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古典

신영복의 고전강독 제9강 장자(莊子)

경호... 2012. 2. 3. 01:40

 

제9강 장자(莊子) 1

  

   “오늘 우리는 왜 ‘장자’를 읽는가” 
 
  1) 장자와 노자  
 

   장자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井底蛙)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井底蛙)의 출전(出典)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에게 던지는 비판입니다.

  교조(敎條)에 묶인(束於敎) 굽은 선비(曲士)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이며, 그들에게는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자백가도 적극적인 실천을 통하여 당대사회의 문제해결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공동체의 문제 즉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음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제자백가들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의식에 비하여 장자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자가 추구하는 문제는 더 근원적인 문제였습니다. 제도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개인적인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自由主義) 철학입니다.
  사회적 혼란과 전쟁은 개인주의 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위험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災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혼란기였습니다.

  사이비(似而非) 사상가와 철학자가 종횡으로 누비는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들이 골몰하는 것도 제도개혁이 아닌 패권경쟁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백화(百花)라고 하지만 우물을 벗어나지 못한 꽃이었습니다.
 
  2천년을 격한 오늘 ‘장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장자’를 읽을 것인가?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은 ‘장자’를 읽는 이유를 찾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장자’의 제1편 소요유(逍遙遊)가 바로 장자의 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다르지요. 보행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는 행위입니다.
  소요는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할일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춤이란 어디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지요.

  동작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여하한 목적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장자사상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규범 밖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추구하던 일민(逸民)들의 경물중생(輕物重生)

  즉 개인주의적인 생명존중론(生命尊重論)이 양주(楊朱)학파에서 크게 고조되었는데

  장자는 이 양주학파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평가되지요.
  생명의 물리적 보존뿐만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정신(精神)의 자유(自由)’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무한한 소요유(逍遙遊)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장자의 철학과 사회학의 접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장자’를 읽는 독법이 대체로 ‘소요유’와 ‘자유’의 측면에 과도하게 치우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러한 경향은 우리 현대사에 만연된 패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현대사에는 기인열전(畸人列傳)에 들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익숙한 이름들도 많습니다.
  나는 그 개인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만,

  기행(奇行)이나 주사(酒邪)까지도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치부되기도 하고,

  예술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일제하에서부터 해방전후의 격동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폭압적인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현대사에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는 실로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절망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장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탈(逸脫)의 논리로, 패배(敗北)의 미학(美學)으로 읽혀졌었지요.
  그러나 그런 일탈(逸脫)과 농세(弄世)라는 패배주의자들의 개인주의적 대응과는 달리

  역사의 엄혹한 현장에서 산산이 부서져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또 알고 있습니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과 감옥을 함께 살기도 하였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해금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수용하기에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지요.

  현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리적으로도 부담이지요.

  패배의 미학이 훨씬 더 친근하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이러한 현대사의 그림자 때문에 우리의 ‘장자’ 독법이 부정의 철학으로 기울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미도중(曳尾塗中)’의 일화는 장자의 이러한 면모를 잘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장자가 낚시질을 하고 있을 때, 초(楚)의 위왕(威王)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어 재상을 삼으려는 뜻을 전했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도 않고 웃으며 사신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듣건대,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에 보관한다 합니다.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 하여 돌려보냈다는 일화입니다.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寧生曳尾塗中)”는 것이 바로 ‘장자’입니다.

 

제9강 장자(莊子) 2

 

  “장자는 노자와 중요 지점에서 일치”

 

  장자에게 끼친 노자의 영향에 대하여는 상반된 견해가 있습니다.

  노자의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견해와 '장자'와 '노자'는 각각 달리 발전되었고

  다른 경로를 통하여 계승되어 왔다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자'보다는 오히려 '장자'를 노장철학의 주류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장자'에는 '노자'를 직접 인용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지요.
  '노자'와 '장자'가 다른 경로를 통하여 발전되어 왔다는 주장은 특히 그 서술형식이 판이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노자'의 서술방식은 여러분들도 읽어서 아는 바와 같습니다.

  사설(辭說)을 최소화하고 있는 엄숙주의(嚴肅主義)가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선언적 명제(命題)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만연체(蔓衍體)의 이야기 구조를 기조로 하면서

  허황하기 짝이 없는 가공(架空)과 전설(傳說) 그리고 해학(諧謔)과 풍자(諷刺)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책의 제1장이 그러한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자'의 제1장 기억하지요?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입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의 첫 구절은 "북쪽 깊은 바다(北冥)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로 시작됩니다.
  이 첫 구절의 차이가 사실 노장(老莊)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도(道)의 존재성(存在性)을 전제합니다.

  도(道)를 모든 유(有)의 근원적 존재로 상정하고 이 도(道)로 돌아갈 것(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도(道)를 무궁한 생성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逍遙)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노자'를 우리는 민초들의 정치학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확인하였습니다만 '노자'에게는 그러한 사회성과 정치성이 분명하게 있는 것이지요.

  '장자'에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장자'와 '노자'는 가장 중요한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치성은 노장(老莊)의 사상적 연관성이나 노장사상의 특징이라기보다는

  크게는 동양적 세계관의 본질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은 궁극적 실재(a basic oneness)의 구현(具現)으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이 점에 있어서 노자와 장자는 차이가 없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相對主義) 철학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지만 이를 심화해 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즉 '정신의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도피(逃避)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노자의 관념화(觀念化)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쉰(魯迅)의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가 바로 장자의 그러한 면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호루라기를 부는 장자'는 '장자' '지락(至樂)'에서 소재를 취하여 장자의 상대주의 철학을 풍자한 희곡형식의 작품입니다.

  이 자리에서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만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5백년 전에 친척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옷을 모두 빼앗기고 피살된 한 시골 사람이 다시 부활하여 장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간절하게 옷을 원하는 그 사람에게 장자는 그의 고답적인 철학을 펼칩니다.
  "옷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법. 옷이 있다면 그 역시 옳지만 옷이 없어도 그 역시 옳은 것이다.

   새는 날개가 있고, 짐승은 털이 있다. 그러나 오이와 가지는 맨몸뚱이다.

   이를 일러 '저 역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며, 이 역시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위급해진 장자가 급히 호루라기를 꺼내어 미친 듯이 불어서 순경을 부릅니다.

  현장에 도착한 순경은 옷이 없는 그 사람의 딱한 현실을 생각하여 장자가 옷을 하나 벗어서

  사내가 치부만이라도 가리고 친척을 찾아갈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러한 순경의 제안을 끝내 뿌리치고 순경의 도움을 받아 궁지를 벗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작품의 전편을 '발가벗겨진' 분위기로 이끌고 가면서 사내의 절실한 당면의 현실인 '옷'과

  장자의 고답적인 사상인 '무시비관(無是非觀)'을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장자철학의 관념성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의 정점은 장자가 미친 듯이 호루라기를 불어 그의 지지자인 순경을 부르고 순경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대목입니다.

  장자가 호루라기를 불다니 여러분도 상상이 가지 않지요?
  그러나 나는 장자와 호루라기라는 그 극적 대비에서 바로 루쉰의 대가적 면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장자와 호루라기라는 극적 대비를 통하여 장자의 허구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자의 무시비(無是非)란 결국 통치자에게 유리한 또 하나의 정치적 현실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호루라기는 역시 권력(權力)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호루라기는 군사적 권력이지요.
  이상과 같은 부정적 평가보다는 장자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묵(儒墨)의 천명(天命)사상이나 천지론(天志論)에 대한 장자의 비판입니다.
  그것은 반체제적인 부정철학(否定哲學)일뿐만 아니라 장자사상은 궁극적으로 체제부정(體制否定)의 혁명론이며 해방론이라는

  입장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해방은 어디까지나 관념적 해방이며 주관적인 해방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장자철학은 노자의 '모순대립(矛盾對立)'적 구조를 한층 심화하여 공간적, 시간적인 상호연관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사상적 영역이 새롭게 확장된 것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노자의 사회성과 실천성이 거세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치자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은 지나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 전편을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理論)과 사상(思想)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鳥瞰)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세상만물까지도 우물 속에 있는 작은 조각에 불과한 존재임은 물론입니다.

  세상만사, 세상만물이 모두 부분(部分)이고 찰나(刹那)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사상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讀法)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공자와 맹자의 세계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계입니다.

  이 상식의 세계란 본질에 있어서 기존(旣存)의 논리입니다. 기존의 논리를 승인하는 구도입니다.

  상당부분 복고적이기까지 하지요. 그것은 답습(踏襲)의 논리이며, 기득권(旣得權)의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一喝)하고 일소(一笑)하고 초월(超越)하고 있습니다.

  초월적 시각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제9강 장자(莊子) 3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공헌은 자본주의 체제를 과도적(過渡的)인 것으로 규정하는 역사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란 이전의 다른 모든 체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과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이지요.
  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종말'이란 그 어감과는 반대로 최고단계를 의미합니다.

  궁극적 귀착점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가 최후의 체제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지요.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입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그것을 조감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자본주의 질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인식을 조감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지요.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상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과제로 삼고 있는 장자독법에 관하여 중요한 단서를 하나 발견한 셈이지요?
 
  장자 예제(例題)에 들어가기 전에 장자와 '장자'에 대하여 몇 가지 이야기해두어야 합니다. 우선 장자라는 인물에 관한 것입니다.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漢列傳)에 장자(莊子)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몽(蒙 河南省 商丘縣 東北部)출신으로 이름은 주(周)이며. 양혜왕(梁惠王), 제선왕(齊宣王), 맹자와 동시대인(同時代人)이라

  하였으며 박학하고 근본은 노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자의 생존연대는 BC.369-286이었으며 몽(蒙)이란 곳은 당시에는 송(宋)이라는 작은 나라에 속하였습니다.

  송(宋)나라에 대하여는 '논어'를 강의할 때 이야기하였지요. 은(殷)나라 유민들의 나라입니다.
  송나라는 옛날부터 사전지지(四戰之地)라고 불릴 정도로 사방으로 적을 맞아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나라였습니다.

  사방으로부터 전화(戰禍)가 집중되었던 불행한 지역이었습니다.

  전국시대를 통하여 이 지역만큼 전란의 도가니에 휩싸인 곳도 달리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와 고통, 기아와 유망 등 이 지역의 백성들이 겪은 모진 역사가 바로 장자사상의 묘판(苗板)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가 칠원리(漆園吏)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장자는 약소국의 가혹한 현실에서부터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자유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상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의 일차적 가치는 '생명(生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반(反)생명적인, 반(反)자연적인, 그리고 반(反)인간적인 모든

  구축적(construct) 질서를 해체(de-construct)하려는 것이 장자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장자는 제자백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논리가 상대의 허점을 예리하게 찔러 사람들이 그를 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유유자적한 장자사상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킬러(killer)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로 공자의 무리 즉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이 교묘하고 세상과 인정을 추찰(推察)함이 뛰어나 당시의 석학들도 그 예봉을 꺾지 못하였다고 전할 만큼

  그의 수사학과 논리는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장자'는 AD 4세기 북송(北宋)때의 곽상(郭象)이 그 때까지 전해오던 여러 '장자'본들을 정리하여

  6만5천여 자 33편으로 편집하고 주를 단 것입니다.
  그 이전에 아마 다른 '장자'라는 서물(書物)이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사기(史記)'에 10만 자로 된 '장자'가 언급되고 있으며 52편으로 된 '장자'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금본 '장자'는 내편(內篇) 7, 외편(外篇) 15, 잡편(雜篇) 11편 모두 33편으로 묶여 있는데

  내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장자사상의 정수입니다.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 7편입니다.

  이 7편은 장자의 저술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편과 잡편은 내편에 대한 해석으로 후인들에 의한 2차 저작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제9강 장자(莊子) 4

 

  2) 예제(例題)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 而徵一國者 其自視也 亦若此矣.
          而宋榮子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 而不加勸 擧世而非之 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竟 斯已矣 彼其於世 未數數然也 雖然 猶有未樹也

  夫列子於風而行 ?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乎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內篇 逍遙遊)
  
      效(효) : 본받다.

      徵(징) : 부르다. 맡다.
      亦若此矣(역약차의) : 此는 앞 구절의 메추라기. 붕새의 경지를 모르는 작은 새.
      沮(저) : 막다. 기죽다.

      數數(삭삭) : 서두르다.

      樹(수) : 立. 이르다.
      ?(령) : 서늘하다.

      猶有所待者(유유소대자) : 아직도 의지하는 바가 있다.
      辯(변) : 變

      無己(무기) : 자신을 없애다.
      無功(무공) : 공적이 없다.

                無名(무명) : 명예가 없다.
  
  이 장에서 장자는 초월의 경지를 4가지 단계로 설정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극히 현실적인 상식인(常識人)이며 메추라기와 같이 국량(局量)이 좁은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 단계는 송영자(宋榮子) 같은 사람을 일컫고 있습니다. 송영자는 송나라 사상가로서 반전 평화주의자이며

         특히 칭찬이나 모욕에 개의치 않고 초연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아직도 칭찬 받으려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예시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로는 열자(列子)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보름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열자도 자유롭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라는 외적 조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猶有所待者 즉 아직도 의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
  넷째 단계가 아마 장자가 절대자유의 단계라고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서 도와 함께 노니는 소요유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단계에 이른 사람을 성인(聖人) 신인(神人) 지인(至人)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신인 지인은 '장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의 경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자유의 경지'입니다. 전체의 뜻을 함께 새겨보기로 하지요.
 
  "그러므로 그 지식이 벼슬자리 하나 채울 만한 사람, 그 행위가 마을 하나를 돌볼 만한 사람, 그 덕이 임금 하나를 모실 만한 사람,

   그런 사람들은 국량이 좁기가 메추라기와 같다.
   그래서 송영자는 그런 사람을 비웃는다. 세상이 그를 칭찬한다고 해서 더 분발하지도 않고 세상이 그를 비난한다고 해도

   기죽는 법이 없다. 내심(內心)과 외물(外物)을 구별하고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구분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계에 있을 뿐이다. 비록 세상일을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이르지 못한 경지가 있었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니며 거리낌없이 노닐다가 보름이 지나서 돌아온다.

   그는 세상의 행복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걷는 수고를 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의지하는 데가 없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무한한 경지에 노닐 수 있다면

   그는 또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신인(神人)은 공적(功績)이 없고 성인(聖人)은 명예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장자세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도(道)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老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無待),

  무엇에도 거리낌없는(無碍)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제9강 장자(莊子) 5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內篇 齊物論 )
  
      方(방) : 배를 나란히 세우다. 특정한 때. 특정한 곳.
      方生方死(방생방사) : 한 편에서는 죽고 한 편에서는 태어난다. 생에 대립하여 사가 있다
      方可方不可(방가방불가) : 可가 있기 때문에 不可가 있다.
      彼是方生之說也(피시방생지설) : 저것과 이것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존재 조건으로 삼는다. 저것과 이것은 서로 나란히 생긴다.
  

  위에 달아놓은 주(註)만으로 해석하기에 좀 부족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전체적인 의미를 풀이해보지요.
 
  “사물은 어느 것이나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적 관점(自彼)에서 보지 못하고 주관적 관점(自是)에서만 보고 있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에서 말미암는다고 하여 이것을 (惠施는) ‘저것과 이것의 모순이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生과 死, 死와 生 그리고 可와 不可, 不可와 可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조건이 되는) 모순관계에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특정한 입장에 서지 않고(不由) 하늘에 비추어 본다고 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亦因是也).“
 
  본문은 이어집니다만 여기까지만 소개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혜시(惠施)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실상계(實相界)의 상대주의적 한계(限界)를 깨달아 사물의 한 면만을 보지 말고 하늘에 비추어보고,

  도의 중심(道樞)에서 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풀이한 내용은 몇 군데 일반적 해석과 다소 달리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풀이에 덧붙여 원문을 괄호에 넣어 두었습니다. 관심이 있는 학생은 다른 번역서와 비교해보기 바랍니다.
  번역은 어디까지나 문법이나 용례에 있어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장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번역상의 차이가 있는 부분은 원문을 괄호에 넣은 자피(自彼) 자시(自是)

  그리고 방(方)에 대한 해석과 불유(不由) 역인시야(亦因是也)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비교해 보기 바랍니다.
  이 예제는 장자의 상대주의 철학이 압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제물론(齊物論)에 있는 其分也成也 其成也毁也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唯達者知通爲一과 같은 내용입니다. 
 


 제9강 장자(莊子) 6
  
         疱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 道也 進好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隙 導大? 因其固然
       技經肯棨之未嘗 而況大?乎” (養生主)
  
            肯棨(긍계): 힘줄이 살에 붙은 곳, 사물의 가장 중요한 곳.
            隙(극): 틈.

            款(관): 빌 관. 空.

            批(비): 찌르다. 깎다.
            固然(고연): 본디부터 그러함.

            ?(고): 큰 뼈.
 
  내용이 어려운 예제만 제시한 것 같아서 좀 쉬운 것을 골랐습니다. 위의 예제는 앞뒤 부분을 생략하였습니다.

  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하고 전체 문맥 속에서 본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포정해우(疱丁解牛)란 ‘백정이 소를 잡다’는 뜻으로 유명한 예화입니다.

  비천한 백정이 소를 잡는 이야기이지만 바로 그 비천하고 비근한 예로써 도(道)를 설명합니다.

  장자 특유의 풍자와 해학이 잘 나타나고 있는 구절입니다.
  포정이 文惠君(梁나라 惠王)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그 손을 놀리는 것이나, 어깨로 받치는 것이나, 발로 딛는 것이나,

  무릎을 굽히는 모양이나, 쓱쓱 칼질하는 품이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동작 하나 하나가 상림(桑林)의 춤에 맞고 경수(經首)의 장단에도 맞았습니다.

  상림의 춤은 은(殷)나라 탕왕(蕩王)이 상림이라는 곳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춘 춤이며.

  경수의 장단이란 요(堯) 임금 때의 음악이라고 전해지는 함지곡(咸池曲)의 한 악장(樂章)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최고의 춤과 최고의 음악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에 탄복하고 조금도 힘들이지 않는 솜씨에 문혜군은 감탄합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교재의 예제는 여기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우선 그 내용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였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 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 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靭帶)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
 
  그리고 이어서 포정이 이야기합니다.
 
  “훌륭한 포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보통의 포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니

   그것은 뼈에 칼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 동안이나 사용하였고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릅니다만

   칼날이 날카롭기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19년이나 사용하였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심줄이 엉긴 곳에 이르러서는 저도 조심하여 눈길을 멈추고 천천히 움직이며 칼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서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해집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터득했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포정해우의 예화는 술(術)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도(道)에 관한 이야기임은 물론입니다.

  장자사상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것을 체득하여 함께 합일한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논어에서도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와 통하는 경지라 할 수 있지요. 

 

제9강 장자(莊子) 7
  
         是故 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
        無所去憂 意仁義其非人情乎 彼仁人何其多憂也(外篇 騈拇)
 
               騈拇(변무) : 엄지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이 붙은 것. 네 발가락.
               鳧(부) : 오리

               ?(걸) : 물어 뜯음

               去(거) : 怯(겁)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라는 책이름이 있었지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장자' 번역서였습니다.

  책명을 그렇게 바꾸어 출판하였지요. 그 이름을 바로 이 변무편에서 따온 것이지요.

  위의 예제를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늘여주면 우환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다고 하더라도 자르면 아픔이 된다.

   그러므로 본래 긴 것은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은 늘여서도 안 된다. 두려워하거나 근심할 까닭이 없다.

   생각건대 인의(仁義)가 사람의 본성일 리 있겠는가! 저 인(仁)을 갖춘 자들이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 "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여기지 않고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이며 도의 세계이다.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이 붙은 것을 가르면 울고, 육손을 물어뜯어 자르면 소리친다.(騈於拇者 決之則泣 枝於手者 ?之則啼)
  이 대목에서 장자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인의(仁義)는 사람의 천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천(天)이 무엇이며, 인(人)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장자는 간단명료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何謂天 何謂人 曰 牛馬四足 是謂天 落馬首 穿牛鼻 是謂人(外篇 秋水)
  "소와 말이 발 4개가 있는 것. 이것이 천(天)이요, 말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 이것이 인(人)이다."
  그러므로 인위(人爲)로써 자연(自然)을 멸하지 말며 고의(故意)로써 천성(天性)을 멸하지 말며,

  명리(名利)로써 천성의 덕(德)을 잃지 말라. 이를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일러 천진(天眞)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지금까지의 예제에서 여러분이 느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장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그야말로 거리낌없이 풀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서술형식과 전개방식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장자사상과 가장 잘 조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요(逍遙)와 자유(自由)와 자연(自然)을 본령으로 하는

  장자의 사상을 담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는 대단히 높은 문학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문장에서 그 문학성을 주목해보기 바랍니다.
 
  "노(魯)나라 교외에서 갈매기를 잡아 묘당(廟堂)에 모시고 구소(九?)의 음악과 태뢰(太牢)의 요리로 대접하였다.

   3일만에 죽었다. 백락(伯樂)이 말을 잘 다루고, 도공(陶工)이 점토를 잘 다루고, 목수가 나무를 잘 다룬다고 한다.

   말을 불로 지지고, 말굽을 깎고, 낙인을 찍고, 고삐로 조이고, 나란히 세워 달리게 하고, 마굿간에 묶어두니 열에 두셋이 죽었다.

   점토와 나무의 본성이 어찌 원(圓)과 곱자와 먹줄에 맞고자 하겠는가."
 
  위 구절에서는 우리는 인위적인 규제와 형식을 거부하는 장자사상의 핵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人)을 거부하고 천(天)과 합일하는 것이 장자사상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을 피하려는 둔천(遁天)의 형벌이다.

   천인합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제(天帝)의 속박(縣解)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함으로써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 합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道)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道)와 합일(合一)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道)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情緖的) 공감(共感)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cool head)가 아니라 가슴(warm hearts)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와 가슴에 관해서는 지난번에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는 말은

  우리의 생각이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지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해보아야 맞지요.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해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은 머리와 가슴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반성하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여러분들이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을 것입니다. 


 

제9강 장자(莊子) 8     
  

             爲圃者忿然作色而笑曰
           ‘吾聞之吾師 有機械者必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外篇 天地)
 
                    機事(기사) : 계로 인한 일,

                    機心(기심) : 꾀.
                    純白不備(순백불비) : 본성을 해치다.

                    神生不定(신생부정) : (신성한) 생명이 자리를 잃다.
 
  자공(子貢)이 초(楚)나라를 유람하다 진(晉)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힘은 많이 드나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자공이 용두레( )라는,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用力甚寡 而見功多) 기계를 소개하였습니다.

  위 예제는 노인이 자공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이 구절을 소개하는 이유는 기계와 생산력에 대하여 반성하는 화두로 함께 읽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연 설명할 필요 없이 본문을 풀어서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機事)이 있게 마련이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그 다음 이야기도 매우 신랄합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하고 있는 자공에게 댁은 뭐하는 사람이냐고 노인이 묻습니다.

  자공이 공구(孔丘)의 제자라고 대답하자 노인은 유가(儒家)를 신랄하게 욕합니다.
 
  “그 자는 많이 아는 체하고, 성인을 자처하고, 백성들을 속이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이 노래하며,

   천하에 명성을 팔고 다니는 자가 아닌가! 자네도 그런 생각을 버리고 심신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겠네. 제 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느 여가에 천하를 다스린단 말인가?

   내가 하는 일을 어리석다 하지 말고 그만 가보시게.”
   (‘子非夫博學以擬聖 於于以蓋衆 獨弦哀歌 以賣名聲於天下者乎 汝方將忘汝神氣 墮汝形骸 而庶幾乎.

     而身之不能治 而何暇治天下乎 子往矣 無乏吾事’ )
 
  장자의 의도에 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요?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神話)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高揚)’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道)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입니다.
  물론 현대의 동양이 이러한 가치와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동양의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현대의 특징입니다.

  기계에 대한 장자의 주장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기계(機械)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계는 그 속성인 기사(機事)와 기심(機心)으로 인하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노동문제, 노동자문제, 노동계급문제 등을

  장자가 경험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요. 나아가서 공황이나 실업문제에 대해서도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짚어보지요. 장자의 논거는 오늘날의 논의와는 그 장을 달리 합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경멸적 문화가 자리잡는

  그러한 일련의 반노동적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지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뜨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支出)’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實現)’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1810년대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지요.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파괴(機械破壞) 운동입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파괴에 나섰던 것이지요. 기계가 사람을 쫓아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러다이트 운동에 대하여 내린 평가는 기계와 기계의 자본주의적 채용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잘못된 운동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자와 함께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적 채용형식이 아니라면 기계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기계는 그 효율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여가를 가지게 하고 더 많은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한 실업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여가와 소비가 인간성의 실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곧 장자의 문제의식입니다.
  장자가 제기하는 것은 경제학에서 다루는 문제보다는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도(道)의 문제입니다.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그 편리성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용두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이 안정되려면 자연과의 조화가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하지요.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逍遙)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은 사람과 기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주관적(主觀的)’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여러분은 주관적인 것은 사람이고 기계는 철저하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 포기 풀이 자라는 것을 보더라도 그 풀은 햇빛과 물과 토양과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에는 깜깜한 땅 속에서 뿌리로만 견디며 봄을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기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일을 못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철저하게 자기식대로 합니다.

  남이나 주변조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습니다.
  나한테 먹을 가는 기계가 있습니다. 먹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더러는 이 먹갈이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가끔씩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이 먹갈이 기계는 자기식대로만 움직입니다. 물이 없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 갈고 있습니다.

  적당한 농도(濃度)를 맞춰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요.
  최근 전화 여론조사가 부쩍 많이 걸려옵니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것은 기계와 기계가 서로 응답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가관이었습니다. 이미 녹음된 질문이 질문을 하고 답변하는 쪽도 응답기가 돌아가는 것이지요.

  기계와 기계가 서로 상대방을 고려하는 법 없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근대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했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三人行而一人惑 所適者猶可致也 惑者少也 二人惑則勞而不至 惑者勝也 而今也以天下惑 予雖有祈嚮 不可得也 不亦悲乎.)(天地)
 


제9강 장자(莊子) 9 
  
           ?之人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惟恐其似己也(外篇 天地)
 
                  ?之人(여지인) : 불치병자.
                  汲汲然(급급연) : 급히 서두르는 모양.
                  惟恐其似己也(유공기사기야) : 오직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이 구절은 방금 예를 든 “三人行而一人惑···”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입니다만 잘못 끼어 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 내용에 있어서 문맥상으로는 어긋나는 내용입니다.
  물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의미로 연결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릅니다.

  불치병자의 자식이 불치병자인 것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하늘의 뜻에 거역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읽을 수는 없지요.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까닭은 자기반성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구절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선생’들이 읽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선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迷惑)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사회(社會), 한 시대(時代)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까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神)을 강요하는 제국(帝國)과 패권(覇權)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9강 장자(莊子) 10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輪徐 則甘而不固
           疾則 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外篇 天道)
 
                  ?(착): 깎다.

                  椎鑿(추착): 망치와 끌.

                  邪(야): 耶와 同字. 의문사.
                  糟魄(조박): 지게미와 재강.
                  數存焉於其間: 그 사이에는 정확한 치수가 있다. 또는 비결(數)이 있다.
                  喩(유): 깨우쳐 주다.

                  行年(항년): 享年과 같음.
                  與其(여기): 그와 마찬가지로. 與는 如.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목수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당상을 쳐다보며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그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은 신의 일(목수일)로 미루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
 
  위의 예제를 읽으면 무대의 한 장면 같은 그림이 떠오릅니다.

  당상에 환공이 앉아서 책을 읽고 당하의 마당에는 백발의 노목수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사가 시작되는 그런 연극무대 같은 그림이 떠오릅니다.
  눈앞에 펼쳐 보이듯이 자기의 주장을 매우 쉽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장자의 역량이 돋보입니다.

  사실은 우리 강의도 이처럼 쉽고 비근한 예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고 반성하게 하는 예제입니다.

  내용에 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재에 소개된 본문은 天道 13절의 일부입니다. 그 앞 부분에서 ‘책’의 한계에 대하여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만 소개하기로 하지요.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도(道)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제9강 장자(莊子) 11 
  
           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年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莊周笑曰 ‘周將處夫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外篇 山木)
 
                  材(재): 재목 감. 쓰임이 됨.

                  不材(부재): 재목감이 못됨.
                  似之而非也(사지이비야): 비슷하지만 (道는) 아니다.
                  未免乎累(미면호누): 화를 면할 수 없다.
 
  이 예제도 일부만 취한 것입니다.
  장자가 제자들과 산길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를 베지 않고 있는 나무꾼에게 그 까닭을 묻자 나무꾼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不材) 때문에 천수(天壽)를 다 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장자 일행이 산에서 내려와 친구 집에 묵었는데 주인은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제자들이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다음은 본문입니다.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 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이란 도(道)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쓸모가 있으면 천수를 못한다고 하지만, 쓸모가 없으면 취직이 안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생업(生業)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체로 여러분들의 고민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에서 인문학과 교양교육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기가 바로 재(材)와 부재(不材)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장자가 제기한 재(材)-부재(不材) 논의는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좋다 아니다라고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材)와 부재(不材)를 뛰어 넘을 것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도 재와 부재의 중간(中間)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쓸모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의 하위개념이지요. 다른 것을 만드는 데에 유용한 것인가 아닌가하는 수준의 것이지요.

  오늘날은 물론 상품생산에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장자가 중간에 서겠다고 한 것은 재(材)-부재(不材)의 논리를 조감해야 한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간(間)이란 것이 바로 조감(鳥瞰)의 자리를 의미하고, 반성의 자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도 사실은 도와 비슷하지만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장자의 결론입니다.

  장자의 주장은 결국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道)에 노닐게 하여야 하며

  그리함으로써 만물을 부리되 만물에 얽매이지 않아야 화를 입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도(道)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도(道)를 닦는다는 것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절간의 선방에 앉아 있는 스님들의 일이라고 치부하지요.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재-부재의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입니다.
  장자의 논리에 따르면 도(道)는 재와 부재를 조감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의 도(道)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주류담론이던 부국강병 논리를 반성하고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날의 도(道)의 문제는 문명론(文明論)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서 있는 처소(處所)가 어디이며, 자기가 갖고 있는 소망(所望)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성찰하고,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조감과 각성이 도(道)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예제 마지막 구절에서 장자는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고 하며 빙그레 웃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웃음의 진의(眞意)가 무엇인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제4편 인간세(人間世)에 있습니다.

  그 내용만 간추려 소개하겠습니다. 장자의 진의는 여러분들이 짐작해보기 바랍니다.
 
  “목수 장석(匠石)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도토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위에서 내려다 볼만하였다.···

   구경꾼들이 장터를 이루었지만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렸다. 그의 제자가 장석에게 달려가 말하였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 다닌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장석이 말하였다.
  ‘그런 말 말아라. 쓸 데 없는 나무다. 그걸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쉬이 깨져 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그 것은 재목이 못될 나무야.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배, 귤,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어지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 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가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 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제9강 장자(莊子) 12

  
         方舟而濟於河 有虛船 來觸舟 雖有?心之人不怒
        有一人在其上 則呼張?之 一呼而不聞 再呼而不聞
        於是三呼邪 則必以惡聲隨之
        向也不怒而今也怒 向也虛而今也實
        人能虛己以遊世 其孰能害之(外篇 山木)
 
               呼張?之(호장흡지): 一呼張之 一呼?之. 一請張之 一謂?之. 이쪽 배의 사람은 배 사이를

                                           (부딪치지 않게) 벌리라고 소리치고 저쪽 배의 사람은 배를 거두라고 소리치다.
               向也(향야) 今也(금야): 아까는 이제는.
               虛己(허기): 자기를 비우다.
 
  산목(山木)에서 예제를 하나 더 골랐습니다. 축자해석(逐字解釋)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체의 뜻을 중심으로 읽어보기로 하지요.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었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는 도달할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步行)이 아닙니다.
  삶이란 삶 그 자체로서 완결됩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장자는 자유의지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적이라거나, 사회적 의미가 박약하다거나,

  실천적 의미가 제거되어 있다는 비판은 장자를 잘못 읽거나 좁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국강병이라는 전국시대의 패권논리가 장자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었던가를 우리는 상상하여야 합니다.

  도(道)란 무엇인가? 인간이 지향하여야 할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

  장자가 이러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고 나아가 최대한의 자유개념을 천명한 까닭은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패권경쟁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비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장자의 이러한 근본주의적 관점과 서슬 푸른 비판정신이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에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제9강 장자(莊子) 13 
 

  다음 예제는 '나비 꿈'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혼돈칠규(混沌七竅)'입니다.

  
            南海之帝爲?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混沌
         ?與忽 時相與遇於混沌之地 混沌待之甚善
         ?與忽謀報混沌之德
         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混沌死 (內篇 應帝王)
 
                   ?(숙): 갑자기.

                   忽(홀): 홀연히.
                             숙과 홀은 둘 다 제왕의 寓意的 이름이다.

                             ?은 현상이 재빨리 나타나는 모양, 홀은 현상이 재빨리 사라지는 모양을 우의적으로 표현하고 있음.

                             각각 생성과 소멸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
                   混沌(혼돈): 渾沌과 같음. 沌은 덩어리를 의미함.  혼돈은 생성과 소멸 이전의 궁극적 통합체.
                   竅(규): 구멍.

                   鑿(착): 뚫다.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하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다.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하였다.
  날마다 한 구멍씩 뚫어주었는데 7일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제적인 전체를 분(分)하고 별(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별하고 분석(分析)하는 것이지요.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分別智)이며, 분별상(分別相)이며, 개아(個我)로서의 존재들인 것이지요.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총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장자'를 끝내면서 몇 가지만 더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장자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장자'에 어원이 있는 성어(成語)도 매우 많습니다만 우리가 잘 아는 조삼모사(朝三暮四)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조삼모사의 우화는 우리의 생각이 좁기가 원숭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달팽이 뿔 위에서 촉씨국(觸氏國)과 만씨국(蠻氏國)이 전쟁을 벌이는

  소위 달팽이의 우화도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예제는 생략하기가 마음에 걸려서 뒤늦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지식(知識)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간단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雖然有患 夫知有所待而後當 其所待者特未定也
     庸 知吾所謂天之非人乎 所謂人之非天乎(大宗師)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어려움이란) 그 의거해야 하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장자는 물론 이 구절에서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나누고, 결국 하늘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照之於天)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자의 결론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과 이 구절을 읽으려고 하는 까닭은

  이 구절에서 '지식(知識)'에 대한 몇 가지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첫째는 조지어천(照之於天)의 입장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의 체계에서는 진인(眞人)의 입장입니다만

       이것은 객관적 입장을 의미합니다. 지식에 있어서 과연 객관적 입장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이 장자가 관념론자로 비판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가치중립성(價値中立性)과 지식의 당파성(黨派性) 문제로 논의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는 소대이후당(所待而後當) 즉 지식의 진리성은 소대(所待) 이후에 검증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소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소대(所待)는 <예제 1>에도 나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 반복됩니다. 소대자특미정(所待者特未定)이 그것입니다. 소대가 아직 미정이라는 것입니다.

  특(特)은 '다만' 또는 '아직'이란 의미입니다. 소대(所待)는 글자 그대로 '기다려야 할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지유소대이후당(知有所待而後當)이란 의미는 지식(知識)이란 어떤 것을 기다린 연후에

  그 진리성 여부가 판명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란 한 마디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명(名)입니다. 그 명(名)의 실체가 되고 있는 실(實)과 비교하여

  명실(名實)이 부합(附合)할 때에 지식은 합당(合當)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소대자(所待者)는 실(實)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소대자특미정(所待者特未定)이란 이 실(實)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상 그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지요.
 
  변증법에서는 이론은 실천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천의 조건이 변화하고, 실천의 주체가 변화하는 경우 검증은 매우 복잡한 것이 됩니다.

  장자는 물론 이러한 논의를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에 논의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지식과 진리성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變化)'입니다. 변화를 담아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사회변동기에는 이러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최대한의 변화를 포용할 수 있는 구조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장자의 천(天)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천(天)은 진리가 수많은 진리들로 해체되는 것을 막아주고 진리가 재(材)-부재(不材)의 차원으로 격하되지 않도록

  해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인(人)이며, 어느 것이 천(天)인가를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장자의 고민이기도 하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9강 장자(莊子) 14

 

  너무 딱딱한 이야기로 끝내는 것 같습니다. 지식론(知識論)이 아닌 장자의 지혜론(智慧論?) 하나를 소개하지요.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이 오면 큰 궤를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역할에 지나지 않지요.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이지요.
  도척(盜?)은 도둑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데 실은 공자 당시의 노나라 현인 유하계(柳下季)의 동생으로

  무리 9천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침략한 대도(大盜)였습니다.
 
  장자는 “도적질에 도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도척에게 합니다.
  도척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이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이다.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知)이다.
   도둑질 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仁)이다.“
 
  ‘장자’에는 노자의 죽음과 장자 아내의 죽음 그리고 장자 자신의 죽음에 관한 부분이 실려 있습니다.

  물론 사실적 근거로서의 의미는 없으며 장자의 사상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지만 간단히 소개하지요.
  노자가 죽었을 때 진일(秦佚)이 조상(弔喪)을 하는데 세번 곡하고는 나와버렸다.
  이를 본 진일의 제자가 물었다.
 
  “그 분은 선생님의 친구가 아니십니까?”
  “그렇다네.”
  “그렇다면 조상을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가 않네. 늙은이는 자식을 잃은 듯 곡을 하고,

   젊은이는 어머니를 잃은 듯 곡을 하고 있구먼. 그가 사람의 정을 이렇듯 모은 까닭은

   비록 그가 칭찬을 해달라고 요구는 아니 하였을 망정 그렇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며,

   비록 곡을 해달라고 요구는 아니하였을 망정 그렇게 하도록 작용하였기 때문일세.
   이것은 천도에서 벗어나고 자연의 정을 배반하는 것이며 타고난 본분을 망각하는 것일세.

   옛부터 이러한 것을 둔천(遁天:천을 피함)의 형벌이라고 한다네.

   자연에 순응하면 슬픔이든 기쁨이든 스며들지 못하네. 옛날에는 이를 천제(天帝)의 현해(縣解:속박으로부터 벗어남)라 하였네.

   손으로 땔나무를 계속 밀어 넣으면 불의 번짐은 꺼질 줄을 모르는 법이라네.”(養生主)
 
  장자가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히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그 말을 듣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널(棺)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玉)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세상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파먹을까봐 염려됩니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땅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 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를 끝내자니 어째 너무 약소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노자’와 ‘장자’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태도를 갖기 바랍니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를 묶어서 하나의 사회변동과정으로 이해하듯이 ‘노자’와 ‘장자’도 하나로 통합하여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완성하게끔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새삼스레 노자와 장자가 어떻게 서로 보완(補完)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끝으로 잡편(雜篇) 외물(外物)의 끝 구절을 소개하고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이 구절은 여러분도 잘 아는 득어망전(得魚忘筌) 득토망제(得兎忘蹄)의 출전입니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는 뜻이지요.
 
  “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기 마련이고,
    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得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노자’나 ‘장자’의 텍스트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노장(老莊)’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고 노장사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하였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득어망전으로 끝내려는 것이지요.
  득어망전(得魚忘筌)으로 끝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관계론(關係論)의 관점에서 부언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득어망전의 筌은 통발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통발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이 통발(筌)을 그물(網)로 바꾸어서 생각하기 바랍니다.

  筌을 網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이유는 관계망(關係網)을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이야기한 천망(天網恢恢 疎而不淚)이나 제석천(帝釋天)에 있다는 인드라網을 이야기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得魚忘筌이든 得魚忘網이든 고기를 잡고 나면 그 고기를 잡는데 소용되었던 기구를 잊어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網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忘魚得網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關係網)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닫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지요.