)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지요.

  징역살이를 10여 년쯤 하게 되면 얼굴만 봐도 죄명(罪名)과 형기(刑期)를 정확하게 맞추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성깔이나 학력, 직업까지 맞출 수 있게 됩니다.
  감옥의 인간관계라는 것이 도시의 인간관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하루 24시간, 1년 3백65일을 몇 년 동안 같은 감방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히 그 사람의 역사(歷史)를 알게 됩니다.
  감방은 사람에 대한 이해방식을 매우 입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입체적 이해방식은 사람에 대한 판단을 매우 정확하게 만들어 줍니다.

  나 자신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출소하고 난 이후에 사회에서 내가 그런 ‘능력’을 자주 사용하는 곳이 바로 지하철입니다.

  저는 꼭 앉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앉을 수 있어요. 누가 어디서 내릴 건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거든요.
  
거짓말 같지요? 물론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서 앉아 있는 사람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매우 부럽지요? 여러분들도 연습하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이대역(梨大驛)에서 내릴 사람과 서울역에서 내릴 사람은 구별이 어렵지 않지요?

  그런 쉬운 문제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경험을 쌓아 가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창 밖을 자주 내다본다고 해서 곧 내릴 사람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눈감고 있다고 해서 종점까지 가는 사람이라고 포기해서도 안 되지요. 매우 종합적인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사람의 인상, 옷차림, 소지품, 그리고 각 전철역의 사회, 문화적 특성은 물론이고

  현재시간에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유에 대해서까지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앉을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2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어서 전철 속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도림 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 그 앞에 섰습니다.
  정확하게 신도림 역에서 그 사람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마악 앉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사람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재빨리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자기 자리에는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를 끌어다 앉히는 거였어요.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요.
  나는 실력(?)이 있기 때문에 엇비슷이 두 사람 걸치기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정면에 서서 그 좌석에 대한 확실한 연고권(緣故權)을 주변에 선언(?)해 두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하였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와 경쟁상대가 될 만한 나이든 사람도 없었거든요. 태무심으로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 앞에 선 채로 나는 매우 착찹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여자와 내가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무 관계가 없었고 앞으로도 무슨 관계가 있을 리가 없지요.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乘車)한다고 합니다.

  전철을 동승(同乘)하고 있기는 하지만 평균 10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群集)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持續性)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치(恥)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언제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관심과 냉담함을 도시(都市)문화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밀집해 있는 도시라는 물리적 공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물리적 공간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문화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형식입니다.

  인류 5천년 역사에서 고대 노예제사회와 자본주의사회가 도시문화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그처럼 비인간화되는 정도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합니다.

  물론 노예제도란 그 자체가 억압적 제도임이 사실이지만, 관계 그 자체가 소멸된 구조는 아니지요.
  더구나 그리스-로마의 경우, 일부 광산노예나 겔리선의 노예와 같은 노예노동을 오히려 특수한 경우이며

  오늘날의 경찰, 행정, 교육 등을 노예계급이 담당하였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외거노비(外居奴婢)는 물론이고 가내노비(家內奴婢)의 경우 매우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관계는 외견상으로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광범하고 열려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사회는 상품사회(商品社會)입니다. 상품사회라는 것은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交換價値)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교환(商品交換)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라 하더라도 전체적인 사회구성(社會構成)에 있어서 전자본주의(前資本主義) 부문(部門)도 온존하고 있으며

  비자본주의(非資本主義) 부문도 물론 존재합니다.

  이러한 부문에 주목하고 이 부문을 진지(陣地)로 만들어나가는 과제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자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자본주의, 비자본주의 부문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一回的)인 화폐관계(貨幣關係)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임입니다.
  일회적 화폐관계로 전락한 인간관계는 인간관계가 소멸된 상태이며,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他者化)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지요.

  지하철에서 자리를 빼앗긴 작은 사건(?)이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이야기 하나 더 하지요.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깎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반면에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었지 않습니까?”라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봤죠.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참으로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지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신도림역에서 횡령(?)당한 좌석의 이야기는 동시대의 횡적인 인간관계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바의 젊은이와는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답은 인간관계가 세대간에서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화(例話)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간의 관계가 그만큼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인간관계는 종횡(縱橫)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성이 사회의 속성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고,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부정부패 이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이 맹자의 곡속장을 통하여 반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맹자는 제 선왕(齊詵王)이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사실을 들어

  제 선왕에게서 보민(保民)의 덕(德)과 천하통일(天下統一)의 자질을 보았던 것입니다.

 

제7강 맹자(孟子) - 5

 

  ‘맹자’는 7편(篇) 2백61장(章) 3만4천6백85자(字)에 달하는 대저(大著)입니다.

  그 내용도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정된 우리의 고전강독 시간으로는 더 이상 다룰 수가 없습니다.

  아쉽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몇가지 구절을 소개하고 ‘맹자’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음 장은 맹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맹자’의 대부분은 치세(治世)에 관한 도도한 논설임에 비하여

  이 장은 매우 성찰적(省察的)이면서 매우 엄정(嚴正)함을 느끼게 합니다.
  
  먼저 본문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孟子曰 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盡心上)
  

             小魯(소로) : 노나라가 작다고 하다. 小는 동사.
             觀於海者(관어해자) : 바다를 본 사람.
             難爲水(난위수) : 물을 말하기 어렵다. 물로 여기기 어렵다. 爲는 謂.
             難爲言(난위언) : 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렵다. 言이라고 여기기 어렵다.
             瀾(란) ; 큰 물결. 水中大波.
             容光(용광) : 빛이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작은 구멍. (容膝)
             成章(성장) : 章을 이룸. 어떤 경지에 오름.
                              文章이라고 할 때 文은 무늬 하나 하나, 章은 많은 무늬들로 이루어진 전체.
             達(달) : 통달함(足於此而通於彼也). 벼슬에 나아감. 仕進. 官達.
  

  전체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魯)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泰山)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에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가득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道)에 뜻을 둔 이상 경지(境地)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이 장의 전체 기조는 아까 말한 것처럼 성찰적이면서도 엄정합니다.
  동산(東山)은 노(魯)나라 동쪽에 있는 산이고. 태산은 여러분도 잘 아는 중국의 영산(靈山)입니다.

  오악의 으뜸(五岳之首)으로서 1백여명이 넘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여기에 올라 하늘에 봉선(封禪)을 고한 산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 .”
  양사언의 시조에 나오는 태산이 바로 이 산입니다.

  동산과 태산의 예를 들어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을 닦고 품성의 기르는 일의 가없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위수(難爲水)와 난위언(難爲言)의 해석에 있어서 이견이 없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爲’를 ‘become’으로 해석하여 ‘물이기 어렵다’ ‘물이라고 여기기 어렵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문법적으로 무리가 없고 그 뜻도 좋습니다. 대해(大海)를 본 사람은 (큰 호수나 큰 강 등) 엔간한 물은

  바다에 비할 바가 못되고 따라서 물이라고 하기가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바다를 본 사람의 이미지가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집니다. ‘바다’라는 것은 큰 깨달음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되지요.
  난위언(難爲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언(言)은 단순한 말의 의미가 아니라 학문(學問)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言)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이나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웬만한 물이나 이론(理論)에 대하여

  그것을 물이나 이론으로 쳐주기 어렵다고 하는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맹자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노자(老子)의 지자불박 박자부지(知者不博 博者不知)와 통하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관어해자 난위수(觀於海者 難爲水)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로 서예전(書藝展)에 출품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일입니다만 도록(圖錄)을 만드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내가 달아 놓은 설명문(caption)을 교정하였습니다.
  어떻게 바꾸었는가 하면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을 말하기 어렵다,’로 바꾸어놓았어요.

  깜짝 놀라서 다시 바로 잡았습니다만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였던 것이지요.

  세태(世態)의 일면을 보는 듯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월(日月)은 모든 틈새도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영과부진(不盈科不進)은 우리가 특히 명심하여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科)는 여러분들의 학과(學科)라고 하는 경우의 그 과(科)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해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불성장부달(不成章不達) 역시 불영과부진(不盈科不進)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章)은 수많은 무늬(文)들로 이루어진 한 폭의 비단과 같은 것입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경지(境地)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면 치인(治人)의 장(場)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이지요.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맹자는 공자를 잇고 있다는 일반적 통설과 달리 공자에 대한 최대의 이단(異端)이라는 상반된 견해도 있습니다.

  물론 맹자는 공자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제자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맹자는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배운 것으로 사마천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사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아니지요.
  자사는 증자(曾子)의 문인으로 되어 있지만, 막상 증자는 공자 최만년(最晩年)에 입학한 제자로서

  공자보다 46세 연하여서 공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였음이 지적됩니다.
  더구나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曾晳)은 ‘논어’에 매우 부당하게 삽입되어 있는데 필시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맹자는 무리하게 공자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강의에서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는 나도 여러분도 양쪽 모두가 적합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러한 맹자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공자와 맹자의 시대적 차이에서 상당부분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맹자 당시는 진(秦)에서는 법가인 상앙(商?)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였고,

  초(楚)와 위(魏)에서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전쟁으로 적국의 땅을 빼앗았으며,

  제(齊)의 위왕(威旺)과 선왕(宣王)은 병가(兵家)인 손자(孫子)와 전기(田忌)를 등용하는 등

  당시는 합종연횡(合縱連橫)의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면서 오로지 전쟁을 능사로 여기는 그야말로 전국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비록 맹자가 공자와 마찬가지로 요순(堯舜)과 하(夏) 은(殷) 주(周) 3대 성왕들의 덕치(德治)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강조점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차별화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엄격한 수기(修己)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등문공편(騰文公篇)>에서 맹자는 왕량(王良)의 비타협적인 자부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진(晋)의 대부인 조간자(趙簡子)가 천하제일의 마부인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임금의 총신(寵臣)인 해(亥)의 사냥을 위하여

  마차를 몰게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한 마리도 맞추지 못하고 돌아온 해(亥)가 왕량을 일컬어 천하의 형편없는 마부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량이 다시 한번 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강청하여 허락을 받고 마차를 몰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亥)가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쏘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해는 왕량을 일컬어 천하제일의 마부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조간자가 총신 해를 위하여 앞으로도 마차를 몰겠느냐고 왕량에게 묻자 왕량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사냥의 법도대로 마차를 몰았더니 하루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법도를 어기고 궤우(詭遇)하게 하였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잡고서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리 그가 권세가(權勢家)라 하더라도 마차를 몰 수가 없다는

  고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궤우(詭遇)란 것은 아마 짐승을 옆에서 쏘게 해주는(橫而射之) 것으로 부정한 방법으로 사냥하는 것(不正而與禽遇)을

  의미하는가 봅니다. 맹자는 왕량의 그 법도를 잃지 않으려는(不失其馳)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맹자에 관하여 여러분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 알고 있지요? 유향(劉向)의 ‘열녀전’ <모의편(母儀篇)>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다는 고사입니다. 그 고사의 진짜 주인공이 맹모(孟母)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훈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맹모로 만들었지 않았나 짐작됩니다.

  당사자가 맹모였다면 대단한 현모(賢母)는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맹모는 아들이 주변에서 본대로 흉내를 내자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이사를 갑니다.

  처음에 아마 시장(市場)이었던가요? 그리고 묘지(墓地)부근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당(書堂)옆으로 이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3번씩이나 이사한 다음에야 깨닫다니 현명한 여자라 하기 어렵지요.
  나는 맹모보다는 한석봉(韓石峰)의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지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맹모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몸소 보여줌으로써

  그 자식이 그것을 모범으로 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는 것이지요.
  가난한 떡장수였던 한석봉의 어머니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불을 끈 캄캄한 방에서 두 사람이 서로 견주게 됩니다.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지요. 그리고 다시 불을 켜고 확인합니다.

  어머니가 썬 떡은 가지런하지만 석봉의 글씨는 비뚤어지고 크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한석봉은 어머님의 솜씨에 비교하여 볼 때 자기의 글씨가 아직 멀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깨닫는 것이지요.
  물론 이 게임은 공정한 게임은 아닙니다. 나도 붓글씨를 쓰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떡은 손으로 만져보면서 썰 수가 있지만 글씨는 만져보고 쓸 수가 없지요.
  그렇긴 하지만 석봉의 어머님은 매우 훌륭한 교육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만을 만들어주는 맹모에 비하여도 훨씬 뛰어난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에 있어서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모범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극히 일부분만을 여러분과 함께 읽었습니다만 우리는 맹자의 사회주의(社會主義)와 민본주의(民本主義)를 통하여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조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迂遠)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收容)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사상은 당시의 패권을 추구하는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아마 제 선왕(齊宣王)이었지요? “신하가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맹자는 참으로 명쾌하고도 단호하게 답변하여 군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인(仁)을 짓밟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짓밟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殘賊)한 자는 일개 사내(一夫)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단호한 사회정치적 사상을 준열하게 설파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돌이켜보고

  그 품성을 곧게 간추리기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書經) 태갑(太甲) 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離婁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